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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저 높은 곳을 향하여/골 3:1-4

by 【고동엽】 2022. 1. 10.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골 3:1-4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보면 “저 위를 보라”고 말씀합니다. “위를 보고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위엣 것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고 목적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귀한 것은 모두 위로부터 오기 때문”

 

 

 

세상에서 귀한 것은 모두 저 위로부터 옵니다. 만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로부터 주어졌습니다. 헐몬산의 이슬이 위로부터 밤사이에 내립니다. 주님도 저 위로부터 오셨습니다. 주님의 재림도 저 위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존슨 오토만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시 121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저 높은 곳, 인생의 모든 근본적인 도움은 저 높은 곳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귀한 것은 저 위로부터 온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사람은 저 위를 보고 살고 짐승은 아래를 보고 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사람은 두발로 걸어 다니게 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짐승은 네 발로 기어 다니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땅을 보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저 위를 보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값이고 삶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원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값입니다. 사람은 위를 올려다보며 살아갈 때 인간의 값이 인정됩니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다 위를 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상주의자이고 또 하나는 현실주의자 입니다. 이상주의자는 저 위를 중시합니다. 미래를 중시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오늘 수고하고 고통을 이겨나갑니다. 그리고 물질보다 정신에 더 비중을 두고 저 높은 곳에 뜻을 두고 살아갑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내일 천국을 위해서 오늘의 즐김과 놀이와 환락과 재미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장차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 수난도 수고도 희생도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인간이 값이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저 천국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 위를 보고 생각하고 뜻을 두고 목적하고 흔들림 없이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주의자는 먼 장래보다 당장의 일에 열중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생일날 먹자고 오늘 굶지 않습니다. 정신적 기반 보다 물질적 기반을 중시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되면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뜻도 생각도 관심도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존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속물이 될 수 있고 짐승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귀한 것은 한결같이 저 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

 

 

 

우리는 저 높은 곳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길이 거기에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길이 거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인생의 궁극적인 길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땅히 저 위를 보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는 위를 보려고 안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 위를 보게 되느냐 하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올려다봅니다. 앞이 콱 막혔을 때 위를 올려다봅니다. 미래가 막막할 때 위를 올려다봅니다. 장래가 불안할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저 위를 올려다봅니다. 무신론자도 그 상황에 빠지게 되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어머니의 고지식한 신앙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배우지 못하고 너무 무지해서 저렇게 고지식하게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주일마다 꼬박 교회에 나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는 어머니의 저속한 믿음생활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그때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젊은이가 군에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를 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한마디를 했습니다. “전선에서 암담하고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거든 너는 위를 보라.”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고 전선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이 잘난 아들이 전선에서 작전 중에 적진에서 퇴각하다가 홀로 낙오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적진 깊숙한 곳에서 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방법이 전무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별 수단이 없었습니다. 지금 자기가 위치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방향조차 모를 만큼 혼돈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 젊은이 마음속에 그 무지하고 고지식하기만 했던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기차를 탈 때 마지막으로 전해주시던 어머니의 한마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전선에서 암담하고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지거든 저 위를 보라.”

 

그때 이 젊은이는 일생 처음으로 가장 진솔하고 가장 솔직하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저 위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신도 모르게 절박한 기도가 나왔습니다. “나를 살려 주세요, 나를 구원해 주세요, 나를 기억해 주세요.” 이 젊은이는 일생 처음으로 그렇게 진실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동안 유치한 어머니 신앙을 비웃었는데 오늘 처해 보니 오직 길은 저 위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이 젊은이는 비로소 뼈저리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위를 바라보고 기도한 후 극적으로 구조대에 의해서 구조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이 정도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능력을 가지고 지금 그렇게 큰소리치고 폼 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좀 여유 있다고, 건강하다고, 능력이 좀 있다고, 기술이 있다고 자만 떨고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2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하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면 참 가관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하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의 궁극적인 길은 저 위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 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 미국인들의 영적상태를 조사한 통계가 나왔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응답한 사람이 59%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믿는다고 응답한 사람이 65%로 나타났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공공건물 앞에 머릿돌처럼 십계명 현판을 붙여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판을 그냥 놔두자는 응답이 79%였고 그것을 제거하자 하는 응답은 18%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동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We Trust in God).” 라는 문구를 그냥 두자는 응답은 84% 제거하자는 응답은 13%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말은 미국의 국민 7~80%가 저 위를 보고 생각하고 찾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국민은 국가에 재난이 오고 위기가 올 때는 백악관에서 국회의사당에서 나라의 지도자들이 모여 구국 기도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기 때 미국이 나아갈 길과 방법은 오직 저 위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강한 민족입니다. 위기 때 저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민족, 국가가 강한 나라이고 지혜 있는 민족이고 구심점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나라들은 위기가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기가 올수록 더 강해지고 뭉치고 단결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 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길이 저 위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저 위를 보지 않으면 사람이 저속해지기 때문”

 

 

 

오늘 이 세상은 온통 오염되고 병들어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이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가 하면 성한 곳이 한곳도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골 3:5-8을 보면 오늘 이 세상의 오염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이 저속해지고 천박해졌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한결같이 저속한 소리만 들려옵니다. 오늘 뉴스를 들어 보십시오.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하고 부정하고 혼란스럽고 정신이 혼란스러워졌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소식, 딸이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소식, 어린 아이를 유괴해서 죽여 산에 묻었다는 소식, 알고 보니 그 유괴범은 죽은 아이의 아버지와 함께 동업했던 사람이었다는 소식, 아파트 값이 폭등하고 있다는 소식, 우리들이 매일같이 똑같이 일어나는 이런 소리들만 듣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날마다 이런 소리만 듣고 살아가게 되면 저속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이나 주위 여건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내 삶의 주변이, 환경이, 여건이 경건하고 엄숙하고 숙연하면 그 인생도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분위기가 고상한 분위기이고 경건한 친구들이 있는 환경에 살아가게 되면 내 인생도 나의 삶도 그렇게 경건하게 만들어집니다.

 

여러분, 시끄럽고 복잡한 도심을 떠나 산에라도 가 보십시오. 우선 들려오는 소리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느낌이 다르고 소리가 다르고 공기가 다르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순간 마음이 맑아지고 조용해지고 침착해지고 잃어버렸던 생각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최소한 도심을 떠나 산에 가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그렇게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저 위를 올려다보며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저 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생각하며 살아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음과 생각은 물론이고 우리의 영까지도 맑아지고 새로워지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 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소리가 거기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귀한 것은 거기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조건 - 수고”

 

 

 

그런데 그런 삶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그것은 수고입니다. 저 위를 올려다보는 생활에는 반드시 수고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저 위에 있는 길은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 위를 보며 살아가려면 위를 올려다보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토만은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도중에 하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왜 도중에 하차하는가 하면 올라가는 수고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로 수고가 필요하고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묵상생활도 하고 산에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매일 피곤한 육체를 끌고 저녁이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신앙생활 하려면 때로 금식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식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금식하게 되면 사람이 처량해지고 비굴해집니다. 보험은 사고가 발생하고 난 후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고 사고가 발생할 것을 미리 대비해서 가입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금식은 사고가 난후에 하는 것이 아니고 사전에 하는 것입니다. 사고가 발생한 후에 금식하게 되면 그 금식이 더 힘들어집니다. 살을 빼기 위해서 금식해 보십시오. 더 먹고 싶고 더 힘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을 빼면 헛수고입니다. 금식 후 더 먹게 되어 살이 더 찝니다. 금식은 연단을 위해서, 영적 성숙을 위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평소에, 여유 있을 때, 기회 있을 때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 수고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만들고 영적 깊이를 깊이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려가는 것은 모두가 쉽습니다. 산을 올라가기는 어려워도 내려갈 때는 쉽습니다. 돈을 벌기는 어려워도 쓰기는 쉽습니다. 깨끗해지기는 어려워도 더럽혀지기는 아주 쉽습니다. 수양하기는 힘들어도 타락하고 방탕하고 추해지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래서 오토만은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옛날 중국의 산동성에 어느 신념이 강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집 앞에 큰 산이 가려서 살아가기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이 노인이 어느 날 “이 산을 옮겨보자” 하고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을 데리고 삽으로 산을 옮기기 위해서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 그 큰 산을 옮기겠느냐고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 노인이 “내가 죽는 날까지 파 낼 것이고, 파다가 죽으면 내 아들들이 파낼 것이고, 손자들이 파내다 보면 언젠가 이 산은 옮겨질 걸세”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데 꾀도 있어야 하고 요령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소중한 것은 믿음이고 행동입니다. 저 높은 곳을 동경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이루는 데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오늘 안 되면 내일하고 내일도 안 되면 모레까지 한다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그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민족은 너무 급한 것이 문제입니다. 너무 서두는 것이 병입니다. 그러니까 포기도 빠르고 체념도 빠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주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 생명의 주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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