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총애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
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
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
라.
저는 지금까지 주례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주례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주례는 장례식 주례도 있습니다. 장례식 주례는 한사람의 인생을 마감시키는 결산의 주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엄숙하고 숙연한 자리입니까. 그런데 결혼주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장례주례는 한 인생의 결산과 마감을 이루는 것이라면 결혼주례는 한 인생의 시작과 출발을 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결혼주례는 더 소망적이고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엊그제는 저는 별난 주례를 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결혼 35주년을 맞는 어느 중년의 부부가 다시 인생을 새롭게 되새기고자 결혼식을 올렸는데 제가 주례를 했습니다. 그 부부는 이제 60이 넘은 분들인데 아주 진지한 모습으로 다 장성한 아들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결혼식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 속에서 한 가지 눈여겨 보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편이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는 모습이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35년이나 살고서 무엇이 저렇게 좋을까, 아니 35년을 살고서도 저렇게 진지할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너무나 진지했습니다. 그리고 답사를 하는데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공작이 기를 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아내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공작이 설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을 아무런 가식 없이 진심어린 모습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저렇게 행복하게 하고 즐겁게 만들고 만족하게 하고 삶을 진지하게 만들고 사랑하는 상대방을 자랑하게 만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 그것이 분명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행복을 발견하고 의미를 발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진지한 인생입니까.
그 마음은 부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더 없이 중요한 존재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볼 때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자랑하고 싶은 존재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 자랑을 참 잘합니다. 어떤 때는 민망할 정도로 자랑을 많이 합니다. 예부터 자식 자랑은 반병신이라고 했는데 오늘 반병신들이 되고자 하는 부모들이 참 많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 자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자랑스러운 자식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런 부모들의 마음을 자식들이 잘 모릅니다. 모르기에 이 땅에 문제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이 받으면 좋아하고 결핍되면 울고 떼를 쓰고 야단입니다. 아직 성숙되지 못한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숙하게 되면 사랑을 주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성인이 되면 사랑을 받기보다 줌으로서 삶의 의미를 느끼고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스스로의 마음과 생각 속에 그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차 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서 만족해하고 보람을 느끼며 생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 비가 오는데 거리를 가다 보니까 남녀 둘이 한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한 쌍의 젊은이들 모습에서 아주 특이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남자 아이는 여자 친구가 비를 맟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기는 비를 다 맞고 친구에게만 우산을 씌운 채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청년은 그러면서도 무엇이 즐거운지 만양 행복해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일은 이렇게 즐거운 일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다 양보하고 다 빼앗기고 손해를 보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이 마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들고 기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좀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어찌 사람들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우리들이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에는 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입니다. 사랑으로 뭉쳐진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모습을 성경 여러 곳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땅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는데 너무나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 하나님은 매일같이 죄를 짓고 불순종하고 뜻을 거역하기를 밥 먹듯 하는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주 무한대한 강렬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이 같은 대우를 받고 있으며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대우하시고 인정하시는 은혜를 주셨으면 우리의 삶에는 그만한 책임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주시는 분들의 마음에 실망을 끼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에게 몇 가지 자질이 있어야 합니다. 그 자질을 초대교회 시대의 교부였던 오리겐이라는 사람이 세 가지 자질을 갖추라고 했습니다. 오리겐(Origen 185년경~254년)은 그 삶의 요소를 지성과 영성과 삶이라고 했습니다.
“지성”
사람은 늘 배우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배우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사람은 배우면서 한 가지씩 터득하고 눈을 뜨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한 단계씩 성장해 나갑니다. 그래서 사람은 날마다 배워야 합니다. 아이한테서 배우고 자연한테서도 배우고 개미한테서도 배우고 자식한테서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이웃을 통해서도 배웁니다. 배우는 동안 지성이 깨우침을 받아 질서를 배우고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고 이 우주의 신비한 질서를 배워 마침내 삶에 건실한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지성이 없고 감정만 강하면 균형을 잃고 감정에 치우치게 되고 그래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지구는 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세도를 누리던 교황이 시93편에 의거하여 그를 신성을 모독했다 하여 종교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시편 93:1~2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세계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슨 소리냐”하고 신성모독을 하였다고 해서 그를 사형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연구결과 지구는 돈다는 사실이 발견했습니다.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한말이 “이제부터 지구는 돌아도 좋다”고 했습니다. 삶의 방식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보면 공부하지 않고 더 연구하지 않음으로 오류를 범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연구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경륜과 섭리는 공부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오묘한 비밀은 모두 깊이 감추어 놓으셨습니다. 연구하고 탐구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성이 없으면 신앙의 깊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심 있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십 년을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그 삶에서 세련된 빛이 나질 않는 것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이 목사님께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내 남편이 내 사생활을 다 알고 있어요.” 그러자 목사님이 말씀했습니다. “나도 다 알고 있습니다, 모피코트 몰래 샀다가 남편한테 들킨 것 나도 다 안 다구요.” “아니 목사님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 그러자 목사님이 말씀했습니다. “새벽기도 때 목소리 좀 낮추세요.”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어느 여집사님이 늘 그냥 무심히 듣고 있었는데 오늘은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태도를 바꾸었는가 보구나.” 그래서 예배 후에 “이제는 설교를 기록하시는군요, 어떤 점이 중요하다고 느껴서 적으셨나요“ 그러자 대답합니다. “곗돈 순번 짜고 있었어요.”
그리스도인이 그 신앙의 삶에 지성이 없으면 삶에 균형감각을 잃게 되고 분별력이나 깨달음의 깊이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리겐은 신앙인에게는 반드시 지성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영성”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질 중에 영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성을 주신 것은 인간을 그만큼 대우하신 결과입니다.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연결되어 살아가도록 만드신 끈이고 힘이고 능력입니다. 물가에 가 보면 모든 식물은 물을 향하여 잎이 뻗어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나무들은 한결 같이 태양을 향하여 뻗어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엄마를 향하여 마음이 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향하여 갈 때 마음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느낌이 다가옵니다. 그것을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포근함을 느끼고 안정감을 느끼고 든든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좋은 집에 있을 때 포근함을 느끼고 안정감이나 따뜻함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초막에서도 얼마든지 포근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플레디(Augustus M. Toplady 1740~1778) 목사가 허허벌판을 지나 심방을 갔다 오다가 도중에 소나기를 만나 들판에 있는 큰 바위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합니다. 소나기 폭우가 거칠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그 때 순간 그곳이 얼마나 포근하고 따뜻하고 안정감이 주어지는지 그는 그때 느낍니다. “아하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품이로구나!” 그 느낌, 그 깨달음, 그것이 영성입니다. 그래서 펜을 꺼내 그때 느껴지던 감동을 시로 적었습니다. 그 시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특별히 하스팅(T. Hastings)이라는 사람이 그 시를 읽는 동안 순간적으로 감동이 와서 그 시에 곡을 붙였는데 그것이 오늘 188장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라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영감에 사로잡혀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지성으로 바탕을 이루고 그 위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성으로 집을 세우면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강하고 힘 있고 자신 있고 능력 있게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그 영감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변화를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의 미래와 앞을 보면 암담한데 그 성령은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불평하던 내 마음이 벅찬 감격으로 가득 채워지게 할 것입니다. 옹졸하던 내가 용기 있는 신앙인으로 변모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던 사람이 화해를 이루는 사람으로 변신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 일터, 삶의 현장이 놀랍게 달라질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입이 열어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이 지성이 중요하다고 해도 지성만 가지고는 신앙다운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고 삶입니다. 내 삶 속에 신앙이 적용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아무 역할도 못하는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나로 하여금 내 삶 속에 깊이 다가오셔서 나를 감동하십니다. 나를 움직이십니다. 나를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효과 있게 살아가려면 지성과 영성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삶”
지성과 영성이 교차하게 되면 삶이 이루어집니다. 어떤 삶입니까. 책임 있는 삶입니다. 사람이 지성만 가지게 되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자기본위의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좀 무지하고 가진 것이 없고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나는 부족하다 하고 느끼는 사람은 이기적이거나 자기본위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좀 가지고 지성인이다 하는 사람은 이기적이 되기 쉽고 자기본위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영성을 강조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주관적인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래서 뭘 보았다, 음성을 들었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삶은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지극히 주관적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지극히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성과 영성이 겸비된 균형을 이룬 신앙인의 건전한 삶입니다.
18세기 미국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친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영적 대 각성운동“이라고 합니다. 그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 것이 프린스턴대학을 비롯해서 유수한 대학이 나서서 그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때 선두에 나서서 그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 목사입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목회자였고 신학자였습니다. 그때 그는 결심한바 5대 결심을 발표했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 나의 힘을 다해 살아간다, 한순간의 시간이라도 결코 놓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시간을 선용한다, 아무리 큰 이익이 된다 해도 타인으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결코 취하지 않는다, 어떠한 일도 원한 때문에 하지는 않는다, 인생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좋은 기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일이라면 포기하고 선택하지 않는다.”
이것이 책임 있는 삶의 태도이고 생각이고 판단입니다. 이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지성과 영성이 겸비될 때 나오는 힘입니다. 이 정신을 청지기 정신이라고 합니다. 신앙인이 지성만 강조해도 균형을 잃게 됩니다. 매사 영성만 강조해도 주관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중심 있는 신앙인의 삶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지성과 영성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 거기서 중심 있는 삶과 생각과 뜻이 나올 수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힘이 솟아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도 힘도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빛 되고 소금되는 삶의 용기도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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