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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인격- 막 10장45절

by 【고동엽】 2022. 1. 3.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위대하신 것은 예수님이 위대하게 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위대하게 세워 주고 싶은 사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대하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구분한다면 겸손, 섬김, 희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탄생이 겸손이요, 살으심이 섬김이요, 죽으심이 희생입니다. 전 생애가 이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의 겸손, 섬김, 희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인격을 닮고 그의 삶의 정신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본받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 믿고 복을 받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대하게 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잘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부요하고, 사업이 더 잘 되고, 더 잘 사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이 복을 생각하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뒤에는 이 복을 받으려고 수없는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위대하게 되라고 태어났고 위대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위대하게 사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위대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성공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위대함은 예수님과 비교하고 예수님과 경쟁합니다.
성공은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입니다. 위대함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성공은 소유를 얻는 것이요, 위대함은 인격을 얻는 것입니다.
성공은 세상을 얻고 위대함은 예수님을 얻는 것입니다.
위대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위대하신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대한 분을 좋아해야 합니다. 위대한 분 사모해야 합니다. 미쳐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께서는 나실 때부터 마음을 비우고 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의 과정을 보면 말구유에서 나실 때부터 십자가에 죽기까지 전 생애가 겸손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문의 교만을 낮추시고 목수의 아들로 나시고,
부요의 교만을 비우고 머리둘 곳 없는 가난한 집에 나셨으며,
출생의 교만을 비우고 나사렛에서 나셨고,
그는 용모의 교만을 비우고 풍채도 고운 모양도 없이 사셨고,
인기의 교만을 포기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고,
학식 교만을 비우고 학교 경력이 없고,
그는 자기 고집을 포기하고 ‘나는 아버지 원대로 한다’ 순종하고 복종하면서 사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6-8절)
예수님은 하나님 됨을 버리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시고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버리시고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영광을 버리고 수치를, 주인이 종의 신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나신 것은 자신이 낮아짐이요, 겸손이요, 마음을 비운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자기를 비웠습니다. 마음을 비우신 분이시라 마음 비운 자를 찾아가십니다.

둘째, 섬기는 삶
예수님은 친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교만은 섬김을 받으려 하고 겸손은 섬기려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남을 이용하고 노예화 합니다. 그러나 겸손은 섬기는 종의 멍에를 즐거움으로 매게 합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은 언제나 남을 먼저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남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종이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언제나 남을 섬기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누가 크냐는 다툼이 있은 후 다락방에서 친히 겉옷을 벗고 수건으로 허리를 동인 후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을 씻기셨습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 마음을 비우면 그 인생관이 남을 섬기면서 사는 데서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고 이것을 축복으로 압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사람들이 크고자 하는 의욕은 있으나 그 높아지는 길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고 우리가 대접을 받는 것보다 남들을 대접을 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역사가 기억하는 사회에 공헌이 큰 인물들은 이 국가, 이 사회에서 나의 포부 성취를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지 않고 나의 기능을 어떻게 사용하여 국가 사회를 섬길 수 있을까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섬기는 자는 헬라어로 ‘δίακογος’(디아코노스) 집사입니다. 성경에 집사와 섬기는 자는 같은 말입니다.
섬기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순간 마음은 빈곤해지고 불평과 불만에 싸이게 됩니다. 가장 비참한 사회는 섬김의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입니다. 섬기는 자가 결핍된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늘 이 역사의 모든 위대함이란 남을 섬기고 간 사람들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자기 유익을 양보하면서 남도 잘 되기를 바란다면 이 사회는 낙원이 될 것이며, 자기 명성을 생각지 않고 국가에 봉사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정치, 사회는 정의 사회가 될 것입니다.

셋째, 희생하는 삶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
예수님은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매사에 하나님 뜻대로 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시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겸손히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38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라 하셨고 요한복음 8장 42절에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또 자기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간에 그것을 하나님이 친히 자기 안에서 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씨앗은 싹을 내기 위해 껍질을 벗습니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자기 꽃을 떨굽니다. 열매는 씨앗이 되기 위해 스스로 썩습니다. 나비가 되기 위해 애벌레는 자기 죽은 무덤을 비단으로 뒤에 남깁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 자기를 비우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대속물은 대신하여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대속물은 고대 세계에서 전쟁의 포로들이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 대가를 지불하고 구출하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노예요, 죽음의 노예인 우리들을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속물이 되는 것은 구약에서 짐승이 제물로 피흘려 죽는 사건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피는 곧 생명이며(레 17:11)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생명을 위힌 생명, 피를 위한 피가 있어야 살리는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콜베라는 유대인 천주교 신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 일입니다. 신부는 수용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살았습니다. 자기 음식을 나눠 주었고 자기 침대는 남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또 원수인 독일군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성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유대인 한 사람이 수용소를 탈출했습니다. 한 사람의 도망자가 생기면 열명의 유대인을 죽입니다. 독일군 장교가 유대인 명단에서 아무나 열명의 이름을 부르면 그대로 방에 갇혀 굶어 죽게 됩니다. 그때 한 유대인이 호명되자 “내가 죽으면 아내와 자식은 어떻게 하나” 외치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 유대인에게 독일군 장교가 총을 겨누려 하자 갑자기 뒤에 서 있던 유대인들 틈에서 콜베 신부가 천천히 걸어나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 사람을 대신하여 내가 죽었으면 합니다. 나는 아내도 자녀도 없습니다. 게다가 늙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제발 나를 대신 죽여주십시오.” 사령관은 신부를 대신하도록 명령했고 죽음의 벙커안으로 그를 들여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신부는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신부는 47세의 나이로 주님 품으로 갔습니다.
1982년 10월 16일 로마의 베드로 광장에서 콜베 신부의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15만명의 추모인파 가운데는 대신 살아난 유대인과 그 아내와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교황은 콜베 신부의 죽음을 이렇게 예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인간에 대한 사랑의 승리와 같은 것이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대신하여 참고, 대신하여 주치를 당하고,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고, 대신하여 손해나는 일이 바로 희생적인 삶이 됩니다.

넷째, 가정은 인격의 현장
가정은 예수님의 인격을 실현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사회를 향하여 실현될 때 삶은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낮아짐의 겸손과, 자기 비움, 섬김의 삶, 희생하는 대속의 정신이 가정에서 출발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은 수도사, 성자, 순교자의 정신으로 사는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면 그곳이 수도원이 되고 곧 교회가 됩니다. 서로 자신을 비우고 서로 높여주며 살면 수도사가 됩니다. 최고의 수도사는 가정 수도사요, 부모와 자녀들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고 살면 수도사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자녀는 효자 수도사입니다.
하나님은 수도원을 만들지 않고 가정을 만들었으며, 하나님은 가정에 거처를 삼으셨습니다. 수도원보다 가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수도원이 흥하면 그 사회는 망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생명의 소리는 없으므로 새 역사가 탄생하지 않습니다.
가정은 인간의 선한 마음으로 섬기는 성자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는 성녀가 있습니다. 성모가 되는 것은 자기 아들을 기르지 않고 남의 아들(하나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기르는 어머니에게 붙이는 찬사입니다.
지금 많은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을 기르면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자식을 비인격화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가르친다고 더욱 죄인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식이 없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 없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낳은 자식들입니다. 나로 하나님의 자녀를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식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다면 성녀요, 성모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자녀의 잉태의 은혜를 못받은 자매들은 낙심하지 마십시오.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십시오. 더욱 성모가 될 것입니다.
자기 남편을 주께 하듯 섬기고 있다면 그는 이미 아내가 아니요 성녀요 수녀입니다. 성격이 괴팍한 남편 모시고 뜻 받들고 잘 사는 부인은 성녀입니다. 그러나 불평하고 살면 시녀입니다.
가정은 순교자가 탄생하는 곳입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는 가정에 있습니다. 목숨 바친 순교자는 기념관에 있지만 살아있는 순교자는 자녀를 기르고 돌보면서 희생한 어버이들이었습니다. 오직 남편만을 위해 그 뜻 받들고 산 아내가 있다면 그가 주님처럼 섬긴 산 수녀요, 주님 섬기듯 섬긴 성녀요, 자기 한 평생을 희생한 산 순교자일 것입니다.
순교자는 살았으나 이미 죽은 몸이요, 죽었으나 영원히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여자는 결혼할 때 친정을 떠나면서 죽은 몸이요, 남편과 함께 사느라 죽었으나 자식을 기르므로 살아있는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았고 따로 애인이 없고 아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 인류를 애인 삼았고 이 세계를 가족으로 삼고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가정 헌장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남편과 아내가 이 심정으로 새 가정을 이룬다면 그는 이미 예수 가정을 이르고 천국을 살게 됩니다. 위대하신 예수님처럼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정신을 가지면 위대한 아버지 어머니가 될 수 있고 남편도 아내도 될 수 있습니다. 효자도 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공부와 상관이 없습니다. 학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직업과 상관이 없습니다. 인물과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따르는 일은 기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현재 그곳에서 그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직분으로 안됩니다. 겸손으로 낮추고 남은 높이고 섬기며 살고 남을 살려주려고 애쓰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요, 존경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실천하신 별세의 인격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하늘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떠났으며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겸손으로 나아갔습니다. 섬기며 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었으며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겸손하게 서로 이해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십시다. 뜻 맞추고 서로 잘 사는 사람 복있는 사람입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자기 성질 다 부리고 부딪치면서 살면 자기도 상처나고 남도 아프게 합니다. 섬기기 위해 많이 다듬어야 합니다.
살리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사는 사람이 가정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고, 회사에도 있고 이 사회 구석구석에 있어야 합니다. 별세의 신앙으로 난는 별세의 정신은 별세의 삶을 이루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하늘도 땅도 우러러 보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출처 : 세계화 목회연구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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