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나 오늘이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늘 동행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만이 아니고 이 땅을 하나님의 거처로 삼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잃어버린 사람을 찾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한 처음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났기에 하나님은 그를 찾고 있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이것은 어느 회사의 구인 광고가 아니고 하나님은 그 역사를 살려낼 소중한 의인을 찾기 위해서 언제나 우리에게 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것은 수없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준 하늘의 소리였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1절)
이것은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준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세상 가운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가운데서 찾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고, 의인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부를 때는 죄인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진실로 정직하게 살며 하나님의 진리를 찾는 사람이 되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계명이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사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수도로서 솔로몬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집’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예배가 드려졌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거룩한 처소 시온성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천국의 상징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온 백성이 공의로운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왕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일반 도시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거룩한 도성이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언약의 처소였습니다. 그래서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신 12: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눈이 집중된 곳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담아진 곳이고, 하나님께서 주야로 그 백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 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이 타락할 때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공의로운 사람, 진리를 구하는 사람 하나라도 찾으면 이 성을 용서하겠다. 이 말씀은 세상에 대한 선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빨리 다녀보고 그 넓은 교회당에서 예배하는 사람들 가운데 참으로 의롭게 믿는 사람 하나라도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헬라의 철인 디오게네스는 백주에 등불을 켜고 아데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조국의 위기를 구할 사람을 찾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헬라의 위기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국의 위기를 구할 사람을 찾았던 것입니다.
역사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살려낼 의인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이 민족의 역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의인을 필요로 합니다. 정치가는 탁월한 정치가가 있어야 나라가 산다고 말합니다. 기업가는 능력있는 경제인이 국가를 살린다고 주장합니다. 교육자는 지성이 있어야 국가를 번영시킨다고 열변합니다. 언론은 신문이 살아야 나라가 사는 것처럼 떠듭니다. 군사 전문가는 막강한 군사력만이 나라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이 있어야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산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회개할 의인을 찾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진실하게 살아라, 정직하게 살아라, 행동을 바르게 살아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자기 자신을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사람이다. 내가 바로 되어야지. 내가 바로 서야지’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네가 죽일 놈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우리는 “내가 죽일 놈이야, 내 탓이야, 내가 잘못했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역사의 현장을 보면서 정치를 잘못한다,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떠들지 “주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역사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회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가장 아픈 현실입니다.
이 민족의 위대한 애국자로 존경을 받는 도산 안창호는 이렇게 통곡을 했습니다. “이 나라는 이렇게 우리를 위해 주건만 나는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 뭔가! 모두 다 조상 탓하고, 일본을 원망하고, 우리의 현실을 불만하고 있지만 모두 다 ‘내가 이 나라를 망친 자다’하고 통곡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 나라를 살려낼 길이다”
이사야 선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5)
하나님께서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습니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전에서 사람을 찾습니다. 바르게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할 사람을 찾습니다.
한국 불교계에 유명한 만해 한용운 선생이 어느날 조계종에 모여 있는 스님들에게 강론을 하는데 지팡이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러운 것 중에 더러운 것은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배설물이니라.” 이 말을 한 다음에 한참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다시 지팡이를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나니 사람의 시체가 썩는 냄새니라.” 또 이 말을 한 후에 한참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지팡이를 들고 탕탕 치면서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에만 눈이 먼 중놈의 마음이니라” 하고 떠났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예수를 믿었음에도 마음이 전혀 변화되지 않는 사람, 끊임없이 남의 허물이나 찾고, 남을 비판하고 불만하는 마음은 더럽고 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회개할 사람을 찾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6-7)
어떤 사람도 성한 사람이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 마음을 늘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고 시간 있으면 ‘나는 잘못했지’ 뉘우치고 이게 사람되는거에요. 교회는 그거 하자고 교회가 있는거에요. 여기에서는 눈 뜨고 다른 것 볼 필요가 없어요. 교회는 회개하는 곳이고 은혜받는 곳이에요. 교회에 와서 뭘 잘하느냐 못하느냐 그런 것은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바로 되려고 내 인격을 바로 세우려는 것이지 그 외에는 중요한 것이 없어요.
교회는 병원과 같습니다. 병원은 병든 사람이 모인 곳입니다. 환자는 병원에 왔으면 건강을 얻고 돌아가야지 남이 병이 있나 없나 그것을 조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환자는 병을 고쳐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교회에 오면 내 마음이 병들어 있는 것을 빨리 고쳐서 건강한 성도로 살도록 힘써야 됩니다. 몸이 아프면 자기만 괴로운 것이 아니고 온 집안 식구가 다 괴롭고 사회를 온통 혼란스럽게 합니다. 집안에 치매 환자가 하나 있으면 집안이 온통 혼란스럽습니다. 한 사람이 전염병에 걸리면 온 나라가 혼란스럽습니다. 성도 한 사람이 병들어 있으면 자기만 아픈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가 아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픈 상처를 치유해야 됩니다. 나 때문에 내 남편이 괴로움 당하고 있다면 그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남편이 말을 함부로 해서 아내가 늘 주눅들어 있다면 그것을 치유해야 됩니다. 시어머니가 말을 함부로 해서 며느리의 마음이 멍들어 있다면 시어머니을 병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자기 병을 고치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 4:25)
이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은 에베소 교회 안에 거짓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 짓지 말라”는 것은 교인 중에 혈기 부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28절에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은 에베소 교회 안에 도둑이 있다는 것입니다.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라”는 것은 상소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의인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병원처럼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혈기 많은 사람들, 온갖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 치료받아 건강해지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는 믿는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어떻게 믿을 것인가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묻고 행동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둘째, 오직 예수를 구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오직 예수로 사는 진실한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1-44)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볼 때 진리를 찾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의롭게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도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원래는 절기 때 먼 길에서 제물을 가지고 오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소와 비둘기를 파는 시장을 성전 문밖에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안나스가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이익을 얻으려고 성전뜰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 있어야 할 것들이 안으로 들어왔고 성전과 시장의 구별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성결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채찍을 드사 장사치들을 다 성전 밖으로 내보내시고 성전 안의 돈 바꾸는 상을 엎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마 2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밖에 있어야 할 것들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성전과 시장의 구별이 없어져버렸습니다. 성결되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채찍을 드신 것입니다.
소나 양이 성전에 들어오는 경우는 제물이 되어 들어오는 것이지 살아서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제물은 하나님을 위해 죽은 것이요, 바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산 짐승들이 성전에서 우글거릴 때 예수님께서 “이 성전에는 죽은 제물이 있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산 짐승들이 우글거리는가” 하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주여, 내가 죽어야 하겠나이다.” 이 고백을 하는 곳이지 짐승의 소리를 내는 곳이 아닙니다.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성도를 찾으십니다. 성전에서 진리를 찾는 이가 없을 때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은 헤롯궁으로 가지 않으시고, 국회 의사당으로 가지 않으십니다. 성전으로 가십니다. 진심을 담아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 중에서 오직 예수를 구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배는 자기는 죽고 예수로 살아나는 은혜입니다. 기도는 자기는 죽고 예수로 살려는 고백입니다. 헌신은 자기는 주고 예수로 사는 삶입니다.
제가 지난 일주일동안 분당에서 새벽성회를 인도하면서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복이 뭐냐? 예수가 복이다. 믿음이 복이다. 믿음 자체가 복이지 믿어서 복받는 것이 복이 아니다. 기도가 복이다. 기도해서 뭘 얻는 것이 복이 아니고 기도 자체가 복이다. 왜? 기도로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니까요, 예배가 복이다. 아무나 예배드리는 것 아니다.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복이다. 충성이 복이다. 충성해서 뭘 얻는 것이 복이 아니고 충성 자체가 복이다. 천국은 복있는 사람이 가는 곳이다. 행복이 뭐냐? 예수가 행복이다.”
이 설교를 한 후에 교역자 회의를 하면서 교역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목사님, 참으로 감동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잘 안오겠네요.” “그럴거야”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에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 하나를 찾지 않습니까 별세의 은혜는 모두에게 주는 음성이 아닙니다. 은혜 받아야 할 소수의 사람이 ‘아!’ 하고 받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할 일꾼을 찾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찾습니다. 예수님이 찾는 사람은 일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 9:37-38)
일꾼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진실을 담아 주님과 함께 살려고 하는 한 사람이 역사를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성을 멸망시킬 때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내가 거기서 사십오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소돔 사람들 가운데 정치가는 정치를 잘해서 나라가 산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기업가들은 기업으로 나라가 움직인다고 했을 것입니다. 노동자는 우리의 노동력으로 이 나라가 움직인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의인이 있어 이 성이 버텨왔다. 의인이 없으니 이제 이 성은 끝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것은 정치를 잘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기도하는 의인이 있어서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나 한 사람이 바로 되면 역사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는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정치사를 보면 우리 국민은 의로운 지도자를 만나보지 못한 슬픔이 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일어났고 그는 하야했고 하와이로 망명하여 죽어 돌아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유신 독재로 장기집권 하려다가 부인도 비명에 갔고 자신도 부하의 손에 죽는 비극에 갔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부정 축제로 감옥에 갔고 부끄러운 통치자로 역사에 남겼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만하다가 IMF를 가져와 온 국민을 고통 가운데 나라를 파탄에 이르게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나라를 세계사에 드물게도 IMF를 빠른 시일 내에 극복하고 나라 경제를 안정시키고 남북의 화해의 역사와 노벨 평화상을 이 민족에게 안겨주는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두 아들을 감옥에 넣는 비극을 맛보았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에게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의입니다. 똑똑한 사람도 있고, 잘난 사람도 있지만 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똑똑한 교인 있습니까 잘난 교인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하십시오. 겸손해야 됩니다. 지금 이 역사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아니라 의를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누가 잘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살려고 하는 권사 한 사람이 이 교회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목사님 내가 바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를 용서하소서.” 그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래전에 분당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부흥회 전날 밤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다음날도 비가 계속 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저쪽에서 아들이 받쳐주는 우산을 쓰고 교회로 걸어오는 것입니다. “아이고 할머니 비오는데 집에 계시지 않고 교회에 오셨어요” 옆에 있던 아드님이 “목사님, 저희가 그렇게 만류하는데도 ‘비가 오는 날 사람들이 안오면 목사님이 얼마나 간이 타겠나 나라도 가서 앉아있어야지’ 그러면서 뿌리치고 나오셔서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속으로 “이 노 여종이 계시므로 교회가 살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바다는 2.8퍼센트의 염분으로 바다를 신선하게 지켜줍니다. 육지에서 온갖 쓰레기를 바다로 흘러보내도 바다는 2.8퍼센트의 염분 때문에 깨끗합니다. 이 역사 속에서 2.8퍼센트에 속하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찾는 사람이 있어야 교회도 살고 민족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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