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는 살아있다! (사도행전 7:55∼60)/(고)이중표목사
우리가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서의 핵심이며, 그리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이 사건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리라는 것은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과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별세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최대의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건이 내게 사건으로 할 때 별세의 사건으로, 별세의 신앙으로, 별세의 은혜로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의 사건이고, 또 하나님의 사건이지만 이 사건이 내게 임할 때 내게 별세를 이루어 세상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세 신앙의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신앙의 최고의 신앙 행위를 순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세의 신앙은 순교의 신앙 행위에 이르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순교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죽는 것으로,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을 순교로 일컬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진리에 확신하는 신앙을 보여주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는 사람들을 우리가 보통 기쁘게 죽어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말해 왔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부인하라고 하는 지배자의 강요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그 때 당시에는 모든 세상에 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이교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순교는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피 흘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때 당시에는 목숨을 가지고 있었지만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결국 순교자의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매일 사는 것이 죽음을 날마다 짊어지고 사는 그러한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라고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일상생활, 날마다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들이 거의 순교자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초기 한국 교회 성도들도 피 흘리지 않고 살아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이미 모두 순교자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결단 자체가 그들에게서는 이미 순교자의 각오를 한 것이고, 저들은 끊임없는 박해의 상황 속에서 저들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적 안정을 바랄 수 없었고, 가정의 유익이, 사회적 소외, 재산의 박탈, 생명의 위험은 순교자의 각오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천진암에 가면 천주교의 성지가 있는데, 이 천진암에는 많은 당시의 천주교인들이 사회적 대원군 핍박을 피해서 그곳으로 몰려갔던 것입니다. 한강 마포에 가면 절두산이라고 당시에 목을 치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당시의 민중들이 절두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거기에 가서 목을 잘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순교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도 순교자요, 죽어 있는 사람도 순교자의 각오, 모두 다 순교로 신앙을 지켜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일시적 순교, 한 번에 죽는 것은 일시적 순교이고,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순교자의 각오로 사는 것은 매일 순교라고 일컬었습니다.
또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죽는 것은 공적 순교이고, 매일 매일 숨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적 순교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피 흘려서 죽는 순교를 적색 순교라고 말하고, 깨끗한 양심을 지켜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백색 순교자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매일 매일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별세적 삶이 곧 순교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세와 순교는 분리할 수 없는 신앙 생활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별세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가장 예수를 닮는 신앙 고백이라고 말한다면 순교는 예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수의 부활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고백이 바로 순교이기 때문에 별세와 순교는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죽듯이 자기가 죽는 것,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빼앗기면서 하나님께 바친다고 고백하는 이것이 바로 순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의 효력에도 참여한다고 신학적으로 말합니다. 순교자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 제사의 구속적 능력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서 우리를 구원한 구속적 능력이 순교를 통해서 피 흘림으로 함께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를 피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듯이 순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와 더불어 다시 부활하는 실질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집행하는 피의 세례를 집행한다고 신학적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순교의 모델을 이룬 사람을 스데반이라고 일컬어 옵니다. 이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 몸으로 실행한 최초의 성도요 예수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서 지금도 살아 있는 순교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순교자는 살아 있는 스데반, 스데반은 순교자요. 그래서 스데반이라고 하는 말 이 면류관이라는 말인데, 면류관을 받는 사람이 순교자요. 그래서 스데반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순교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살아 있다는 말은 순교자는 살아 있는 말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같이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데반이 죽는 모습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었다고 보는 사람이 있고, 살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스데반이 죽었다고 보는 것은 불신앙이고 스데반이 살았다고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은 어떻게 살아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생명으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또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아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사람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예수와 함께 살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죽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순교자로 예수와 함께 살아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러 왔는데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것은 2천년 교회사에서 제가 밝히고 있는 유일한 선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은 순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말하느냐? 2천년 교회사에서 이제 제가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러 왔는데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순교자는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려니까 괴롭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다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내 안에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려고 하니까 모든 것이 부담입니다. 자기는 따로 있는 걸로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으려니까 이 한 목숨 죽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몸,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몸.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게 하는 것. 순교는 믿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요, 예수를 위해 죽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보통 우리는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고난 받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이것이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올바른 신앙이 못됩니다.
기독교의 순교는 다른 종교에서처럼 자기 교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종교는 죽음으로 드립니다. 기독교의 순교는 산 자로 드리는 신앙 행위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순간에 그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늘이 열렸구나. 그리고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구나." 스데반은 살아 계신 예수를 보았고, 예수가 자기를 맞이하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스데반이 죽은 것입니까? 살아있는 예수와 함께 산 채로 가는 것입니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순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만이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별세 신앙이 없으면 순교자가 되지 못합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받은 이후에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진정한 순교는 부활 신앙으로 얻은 산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산 자만이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죽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 살았다고 믿어야 자기 신앙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수한 선교사와 장현진 선교사를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라는 주의 명령에 따라 땅 끝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순교자의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이걸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순교자는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습니다. 순교자는 성도의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는 우리가 살아있듯이 우리와 함께 살아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는 그래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순교자는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우리 속에 살아 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의 가슴속에 살아서 감동하고 있습니다. 살았기 때문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감동을 못 줍니다.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그들의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감동을 못 줍니다. 산 자만이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그들이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장현진, 안수한 선교사의 순교가 눈에서 샘물처럼 눈물을 흘리게 했고 홍수처럼 쏟아졌습니다. 눈을 감으면 눈물이 솟아나고, 길을 걸어도 눈물이 솟아나고, 추모 영상만 보면 그렇게 울어야 했습니다. 두 순교자가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또 부모를 생각해서 내가 울 만한 사람도 아닙니다. 부모를 생각해서는 눈물 한 방울도 나질 않습니다. 순교자의 감동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그들과 무슨 정이 들었다고 눈물이 나겠습니까? 나는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입니다. 부모를 내가 얼마나 사랑한다고 눈물이 나겠습니까? 솔직한 얘기로 부모 사랑할만한 목자는 별로 되지 못했습니다.
순교자의 감동 때문에, 순교자가 받는 그 신비한 은혜 때문에, 저들의 살아서 감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순교자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감동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위로하려고 추모를 성대히 한 것 절대로 아닙니다. 만일이라도 그 맘 가졌다면 위선자입니다. 내가 부모님에게 비유 맞추기 위해서 그 정성을 다한 것이라고 한다면, 머리 끝에서 한 번이라도 스쳤다고 한다면 나는 목자가 아닙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신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어떻게? 부모를 생각해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요. 우리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그가 살아서 감동하기 때문에.
스데반은 그의 순교를 통해서 행복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에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성경은 그를 잠들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은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잠 드는 순간처럼, 하루의 제일 행복한 순간이 어느 순간입니까, 밤에 잠드는 순간입니다. 스데반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잠이 들었다, 죽은 자는 잠드는 것이 아닙니다. 산 자가 잠이 듭니다.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거짓을 일컬어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나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너희 상이 크다." 이것은 초대 교회 예수님께서 순교자에게 줄 행복의 보상이었습니다. 이 은혜에 따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산 자의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순교는 별세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감동은 천지를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곁에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어요. 오늘 이 성경을 보니까 저희가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돌에 맞습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이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맡겼습니다.
스데반이 뭐라고 합니까, 돌에 맞을 때 부르짖어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여기에 순교자의 행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행복입니까? 원수를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용서하는 그 사랑 때문에 순교자가 행복으로 꿇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이런 화해를 자기 몸으로 실천했어요. 스데반은 화해자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 마음에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행복이 온 거죠.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마음 때문에.
스데반은 최후의 순간에 주 예수께 자기 영혼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영혼에 안식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셨지만 원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해서 용서를 빌고 그는 그의 삶을 마쳤습니다. 순교는 원수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원수와 화해하기 위해서 원수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나의 죽음을 통해서 증오심과 모든 저들 마음속에 악함을 청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순교자는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들의 아들을 순교자로 만들려면 부모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경지에 또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들의 영광스런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순교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죽음의 제물로 내놓는 것입니다. 그 순교는 살리는 사건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교 후에는 살리는 사건이 나야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원수에게 사랑으로 증거 되어야 하며, 그 코에 향기로 호흡되어야 됩니다.
순교자는 복음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살아 있듯이 순교자는 복음과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영원히 영생하고 있으며 우리 가슴속에 살고 있으며 그리고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는 교회 종자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복음이 살아있듯이 순교자는 복음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증인은 순교자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죽은 것 같으나 복음과 함께 살아있습니다. 결국 이제 스데반이 순교 속에 들어있는 생명의 씨가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심령 속에 들어가서 그가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 2천년 교회사를 지금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울이라는 청년인데 그 사울이라는 청년이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청년을 끌어다가 스데반이 죽는 곁에다 세웠습니다. 왜? 너는 순교자의 마지막을 봐라. 사도 바울이 살아간 전 생에 살고 죽는 것은 스데반의 피가 이 속에 죽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친히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성령이 각 성에서 결박과 환란이 이제 증거하여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은혜로운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스데반이 마지막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은 것처럼 사도 바울 속에 스데반의 피가 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일생은 스데반의 일생의 재판입니다. 순교자의 정신이, 순교자의 능력이 사도 바울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에 죽음의 능력이 스데반 속에 들어갔고 스데반 속에 능력이 바울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는 예수님의 그 고백이 스데반의 죽음으로 나타났고, 순교로 승화되어 생명을 이어갔으며 그리고 사울 바울이 내가 이 은혜로운 복음을 마치려 함에는 이 마친다는 말로 그 단어를 이어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선교적 사명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에 보면 결국 사도행전의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로 이어갔는데 8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어서 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러면서 이어서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서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 할쌔" 복음의 말씀을 전 할 때 스데반이 저들을 막 흩어지게 했습니다.
간접적으로는 핍박이 왔으므로 두려워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능력에서는 스데반의 피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가슴에 튐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을 전합니까? 스데반의 순교를 함께 전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 머리에 부을 때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느니라" 말씀하시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기념하리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옥합 깨뜨린 이 사건이 전하여 지리라. 스데반은 자기 몸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머리에 부었습니다. 복음과 함께 스데반의 순교가 역사에 길이 복음과 함께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복음 전파와 함께 살아 있는 것이요, 부활 생명으로 살아있는 위대한 능력이 복음과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현진 선교사와 안수한 선교사는 선교사로서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이 된 것입니다.
영광스럽도다. 안수한, 장현진 선교사여. 그대들 14세, 19세 나이 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33세. 십자가의 생애를 이루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영생하게 된 것입니다. 행복하시도다. 우리의 눈물을 담아 가슴속에 길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영생하고 있습니다. 그대 선교사의 고귀한 발자취, 메콩 강물 줄기 따라 오대양 육대주 전 세계 땅 끝까지 갈 것입니다.
참으로 숭고한 두 순교자가 한신 제단을 이렇게 빛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순교자의 위대한 스데반의 정신 속에서 새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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