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32:24-28/벧전2:9)/(고)이중표목사

by 【고동엽】 2022. 1. 2.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32:24-28/벧전2:9)/(고)이중표목사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슴 설레이도록 감동을 주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성경 가운데 평범한 사람이면서 우리보다 더 나은점을 발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바꾼 위대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야곱입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성을 지녔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만한 위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인간적으로 결코 내놓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역사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사에 남겨놓은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야곱이 이런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 "이제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이 사건을 통해서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고 이스라엘 역사에 위대한 조상으로, 세계 역사에 이스라엘 민족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쌍둥이로서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탄생에 걸맞게 남의 발꿈치를 잡고 넘어뜨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남의 약점을 잡아서 이득을 보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날 형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왔는데 몹시 시장했습니다. 그때 마침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내가 시장하니 팥죽을 좀 다오." 야곱은 형이 시장한 틈을 타서 얼른 형에게 요구 조건을 내겁니다. "형이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면 내가 팥죽을 주겠나이다." "내가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이냐 장자의 명분을 줄테니 얼른 팥죽이나 다오." 야곱은 형이 시장한 틈을 타서 형을 넘어뜨려 장자의 명분을 받습니다.
또한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서 사람 구별을 잘 못할 때 아버지를 속여서 자기 형 에서의 축복을 받아냅니다. 이런 야곱이었습니다. 사람과 상대해서 끊임없이 싸워 이기는 사람으로 그의 생애는 계속됩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그런 식으로 살다가 쫓겨나서 자기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동안 머슴살이를 합니다. 거기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외삼촌을 넘어뜨리고 거부가 됩니다. 야곱이 거부가 되자 고향이 그리워져서 그의 가족과 많은 소와 양떼를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자기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창 32:9-11)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재산도, 가족도 모두 멀리 보내놓고 홀로 남아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야곱에게 한 사람이 나타나서 야곱과 밤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므로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야곱의 환도뼈가 어긋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끝까지 그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할 때 야곱이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내가 결단코 당신을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 질문을 받아야 됩니다. 첫째는 네 존재가 무엇이냐, 둘째는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셋째는 그 이름을 역사에 어떻게 남길 것이냐

네 존재가 무엇이냐
야곱은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으므로 '야곱'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끊임없이 남을 넘어뜨립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 존재가 무엇이냐? 너는 지금까지 사람과 상대해서 싸워 이겨온 자다. 그러나 이제는 네 이름을 바꿔라. 이제는 사람을 상대하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을 상대하는 자가 되라. 사람과 싸워 이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싸워 이기는 자가 되라. 너는 육신적으로 싸워 이기는 자가 아니라 영적인 승리자가 되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바꾸어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세상, 육신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리를 "브니엘"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엿새동안 세상에서 사람을 상대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헤매다가 주일이면 교회에 와서 얼굴을 들고 하나님을 봅니다. 세상을 향한 내 마음을 하나님 편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목사는 교인들을 세워주는 자다.' 수평적으로 세상에 매여 살다가 교회에 오면 수직적으로 세워놓습니다. 하나님을 보라고,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내 존재가 하나님 편으로 어떻게 세워져 있는가 말씀으로 자기를 성찰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주일날 겨우 세워놓으면 나가면서 또 넘어집니다. 안넘어지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넘어집니다.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목사는 넘어진 교인들 세워놓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내 이름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사람을 상대하는 자로 끝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너 자신을 세우라"
성경은 끊임없이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 아버지가 원래 지어준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열국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어부 시몬의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네 이름을 이제는 시몬이라 하지 말고 베드로라 하라. 갈릴리 바닷가의 파도에 흔들리는 연약한 뱃사람 베드로, 이제는 그 믿음 위에 반석같이 서서 교회를 세우고 역사에 길이 남는 존재가 되라"
고기잡이 세베대의 아들 요한의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네 이름을 보아너게라 하라" 보아너게는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네가 지금까지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소리치며 고기잡는 어부였지만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의 복음, 재림의 복음, 심판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하늘의 우레소리처럼 울어 주어라"
드디어 그는 요한복음, 요한일,이,삼서, 요한계시록을 써서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요,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과 멸망이 있을 것을 하늘의 우레소리처럼 울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이름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인지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인지를 스스로 성찰해야 됩니다. 우리는 자기 이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자세와 새로운 변화를 의식해야 됩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십니다.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너는 하늘로부터 온 존재다."
여러분의 이름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늘로부터 왔다고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이 세상에 보냈다고 믿으십시오. 그때 내 존재는 하늘로 우뚝 세워집니다.
이름은 신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름 때문에 존재합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존재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이름을 부르면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자기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소중합니다. 내가 죽어도 이름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이름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 이름이 그 사람의 본성, 성격, 인격 전체를 의미했습니다. 우리가 자기 이름을 소중히 안다는 것은 자기 인생 전체를 소중히 아는 것입니다. 현재가 아닙니다. 영원한 미래까지 내 존재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됩니다.
야곱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이스라엘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사람을 대면하는 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입니다.
야곱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붙드는 자입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재주로 살아가는 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
야곱은 땅에 속한 자요, 이스라엘은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는 하늘로부터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야곱 인생으로 살아오면서 눈만 뜨면 사람과 싸우고, 사람에게 시달리고, 사람 때문에 마음 상하고,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얻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하면서 지혜를 얻을까, 하나님 앞에 서 내 존재를 어떻게 세울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근본적인 자기 정체성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예배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네 존재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다. 너는 땅의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람이다."
자마이카에 악하게 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삶이 변화되면서 과거에 쓰던 이름이 부끄러워 판사에게 개명 신청을 했습니다. "제 이름을 바꾸어 주십시오." "왜 이름을 바꾸려고 하는가" "제가 과거에는 악한 짓을 하면서 부끄럽게 살았지만 예수를 믿은 이후에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좋은 이름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름을 바꾸어주지" 그래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꾸어지면 이름은 자연적으로 바꾸어집니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입니다. 육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거룩한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야곱의 근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 이스라엘의 본성이 존재할 뿐입니다. 십자가에 옛 이름은 못박혔습니다. 이제 나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뿐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고 살아야 됩니다(엡 4:22-24).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살아야 됩니다(롬 12:2).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일입니다. 하루는 심방을 가는데 산밑에 집이 한 채 있어서 봤더니 폐가처럼 비바람에 지붕은 온데간데 없고 흙만 남아서 그 위에는 풀이 나 있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생겼어요. 그런데 그런 집에도 문패가 하나 붙어 있는데 김억만이라고 써 있어요. 그래서 심방 가다말고 집사님 한 분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 이름이 김억만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누가 지었습니까?" "할아버지가 지었습니다." "왜 이름을 김억만이라고 지었는지 아십니까?" "할아버지 아들이 술 먹고 개망나니라 너무 가난하게 사니까 손자라도 돈 많이 벌어서 잘 살라고 '억만'이라고 지었답니다." "그러면 이 분은 이름대로 잘 삽니까?" "웬걸요. 아버지처럼 술만 마시고 사람 노릇 못하니까 부인도 도망가버리고 패가 망신했습니다." "이름은 억만인데 사람은 엉망이구만"
그 집을 막 나오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감동하셔요. '그 사람을 두고 그냥 가는 것은 목사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다. 심방 가는 것보다 전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 집 안으로 들어가서 "김선생님 계십니까?" 하고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안에서 사람이 하나 나오는데 정말 엉망이에요. 폐인이 따로 없어요. 제가 그 사람을 붙잡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가서 정중하게 전도를 하니까 감동이 되었든지 교회에 나가겠다고 그래요. 그때 옆에 있던 여 집사님들이 "목사님 그 사람 말 믿지 마세요." 그래요. 하지만 저는 웬지 그 분이 교회에 나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 분이 다음 주일날 교회에 나왔습니다. 이 분이 교회에 나온 이후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교회에 나온지 한달만에 부인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엉망된 인생이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니까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 제가 받은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을 전도해서 새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을 해야 됩니다.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
교회에서 부르는 이름 가운데 장로, 권사, 집사, 목사, 순장, 성가대 대장, 지휘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부르는 이름 가운데 대통령, 장관, 회장, 사장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르는 이름 가운데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각각 자기 위치에서 그 이름에 맞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며느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참 훌륭한 어머니야' 그럴 것인가 아니면 '나쁜 어머니야' 그럴 것인가 또 며느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시어머니가 '보기도 아까운 우리 며느리' 그럴 것인가 아니면 '못된 며느리' 그럴 것인가
얼마전에 저희 교회에 안다니는 어떤 분이 교회 마당에 차를 세워놓고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운전이 서툰 우리 교회 집사님이 차를 빼다가 그만 그 차에 기스를 내고 말았습니다. 전후상황을 모르고 있던 나는 차에 기스가 났기에 속으로 '누가 살짝 받고 그냥 갔구나!' 했더니 차에 쪽지가 하나 꽂혀 있어요. "형제님, 운전 미숙으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바쁜 일이 있어서 가야 되겠기에 메모를 남기오니 이 연락처로 전화주십시오. 전화주시면 성의껏 고쳐드리겠습니다."
은행에 갔던 분이 돌아와서 차에 기스가 나 있는 것을 보고 속이 상했는데 메모가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야, 이렇게 착한 사람도 있구나 믿는 자의 양심은 다르구나!' 하고 우리 집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둘이 만났습니다. 만나서 차 고치고 차 한잔 하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집사님이 그 분을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돈 10만원, 20만원 때문에 양심을 파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야 아무도 보는 사람 없다.' 하고는 도망칩니다. 돈 20만원은 통장에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양심이 도둑맞았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예, 그리스도인입니다." "아, 사기꾼 그리스도인이구나!" "네 이름이 뭐냐?" "예, 집사입니다." "아, 가짜 집사구나!"
천만금을 갖는 것보다 양심을 살려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축복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1-12)
세상 사람을 감동시켜야 됩니다. 안믿는 부모를 감동시켜야 됩니다. 직장에 가서 안믿는 동료들을 감동시켜야 됩니다. '믿는 자는 다르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름입니다.

네 이름을 어떻게 남길 것이냐
이것은 심판입니다. 가롯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 역사에 배신자로 남아 있습니다. 네로는 악한 자로 자기 어머니와 부인까지도 죽인 악한 자로 남아 있으며, 네로의 손에 죽은 바울은 역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순교자, 성자, 그리스도인, 그리고 선교사로 남아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데 이름을 어디에 남기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 들여 비석을 세워놓으면 이름이 남는 줄 압니다. 성경을 말합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예수님께서 칠십인의 전도대를 세우시고 둘씩 짝을 지어서 각동 각처로 보내셨습니다. 70인이 복음 전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죽으면서 성령이 충만하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부르짖습니다. 스데반이 눈이 열려 천국을 보니 예수님께서 보좌에서 일어서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스데반이니이다." 예수님은 스데반을 맞이하기 위해 보좌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에서 내 이름이 불려질 때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서 일어나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환영받는 아름답고 빛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