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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오래 참으신 하나님

by 【고동엽】 2021. 12. 31.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후서 3: 8-13)

우린 흔히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백번까지는 참는다는 뜻으로 百忍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백번까지는 참지만 백한번째 부터는 참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본래 인내라는 말은 휘포메노입니다. 그 뜻은 "밑에 머무르다. 견디다"라는 것입니다.

짓눌려 힘들고 괴롭고 어려워도 견디는 것이 인내입니다.
사람들은 참고 또 참아 백번까지는 참을 수 있을 지 모릅니다만 하나님의 인내는 한이 없으십니다.

로마서 2:4을 보면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시다"고 했고 로마서 9: 22를 보면 "오래 참으신다"고 했고 베드로 후서 3:9과 3:15를 보면 "오래 참으신다"고 했습니다. 오래라는 말의 뜻은 하나 둘 셋 넷 그 수를 셀 수 없도록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와 후서를 받은 사람들은 초대교회 당시 사방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로마 정권이 기독교를 박해하자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로 흩어졌습니다. 터키 갑바도기아 지방에 가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 15층 땅굴을 파고 그 안에 교회를 만들고 신학교를 만들고 산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들에게 베드로사도는 인내하라. 시험을 참으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던 것입니다. 박해 받는 성도들이 제기한 의문점은 왜 주님은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왜 주님은 빨리 다시 오시지 않으시는가? 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의문이 있습니다.
왜 악과 선이 공존하는가?
왜 하나님은 의와 불의가 공존하도록 방치하시는가?
왜 주님은 빨리 오시지 않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그 해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8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 씀 속에는 천년을 하루처럼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가 들어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사람의 기다림이나 인내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창세기 29장을 보면 야곱이 에서의 분노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곳에 살고 있던 외삼촌 라반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둘째 딸인 라헬에게 첫눈에 끌렸습니다.

어느 날 외삼촌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고 라헬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고이 키운 라헬을 아무 댓가도 없이 줄 수 없다며 7년을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그 날부터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겠다는 일념으로 7년을 수일처럼 열심히 일했습니다. 창세기 29:20을 보면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언제 7년이 지났는지, 몇 일 지난 것 같은데 7년이 지나버렸다는 것입니다.
라헬을 향한 사랑, 기대,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7년 세월이 수일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각이여 삼추」라는 말도 있습니다. 찰칵찰칵 지나가는 몇초시간이 길고 긴 가를 세 번을 합한 것처럼 길고 지루하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하느냐 누구와 함께 있느냐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천년이 하루처럼 짧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예배시간 길이는 1시간에서 2시간을 넘지 않습니다. 예배를 피하는 여러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벌써 끝났군요 너무 예배시간이 짧습니다. 아니 어떻게 목사님 설교는 시작하자마자 끝이 납니까? 은혜속에 푹 빠지는가했더니 끝내시는 군요, 너무 아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신바람나고 일할 맛이 나고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 끝나요?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아요? 설교는 몇분하는 거예요? 왜 만날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해요? 밑천 떨어졌어요?"라며 몸을 꼬고 하품을 해대는 사람을 대하면 온몸의 힘이 빠지고 두다리가 후들거립니다. 다른 부류의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시간이 길든 짧든, 설교가 길든 짧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유는 끝날 때까지 내내 졸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인이 좋은 교인입니까? 예배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아깝고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7년 14년 21년도 하루처럼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처럼 기다리시고 하루를 천년처럼 귀히 여기고 인내하십니다. 우리들의 약점은 너무 서두르고 급하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참는 것이 약합니다. 이태리 로마에 가면 120년 넘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습니다. 그 집은 오직 대를 물려 아이스크림만 만들어 팝니다. 영국에 가면 100년 넘게 소고기 스테이크만 파는 식당이 있습니다. 자그마한 양식당인데 예약이 외엔 손님도 받지 않습니다. 일본도쿄에 가면 4대째 붕어빵만 만들어 파는 집이 있습니다. 붕어빵하나로 100년을 버텨 나왔다면 알아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고 기다리고 버티고 유지하고 지속하는 힘이 약합니다. 인간관계도 쉽게 친하고 쉽게 멀어집니다. 쉽게 가까워지고 쉽게 멀어집니다. 쉽게 친구가 되고 쉽게 원수가 됩니다. 7년을 수일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참고 기다립니다.

2.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9절을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왜 천년을 참으시고 이천년을 기다리십니까? 그것은 단 한 명이라도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주님이 재림하셨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성격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제자가 된 후에도 그 성격대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한도 자기 성격대로 제자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인내를 배우고 사랑을 만난 이후 삶의 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화병에 꽂은 꽃을 오랫동안 싱싱하게 유지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 화병에 차가운 물대신 미지근한 물을 담을 것. 미지근한 물에는 줄기가 물을 흡수하는데 방해되는 기포가 적기 때문이고 미지근한 물은 봉오리가 개화되는 것을 촉진한다는 것입니다.
○ 물이 흡수하는 단면적이 넓어지도록 칼이나 가위로 줄기를 엇비슷하게 자를 것
○ 수면 아래 잎사귀는 모두 떼어낼 것
○ 탈수를 막기 위해 직사광선, 대형 가전제품 등으로부터 먼 곳에 화병을 놓을 것
○ 익은 과일이나 시든 꽃 가까이 화병을 두지 말 것, 시든 꽃 가까이 두면 그것들이 방출하는 에틸렌가스 때문에 꽃이 일찍 시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 장미의 가시를 제거하면 장미꽃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든 꽃을 가까이 하면 싱싱한 꽃이 빨리 시든다" 깊이 음미할 교훈입니다. 신앙도 시들고 부정적이고 공격적이고 조급한 사람 곁에 있거나 그들과 교제하면 함께 빨리 시들어 버립니다. 어려워도 참고 힘들어도 투정부리지 않고 괴로워도 믿음으로 극복하려는 사람과 교제하고 가까이 하면 신앙이 발전하고 향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십니까?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이 말씀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어느 특정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까지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난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더나 향락의 도시로 나갔습니다. 그는 몸만 더 난게 아니고 상속받을 재산을 미리 다 챙겨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극구 말렸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는 너 없이 못산다 사업이 정하고 싶으면 이 도시에서 해라 그러나 그는 고집을 꺽지 않고 떠났고 얼마 못가 아버지가 염려했던 대로 주색잡기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 아들에게 부칠 대명사들이 있습니다. 폐륜아 불효자, 탕아, 철부지 나쁜놈, 아버지 가슴에 못박은 놈" 등등.

그런 자식이라면 기다릴 가치도 없고 다시 받아줄 명분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낮이면 동구밖에 나와 기다립니다. 밤이면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립니다.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는 날 까지 기다립니다. 이 사건을 노래로 만든 찬송이 317장입니다. 전영택 선생이 가사를 만들고 박재호 목사님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집을 떠난 이유, 아버지를 떠난 이유는 상관이 없습니다. 집 떠나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을 했느냐도 상관이 없습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집과 아버지를 떠났던 그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실수 과오 과거를 다 용서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리고 거창한 환영식을 열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에 하나님 떠나 죄짓고 고생하기 때문에 그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벼락을 때리고 호통을 치고 감옥에 가두고 청문회를 열어야 할 그런 나입니다만 사랑 때문에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요한웨슬리의 아버지가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멍청이 녀석에게 똑같은 말을 스무번이나 되풀이 할 수 있소 인내심이 대단하구려"라고 말썽꾸러기, 말 안 듣는 아들을 계속 같은 말로 타이르는 자기 아내에게 한 말입니다. 수산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 아이에게 열 아홉번만 말하고 그만둔다면 열아홉번 해온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랍니다."라고..
하나님의 인내는 거기 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믿습니다.
우리도 참고 기다립시다.
인내로 우리의 구원을 이룹시다.

 
출처 : 여호와닛시♥
글쓴이 : 주님의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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