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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이란 무엇인가?*이재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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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좋다오

비전이란 무엇인가?
글//이재철 목사
비전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성경 장언 29장 18절을 통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묵시'란 '비전’을,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파라(paw-
rah)'는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뜻합니다. 따라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
히 행한다'는 말은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경거망동한다’는 의미입니다.
비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입니다. 위대한 비전의 시인이란 위대한 통찰
력을 지닌 시인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비전을 지닌 자의 시선은 언제나 오늘을 뛰어넘어 보다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시선이 맞달아 있는 그곳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른히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가리켜 '비전이 있다'고 말합니
다. 그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으로, 지금부터 미래의 자신을 스스로 일구어 가기에, 그에게는 장래
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이 없는 인간이 방자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비전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목전
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감정대로, 욕구대
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방자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목사든, 교인이든, 그 누구든 방자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크리스천은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되
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전과 관련하여 우리가 론동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비전은 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인들은 비전과 드링(dream,꿈)을 구별 없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르
틴 루터 킹 목사님이 링컨 기념관 앞에 운집한 특인들을 향해, ”1 have a dream"이라 설교할 때,
그때의 꿈(드림)이란 곧 비전을 뜻했습니다. 특인과 백인이 함께 어우러저 살아갈, 새로운 미래
를 향한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미국인들 역시, "꿈 깨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의 꿈
은 공허한 망상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비전과 드림(꿈)을 구별 없이 사용하지만, 영
어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는、이 양자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영국 수상을 역임했고 누
구보다 명문장가로 알려져 있는 옥스퍼드 대학 줄신의 대저 여사가, 오래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비전과 드람의 차이를 명쾌하게 풀이해 준 적이 있습니다.
즉 비전이란。반드시 그 비전에 상응하는 행동을 수반하기에,어떤 형태로든지 결과를 초래한다
는 의미에서,꿈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전을 지닌 사람은 미래에 대한 통찰력
을 가진 사람이요, 그 미래에 부단히 자신을 맞추어 가기에,어떤 형태로든 가시적인 결과가 수
반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꿈은 다만 머릿속으로 즐기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꿈은 거기에 상
응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책임이 뒤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단지 즐기는 것만으로 족한 꿈이란, 현실도피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메리칸 드
림'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아메리칸 비전•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아메리카 대륙이란 특정 공간에 국한된 꿈을 일컫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꿈을 이를 수 있다면.. 아메리칸 비전이라 함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메리칸 비전이 아니라 아메리칸 드링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비전으로서의 꿈을 이
루는 사람은 극소수요, 나머지 사람의 꿈은 망상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꿈의 나라
로 알려저 있지만,그러나 꿍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망상을 종아 태평양을 건넜다가 패가망신했는지 모릅니다.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방자해지고, 망상을 좆는 인간은 패가망신하고 맙니다. 둘째. 비전은 야망
이 아님니다. 야망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한다는 면에서 망상과 구별됩
니다. 또 야망을 지닌 자는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무엇인가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면에서, 야망이 비전과 동일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전은 오늘을 뛰어넘어 긍정적인 방향
으로의 자기 계발과 자기 가꿈이기에, 비전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야망은 욕망의 산물입니다. 아무리 높은 곳에 야망을
설정했더라도, 그 근본은 욕망입니다. 따라서 야망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 참되거나 바를 수 없
습니다. 야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기에, 야망은 성취되면 될수록,자기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망상을 좆으
면 패가망신합니다. 더욱이 인간이 야망의 노예가 되면 백해무익한 흉기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는 모두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누구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
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아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는 비전의 사람이 되
기 위해서는,우리 모두 반드시 유념해야 할 다섯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1,_하장의.중요성 하나님의 비전은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주어집니다. 바을이 책상 앞에 앉아 자
신의 비전이 무엇인가 골몰한 끝에 로마의 비전을 얻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사를 제쳐 놀고
심산유곡(深山幽谷:깊숙하고 고요한 산과 골짜기》기도원을 찾아, 금식기도 하다가 얻은 것도 아
닙니다. 매일매일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던 중, 그 삶의 현장에서 자신을 통해 이루기 원하시
는 하나님의 비전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이란 하얀 백지 위에 하루하루 색종이로 모자이크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자이크를 직접
행하는 예술가 외엔, 그 모자이크가 이루려는 최후의 그림이 어떤 구도나 내용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통해 이루시려는 당신의 궁극적 비전 역시 우리가 당장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우리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여 매일의 색종이를 중실히 붙여
가노라면, 어느 날 불현듯 완전한 형태의 하나님 비전을 보게 됩니다. 우리 나날의 삶은, 하나님
의 그 비전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모자이크 판인 셈입니다. 바울은 20여 년 만에 그 모자이
크 판에서, 로마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비전은 결코 삶과 괴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상은 자는 누구보다 현재 주어진 삶의
현장에 중실해야 합니다. 현세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기 위함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비전은 허공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인간을 위한
비전이고, 인간의 삶을 위한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의 현실과 현장을 적극적
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나의 비전으로 삼을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
기 원하시는 비전을 포괄할 도리도 없습니다.
2. 지닌 것의 소중함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자는, 오늘은 곧 내일을 위한 예비라는 사실을 인
식하며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는 나를 통해 이루실 당신의 비전이 있습니다. 그때가 정확하게
언젠가는 모르지만,미래라는 의미에서 내일입니다. 오늘은 그 내일이 이르기까지 반드시 거져
야 할 과정이요, 오늘의 모든 것이 그날을 위한 예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것
들의 소중함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내일 하나님의 비전을 이
루기 위한 귀중한 도구들입니다. 우리의 외모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직접 빚어 주신 하
나님의 선물입니다.
지금 유럽 성악계에 혜성저럼 떠오르는 한국 여성이 있습니다. 그 자매님은 단역이나 조역을 거
치지 않고 처음부터 푸지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자매님의 데뷔
이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일부 신문이 (나비부인)이 본래 동양(일본)여성인 것에 착안, "이제야
비로소 나비부인을 찾았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유럽인은 오페라나 음악회에서 감동이 클
경우 박수를 칠 뿐만 아니라 발로 바닥을 구릅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녀의 공연이 끝나면 관
객들이 앙코르를 연발하며 발로 바닥을 구릅니다. 연로한 관객들은 공연을 공연으로 보지 않고
실제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나비부인)은, 일본 나가사키를 무대로 전개되는 비극으로、미국인 해군사관 핀커튼이, 일본 기생
나비부인을 데리고 놀다가f 끝내 차 버린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공연이 끝나면, 연로한 관객들
이 분장실로 핀커튼 역의 남자 가수를 찾아가, "너 그러면 안돼!"하고, 항의하는 해프닝이 벌어지
는 것입니다. 아직 신인이긴 하지만, 그 자매님은 그정도로 사랑받는 오페라 가수입니다. 유럽에
서 성악을 전공한 후, 아직까지 현지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한국 청년들이 부지기수인 것으
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악전공의 유럽 청년들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므로 한 극장의 주연으로 발탁된다는 것은 하늘의 벌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이탈리
아에서 수년 동안 유학한 그 자매님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것은 못생긴 눈 때문이라 단정한 자매님은,상꺼풀 수술을 받기로 결심。며
칠을 두고 남편을 설득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자신
의 귀국일에 맞추어 제일 좋은 성형외과를 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쌍꺼풀 수술의 세계적 권
위자는 거의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구 백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쌍꺼풀이 있기 때문입니다. 딸의 전화를 받은 어머
니는 수소문하여 장안에서 쌍꺼풀 수술의 제일 권위자라는 의사를 찾아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나 예약이 밀려 있는지 딸이 원하는 기간엔 어림도 없었지만, 에11 니는 적'을 동원하여 기어이
원하는 날짜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자매님은 여간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간, 주일 예배 시간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 유별났습니다. "왜 주어진 것에 감사
하지 않습니까? 왜 여자들이 멀쩡한 눈에 쌍꺼풀 수술을 받습니까? 쌍꺼풀 수술을 받고 이 다음
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는데 하나님깨서, '넌 누구냐, 난 네게 쌍꺼풀을 준 적이 없는데 대체 넌
누구냐’이렇게 울으시면 어쩌시렵니까?" 오늘날 한국 크리스천의 성경공부 열기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목사를 포함한 한국 크리스천의 문제는 성경공부를 즐기기만 할 뿐, 배운 것을 자신의 삶
에 적용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매님은 다소 유치하게 들리 수도 있는 그 설교를, 자
신의 문제로 자신을 향한 주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곧 서울 어머니에게 전하, 쌍꺼
풀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어머니가 화를 내었습니다. 얼마나 어렵게 받온
수술 날짜인지 아느냐며 계획대로 할 것을 독족했습니다.
그러나 자매님온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수술 예약일과 겹져 있던 소규모 콩쿠르에
참가하였고,거기에서 뜻밖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현장에 앉아 있던 독일의 한 극
장장에 의해 자매님은, 그 자리에서 전격적으로 나비부인에 발탁되었습니다. 조연 경험도 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주연을 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루는 자매님이 극장장에게 자기처럼 서툰 사람을 왜 주연으로 뽑았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극장장의 대답온 '당신의 눈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극중의 나비부인은 일본 여성이지만, 일
본인의 가창력은 한국인에 비해 헌격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혹 가창력을 지녔다 해도, 유럽에
진줄한 일본 성악인 중에 쌍꺼풀 수술을 받지 않은 여성이 없기에, 일본 여성을 무대 위에 올려
놓으면 유럼 관객 보기에는 일본인으로 느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중분한 가창력을 지
니고서도, 쌍꺼둘이 없는 동야여자라는 것이 자신을 발탁한 배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쌍꺼풀 수술을 받았던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이후 자매님온
무대위에서 단순히 나비부인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매님은 주어진 배역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주신 나의 외모를 통해 당신의 비전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크리스천온 자신의 외모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외모를 상대적으로 평가, 열
등감을 갖는 것은 금물입 니다.
특히 목회자가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갖는 것온 금물입니다. 외적 열등감을 지닌 목회자
는 사람을 바르게 쳐다보지 못하고, 자신의 눈이 상대의 눈과 마주지지 못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
에서 성령님의 역사는 제한됩니다. 더욱이 목회자의 외적 열등감은 한 순간 상대를 해치는 룡기
로 둔갑할 수도 있습니다. 얻리야로부터 갑절의 영감을 받온 얼리사가, 엘리야의 검옷으로 요단
강을 치자, 순식간에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한 개인을 위해 요간강이 갈라진 것은 그때가 유일
했습니다. 그 정도로 영감과 능력이 중일했던 엘리사가, 그 직후에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대머리인 자신의 외모를 놀리는 자 마른두 명을 저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알았습니다. 엘
리사 일생 최대의 실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쌍꺼풀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없는 사람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쌍꺼풀이 없다거나 키가 작다는 것이, 하나님의 실패를 의
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외모는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종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수 있습니다.
3.자기 세계의 확장 하나님의 비전으로 삼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시켜 가는 자입
니다. 여기에서 자기 세계의 확장이란,첫째. 자기 영성의 세계를 키워 가는 것입니다. 우리말 ’얼
글’의 원형은 '얼꼴'이라고 합니다. 얼은 영을, 그리고 꼴은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인간의
얼굴이란 그 사람의 영론의 모습 혹은 상태를 반영합니다. 영성이 깊은 자의 영은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성 깊은 자가 비인격적인 얼굴의 소유자일 수 없거나, 무자비한 표정의 얼굴로 살아가는 자가
깊온 영성을 지닌 자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영온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은 인간의 얼굴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영성을、얼꼴을 중단 없이 키워 가는 자입니다.
둘째. 사람의 세계를 확장해야 합니다. 공공이 자신을 되돌아보십시오. 지난해와 비교하여 올해
에는 자신과 성격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과 얼마나 더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만 사귀려 한다면,아무리 세월이 틀러도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허공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간의 삶 속에
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통하여 나의 삶 속에, 혹은 나률 통하여 누구의 삶 속에, 혹은 나를 통하여 누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질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다른 사람올
전폭적으로 수용, 사람에 대한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 가는 자콜 통해,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됨
은 전혀 의심이 여지가 없습니다.
셋째,지리적 세계를 확장시켜 가야 합니다. 고려대 종장을 역임한 통일식 교수의 (한국인에게 무
엇이 있는가?)란 책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 홍 교수가 중국
에 줄장 갔을 때의 일입니다. 비행기로 중국 내륙을 1!단하던 중 갑자기 비행기가 어느 공항에
착륙하더니,승무원이 승객 전원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까닭인즉 그 도시의 공산당 간부가 급히
줄장을 가기 위해, 운항 중이던 비행기률 차출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다음 비
행기는 언제쯤 올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 능사라고 했습니다.
중국인 안내원이 통 교수에게 비행기가 다시 뜰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자동차로
가장 가까운 기자역까지 이동하여, 기차를 타고 갈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B 교수는 속절없이 기
다리기보다는 기차를 선택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택시를 타고 가장 가까운 기자역에 당도하
는 데엔 무려 열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기차를 타기 위해 열 시간이나 자동차를 타고 간다는 것
은 한국인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중국인에겐 그 기차역이 그저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었을 뿐입니다. 서을에서 부산까지
자동자로 왔다 갔다 하는 데에 불과 열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는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의 사고와,
제일 가까운 기자역이 무려 열 시간이나 걸리는 광할한 대륙에 사는 중국인의 사고가 동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 웅대한 대륙율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서야 어찌 중국인율 제대로 이해할 수 있
겠습니까?
한국 산하의 륵징은 산을 넘으면 또 산입니다. 어디서나 첩첩산중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
족은 전통적으로 아예 산 넘어 가기를 포기해 버리고,같은 산자락에 사는 사랑끼리만 같은 편이
되었습니다. 건너편 산자락의 사람은 내 편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까지도 지연, 혈
연, 학연율 중아,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있습니다.
베를린, 파리, 런던, 로마 등 역사적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콜의 수도가 어떤 톡징이 있는지
아십니까? 산이 없다는 것입니다. 산이 없다보니 그곳의 하늘은,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
우리나라의 하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습니다. 더없이 넓은 하늘을 보며 살아가는 그곳
사람듈의 사고 역시 자연스럽게 확장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지경을 넓히면 넓
힐수록, 이 세상율 창조하신 하나님과 더 깊이 교감할 수 있율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나와는 다
른 사고와 방법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더 넓게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세계의 확
장이란 마지막으로 실력뮴 배양하는 것입니다.
실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두 부류의 사람을 쓰십니다. 베드로처럼 배운
것은 없지만 진짜 행동하는 사람이든지,아니면 바울처럼 실력묻 갖준 사람입니다. 구약성경 창
세기부터 신명기까지 기록한 모세는, 이집트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제왕교육율 받은 사림이었습
니다. 구약성경 기록에 동원된 제사장들은 모두 당대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을 3분의
1이나 기록한 바묻 역시 줄중한 지성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력 있는 자콜 콜어 당신의
말씀울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목사거나 톡은 목사가 되기플 원하는 자는 예외 없이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실력이란 한 마디로
곧 표현력입니다. 음악가의 마음속에 아무리 그럴 듯한 음악이 깃들어 있어도, 그것을 어떤 방법
으로든 3현해 낼 능력이 없으면, 그는,진정한 움악 실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수학자는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수학적인 논리■ 공식으로 표현합니다. 운동선수는 자신의 기량과 힘을,운
동으로 표현합니다. 소설가는 자기 속에 담긴 이야기들율 글로 표현해 냅니다. 목사는 하나님께
서 주신 은혜를, 진리의 말은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때의 말이란 자신의 삶으로
뒷받침된 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한국인은 평소 국어사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초동학교나 중학교 때 사전 찾는 법을 한 번
배운 뒤엔,사전은 단지 서가의 장식풍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대학생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나 영국 대학생들에게 봉불사전이나 영영사전은 필수적입니다. 그것은
자기 모국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정확한 3현을 위해서입니다. 사전을 전혀 사용지 않는 한국인
의 경우, 평소의 대화에 물과 200여 단어밖에 동원되지 않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대화에 비해 문장에는 더 많은 단어가 구사되게 마련이지만,일반적으로 한국인의 문장에 사용
되는 단어는 300여 개 남짓이라 합니다. 여러분의 노트콜 펴 놓고 자신은 과연 몇 단어나 구사하
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우리말처럼 풍부한 어휘력과 다양한 표현율 지닌 언어도 드물것입
니다. 그럼에도 일평생 겨우 200에서 300단어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상대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운학에서는 무엇이든 그것을 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
뿐인 단어콜 찾기 위해 유럽 사람듈은 사전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설력은 표현력이요, 표현력
이란 하나밖에 없는 단어를 찾아내는 실력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가리켜 '입의 집
(Mundhaus)이라고 했습니다. 설교가 얼마나 중요하면 교회콜 곧 '입의 집_이라 했겠습니까? 수
많은 신학서적을 탐독해도, 아무리 많은 신학정보콜 입수해도,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해 냄 수 없
다면 그것은 자신의 실력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율,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설교플 통해,어찌 로
고스이신 그분의 비전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실력은 표현력입니다. 표현되는 것만 나의 실
력입니다. 먼저 말에 대한, 우리말에 대한 실력을 배양하십시오. 해외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목회
할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말 200에서 300단어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비전움 온전히 전달하는 사
람이 될 수 없습니다.
4.이성적 신앙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자는 이성적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회를 권하노니, 너회 몸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성경 로마서 12장 11 말순
영적 예배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삶, 전 생애를 하
나님께 제물로 바쳐드리는 것이 명적 예배입니다. '영적'이란 헬라어 '로기코스'는 '로고스'에서
파생된 단어토 이성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적이란 단어가 험라어에 닫리 있옴에도(프뉴마티코
스),사도 바율은 여기에서 굳이 이성적이란 뜻의 '로기코스'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예배란 어떤 예배이겠습니까? 우리의 이성을 접어놀고 맹신자처럼 열광하는 것이 영적 예배이
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성만으로는 우리의 전 생애콜 거북한 제물로 드릴 수 없
습니다. 우리의 이성을 다하여 우리의 뜻과 의지를 하나님께 드립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영적
예배가 될 수 있고,그와 같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율 목전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율 찾아 땀에 피가 맺히기까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절규하실 때,그것은 주님의 감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마감하신 것은 주님의 이성이었습니다. 이 기
도률 마지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의연히 일어나셨습니다. 주님의 이성이 감성율
극복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누구든 이성적 신앙의 소유자
라야 하나님의 비전을 바르게 분변할 수 있고, 자신의 전 생애콜 그 비전옳 실전하는 거륙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 드릴 수 있습니다.
5.결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비전으로 삼은 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겯과콜 보
고픈 유혹에서 자유하는 자입니다. 한국의 역대 대동령들은 자신의 재임기간 동안, 가시적인 결
과콜 보러다가,모두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정한 기한 내에 반드시 결과플
보고자 하는 것은, 경제논리요 실적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옳 믿는 크리스전은, 달라야 잡니
다.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의 결과률 자신의 생전에 직접 확인하러 하면,그 사람은 결코 정
도콜 걸을 수 없습니다. 결과라는 우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란 영원물 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주님율 위해 행하는 일의 결과를 우
리 생애에 못 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영원 속에서 주님과 함께 반드시 확인케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당을 때 우리는 결과의 유톡을 끌피할 수 있으며. 일평생 정도콜 지킬 수 있습니다. 사
도 바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로마 복음화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자기 생을
걸고 로마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참수형을 당해 죽을 때까지 그가 로마에서 한 일이라곤, 감옥 안 죄수와 간수 몇 명에게
복융을 전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가시적인 결과나 업적이 없었습니다. 고작 그 정도의 일을 위해
자신의 생명마저 던졌다면, 경제논리로만 따저클 때그는 완전무걸한 실패자요 어리석기 짝이 없
는 인간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주님을 위한 자기 헌신의 결과률 어떤 형태로든 자기 생애에 보기
원했더라면, 가민히 앉아 참수령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온갖 수단율 강구했움 것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 개인적으로는 성공했을는지 모르지만 성경의 위인으로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정도콜 외면한 그콜 하나님께서도 외면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과
률 보고픈 유혹에서 첨저하게 자유했기에,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율 수 있었고, 하나님의 비전을
위하여,자신의 생명마저 내어놀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수형돌 당한지 300년 만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을,다시 말해 자
신이 뿌린 씨앗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짐을、하나님 나라의 영원 속에서 확인할 수 있
었습니다. 이국 땅에서 종살이와 옥살이의 눈묻겨운 과정옳 거친 요셉은,하나님옳 비전으로 삼
았던 자기 삶의 결과를, 즉 자신을 통해 인류를 기근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의 성취을 자
기 생전에 직접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을은 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결과를 보았다고 해서 그가 결과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요, 바울이 결과콜 보지 못했다고 절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결과에
대해 철저하게 자유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옳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율 위한 우리 삶의 결과를 생전에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과률 보고픈
유혹에서 자유할 때에만, 일평생 하나님의 비전을 추구하는 참된 섬김과 봉사의 크리스천으로
살아같 수 있습니다.
! U
크리스천이란 영원을 사는 사랑이요,무엇보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생전
에 자기 삶의 겯과플 보기 위해 안달한다면, 어찌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증은님들! 비전이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망상을 좆으면 패가망신
합니다. 야망의 노예가 되면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해지는 룡기가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으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그분을 비전으로 삼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에게 섬김과
붕사콜 다하는 진정한 크리스전,참된 하나님의 액성이 되십시오. 그때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우리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박수로 친히 맞아 주실 것입
니다. - 발취: 이재철 목사의 저서 _비전의 사랑' 中에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예수가쫑다^
글율 보시고 스크업 하시기 전에 그냥 가지 마시고 엇굴로 따芸한 소감으로 감사좋 표하는 그리스도인미 됩시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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