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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우리 아버지(마 6:5-13 )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하나님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5~13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고, 어떻게 보상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할뿐만 아니라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주님이 중요시하는 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기도의 보상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에서 주님의 말씀하신 '자기상'은 α절에서 구제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말씀하신 '자기상'과 16절에서 말씀한 '자기상'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문맥상으로 볼 때 기도의 응답은 이차적인 것이고, 기도로 인해 얻게 되는 보상이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되면 우리의 긷는 응답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가 되고, 보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보상에는 두 번의 시기와 두 종류의 보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주는 보상과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입니다. 이 두 가지 보상을 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보상을 받으면 나중에 하나님의 보상은 받을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에 오늘 우리의 목적하는 바가 사람의 명성과 칭찬을 받는 것이라면 장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이 우리에게 더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눈이 열렸다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영광만 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알아야 할 것은 응답을 받는 기도뿐만 아니라 상을 얻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다면 그 기도는 우리의 의가 될 것이고, 장래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두 종류의 사람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로 가지를 영화롭게 하려하기 때문에 회당과 큰 길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외식하는 자'라는 말에는 그 어근의 의미로 볼 때 배우가 연극을 공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자는 배우와 같습니다. 기도하려는 간절한 생각은 없으면서도 기도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처럼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런 연기를 정제하십니다.

 

'회당'은 열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큰 거리 어귀'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곳입니다.

 

그런 곳은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극장 무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들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 때 그들은 회당안과 밖에서는 큰 거리 어귀에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공개된 장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데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를 고의로 사람들에게 보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기 때문에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려는 것이 동기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 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 말씀은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실을 꼭 지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2장8절에 보면 "각처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골방'은 은밀한 장소를 의미 합니다. 반면에 '회당과 큰길 어귀'는 드러난 장소를 가리킵니다. 골방은 어느 지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은밀히 교통하는 곳이고, 나를 나타내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쉬실 곳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광야와 산을 골방으로 여겼습니다.

 

여기 "문을 닫고"라는 말은 밖의 어떤 소리에도 상관하지 않고 조용하고 단순하게 우리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깊고도 은밀한 교통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기도는 가장 은밀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면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을 느끼지 못해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며, 냉수 한 그릇이라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아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보십니다. 들으실 뿐 아니라, 아실 뿐 아니라, 보실 뿐 아니라 갚으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진지하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갚으십니다. 오늘 당장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자신을 나타내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실 뿐더러

 

둘째는,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의미 없는 말을 늘어놓아 길게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기도는 소리만 있을 뿐 뜻이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소용이 없고 효력이 없습니다. 이 말은 기도할 때 같은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금지시킬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같은 말로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하셨고 사도 바울도 몸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같은 기도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하늘에서 허다한 무리가 "할렐루야"를 반복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중언부언하지 말하는 말은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기도에는 소리만 많고 의미가 없어서는 안됩니다.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지만" 주님은 말을 들으시지 않고 "은밀한 중에 보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기도해서 하나님이 감동하시겠습니까? 어린애가 말을 잘해서 아버지가 어린애의 소원을 이루어 줍니까?

 

마찬가지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이로움을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태도, 우리의 필요여부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많은 말로 구했다고 해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면 응답 받지 못합니다. 필요한 것이 아닌데 구한다면 그것은 탐심이요 잘못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시지만, 이기적인 우리의 마음을 채워 주지는 않으십니다.

 

혹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기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면 서도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한 대목씩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이 기도를 주님의 기도(Lord's Prayer)라고 하는데 엄격한 의미에서는 이기도가 주님 자신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기도입니다.

 

왜 주님이 기도를 가르치셨습니까?

 

이 세상이 생긴 이래 하나님은 많은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한 세대 또 한 세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구하는 tfka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원함을 구할 뿐, 하나님 자신의 원함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더러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아주 중요하고 깊은 뜻이 있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라는 칭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새로운 칭호입니다.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렀습니다. 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Prinston에서 공부할 때 신약학 선생님으로 매치커 박사님이 계셨는데 세계적인 신약학의 권위였습니다. 그분은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꼭 기도를 하셨는데 예외 없이 첫마디의 기도가 "O, Eternal Good" "오,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시작했습니다. 제가 한번은 박사님께 물었습니다. "박사님은 기도 하실 때마다 꼭 영원하신 하나님을 찾으시는데 무슨 특별한 뜻이 계십니까?" 그때 아주 얌전하게 생기신 매치커 박사님이 생긋이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예, 나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좋아요. 세상은 다 변해도 하나님은 영원하시니 까요" 그 말씀이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혀지지를 않습니다.

 

혹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고, 영생 얻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기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낳으신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 길거리에 지나가는 남자를 보고 누구나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그분과 피로 맺은 관계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 어떤 청년이 상대방 여인을 무척 사랑합니다. 본인끼리는 사이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아버지가 사위로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결혼을 승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여가네 집에 찾아가 아버님을 뵙고 승낙을 얻으려 합니다.

 

"아버님, 아무개와 결혼을 승낙해 주십시오" 그런데 반대하는 여자의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야, 이놈아, 어떻게 내가 네 아버지냐?"고 호통을 칩니다. 이 말은 딸을 너한테 못 주겠다는 말 아닙니까?

 

아무나 아버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를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이미 말씀드린바 있습니다마는 저는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세 살때 아버님이 23세에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린 때 아버님의 사진을 본적이 있습니다마는 '아버지'라고 불러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것이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때 학교에 가면 다른 학생들이 아버지 말을 하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평양에서 민족하교인 승인상업학교를 졸업하시고 평양 청림상회에서 근무하셨다고 합니다. 장사수완이 탁월하셔서 남들이 팔지 못한 물건도 우리 아버지가 맡으면 재고 없이 다 팔았다고 합니다. 웅변술이 있으셔서 웅변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일등만 하셨습니다. 저는 상장과 원고만 보았습니다. 그 아버지만 살아 계셨다면 저는 아무런 고생도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이 아버지, 지금 생각함 해도 저는 아버지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려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주 성품이 소극저이고 우울하고 사람 만나기가 싫고, 다른 사람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다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고 그때부터 오늘까지 저는 불행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아버지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그 아버지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했습니다. 혹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렇게 어려운 수속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구주로 시인했다면 이것은 걸대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내 육정으로 한 것도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26절에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수양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으로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닙니다. 싸워서 쟁취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가운데는 아주 열정적으로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감동적으로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조용히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믿든지 이지적으로 믿던지 조용히 믿던지 뒹굴면서 믿던지 믿으면 그 결과는 똑같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 입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사람 편에서 보면 믿음의 행위입니다 마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선택의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면서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기준에서 선택하셨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처럼 성격이 비겁해서 자기의 위험을 면키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욕을 보게까지 한 사람을 하나님은 택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했을까요?

 

하나님이 친히 "내년 이맘때 네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데도 장막 안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비웃던 사라를 택해서 만민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을까요?

 

약삭빠르기 이를 데 없고 속이기를 잘하는 간사한 야곱을 택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게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천하기 이를 데 없이 살던 기생 라합을 예수님의 조상의 반열에 서게 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하기 원한다'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원한다"는 기도의 중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천사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 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녀를 통해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그날 천년 왕국이 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 아버지의 이름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만일에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히 사용하면 우리의 마음은 아플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어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의 갈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으레히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도리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돌릴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36장21절에 보면 그 반대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겼노라"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지 않은 결과 그들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려고 갈망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의 이 갈망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이 이 땅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불려 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인류의 조상들이 바벨탑을 쌓고 함께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제쳐놓고 자신들의 이름을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창 11:4)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이름이 땅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존귀와 영광을 받는 유일한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류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제쳐 두고 많은 다른 이름으로 대치 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평범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역사 하실 때 계속해서 자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소금 자체가 값이 비싼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소금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우리 자신 만으로서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자녀로서의 사명을 다 할 때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가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이름에 손상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이 될지언정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우리 아버지의 이름에 손상을 끼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자각하고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자녀호서의 긍지와 체면을 세우며 살아갑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고백하며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거룩히 여김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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