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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복음(롬 1:16) / 이철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6.

"구원의 복음"
로마서 1:16


논지 : 교회 교육의 핵심은, 구원의 복음을 확신케 하여 복음을 자랑하게 하는 것이다.


저희들이 어릴 때,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학년 초가 되면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라는 것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집에 라디오 있는 사람 그러면 손들고, 전화 있는 사람 그러면 손들고, 뭐 그렇게 조사를 했어요. 조사를 하다가 이제 아버지 직업을 또 조사를 합니다. 그러면, 농업 그러면 농업 다 손들고, 상업 그러면 상업 손들고, 회사 다니는 분 그러면 또 다 손들고, 저희 아버님은 목사님이셨는데 목사님은 그 항목이 없어요. 그래서 기타 그러면 그 기타에 손들면, 기타 뭐냐고 그래서 기타 몇사람 남은 사람 얘기를 하면, 목삽니다 하고 얘기를 할 때에 그 때 어린 마음에 그게 부끄러워 가지고, 내가 교인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목사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 그렇게 부끄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철모를 때에 가졌던 부끄러운 기억이지요.


여러분, 오늘날 우리 교인들 가운데 기독교인이지만, 그러나 자신이 교인인 것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활동하지만, 그러나 세상 속에 나가서 이웃에서나 혹은 직장 속에서 기독교인인 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복음을 자랑스럽게 내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가. 복음을 부끄러워 함


1. 사실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 그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부끄러운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팔레스틴에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요한이나 유다 같이 아주 흔한 이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나사렛 동네에 사는 예수라는 뜻이그요, 또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은 그 동네 이름 붙여서 예수라고, 이렇게 예수라는 이름이 각지에 많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난 이후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문서에서 싹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이름인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십자가에 죽고 나서는 누구도 자기 아이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 집안에 누가 감옥에 갔다든지, 심지어는 뭐 아주 험악한 범죄를 저질러서 사형 당한 사람이 있다고 그러면 누가 우리 집안에 누가 지금 감옥에 갔다고, 사형 당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겠습니까? 누가 알세라, 쉬쉬하면서 다 숨겨 놓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라는 이름이 사회적으로 부끄러운 이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21:23에 보면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단순히 흉악범으로 사회적으로 부끄러운 이름이었을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2. 바울 선생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선생님이 가만히 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갈릴리 나사렛이란 시골에서 난 젊은 목수가, 예수라는 사람이 메시야라고 믿으니까 도무지 말이 안되는거예요. 제사장 가문에서 났다든지 혹은 왕의 가문에서 났다든지, 혹은 레위인의 가문에서 났다든지 어려서부터 율법교육을 충실히 잘 받았다든지 그럴듯한 것이 하나라도 드러나 보여야 하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이 그저 시골 한 청년이 메시아다, 참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더구나 그 사람이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가장 수치스러운, 가장 참혹한 십자가에 죽었어요. 그런데 그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구주다, 나를 구원하신 주인이다, 내 인생의 주인이다 이러고 얘기를 하니까, 이거는 모독도 그런 모독이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비참한 죄인이 구주라니,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을 했습니다.


3. 로마 사람들 한테도 예수 믿으면 구원얻는다 이런 복음을 전할 때에, 그 말도 안되고 부끄러운 소리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전세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굉장히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식민지 유대, 이름도 알 수 없는 조그만 나라, 그런 나라의 어느 시골 구석에 어느 목수가, 젊은 사람이 메시아이고 구주라고, 그가 인간을 구원했다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십자가에 죽음으로 인간을 구원했다고 이런 말이 안되는 소리를 자꾸 하거든요. 로마 사람들이 그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을 했습니다.


바울 선생님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세상적으로 볼때는 그 예수라는 이름은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름을 로마사람들에게 전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 이름이 부끄러운 이름이었지만 그러나 바울 선생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나. 교회 교육의 핵심 – 복음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요. 로마서 1장 16절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라.’ 여러분 우리 가정이나 교회나 기독교학교에서 신앙교육을 시킨다고 했을 때 신앙교육의 핵심이 뭘까요? 우리 기독교에서 신앙교육을 시키는 핵심은, 세상에서는 그 부끄러워하는 예수 이름을 증거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얻게 하고 그 이름을 자랑하게 하는 것이 우리 신앙교육의 핵심입니다. 우리교회 4대 목표 가운데 하나가 교육인데, 우리가 뭘 교육할것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함으로써 복음을 가르쳐줌으로써 그 복음으로 인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 예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랑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의 핵심입니다.


1. 구원의 복음


1) 바울 선생님은 기독교인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자기가 가장 의롭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자기 자신이야말로 사실은 죄인의 괴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회개하구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가진 사람, 거듭난 사람, 중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에서도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죄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는 계속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2) 바울 선생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험악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잘 알았던 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부터7장 말씀에 까지 보면 바울 선생님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많은 갈등과 고뇌를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8장으로 넘어가면서 세상의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하고는 그것을 고백했습니다.(롬8:35) 세상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큰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장 강하다는 사실을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닮아가면서 구원을 이루어 가게 된 것입니다. 성화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지요.


3) 구원 받아서 중생한 사람이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거룩한 삶, 성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롬15:13)


2. 하나님이 능력


죄에서 구원받은 확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 닮는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삶,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 얻을 소망, 이 구원의 복음, 이 구원의 복음은 성경에 관한 어떤 정보를 제공한다든지 성경에 관한 어떤 지식을 전달해 준다든지 단순히 지식만 전달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심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 아들을 구주로 보내신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깨뜨려 버리고 그리고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신 것을, 내가 구원받은 자인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울선생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가 죄인들의 괴수였다가 새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속에,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 교육


교회에서 교육을 할 때에, 가정이나 기독교학교나 우리가 신앙교육을 할 때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가장 핵심되는 교육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가지 교육을 시킬 때에 성경지식을 전달하고 찬송도 가르치고, 또 교회생활도 가르치고, 그래서 기독교적인 교양을 잘 갖춘, 기독교적인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을 양성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지식이 풍부하고 찬송을 잘 부르고, 교회 생활에 익숙하기만 한 그런 것으로는 우리 교육이 제대로 잘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교육을 시킬 때에는 그것을 더 뛰어넘어서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를 시켜야 하는 것이지요. 생명 구원 받았다는 확신, 영생 얻었다는 확신, 그런 확신을 가지도록 그들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때에 점점점점 기독교적인 교양과 기독교적인 윤리를 다 갖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전후가 뒤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가정에서 기독교학교에서 신앙교육을 시킬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받은 확신,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에 대한 소망, 여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지만, 내 자녀나 우리 교회학교의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그 아이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잘해서, 성경 지식을 잘 전달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모님이나 교사들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아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기를, 이 아이가 거듭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연구와 함께 기도에 힘씀으로써, 기도에 힘쓴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써 새생명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


1. 구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 결과 오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유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첫번째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기 신앙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자기 신앙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자기 신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생활 할 때에 타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율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아이는 신앙생활을 자율적으로 잘 하지 못해요. 어릴 때에는 손목잡고 데리고 다니니까 교회에 잘 출석하지만, 그 다음에 머리가 좀 커져서 자기 발로 다니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 자율적으로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주일 아침 되면 주일학교 보내기 위해서 깨우기가 굉장히 힘들어지구요, 교회 잘 갔다왔나 안 갔다왔나 확인하려고 어떤 집에서는 주보를 가져오라고 하기도 하고, 헌금 줬는데 그것을 잘 갔다 헌금 드렸나 안 드렸나 늘 점검을 해야 하고, 타율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부모님들이 늘 감시하고 점검하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릴 때에는 부모님 따라서 잘 교회를 다니다가도 점점 머리가 커지면 교회 다니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타율적으로 부모님 권유로 억지로 교회에 다니다가, 이제 자기가 독립하게 되니까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있는 아이는 신앙생활을 자율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하기 때문에, 부모가 신경을 안 쓰고 독촉을 안해도 되요. 자기가 오히려 더 열심을 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시험 보는 때에도 교회 와서 예배 드리고 그리고 나서 공부하러 가고, 고3때에도 꼭 교회 나왔다가 학교로 가는 아이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2. 두번째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기 신앙대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생활할 때에 신앙의 기초에 견고하게 서서 신앙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기에는 또래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기가 쉽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 자기 또래 친구들의 압력에 굴복을 해가지고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술, 담배에 빠져들기도 하고, 음란물에 빠져들기도 하고, 폭력서클에 빠져들기도 하고, 가출하는 아이들도 있구요, 심지어는 친구가 문제가 있어 자살하는데, 자기는 아무 문제도 없으면서 같이 따라 자살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또래집단의 압력에 굴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한테 친구를 잘 사귀라고 늘 이야기를 합니다만, 나쁜 곳에 가지 말고 바른 생활 하라고 늘 이야기를 합니다만, 부모님이 선생님이 어떻게 매일 아이들을 따라다닐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매사에 간섭하고 참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구원의 확신을 가진 아이들은 자기 신앙을 토대로 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가치관에 분명하게 서서 이것이 잘 된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 자기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지요. 다른 많은 친구들이 모두 잘못된 길로 나가도, 자기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판단해서 또래 집단의 압력을 극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따 당할까봐,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부모님이나 교사가 간섭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방향으로 인생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하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 끌려들어가지 않고 자기 스스로 신앙적인 가치관이 서서 그래서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를 따라가며 예수를 닮아가며 거룩한 삶,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세번째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기 때문에,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지요. 친구들에게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냅니다. 알립니다. 친구들에게 예수 믿는 복음을 전도합니다. 친구들을 교회로 데리고 와서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기 때문에 전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남지 9월호 보니까 각 부서에서 여름성경학교 한 것을 죽 만남지에 보고를 했는데, 우리 초등부 어린이들이 나가서 전도한 이야기가 쓰여 있스니다. 종로에 가서, 서울역에 가서, 대학로, 혹은 무슨 병원, 여러곳에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종로에 가서 전도를 하는데, 전도하려고 이렇게 펼쳐놓으니까 거기 상인들이, 가게의 상인들이나 포장마차 주인들이 뭐 강력 반대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살벌한 속에서 그런 것들을 다 극복하고 찬양하고 전도하고, 거기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자기 전도훈련 받은 것을 가지고 입으로 전도하고 그렇게 전도를 했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조그만 어린아이들이 담대하게 나아가서 전도하는 일을 했다는 것은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 아닙니까?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기 때문에 그런 일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만남 2000.9 pp.32-33) 우리 교회 청년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청년들이, 젊은이들이 공원이나 학교나 병원이나 여러곳에 흩어져서 매주 전도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참 젊은 사람들이 대단하다, 훌륭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자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전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가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올림픽 경기가 진행되면 예수 믿는 선수들은 경기 끝난 다음에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제도 뉴스에 잠깐 보니까 여자 배구 선수단이 굉장히 오랫동안 게임을 해서 힘들게 승리를 했어요. 그리고는 코트 가운데 그 여자선수들이 둘러 앉아가지고 같이 붙들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히 알리게 되는 것이고 담대하게 전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네번째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에 가서 우리 주님을 만날 때에 자랑스럽게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26절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9:26)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를 부끄러워 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부끄러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자랑하면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우리들을 자랑스럽게 맞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환영하며 맞아 준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자랑할 때에 얻어지는 최종적인 유익이 바로 거기 있습니다.






라. 결론


여러분, 우리가 신앙교육을 시킬 때에, 가정과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신앙교육을 시킬 때에 그 신앙교육의 제일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가르치고 교육시켜서 우리 학생들로 하여금 아이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헌신적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바른 인생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자랑스럽게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여러분들의 가정 속에서, 혹은 교회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면, 신앙교육을 시킬 때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서, 아이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자랑하게 그들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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