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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19-34 신앙과 돈 (2) / 김동호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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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돈 (2)
마태복음 6:19-34


설교방송 (설교본문)


우리는 지난주부터 신앙과 돈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아마 꽤 여러 주일 이 제목으로 설교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담스러운 주제이지만 회피해서는 안 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에 경청하시고 뿐만 아니라 이 설교에 은혜를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생각과 자세가 정말 기독교적이고 신앙적이다 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축복이 아니라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천하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천하를 다 얻어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질에 대하여 신앙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 중에 하나가 저는 바로 물질은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은 절대로 우리를 잘 살게 할 수 없습니다. 돈은 절대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축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돈 정도로 채워지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성공으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돈을 많이 버는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생의 목표를 삼을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은 축복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 자체가 화가 되는 악한 것도 아닙니다. 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복도 아니고 화도 아닙니다. 그냥 돈은 돈입니다. 돈은 선과 악 그리고 화와 복이 될 만한 것이 못됩니다.


복은 정직하게 벌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쓰면 선이 되고 복이 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쓸 줄 모르면 악이 되고 화가 됩니다. 악과 선 그리고 화와 복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돈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돈이 복이 아니라는 말씀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이 화라는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 : 10)






이 말씀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이지 돈 자체가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면 참으로 엉뚱해지기가 쉽습니다. 그 엉뚱한 생각 중에 하나가 바로 돈을 무조건 죄악 시 하는 금욕주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돈 자체가 우리에게 복을 주고 화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돈에 대한 우리 인간의 생각과 자세가 우리에게 화와 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돈에 대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반듯한 균형감각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도 그냥 돈을 축복인 줄 알고 그것을 의지하고 살지 말라는 말씀이지 무조건 저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는 말씀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저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돈을 하나님처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보다 더 믿고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지 돈에 대하여 바른 계획을 가지고 규모 있게 사는 것까지 금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저축을 금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후와 어려운 때를 위하여 미리 미리 저축을 해 두는 것을 지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 근거를 요셉에게서 찾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안타까워 할 때 요셉은 그것이 칠 년 풍년 때 칠 년 흉년을 대비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로 알고 그것을 바로 왕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 칠 년 풍년 때 칠 년 흉년을 대비하였기 때문에 애굽과 근방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칠 년 흉년을 대비하기 위하여 칠 년 풍년 때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고를 지어 저축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아니하고 창고만 지었다가 하나님께 불리움을 받았던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도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이 있습니다. 그냥 쉽게 말해서 보편적으로 볼 때 청년과 장년의 때가 칠 년 풍년이라면 노년의 때가 칠 년 흉년의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과 장년의 때에 풍년이 들었다고 흉년의 때를 대비하지 아니하고 흥청망청 다 돈을 써버린다면 노년의 때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고 폐가 되는 그런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은 돈을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지 무조건 저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잠언 6장에서 개미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여름에 겨울을 예비하는 개미에게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 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 니라 (잠 6: 6 - 8)






여기서 말씀하는 '예비한다'는 말씀과 '모은다'는 말씀은 '저축을 한다'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저축하는 것을 믿음 없이 땅에 보물을 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극단주의로서 땅에 보물을 쌓고 사는 것 못지 않게 우리에게 해를 주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영락교회 원로목사님이셨던 한경직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에 대하여 말을 할 때 그 분의 훌륭함을 무통장 무소유에서 찾았습니다. 물론 한 목사님이 물질에 대한 욕심 없이 깨끗하게 사신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우리가 정말 본 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물질에 대하여 욕심 없이 깨끗하게 사신 것을 무통장 무소유에서 찾는 것은 오히려 불교적인 사고방식이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은 아닙니다.


물질에 대하여 깨끗하게 살려면 무통장 무소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는 극단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그래서 그에 대하여 반박하는 글을 썼습니다. 내용은 한경직 목사님의 훌륭하심을 무통장 무소유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개신교의 목사는 천주교의 신부님이나 불교의 스님과 같이 독신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고 있는 생활인입니다. 천주교의 신부님이나 불교의 스님은 통장과 소유가 없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목사는 통장과 소유가 없다면 문제가 됩니다. 개신교의 목사는 목사인 동시에 한 아내의 남편이고 자녀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자꾸 깨끗함과 훌륭함을 무소유 무통장에서만 찾기 때문에 우리 개신교는 천주교와 불교에 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에서 보면 개신교의 목사는 돈을 밝히는 삯꾼처럼 보이고 세상 속인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무소유 무통장이었어도 전혀 문제가 없으셨습니다. 영락교회가 목사님에 대한 대우와 예우를 완벽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건강을 위하여 남한산성 별장과 같이 좋은 곳에 처소를 예비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당회장과 똑같은 생활비를 매달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목사님만을 위하여 최소한 세 명의 풀타임 유급직원이 배치되었었습니다.


때문에 목사님은 통장과 소유가 전혀 필요 없으셨습니다. 아마 모든 목회자를 영락교회처럼 은퇴 후에 그렇게 보장해 준다면 목사님과 같이 무통장 무소유를 실천하는 목사님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영락교회가 한목사님에게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배경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그에게 통장이 없고 개인 명의의 소유가 없었다는 것만으로 훌륭한 분이었다고 추켜세우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원로목사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은퇴한 후 시무 하던 교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와 같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느보 산에 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좀 냉정해 보여도 하나님의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해야 할 가장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충성하였다고 늘그막에 교회에서 그 댓가를 다 받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은퇴 후 교회로부터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독립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저축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할 수 있으면 시무 할 때 충분한 대우를 하여 목회자가 은퇴 후에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저축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돈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한번 깊이 다루어야 할 주제 중에 하나는 청빈(淸貧)입니다.


청빈은 가난하게 살아도 깨끗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함 = 깨끗함으로 이해되거나 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청빈이 그렇게 왜곡되게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깨끗한 삶을 살려면 무조건 가난해 져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결론이 그렇게 나오면 부자로 넉넉하게 사는 것은 무조건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마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같은 아주 건강치 못하고 위험한 생각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깨끗함은 깨끗함에 있는 것이지 무조건 가난함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끗하게 살기 위하여 가난해 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훌륭한 일이나 무조건 가난해야만 깨끗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무조건 가난을 찬양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아주 유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에 임택진 목사님 사모님이 말씀하셨다는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무섭지는 않아'라는 말씀을 여러분들은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 말씀이 참 좋습니다. 저도 그런 정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가난을 무서워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이 무서워 가난하게 살지 않기 위하여 깨끗함과 바름을 버리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함으로 자신의 깨끗함을 과시하는 그런 유치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가난이 싫습니다. 가난을 싫어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가난을 좋아한다거나 가난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정직한 것도 옳은 것도 아닙니다. 또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들에게 가난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에게 가난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것이 깨끗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아주 확신하고 있습니다.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난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부유하게 살 욕심에 양심을 버리고 살아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무조건 언제나 가난하게 살아야만 그것이 훌륭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돈에 대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축복으로 생각하여 땅에 보물을 쌓는 것으로 생의 목적을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을 벌고 부자가 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며 무조건 부자가 되면 성공한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고 잘 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을 거기에 두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예수를 믿으면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지금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물질은 축복이 아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일은 너희를 위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반대로 돈에 대하여 극단적이고 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돈을 무조건 죄악시하여 저축을 하고 통장을 가지고 규모 있게 살아가는 것을 믿음이 없는 불신앙 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더 골치 아픈 것은 돈에 대하여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돈을 벌어 넉넉하게 사는 것이 좋은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목회자는 그렇게 사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지도자는 무조건 가난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돈에 대하여 반듯한 신앙과 철학을 가지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여기서 마치려고 합니다. 돈은 선도 아니고 축복도 아닙니다. 그러나 돈은 악도 아니고 화도 아닙니다. 돈에 대한 바르고 건강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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