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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로 가는 소 / 삼상 6:1-16

by 【고동엽】 2021. 12. 25.

벧세메스로 가는 소

사무엘상 6:1-16

 

설교방송 (설교본문)

 

 

 

여러분은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신앙은 바라는 것을 이루는 통로라 얘기하기도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라는 말씀을 그 중거로 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라는 말씀을 좋아합니다.

 

 

 

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닌 일부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훨씬 더 다른 차원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요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에 그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자세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주셨던 그 돌 판을 사람들이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 이스라엘 사람들 하나님말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십계명이 새겨져 있는 돌 판을 나무 궤에 넣고 금칠을 하여 일명 ‘황금궤’라 불렀고 그 법궤를 지성소 안에 모셔 놓아 지극히 보살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법궤, 즉 하나님의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있는 이 법궤는 곧 이스라엘을 지키는 수호신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생명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소중히 여겼던 이 법궤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적국이었던 블레셋으로 빼앗기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엘리 제사장 시대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블레셋 진영으로 옮겨진 이 법궤로 인해 블레셋은 7개월 동안 독종이라는 재앙에 시달려야 했고, 법궤에 손을 대는 사람마다 죽임을 당하는 혹독한 곤욕을 치러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호신과도 같은 이 법궤를 빼앗아 온 것은 블레셋 입장에서 보면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였으나, 그 기쁨도 잠시, 너무나도 큰 재앙으로 인해 온갖 질병으로 백성들이 고생하게 되자 블레셋은 이 속수무책인 법궤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세 차례씩이나 법궤를 보관하는 도시를 옮기다가 결국 회의를 해서 이 골치 아픈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 진영으로 되돌려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빼앗긴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광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옮기면서 보여주는 그 방법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수레에다 법궤를 싣고는 젖이 나는 암소 두 마리를 데려다가 그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향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본문의 말씀은 그저 하나의 역사 속의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지나치기 쉬우나,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들이 가져야 될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 깊이 들어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에서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오늘날의 성경을 말하는 것이고, 수레에 실린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로 향하는 암소 두 마리는 말씀을 갖고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이 본문의 말씀은 성경을 갖고, 성경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와 그 여정을 아주 정나라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도대체 어떠해야 하는가? 저는 오늘의 본문을 중심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법궤를 끌 소를 찾을 때 젖이 나는 암소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⑦ 상)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왜 젖이 나는 암소를 택했을까?

 

힘으로 따지자면 수소, 즉 황소를 택했어야 했습니다. 무거운 수레를 끌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이 있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황소가 제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궤를 끌기 위해 선택된 것은 황소가 아니었습니다.

 

또, 법궤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깨끗함과 순결함이 필요했다면 아마 흠 없고 티 없는 어린 송아지를 선택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송아지도 배제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굳이 젖이 나는 암소를 택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아픔입니다.

 

이제 막 새끼를 낳아 사랑으로 길러야 할 어미 소가 그 분신과도 같은 새끼와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⑦ 하)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⑩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⑫ 암소가 갈 때에 울었다

 

 

 

 

 

이 부분은 그 아픔이 얼마나 큰가를 설명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하나 얻게 됩니다. 그것은 법궤, 즉 말씀을 갖고, 말씀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은 큰 슬픔과 아픔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은 힘이 듭니다. 괴롭습니다. 외롭습니다. 많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그 아픔의 강도는 마치 막 낳은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싫든 좋든 말씀을 갖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차이는 혹 있을지 몰라도, 말씀을 배제하고 살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은 그 아픔에서 이미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 그 아픔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 아픔의 결국은 젖 먹는 새끼와 이별하는 아픔만큼이나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런 심한 말까지 해야 하는가? 대체적으로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라고 믿고 있는 오늘날의 교인들에게 상식의 반대되는 설교로 인해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 교우들은 신앙의 참된 진리를 이해하고 소화해 나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합니다. 말씀을 갖고 사는 것은 아픔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픔 그 자체입니다.

 

 

 

 

 

대기업 임원인 남편을 둔 어느 여 집사님께서 남편이 주일마다 골프를 치러 나가서 속이 상하시다 면서 목사님께서 권면해서 주일날 교회에 나오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해 왔습니다. 그 남편도 명색은 집사인데 교회에 나오시라 권면을 했더니 필드에 나가서도 꼭 예배시간에는 교회를 생각하고 기도도 한다고 그렇게 너스레 말씀하시더니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도록 노력하겠노라고 답을 하였습니다. 몇 주간 교회에 잘 나오시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좋아서 참 좋으시죠? 라고 물었더니 그 집사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골프장에 갔을 때는 교회 생각을 많이 했는데, 막상 교회에 나오니까 골프장 생각이 더 나던데 어느 쪽이 좋은 겁니까? 괴롭습니다.”

 

제 대답은 “둘 다 좋으네요. 고민하고 괴로워 한다는 것은 좋은 징조이지요... ”

 

 

 

신앙에 있어서 이런 갈등과 선택의 괴로움은 누구나 한 번 쯤은 다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결국 신앙이란 본질적인 것을 위해 비본질적인 것을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학교나 직장에서 동료들과 점심을 같이 할 때, 사람들이 많은 시내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식사기도를 해야 하는지 안 해도 되는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우리는 마음 아파했습니다.

 

주일이 되면 꼭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지, 집에서 좀 쉬어도 되는 것인지를 놓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다가 소득의 열의 하나, 즉 십일조를 떼어 드려야 하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약간의 주일 헌금으로 때울 것인지를 놓고 마음을 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이것은 아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요. 이것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십일조 정도를 뗀다고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이것 보다 더 강하고 심한 강도의 아픔들이 우리의 선택 속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순간의 선택들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들은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말씀을 지켜 사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며 탈세를 하고 싶습니다.

 

남들 다 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그렇게 타협을 하면 얼마나 일이 잘 진행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하다 못해 병원만 가도 아는 의사가 있어야 빠르다는 말은 이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빨리 진찰을 받으면, 그만큼 다른 한 사람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에 그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승진심사의 기간에 세상적인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고 그저 깨끗하게 기다리다가 승진이 안되거나 오히려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여러분 그래도 여러분의 그 행동에 후회가 없으십니까?

 

 

 

 

 

말씀과 현실 속에서 오는 끊임없는 갈등들, 그리고 세상의 소리 사이사이로 들리는 십자가의 음성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이것은 고통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사는 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통이 싫으시다면 말씀을 버려야 합니다.

 

이 아픔을 거부하고 싶으면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119:105)” 고백하며 말씀을 사모한다면,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도 함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도 떠나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프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평생의 밥줄이었던 그물을 버렸습니다. 우리도 다 생업을 접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괴로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낳은 자기의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해 “매이는데 까지 고난을 받으라(딤전1:9)” 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둘째, 그렇다면 그렇게 산 사람들의 결과는 어떠한 것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약간은 충격적인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다 도달한 그 암소들의 최후는 상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번제물로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따라 아픔을 안고 평생을 산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의외로 영광이 아닌 비참한 최후인 것입니다.

 

 

 

⑭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우리는 말씀을 굳게 잡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며 아이들과 헤어지는 아픔까지도 참으며 주를 위해 일 한 후에는, 이 모든 영광을 한 몸에 받을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말씀을 따르는데서 오는 모든 고통과 희생을 알면서도, 궁극적으로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얻을 영광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복음을 지키며 일 한 후의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기쁨의 영광이 아닌 바로 번제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희생제물로 죽임을 당하고 몸은 조각조각 각이 떠지고 불에 태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은 결국 영광이 아닌 죽는 순간까지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말씀과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은 애초부터 영광을 받는 삶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더 썩어지고 더 희생하고 그리하여 결국은 번제의 제물이 되는 순간까지 봉사하는 것, 이것이 성경을 품고 사는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을 사실 수 있겠습니까?

 

 

 

열심으로 주의 일을 한 후에 어떤 형태로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또 대접받기를 원하는 우리의 체질이 180도로 변하지 않고서는 이 복음의 깊은 진리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희생을 모두 드린 후에 어느정도 영광 자리를 원하는 우리의 생리가 변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말씀에 의한 최후의 승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1840년 9월 4일 영국 웨일즈 리야드란 곳 어느 목사님의 가정에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런던대학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는 1863년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습니다. 중국의 선교에 관심이 있었던 젊은 목사는 24세 청년으로 신혼의 신부를 데리고 중국 선교사로 갔다가 본격적인 선교사업도 하기 전에 기후와 식사 생활 형편이 맞지 않아 부인이 그만 죽고 맙니다. 큰 슬픔과 괴로움이 있었지만 기도로 극복하고 있다가 마침 조선 땅 황해도 장연에서 건너온 천주교인 김자평 최선일이란 사람들을 만나 조선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후원을 받아 많은 한문 성경을 공급받고는 조선 땅 백령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 도서지방에 성경을 나눠줍니다. 1865년 9월의 일입니다.

 

다시 중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1866년 미국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조선으로 오게 되었는데 강화를 돌아 한강으로 올라가야 할 배가 그만 뱃길을 잘못 알아 북상하며 대동강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배가 정박한 곳은 평양의 만경대 일대로 물이 빠지자 그 배는 그만 대동간 모래사장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평양감사 박규수가 군대를 이끌고 나와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고 선원을 다 잡아 죽이게 되는데 이 젊은 목사도 체포되어 백사장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끌려 나오는 순간에도 사람들과 군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었다고 전해졌고 결국 그 곳에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의 나이 27세 1866년 9월 2일 저녁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젊은 목사의 이름은 토마스. 선교사 (Robert J Tomas 1840-1866)한국에 온 선교사로 첫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때 그에게서 성경을 받았던 사람 중 홍신길이란 사람은 후에 강서 교회를 세우게 되고, 최치량이란 사람은 평양교회를 개척하고,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발랐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후에 신실한 신자가 되어 그 집이 널다리교회가 되었고, 토마스의 목을 자른 장본인인 박춘권이란 사람은 평양교회 장로가 됩니다.

 

 

 

 

 

 

 

신앙생활은 아픔입니다.

 

신앙생활은 희생입니다.

 

내가 복음을 붙들고 죽어야 그 복음은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볼 때, 우리에게는 과연 말씀이 있는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와 교계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명예를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부끄럽습니다.

 

 

 

장로와 권사와 안수집사 같은 교회의 직분은 본시, 개인의 희생과 사람들의 존경 속에 되어지는 자리인 것을, 오늘날에는 열심히 교회 봉사 한 후 얻게 되는 영광의 보상으로 착각하기에 우리는 말씀 앞에서 가슴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의 종국은 멸시와 찢김이었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의 인생의 끝은 바로 순교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높은뜻 숭의교회를 왜 오셨습니까? 정담은 ‘건강한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 잘 해보려고’ 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건강한 교회를 찾다가 이 남산의 높은뜻 숭의교회까지 오게 된 것이고 이 곳에서 신앙생활 한 번 잘 해 보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훌륭히 하는 것입니까?

 

 

 

간혹 주차 문제를 비롯해 여러 봉사의 모습들 중에 좋지 않은 소리들이 오가고, 또 예배나 환경 등이 내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쉽게 불평들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너무너무 아픕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실천해야 할 우리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픔을 참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이 일을 내가 하지 않을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평생을 말씀을 갖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다가 종국에는 영광이 아닌 오히려 번제물이 되기 위해 아름다운 준비를 하는 우리가 될 때만이 하나님의 높은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받는 고통과 아픔을 오히려 기뻐하고, 말씀을 따르고 지킨 후에도 대접받거나 영광 받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죽이는, 그런 신앙의 자세를 갖는 높은뜻 숭의교회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말씀을 대충 따르려 했습니다.

 

말씀을 지킨 후에는 더 큰 영광을 받으려 했습니다.

 

말씀을 품고 살면 모든 것이 다 풍요로와진다고 믿어 왔습니다.

 

주님, 오늘

 

말씀을 향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품고 사는 우리의 자세가 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 벧세메스로 가는 젖 나는 암소와도 같이

 

평생을 아픈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희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감추고 나를 가리는 삶을 기꺼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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