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함으로 세상을 고치라
마태복음10:1-15,레위기19:2
설교방송 (설교본문)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교리 중에 하나는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값없이 얻는 것이라는 교리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 교리인지 모릅니다. 만일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되지 아니하고 우리의 공적과 자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율법을 잘 행해야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식과 뜻이라면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수 없고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아이가 물에 빠져서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아이에게 계명과 율법을 내 놓으며 이것을 잘 지키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살려 줄 수 없다고 말하는 부모는 세상에 없습니다.
살려 놓은 다음에 계명과 율법을 주면서 이것을 잘 지키면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이다라고 가르칠 수는 있지만 계명과 율법을 먼저 제시하면서 구원을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셨고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율법과 계명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들에게 율법과 계명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율법과 계명을 율법적으로 철저히 지키려고 하였던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에 있어서 두 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과 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극단과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니 율법과 계명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믿는 극단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 교회는 후자의 극단에 빠진 것처럼 보여집니다. 심지어는 율법과 계명을 요구하는 것은 복음에서 벗어난 것처럼 생각하고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순수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자꾸 율법과 계명과 같은 윤리를 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복음을 우리는 값싼 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율법과 복음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냐 복음이냐?'는 식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개념입니다. 율법과 복음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순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과 복음이냐' 아니면 '복음과 율법이냐 '가 중요합니다. 율법은 복음의 뒤에서야 합니다. 율법이 복음의 앞에서면 복음은 죽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이 범한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율법 앞에 서면 율법은 죽지 않습니다. 율법은 오히려 더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이 아니라 값없이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함과 은혜로 말미암은 율법이 되기 때문에 더욱 더 순수한 율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율법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실입니다. 以信得義의 교리는 사도바울의 로마서에서 세워진 교리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잘 살펴보면 로마서가 단순히 以信得義의 교리만을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총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에서 11장 까지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믿음에 있다는 以信得義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2장부터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율법과 행위에 대한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 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12장의 첫 말씀은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의 의미는 '너희가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얻었으니'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죄 사함을 얻었으니'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된 로마서 12장부터 마지막 장 까지는 믿음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행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좇아 열심히 행하며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율법이 믿음을 앞서면 복음이 죽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이 복음 뒤에 서지 않아도 역시 믿음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3장 28절의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씀과 야고보서 2장 26절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28절의 말씀은 율법을 부정적인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은 반대로 율법을 긍정적인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말씀처럼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3장이 말씀하는 율법은 믿음보다 앞서려고 하는 율법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율법주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이 말씀하는 율법은 믿음 뒤에 서야하는 율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사람이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행하는 율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복음을 앞서 율법주의가 되면 믿음이 죽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율법을 부정하여 믿음 뒤에 구원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행하는 율법까지 부정하게 되어도 역시 믿음이 죽습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과 복음이 값싼 싸구려 믿음과 복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당시 교회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잘못된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면죄부였습니다. 면죄부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대표적인 율법주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以信得義 교리를 들고 나와 그와 같은 로마 교회의 오류에 정면으로 항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 역시 지나쳐서 믿음 뒤에 서야하는 율법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오해하여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을 보고 놀란 셈이 되었습니다. 야고보서의 율법과 행함은 율법주의 행함과 율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한 그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주의를 극복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에는 접근하였으나 그 구원과 믿음 후에 마땅히 따라야 할 율법과 행위를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우리 한국 교회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값싼 복음을 가르쳐 왔습니다. 때문에 이 땅에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전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윤리적인 면에서 있어서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세상을 고치고 치료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는 무능력한 교인과 교회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구원의 능력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의 능력이 될 수는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세상을 치유하고 축복하는 실제적인 힘과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와 같은 능력을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깨끗하게 살 수 있는 능력, 정직하게 살 수 있는 능력,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구원 얻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기도하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이 믿음의 앞에서도 구원에 문제가 생기지만 율법이 믿음의 뒤에도 서지 않고 그냥 무시되고 없어져도 구원에 문제가 생깁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율법이 없이 제 멋대로 사는 것 역시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값없이 얻는 것이라고 말씀 하시면서도 동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모든 불의와 죄에서 깨끗함을 얻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깨끗케 해 놓으셨음으로 우리는 깨끗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물론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깨끗하게 살려고 발버둥질 쳐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전 율법을 붙잡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기 의에 사로 잡혀 점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예수 믿기 어려운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믿음 없이 윤리적인 사람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전에 먼저 율법을 붙잡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믿음이 생긴 후에는 자신 있게 율법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믿음이 생긴 후에도 율법을 붙잡지 아니하면 그 또한 위험한 일이 됩니다. 그 때 율법을 붙잡지 아니하면 믿음이 죽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열심히 율법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열심히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구원에는 삼 단계가 있다는 말씀들을 합니다. 첫째 단계는 義化(justification)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둘째 단계는 聖化(sanctification)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믿음 후의 따라오는 율법과 그 율법을 행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셋째 단계는 榮化(glorification)의 단계입니다.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져 하늘 나라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단계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아직도 義化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聖化의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 교회의 성장이 멈춘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영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행함에 있지 아니하고 믿음에 있다는 말씀은 정말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그와 같은 복음 즉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어 질 때 교회는 부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 단계를 넘어선 후에는 반드시 다시 율법과 행위에 대한 말씀을 전파해야만 합니다. 율법과 행위를 강조하면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멈추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것을 뛰어 넘으면 교회는 다시 건강해 지고 부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정체와 부담을 뛰어넘지 못하고 밤낮 義化의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교회는 점점 체력이 약해지게 되고 성장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가 처해져 있는 상황이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첫 번째 단계의 구원으로 성장한 교회입니다. '예수 믿으면 죄 사함을 받는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씀으로 성장한 교회입니다. 이제 우리 한국 교회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행함과 율법의 단계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믿음 이전의 은혜 없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복음에 뿌리를 둔 은혜 충만한 율법으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 한국 교회에는 두 번째 단계의 구원으로 성장하는 교회의 모델이 생겨나야만 합니다. 저는 그 모델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곳에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아무런 부담 없이 편안히 예수를 믿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높으신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가 깨끗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도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값없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십자가의 은혜의 보답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마음으로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깨끗하게 살기 위하여 발버둥질을 쳐야만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주의를 깨기 위하여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을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이 정작 자신은 얼마나 율법적으로 살려고 애를 썼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법 즉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 법대로 살려고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몸이 그 마음을 따라 주지 못할 때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안타까워했습니다. 발버둥질 쳤습니다. 괴로워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끗함과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깨끗함과 거룩함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없는 능력을 요구하심을 통하여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능력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깨끗함과 거룩함이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은 물론 이거니와 세상을 치유하고 축복하는 능력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병들과 귀신들린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우리들이 받아야 할 능력은 바로 거룩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심을 받은 그런 존재들입니다.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세상에서 건짐을 받았는데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세상 식으로 세상 사람과 함께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역행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구원 얻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비교할 수 없는 세상을 얻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과 같이 욕심부리며 죄를 지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우리의 구원을 바라보며,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깨끗하게 사십시다. 정직하게 사십시다. 반듯하게 사십시다. 거룩하게 사십시다. 그리고 그 거룩의 능력으로 병들고 귀신들린 세상을 치유하며 축복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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