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
레위기 19:9-10
설교방송 (성경본문)
뉴스앤 죠이라는 인터넷 신문에 개척교회 목사 둘이 자살을 하였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수년이 지나도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가족 의 생활은 고사하고 매월 집세와 전기세도 내지 못하고 밀리는 상황이 계속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 자살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너무 안 됐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가족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가족들을 수소문하여 생활비 얼마라도 보내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이었고 둘째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목사가 자살을 해. 세상에 그와 같은 어렵고 막막한 상황에 부딪히며 사는 사람이 어디 하나 둘인가? 오늘도 저녁에 자리에 누우며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목사가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자살을 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의 자살은 그 어떤 이유로도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분명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지울 수 없는 생각은 내가 마치 그 젊은 목사를 자살로 내 몬 공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도 두 달 전 교회를 새로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개척은 시작부터 개척이 아니었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수 억 원의 재정을 개척자금으로 지원해 주었고 시작하는 첫 날부터 백 명 가까운 교인들이 출석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벌써 수 백 명이 출석하는 큰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사무실도 크게 장만하고 교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 비품들도 어렵지 않게 그것도 제법 좋은 것들로 장만을 해가고 있는 터에 그와 같은 기사를 읽게 된 것은 참으로 충격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개척교회를 하면서 좌절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 후배 목사들 생각을 하며, 저들이 흔히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시설과 재정이 곧 교회의 영성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묘한 죄의식까지 느끼고 있던 터였는데 자살을 한 개척교회 목사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충격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이 비슷한 충격을 십 여 년 전에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제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는데 아이들을 위하여 그때 50만원을 주고 컴퓨터 한 대를 사 주었었습니다. 어려서 늘 가난하게 자라 손목 시계 하나를 차지 못하고 살았던 것을 생각하니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사 줄 수 있게 된 것이 그렇게 기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뉴스에 천호동에 사는 일가족 4명이 집세 50만원을 올려 줄 수 없는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사건이 나왔습니다. 저는 그 50만원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누구 집에는 그냥 아이들 컴퓨터 한 대 값에 불과한 50만원 때문에 일가족 4명이 자살을 하였다는 것이 그냥 넘어가 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며칠을 그 생각을 하면서 고민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떠 오른 성경 구절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추수에 관한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할 때 자기 밭이라고 네 귀퉁이까지 다 추수하여서는 안 된다는 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네 귀퉁이 남겨 놓고 추수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추수하다가 단을 떨어트리거든 줍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사람이 주어 갈 수 있도록 버려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배려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아무리 가난하여도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할만큼 절박한 상황은 생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하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자살을 한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있는 자들이 그와 같은 배려를 하지 않았다면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자신을 변명할 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하루 종일 앉아서 꿀 병을 담았던 자그마한 나무 상자를 다듬어 저금통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에 '이삭줍기'라고 썼습니다. 아이들이 궁금하여 그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컴퓨터 이야기와 천호동에 일가족 4명이 바로 그 50만원 때문에 자살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의 말씀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귀퉁이를 여기에 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쓸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큰 아이가 제일 먼저 통에 돈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줍기 통 앞에 붙여 놓은 메모지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김부열 120원 방바닥에서 주운 돈' 이렇게 해서 저희 집의 이삭줍기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삭줍기 운동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영락교회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설교 중에 하였더니 고등부 아이들이 그 이삭줍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운동이 영락교회 고등부에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매달 첫 주일 이삭줍기 헌금을 하였습니다. 겉 봉투에 나름대로의 사연들을 적곤 하였는데 저는 지금도 그 때 그 사연들을 잊지 못합니다.
팥 빙수 먹고 싶었는데 .... 500원
칼국수 대신 사발면 800원 - 300원 = 500원
91년 동안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그 이삭줍기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이삭줍기의 기준을 한 달 수입의 하루 분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제2의 십일조라고 불리우던 것이 있었습니다. 삼 년에 한 번 더 십일조를 하여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삼 년에 십분의 일은 1/30조에 해당하고 그것은 한 달 수입에 하루 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분들이 다 기준으로 헌금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꽤 많은 분들이 그와 같은 기준으로 이삭줍기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매해 1억 5천만원 정도의 이삭줍기 헌금이 모였고 그 돈으로 교회는 구제사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동안교회 이삭줍기 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헌금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시는 할머니 한 분이 이삭줍기 헌금으로 11,000원을 헌금하셨습니다. 그리고 헌금봉투에 '공장 하루 품삯' 이라고 쓰셨습니다. 한 달에 하루 수입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교를 들으시고 할머니는 자기 하루 품삯 전부를 이삭줍기 헌금으로 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날의 감동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 할머니는 그 다음 달 이삭줍기 헌금으로 13,000원을 내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할머니의 일당을 2,000원 올려 주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헌금봉투에는 잔업을 하여 일당 2,000원을 더 받았다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하루 일당 11,000원 받는 할머니는 아마 극빈자 중에 극빈자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할머니는 한 달에 하루를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하여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저는 자살한 개척교회 목사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몹시 불편하고 괴로웠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소위 지금까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였고 개척교회를 시작한 지금도 여전히 재정적으로 넉넉한 목사입니다. 소문 없이 시작한 예배였는데 첫날부터 100명 가까운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두 달이 지난 지금 500명 가까운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시작하는 처음부터 동안교회의 지원과 숭의학원의 지원 그리고 여러 교인들의 진심 어린 후원으로 모든 것이 호화롭다 하리만큼 풍족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체육관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체육관에 카펫을 깔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년 2월이 되면 냉난방이 완벽한 2,000석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최고 수준의 음향시설을 갖춘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사무실과 강의실도 정말 아름답게 꾸며졌습니다. 아마 우리 교회보다 더 아름다운 사무실과 강의실을 갖춘 교회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예산으로만 된 것은 아닙니다. 교인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컴퓨터도 사 주시고 책상과 의자도 사주시고 응접세트도 기증해 주셔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무실과 강의실이 지나치리만큼 아름답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자살한 개척교회 목사의 기사를 읽었을 때 괴로웠습니다. 죄를 지은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거의 언제나 10 여 년 전 아이들 컴퓨터를 사주었을 때 같은 액수의 돈 때문에 자살을 한 천호동 일가족 4명에 대하여 느꼈던 갈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민과 갈등은 조금이라도 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갈등과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이와 같은 고민과 갈등에서부터 자유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율법이 이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날 앉아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물질에 대한 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물질은 크게 세 가지이었습니다. 십일조와 제2의 십일조 그리고 추수할 때 네 귀퉁이를 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작지도 쉽지도 않은 액수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십일조를 네 귀퉁이를 뗀 후의 소득으로 할 것이냐 네 귀퉁이를 떼기 전의 소득으로 할 것이냐에 따라 퍼센테이지가 달라졌습니다. 제 계산이 정확하지 모르겠으나 제 계산에 의하면 그것은 최소한 31.7%에서 34.9%였습니다.
저는 목회를 할 때나 개인적인 살림을 할 때 이 숫자를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수준의 몫을 떼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몫을 떼고는 도저히 자기 살림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몫에 대하여 율법적인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몫을 떼고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몫에 대하여 부담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가난에 대한 절망으로 인하여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용서하며 자유 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안교회에서 목회 할 때 43% 정도를 밖으로 내었었습니다. 교회 건축을 하여 교회재정이 어려웠을 때에도 앞에서 이야기 한 31.7%에서 34.9%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지나치다하리만큼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건축 중에도 개척교회를 건축하고 북한 선교를 위하여 억 단위의 헌금을 하고 신학대학교 건축에도 인색하지 않고 우리 몫을 지나치리만큼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동안교회는 일년에 수 십 억 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교회요 교회 건축을 위하여 100 억 원의 예산을 쓴 교회였지만 저는 나름대로 큰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무조건 동안교회가 큰 예배당을 건축하고 수 십 억 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대형교회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난하지 않은 목사입니다. 얼마 전 선교 단체들 간사들 수련회에서 저들과 대화를 하다가 제 연수입에 대하여 궁금해하기에 조금 망설이다가 정직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들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도 제 수입에 대하여 언제나 큰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기를 쓰고 34.9%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최소한 제가 목회하는 교회만큼의 몫은 나도 밖으로 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림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최고의 몫을 떼었을 때 보다 제가 개인적으로 떼는 몫이 많았습니다. 아마 제가 제 몫으로 떼는 액수를 그 간사들에게 이야기하였다면 저들은 제 수입에 대하여 놀란 만큼 놀라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몫을 떼고도 동안교회는 부자였습니다. 넉넉하였습니다. 큰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저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안교회는 그 큰 예배당에 대하여 자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산을 지키려고 노력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넉넉하고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양심과 자유를 위하여 그와 같은 구체적인 법을 세우셨다고 생각합니다. 좀 부담스럽기는 해도 그와 같은 구체적인 법이 없다면 모든 부자가 자기도 가난해지리만큼 되지 않는 한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좀 지나친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최소한 34.%의 몫을 밖으로 뗄 수 있는 부자는 나머지 65.1%의 개인적인 삶에 대하여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예배당이 필요하면 지어도 되고 좋은 자동차가 필요하면 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에까지 비난하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숭의 교회에서 그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척 초기이기 때문에 제법 많은 예산이 들어가지만 31.7%와 34.9%의 몫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목회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추수감사 헌금을 숭의학원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헌금함으로 거의 그 계산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번 달 성탄헌금 전액을 구제하는 일을 위하여 사용하면 아마 제법 잘 그 기준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올해 처음부터 그 기준을 맞출 수 있다면 이제 모든 것이 거의 준비 된 상황에서 앞으로는 상당히 많은 몫을 밖으로 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미리 밝혀 두지만 무조건 밖으로 떼는 몫만을 생각하여 우리 높은 뜻 숭의 교회를 깡통 교회로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으로 세우신 몫을 감당한 후에는 어느 정도 우리 교회에도 투자할 것입니다. 교인들에게도 서비스 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개척교회를 비관하여 자살을 하였다는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또 다시 이삭줍기 운동을 생각했습니다. 이번 주 설교는 레위기 19장의 말씀을 가지고 이삭줍기에 대한 말씀을 전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네 귀퉁이를 남기고 추수하라 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삭줍기 운동으로 실천하시어 가난한 자들에게 최소한의 희망을 남겨주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고 넉넉한 삶에 대하여 자유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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