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이기신 예수/ 고전 15:1-26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 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 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 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나누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제법 잘 팔리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 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老)교수, 이제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그 글 가운데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는, 의표를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어 그렇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가 있을 때 예수 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엄청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이 되면 자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이 듭니다. 1998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 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만 명으로 최종통계가 나왔습니다. 한 해에 25만 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사랑의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서초구의 전체 인구가 40만 명하고 몇 백 명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25만 명은 서초구에 사는 사람들의 60%에 해당합니다. 1년에 서초구 인구의 60%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랑의교회만 해도 하루에 한 명 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1년에 365명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랑의교회 교인 전체로 따지자면, 거의 100명에서 120명중에 하나가 날마다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만큼 죽음은 우리가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진지하게 직시해야 될 실체입니다.
우리가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낍니까? 왜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무덤을 갖고 있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소식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고상하게 대답을 하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는데 다 이해한 체 한다면 본심을 숨긴 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사람의 책을 여러 권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굉장히 감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정말로 옥 목사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왜 부활의 주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마음이 끌렸는지에 대하여 그는 퍽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인간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바람이 자기 마음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바람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 귀가 번쩍 뜨이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해 안에 자기 친구 셋을 잃은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나이에 비해서 일찍 은퇴를 한 사람 인데, 어느 날 저녁에 아내와 더불어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와서 차를 타려다가 '윽' 하고 쓰러지더니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 친구는 40대 부인인데, 믿음이 아주 좋은 부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모이는 선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길을 드라이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유조차가 앞에 있는 차를 못 봤던지 들이받아 차에 화재가 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습니다. 또 한 친구는 건장한 친구인데, 미시건 호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 해에 졸지에 사랑하는 친구를 이렇게 셋씩이나 잃어버리는 기막힌 슬픔을 가슴에 안게 되자, 그의 마음 속에서 죽음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저항하고 싶은 욕구, 죽음이 마지막 이라고 하는 말에 저항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고 비판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죽은 친구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기대감이 마음에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 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하며 귀여 워하던 어린 딸이 죽었습니다. 그 딸의 시체를 앞에 놓고 울부짖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 아니겠 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 부모의 입장이라면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을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복음 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액시던트(accident) 가 아닙니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나 돌발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입니다. 수 백년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아, 장차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을 여기 저기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한 예로 시편16편 10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은 자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빗대어서 장차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요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자기가 부활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가기 싫어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바다에 빠지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고래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큰 고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3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당하다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40) ' 인자도 무덤에서 사흘 동안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요나가 사흘 후에 살아나온 것처럼 인자도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있는 요나의 사건마저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앉혀 놓고 자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
그러나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구원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습 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5절 이후에 보면 바울이 대충 언급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500여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버티던 예수님 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 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 목격자들입 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짜 목격자들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여인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여인들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전서를 쓰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해도 여자가 한 말은 일단 접어두고 참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서 바울도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자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보았다고 말해도 함부로 의심할 수가 없거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거짓말 이라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부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 자신의 간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본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묻는다면 바울 자신이라고 간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려고 이를 갈면서 다메섹을 향해 가던 사람입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에 거꾸러졌 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여, 누구시니 이까?' 아무도 없는데 누구냐고 물었 겠습니까? 아니죠. 분명히 바울만이 본 예수님의 실체가 있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 다음부터 바울은 숨만 쉬고 있었지 제 정신이 아니었 습니다.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사도 바울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간증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초반부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복음이 지금도 땅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을 비롯 하여 중국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상에 있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생명을 걸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진실입니다.살아계신 그 분이 오늘도 계시기에 그 이름 만 불러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이름만 불러도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그 이름만 불러도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구원 받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확실하게 믿을 때 우리가 어떤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혜택에 대해 논하라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믿도록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상당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만 해도 여러 명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라든지, 야이로의 딸이라든지, 나사로라든지, 이렇게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또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비록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부활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2절에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것이 헬라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부터 17절까지 비슷한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논증합니다. 이 구절 안에는 유명한 오중주의 '욱'(uk)이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어 (not, nothing)로 쓰이는 단어가 '욱'입니다. '아니요', '없으면'하는 뜻입니다.
13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이것이 '욱'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리라.' 비슷한 형식을 17절까지 5번 정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이것입니다. '왜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죽은 자라도 살 수 있다.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자가 다시 살 수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절대 살리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아라.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까? 우리 모두는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이 진리를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격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맹숭맹숭하다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에 매료되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한 사람인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이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빅 뉴스 가운데 제 1면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자로 나올 수 있는 뉴스가 있다면 '죽은 자는 살 수 있다.' 하는 뉴스 아닙니까? 바로 예수의 부활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의 내용 중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 믿음도 헛되고'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의 죄는 하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했다면 우리 보다 먼저 세상 떠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지고 떠났더라도 다 소망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에 가서 있을지 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19절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바울은 정말 인간적인 말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두들겨 맞으면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한,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 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하필이면 여기 와서 앉아있습니까? 벌써 더위 때문에 힘이 드는데 왜 여기 와 앉아 있습니까? 모두 다 오염이 되어서 갈 때도 마땅치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저기 꽃이 피어 있는 계절인데 야외에 나가서 도시락 풀어놓고 먹어 가면서 연인과 함께 꽃향기도 맡고 아름다운 인생의 꿈도 서로 나누면 좋을 텐데,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기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정성껏 헌금까지 준비해 가지고 들고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정말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을 듣겠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괜히 재미있는 일도 못하고 한 생을 보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도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 불쌍한 자가 아니고 영광스러운 자요, 가장 복 받은 사람이요,
정말로 멋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신약성경 27권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언급한 성경이 17권이나 되고, 나머지 10권은 간접적으로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빼고서는 신약의 말씀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해 준다.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20절부터 24절까지 보면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어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 즉 먼저 간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추수기가 다가오면 들녘에 나가 먼저 익은 곡식들을 조금 베어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흔들면서 요제를 드립니다. 요제란 흔들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단을 들고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번 농사에도 축복하시어 이른 비도 주시고 늦은 비도 주셔서 이렇게 추수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제 앞으로 추수할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옵소서.' 손에 들고 있는 처음 익은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들판에 있는 모든 곡식이 다 익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들녘에 있는 모든 곡식을 대표해서 첫 열매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첫 열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음에 예수 믿고 따라올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그 다음에 다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완전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우리 영은 하나님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소에 머무는 것입니다. 완전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영혼이 어느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묻힌 썩은 저 육신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입었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영과 결 합하는 영화로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에는 영화라고 합니다. 또 몸의 구속이라고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완전 구원을 주십니다.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도 구원받습니다. 영과 육이 결합해서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닮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이 완전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기 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믿으면 죽음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않습니다. 죽음이 불쾌한 것이긴 하지만 저주스러운 것으로보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마침표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죽음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배짱이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놓고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죽음 자체를 인정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지금 여든 세 살 정도 되십니다. 그분이 쓴 글을 최근에 보았더니 참 인상 깊은 말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 주소를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 자체를 흔히 말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실낙원을 쓴 영국의 문호 밀턴이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을 놓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 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것과 같구나.' 우리가 죽습니까? 그러면 문 딱 닫아 놓고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몸은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입성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일지 모릅니다. 얼마나 비통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허무합니까? 사랑의교회에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 남편이 30대에 암이 걸려서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다. 라고 그랬더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끝까지 안 갔습니다. 가지 못하는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다는 것,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대단히 어렵습니다.며칠 전에 우리 한국 교회의 큰 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우리목회자의 사표가 되는 어른이었 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빈소 앞에 가서 한참 동안 앞에 있는 큰 사진을 쳐다보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사진은 아마 그분이 한 80세 정도 되었을 때 찍은 것 같았습니다. 깊게 파인 주름살이 잔뜩 덮여 있는 얼굴, 이목구비의 모든 균형이 다 어그러진 얼굴, 생명의 빛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얼굴, 이것을 쳐다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마당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참 정말 허무하네, 허무해.' 그 목사님의 친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눈물은 안 나오겠지만 당장 이런 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정말 허무하네. 빌어먹을 세상, 가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다가 죽어야지. 마지막이 저 모양인데 잘 살겠다, 의롭게 살겠다, 이런 소리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 목사님의 그 사진을 보면서 제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지금은 저렇게 추한 모습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엄청난 미남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시겠지.'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먼저 떠난 내 아버지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먼저 떠난 우리 어머니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눈물을 쥐어짜면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지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통해 완성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합시다.
또 우리 자신이 부활할 그 날을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에 관한 가능성을 길게 변증한 사도 바울은 끝으로 우리를 향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57절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날마다 감사해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주님께 더욱 헌신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샘솟듯이 회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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