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것이니라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
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니라.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하나의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민족이 참 고집이 강했습니다. 무지하고 한눈팔고 생각도 깊이가 없어서 경박했습니다. 그런 그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속이 상하십니다. 그래서 달래기도 하고 설득하기도 하고 때로는 윽박지르기도 하고 벌도 주었지만 그때만 순종할 뿐 얼마 지나면 또 한눈을 팔고 타락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침내 그 백성들을 바벨론에게 압제받게 하십니다. 그 압제 속에서 이 백성들이 고난을 받고 압제당하고 눈물 흘리며 신음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소망을 잃고 탄식합니다.
그때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확신 있고 소망 넘치는 말씀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 의 해답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나의 근원, 나의 뿌리, 나의 출처, 나의 근본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창조했다” 그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뿌리를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를 아는 일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다가 부모들은 흔히 “너는 주워 왔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그 말을 재미로 하지만 아이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떤 아이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더니 밤도 먹지 않고 가족들과 말도 안하고 학교도 가지 않고 앓아누웠습니다. 선생님이 문병을 왔습니다. 선생님이 묻자 “나는 이집 애가 아니래요, 어른들이 그러는데 다리 밑에서 주워 왔대요”하고 말합니다. 그때서야 잘못된 것을 알고 선생님이 부모와 닮은 점을 발견하다가 등에 있는 점이 닮았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약하면 정신적인 혼돈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해외 입양자들을 보면 성장하면 반드시 자신의 뿌리에 관심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나섭니다. 찾아보니 “나는 뼈대 있는 김씨집안의 자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그로 하여금 자신감을 주게 되고 힘을 주게 됩니다. 그것이 뿌리의 역할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나는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여 은혜를 입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값입니다. 이 값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이 값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값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출처를 모르고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방황하고 값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무지는 불행입니다. 모르니까 자꾸만 자신을 비하하고 버리고 업신여기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가 죄입니다.
두 번째는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이 어디서 옵니까. 무지에서 옵니다. 무지는 불안, 두려움, 불확실함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미지의 세계를 가려면 먼저 마음이 불안하지 않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지금 포로로 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래가 불안합니다. 그리고 의문이 생깁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불안감에 싸여 살게 됩니다. 그때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이 믿음이고 해답이고 권위입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아버지라는 말이 참 어색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그 자체로만으로도 힘이고 배경이고 든든하게 여겨지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그냥 아버지가 아니고 아주 든든하고 힘이 있고 능력 있는 아버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용기가 되고 든든하겠습니까. 초등학교 때 우리 반에 경찰서 지서장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참 매사에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학년이 높은 아이들에게도 무서움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빽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얼마나 강력한 힘있는 빽입니까.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오늘 조금 어렵다고 탄식하고 눈물 흘리고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탄식하고 미래가 암담하다고 불안해하고 안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값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값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선택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도구로 삼고자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똑똑해서가 아니고 순전해서도 아니고 예뻐서도 귀여워서도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참 고집이 세고 불순하고 반항하고 변덕스럽고 죄를 떡먹듯이 짓고 우상을 그렇게 좋아하는 백성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고집스럽고 배은망덕한지 모릅니다. 아마 하나님이 바벨론사람이나 애굽사람들을 선택하셨어도 그들보다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바로잡느라고 하나님이 얼마나 속을 썩이십니까.
그들은 설득하면 그때만 조금 듣는 척하고 얼마 있으면 또 옛날로 돌아가 버립니다. 호세아서를 보십시오. 사사기를 보십시요. 참 한심한 백성들입니다. 하도 한심하니까 이사야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내 말을 들으라”고 한탄하면서 예언했습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백성을 향해서 한탄하는 호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무지한 그들을 선택하셨고 지명하여 부르심을 알려주고 깨우쳐주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수고하셨습니다. 성경 내용이 다 그 깨우침의 내용이고 설득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것이 이스라엘백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오늘 나의 모습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날의 여러분들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들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고집스럽고 불순종하며 죄를 짓고 세상을 좋아했습니까. 그런 나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훈련하셔서 오늘 우리들이 조금 나아진 것입니다. 알고 보면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 알아야 합니다.
네 번째는 “너는 내 것이라” 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또 나의 값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들어와 살면서도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는 이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본문을 보면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너는 내 것이다” 이 말씀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고 권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자신만만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내 자식이 세상에서 왕따당하고 따돌림 당하고 얻어맞고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밖에 나가서 놀다 얻어맞고 들어옵니다. 그때 부모의 속이 몹시 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너도 때리지 맞기만 했느냐” 고 고함을 칠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가 대답합니다. “그 애는 힘이 세서 때릴 수가 없어요.” 아이도 고민입니다. 그 말에 부모의 마음이 풀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그러면 물어뜯기라도 해.” 얻어맞았다고 물어뜯어서야 되겠습니까. 속이 상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서 기죽어 살고 있습니다. 눌리고 자포자기하고 매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살아갑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의 마음이 답답하고 비통합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너는 누구냐, 내가 너를 만들고 내가 너를 구속한 너희가 아니냐, 그런데 왜 고개 숙이고 사느냐, 너는 내가 세운 만인 앞에서 보여주려고 선택한 백성인데 왜 그들 앞에서 이기기는커녕 기죽어 사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때로 격려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내가 창조한 너희가 아니냐, 왜 당당하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기죽고 한탄하고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만만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시험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고 기다려야 합니다. 시험이 오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또 마귀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찾아오는 마귀를 괴롭혀야 합니다. 특히 마귀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언어, 불순한 생각, 불편하게 하는 마음, 불화한 관계, 죽고 싶다, 안된다, 죽여 달라, 세상 망해버려라 하는 어두운 말과 생각들입니다. 이 생각이나 말들은 마귀가 아주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생각이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나도 모르게 마귀에게 끌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둡고 원망이 가득하고 침침한 분위기, 그 분위기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분위기입니다. 집안도 어두컴컴하면 마귀가 좋아합니다. 그래서 무당집에 가 보면 어두컴컴하고 거기다 촛불을 켜놓고 향을 피워놓습니다. 그 분위기가 마귀나 귀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끝내주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집안도 밝고 환하고 신선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집안의 분위기는 그 집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상태와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도 밝고 따뜻하고 신선하세 가꾸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삶이 마귀를 괴롭히는 생활입니다.
마귀를 괴롭히려면 마음에 소망이 가득하고 감사가 가득하고 자신 있게 살아야 합니다. 소망적인 말, 밝은 생각, 오순도순, 용기, 감사, 조화, 화목, 즐거움, 협동, 찬양, 뜨거운 기도, 이런 것이 있는 곳에 마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 불평이나 불만이나 불화가 있으면 마귀는 안방처럼 찾아와 안주합니다. 마귀나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분위기가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자꾸만 우리로 하여금 불평하게 만듭니다. 직장에서도 자꾸만 불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직장에 따돌림 받고 결국 직장을 옮기게 하여 마침내 실직자를 만들어버립니다. 또 마귀는 학교생활에도 자꾸 개입합니다. 그래서 청소년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학교를 그만둘까를 생각하게 하고 집을 나갈까를 생각하게 하고 어떻게 하면 부모 간섭 없이 살까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탈선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생활에도 자꾸 개입합니다. 아주 교묘하게 부부사이에 끼어들어 서로 불화하게 하고 오해가 쌓이게 하고 불만이 쌓이게 해서 현실에 불만족하게 만들어 가정생활이 따분하게 하고 자꾸 집을 나가게 하고 허황된 마음을 불어넣어 안정된 마음에 불을 지릅니다. 뿐만 아니고 감사를 모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음에 이해관계에 집착하게 하고 따지게 하고 고발하게 하고 싸우게 하고 고마움이나 감사를 모르게 해서 마침내 배은망덕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배은망덕의 시대입니다. 오늘 신문을 보십시오. 배은망덕한 행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차안에 두 사람이 졸도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려니까 안에서 잠가서 열리지 않습니다. 급히 경찰에 신고해서 구조대가 와서 유리창을 깨고 겨우 구해내 병원으로 후송해서 살아났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다음날 회복된 이 두 사람이 청구서를 가지고 경찰서로 찾아왔습니다.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고 청구서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세상이 왜 이렇게 각박하냐고 말하지만 이 사탄이 오늘 사람들 마음속에서 이 감사하는 마음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자신이 사탄으로부터 조종 받고 있음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특히 오늘은 살아가다 보면 삶이 참 아프고 고달프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살다보면 아픔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고 고난이 있고 실패가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살다 아프고 어려우면 싫어하는데 그것도 모르는 일입니다. 암이 무서운 것은 아픔이 없기 때문입니다. 암이 이가 아프듯 아프면 100%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암이 무서운 것은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수술하기 위해서 마취했는데 마취에서 깨어날 때는 참 아픕니다. 그 아픔, 그것이 복입니다. 아프다는 것은 지금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왜 아픈가 하면 치료되느라고 아픈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복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안하고 놀고 쉽게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왜 매일같이 기적을 베풀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게 하십니까. 여러분, 독수리는 집을 바위 낭떠러지 위에 짓습니다. 새끼가 부화하면 그 낭떠러지 위에서 날려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새끼들은 어미를 인정사정도 없는 부모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미 새가 그런 무자비한 훈련이 없다면 독수리 새끼는 평생 날지를 못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둥지에 가만히 놓아두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갔습니다. 하루는 원주민들과 강을 건너는데 원주민들이 한결같이 가슴에 큰 돌을 안고 건너갔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그냥 가려고 하니까 원주민이 큰 돌을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강 중간쯤 가니까 물살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가슴에 안은 돌 무게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무사히 건너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짐을 지우십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니까 불평하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결국 그 돌이나 짐이나 무거운 새의 날개 때문에 자신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런 삶의 이치와 나의 값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나의 뿌리, 근원을 알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나의 뿌리나 근원을 알게 되면 우선 자신의 값을 알게 됩니다. 나의 값을 알게 되면 소망이 주어지고 힘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집니다.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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