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성도
고린도전서 10장 23-33절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
어느 날, 원숭이 한 마리가 강가를 지나다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원숭이의 눈에는 물고기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걱정하다가 원숭이는 물고기를 살려내겠다는 정의감으로 물 속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건져 모래사장으로 집어던졌습니다. 그리고 강 밖으로 나와 보니까 물고기들이 다 죽어 있었습니다.
원숭이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조금 일찍 와서 물고기들을 구조했으면 좋았을 것을 늦게 와서 이렇게 죽었구나!” 그래서 다음날은 아침 일찍 나와서 부지런히 물고기들을 강 밖으로 던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바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다른 사람과 교회에 유익이 되는 일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표도 없이 인생을 끌려가면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끌려가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네가 이 땅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때 바로 대답할 수 있는 크고 분명한 삶의 비전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 목표 때문에 내가 돈을 벌어야 하고, 그 목표 때문에 내가 좀더 배워야 하고, 그 목표 때문에 내가 마음과 인격을 나이스하게 만들어야 할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할까요? 오늘 본문 31절은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최종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에 맞춰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성공과 행복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에 있습니다. 성공해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고, 실패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면 그것은 성공한 것입니다.
가장 큰 성공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는 바른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위해 힘쓰는 삶이고, 가장 큰 실패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는 목표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가장 큰 성공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 것이 많아 기쁘게 설 수 있는 것이고, 가장 큰 실패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 것이 없어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성도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는 것이 매우 추상적인 개념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일까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이유는 교회가 내부적인 갈등을 딛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결국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성도가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 돌리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성도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4가지로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 성도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라는 4개의 파가 있었고, 다들 똑똑해서 각종 문제를 놓고 의견 다툼과 갈등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 교회에 그런 갈등이 생깁니까?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차이를 이해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다른 것이 화음이 되어 멋진 하모니를 만들고 교회는 더욱 힘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입니다. 다 자기 견해가 있고, 자기 성품이 있고, 자기 은사가 있고, 자기 비전과 자기 방식이 있습니다. 그 다른 것을 이해하고 존중할 때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잘하려면 삶과 신앙의 취향에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은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경건하고 엄숙한 예배를 좋아하고 어떤 분은 즐겁고 발랄한 예배를 좋아합니다. 찬양도 어떤 분은 찬송가를 좋아하고 어떤 분은 복음성가를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음악소리가 큰 것을 좋아하고 어떤 분은 음악소리가 작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취향에는 절대적인 선이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면 됩니다.
특별히 사람의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있는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아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계속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이 절대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많이 아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알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글과 좋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의 얘기를 잘 들을 줄 아는 성품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잘 들을 줄 아는 자세입니다. 주님은 자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말씀을 잘 듣는 복된 귀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실 잘 듣는 것만큼 복된 일은 없습니다.
어느 날, 한 형제가 선을 봤습니다. 호텔에서 만났는데 처음 소개받은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마음이 울렁거렸습니다. 어렵게 얘기를 이끌어가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호텔 정식을 시켰습니다. 그때 스피커에서는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 나왔습니다. 형제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이 곡이 무슨 곡인지 아세요?” 그러자 자매가 음식을 천천히 씹고 음미하면서 대답했습니다. “이 고기요? 맛을 보니까 돼지고기네요.”
귀가 막힌 사람을 보면 가끔 기가 막힙니다. 우리는 잘 듣지 않아서 귀가 막히고 마음이 막힌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 갇히고, 자기 경험에 갇히고, 자기의 상처에 갇힌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배우고, 많이 듣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끊임없이 마음의 폭을 넓히고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그런 폭넓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 유익을 주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2. 남을 위해 절제하는 성도
본문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이 구절에서 ‘가하다’라는 말은 ‘합법적이다(lawful)’라는 말입니다. 즉 법에 저촉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행동이 유익한 행동이고 덕을 세우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까?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많은 우상 신전이 있었고,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도 막대했습니다. 그 제물을 신전에서 다 소화하지 못해 결국 신전 뒷문을 통해 시장으로 나와 팔렸기 때문에 시장에서 고기를 사면 태반이 우상숭배에 쓰였던 제물의 고기였습니다. 그 고기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우상숭배한 제물이니까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먹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25-2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후자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드려진 예물인지 알려고 하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이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라고 알려주면 믿음이 약한 사람과 자신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굿이나 제사를 드린 뒤에 가져온 음식을 먹어야 되는지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먹어도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제사 음식 먹는 것을 절제할 필요는 있습니다. 즉 율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도 법이 말하는 것 이상의 유익이 되고 덕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새 싸움쟁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법대로 하자!”는 말입니다. 옛날에 총회에 가면 총회꾼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법이요!”라는 말이었습니다. 그처럼 법을 지나치게 따지는 사람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갈등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사람을 말할 때 “저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법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법에 어긋나지 않을까?” 하면서 살기보다는 “어떻게 남을 유익하게 하고 덕스러운 삶을 살까?”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실 인간 사회에 더욱 큰 해가 되는 것은 불법적인 잘못보다 합법적인 잘못입니다. 요새 기획부동산을 하는 사람들이나 주식 작전 세력들이나 세금을 탈루하는 사람들도 합법적으로 한다고 합니다. 또한 사치를 부리고, 초호화판 결혼식을 하고, 지나치게 위화감을 줄 정도로 사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그런 태도가 더욱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의 원리에는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새벽에 기도할 때 보면 가끔 특이한 방식으로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도가 기도의 열기를 붙이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가끔 그런 기도 때문에 자기의 기도가 방해되어서 기도를 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기도할 때에도 남을 배려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믿음이 좋은 사람은 거리낌이 없이 술 담배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런 태도가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견고한 믿음으로 그렇게 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거리낌이 없이 행동하고 말한 것이 듣고 보는 상대방에게 큰 상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칭찬을 하려고 한 말이 오해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경우에 가장 문제가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일로 오해하는 사람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언행에 조심을 기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해외에 있는 이민교회로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한 부목사님에게 주일설교를 맡겼습니다. 그 부목사님은 벼르고 벼르던 설교기회가 왔기 때문에 그 동안 자기가 품었던 가장 은혜로운 말씀을 강단에서 전했습니다. 성도들은 오랜만에 들어보는 신선하고 새로운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날부터 교인들 사이에 “그 부목사님은 정말 능력 있다!”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드디어 담임목사님이 돌아왔습니다. 지혜로운 성도들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수한 성도들은 깊은 생각 없이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부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정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꾸임 없이 말할 때는 무슨 말입니까? 거의 대개 “담임 목사님이 설교를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좋은 부목사님이 있으니까 얼마나 힘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말에 좁은 마음으로 오해를 품으면 담임 목사로서는 포용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는 한술 더 떠서 얘기했습니다. “목사님! 이번 주일에 부목사님 설교에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서 교인들 사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이제 자주 해외에 나가세요.” 그런 말이 불법과 죄는 아니지만 그런 모습 자체는 썩 지혜로운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자신은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정당하게 말했지만 그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주고,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행위라고 해서 그 행위를 생각 없이 하고 바른 말이라고 해서 그 말을 생각 없이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남의 유익을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제는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아무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더 독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옳고 그른 것의 잣대로만 살려고 하지 말고 “덕과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잣대로 살면서 교회의 덕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신의 권리를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언어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잘못된 행동보다는 잘못된 말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얘기는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기억하지도 말고, 전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이 돌아다니면 사탄만이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르고 정확한 말이라도 교회에 덕이 안 되면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3.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성도
오늘 본문 말씀은 전체적으로 이웃을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이지만 이제는 이웃을 생각하며 사는 정도에서 끝나지 말고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많이 살수록 이 땅에서의 행복지수와 천국에서의 상급지수는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 자체를 목표로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출세를 목표로 두고 사는 사람들은 출세하지 못합니다. 대개 보면 “이웃을 위해 어떻게 도움을 줄까?”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다가 어느덧 출세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성공은 성공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웃을 위해 공헌을 할까?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공헌을 할까?”하는 사람에게 성공도 주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인내하며 사는 힘의 원천은 “자녀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헌신의 대상이 자녀의 범위를 뛰어넘고, 가족의 범위를 뛰어넘고, 그 대상이 크게 확대될수록 하나님은 그에게 더욱 큰 능력을 부어주시고, 축복의 지경을 넓혀주실 것입니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결국 나를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중학교 친구의 헌신으로 저에게 중형차가 생겨서 마음이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에 힘들게 사는 성도들도 있는데 내가 이런 차를 타면 될까?”하는 생각으로 미안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우와는 달리 어렵게 사는 성도들조차 “우리 목사님이 좋은 차를 타게 되었다!”고 자기 일처럼 좋아합니다. 그처럼 서로의 마음을 살펴주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흐뭇하게 보시겠습니까?
어떤 분이 48평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여유 자금도 있어서 65평 아파트로 이사를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위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사를 포기하고 조금 더 선교에 헌신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그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신비한 은혜와 축복과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은 이웃의 축복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웃이 잘 되기를 바라면 그 소원이 신비한 힘으로 변해서 내가 잘 되고, 이웃이 못되기를 바라면 그 원한이 나에게도 미쳐서 나 자신이 못된 일을 겪게 됩니다. 결국 이웃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는 물질생활도 잘해야 합니다. 물질생활에서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빼앗기는 삶이고 또 하나는 드리는 삶입니다. 같이 내 호주머니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이지만 드리는 삶과 빼앗기는 삶의 기분의 천지차이입니다. 천만 원을 선교에 기쁘게 드리는 기분과 천만 원을 사기 당하고 병들어 병원비로 사용하는 기분은 천지차이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돈은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빼앗기는 삶을 살지 말고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드리는 자에게 빼앗기지 않게 하고, 더불어 그의 마음에 기쁨과 평화를 주시고 더욱 큰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어제 저의 차 바로 옆에서 두 대의 차가 충돌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저의 차에도 3군데에 기스가 났습니다. 가뜩이나 차 사고로 속이 상할 텐데 저도 “이 기스난 것 어떻게 할 거냐?”고 하면 더 속이 상할 것 같아서 그들에게 “나도 차를 모는 입장이니까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상할 것은 없고 다음부터 조심해서 운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상대방이 기뻐할 생각을 하니까 저에게도 평화와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은 남을 위해 자기 것을 조금이라고 희생하고 남을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평화와 기쁨을 얻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남을 이해하고 유익하게 할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큰 의미에서 교회 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유익하게 해주려고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4. 세상의 빛이 되는 성도
본문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 되지 말고.” 교인들은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가끔 보면 믿는 사람들의 행동이 보기 싫어서 교회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꼴 보기 싫어하는 모습을 결코 보여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사는 모습도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행위와 관련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모범을 보이는 삶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빛으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사기를 치지 말아야 하고, 땀이 없는 열매를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으면서 점집을 찾아다니고, 점집은 찾지 않더라도 여기저기 안수하는 곳, 기도해주는 곳, 예언해주는 곳을 찾아다니는 모습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주님을 믿지 못하면 그렇게 하느냐?”고 믿음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게 하고, 결과적으로 주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은 폭리를 취하지 말고, 가짜를 만들어 팔지 말고, 남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입히지 말아야 합니다. 줄을 서는 것도 잘해야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리가 나면 잽싸게 인터셉트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염치없는 모습도 없어야 합니다. 신호등을 잘 지키고, 교통질서도 잘 지키고, 뺑소니도 없어야 합니다.
어느 날, 어떤 성도가 다른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습관적으로 말을 뱉은 후에 뺑소니를 쳤습니다. 나중에는 그 얘기를 가지고 스릴이 넘치는 간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교회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 모릅니다. .
또한 믿는 사람들은 일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공부도 졸업하지 말고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물건을 만들 때도 잘 만들어야 합니다. 그처럼 믿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씨앗을 뿌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언젠가 그 행동의 열매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큰일을 만들기도 하고, 큰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또한 그 작은 행동이 자식 농사를 잘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식 농사를 망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나의 언행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믿음의 문이 열리고, 구원의 문이 열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법대로 산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남을 배려하지 않고 법을 내세워서 자기를 높이고 자기의 유익을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자기만을 위해 살면 교회는 힘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가려지게 됩니다.
참된 기독교와 기복주의적인 기독교의 구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만을 위해 사느냐 남을 생각하며 사느냐의 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선교할 형편이 되지 못해서 선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교할 형편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선교할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교할 마음만 가지면 우리에게는 줄 것이 참 많습니다. 기도를 줄 수 있고, 사랑을 줄 수 있고, 따뜻한 이메일 하나 보내줄 수 있고, 칭찬을 줄 수 있고, 시간을 내줄 수 있고, 용서를 줄 수 있고, 아무리 돈이 없어도 차 한 잔 대접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주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항상 이웃을 생각하고 주려는 마음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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