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의 열매
히브리서 13:15-17
히브리서 13장은 히브리서의 결론부분입니다. 지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히브리서가 끝납니다.
특히 본문은 세 가지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찬미의 제사를 드리라",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찬미와 나눠주는 행위를 제사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교훈을 함께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15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를 "제사"라고 한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그것은 의무적으로 반드시 드려야 되는 제사와 자원함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예를 들면 속죄의 제사는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죄사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함으로 드리는 제사는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시편 54:6에 언급한 낙헌제의 경우 즐겁게, 기쁨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인 것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찬미의 제사는 반드시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 43:21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103:2을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했고, 시편 100:1에서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땅도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신 목적은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사는 목적, 일하는 목적, 결혼하는 목적, 아들 딸 낳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높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남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동네 박완수씨가 3년된 진돗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박씨가 지난 8월 26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인이 세상을 떠나자 진돗개는 일체의 곡기를 완전히 끊은 채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죽고 난 다음날 전남대병원 직원들이 시신을 운구하러 오자 주인 시신을 지키며 마구 짖어대는 바람에 운구 작업이 세 시간이나 지연됐습니다. 평소 박씨가 자기 시신을 전남대병원에 실습용으로 기증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병원 직원들이 시신을 옮기러 온 것입니다. 주인의 시신 곁을 지키며 사납게 짖고 달려드는 바람에 세 시간 동안 꼼짝 못한 채 있다가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시신을 영구차에 옮겨 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며 웃통을 벗어제치고 보신탕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이사야 1:3을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을 보면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마음속에 감사와 기쁨과 감격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즉 마음속에 있는 것이 입술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찬송을 입술의 열매라고 한 것입니다. 입술은 마음의 창입니다. 그 창문으로 마음에 품고 있는 신앙과 인격과 생각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복음찬송 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생명이 되신 주 반석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그렇습니다. 입술로 찬미의 제사를 드립시다.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2.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16절을 보면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서로 좋은 일을 하고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서로"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착한 일을 서로 하고, 주는 것도 서로 해야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사랑도 서로 해야 합니다. 상대를 향한 기대치만 높으면 결국은 실망이 커지고 갈등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서강대 장영희 교수가 어느 잡지에 쓴 수필을 읽었습니다. "결혼의 조건"이라는 글이었습니다.
남학생들이 내세운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조건으로는 "나만 사랑하고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는 여자, 우리 부모님을 공경하고 잘 돌보는 여자, 요리 잘하는 여자, 부지런해서 늘 집안을 깨끗하게 정돈해 놓는 여자, 몸과 정신이 건강한 여자, 책을 읽는 여자, 근검해서 옷 사는데 돈 많이 쓰지 않는 여자,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여자,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려 주는 여자, 목소리가 크지 않은 여자, 내가 아무리 늦게 와도 저녁 먹지 않고 기다리는 여자, 너무 예쁘지는 않지만(너무 예쁜 여자는 위험하니까) 조금은 예쁜 여자, 밤늦게 친구 데려와도 불평 안 하는 여자, 밤에 도둑이 들어와도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왜냐하면 내가 무서우니까), 겨울이면 스웨터 짜주는 여자, 내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오, 당신 목소리는 엘비스 프레슬리 같아요`라고 말해주는 여자" 등등.
그런가하면 여자들이 장래 남편감으로 내세우는 결혼조건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만 사랑하고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는 남자, 신체 건강하고 머리 좋고 야망이 있고 유머감각이 있고 돈 많이 버는 남자, 가사 일을 즐겨하는 남자, 내가 야단칠 때 말없이 앉아 있는 남자, 내 독립적인 생활을 방해하지 않는 남자, 애 잘 키우는 남자, 술은 조금하되 담배는 피우지 않는 남자, 퇴근 후 집에 와서 요리하고 집안 치우는 남자, 우리 부모님을 일주일에 한번 방문하는 남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모닝커피 만들어 침대로 가져다 주는 남자, 예쁜 여자를 끔찍이 싫어하는 남자, 결혼기념일과 내 생일을 절대로 잊지 않는 남자, 여자 화장실 앞에서 내 핸드백 들고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 등등.
서로 요구하고, 서로 기대하는 것은 행복을 만드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주고 베풀고 나누는 것은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선을 행하라, 서로 나눠주기를 힘쓰라는 말씀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지방에서 목회 할 때 가까운 보육원을 도운 일이 있었습니다. 일년에 네 차례 정도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말씀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갈 때마다 과일이나 옷가지 등 선물을 사 가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원장에게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보육원 아이들이 어떤 선물을 받든지 10분의 1을 떼어 역전이나 뒷골목에 있는 또래의 아이들에게 전달하라고.
이유는 나보다 더 불행한 친구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과 나도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받는 것도 주는 것도 함께 훈련해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0:8에서 주님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불친절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친절을 베풀면 그 사람도 친절해집니다. 다른 사람을 인사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인사를 하다보면 그 사람도 인사를 하기 마련입니다.
것은 산울림의 이치와 같습니다. 높은 산등성이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천사님∼ / 천사님∼, 사랑해요∼ / 사랑해요∼, 야 이××야∼ / 야 이××야∼, 너 죽고 싶냐∼ / 너 죽고 싶냐∼, 마귀 할멈아∼ / 마귀 할멈아∼"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울림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이 산울림의 이치인 것입니다.
나 하기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서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순종하고 복종하라
17절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은 목회자를 말합니다.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믿음이라는 단어인 "페이도"와 같은 말로 `설득하다, 말을 잘 듣다`라는 뜻입니다. 순종이란 믿고, 설득 당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복종(휘페이코)이라는 말은 `…아래 놓이다, 포기하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의지나 감정이나 생각을 포기하고 지도자 아래에서 그 지도를 따르는 것이 `휘페이코`인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 그리고 바울 같은 지도자를 무시하고 그 지도력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나 나나 같다는 생각을 하는가 하면, 내가 너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그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될 이유는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해 늘 깨어 기도하며 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인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교인이 잘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요즘 히딩크 자서전을 읽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 교인인 조선일보 조정훈 기자가 이 자서전을 쓰는데 책임자여서 더욱 관심 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히딩크의 인간됨이 한층 매력적이라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축구감독이지 야구나 배구나 마라톤 감독은 아닙니다. 그 누구도 히딩크 더러 야구감독 못한다고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전문가입니다. 다른 분야는 잘 모릅니다. 인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양식을 먹이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17절은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그를 상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이 상하면 상한 음식을 만들게 됩니다. 상한 음식을 교인들이 계속 먹게 되면 가정이 병들고, 교회가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항상 즐거워야 합니다. 특히 토요일은 주일을 준비하는 날이기 때문에 교회일로 속상한 일이 생기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젖을 먹이는 산모가 상한 감정이나 원한을 품은 채 젖을 먹이면 열이면 열 젖을 먹은 아이는 체하거나 푸른색 변을 누게 됩니다. 동일 제품의 우유를 먹어도 엄마 품안에서 들려오는 행복한 박동소리를 들으며 먹는 아이와 씩씩거리며 한숨을 내쉬며 이를 가는 소리를 들으며 먹는 아이는 발육상태가 다릅니다. 그래서 임산부나 아이를 키우는 산모는 마음이 편해야 합니다.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인도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내 입술의 열매인 찬송으로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선을 행하고 나눠주기를 서로 힘씁시다.
인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합시다. 즐거움으로 일하게 해줍시다.
이것이 유익하고, 은혜 받고, 복 받는 비결임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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