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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1)/ 마 5: 6

by 【고동엽】 2021. 12. 20.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1)/ 마 5: 6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돈을 손에 넣기 위해서 안달하는 사람, 쾌락을 찾아서 밤낮없이 헤매는 사람들,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혈안이 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세상 영광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설혹 조금 손에 넣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만족하고 기뻐하고 영원토록 보람을 느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희랍신화에 탄타루스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독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신화입니다. 그러나 한두 가지의 값진 진리는 담고 있습니다. 탄타루스 왕이 먹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하는 제우스 신의 음식을 훔쳐먹었습니다. 그 죄로 그는 평생 배고프고 평생 목말라야하는 고통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이 마시고 싶어서 앞에 있는 물잔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면 물잔이 뒤로 쓱 물러나는 것입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앞에 있는 나무에 열린 과실을 따 먹으려고 손을 내밀면 그 나무 과실이 하늘로 휙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마시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하나도 입에 넣을 수가 없는 고통을 평생토록 겪어야 했습니다. 이 탄타루스 왕의 신화에서 영어 단어가 하나 생겼습니다. '텐터라이징(Tantalizing)'이라는 단어입니다. '감질나는, 애간장을 태우는'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마시지 못하고 먹지 못합니다.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는데 얼마나 안달이 나겠습니까? 얼마나 감질이 나겠습니까? 사람들이 쉬지않고 추구하고 있는 이 세상의 영광은 다 이런 것입니다.

 

내가 손에 넣을 만 하면 손에서 빠져나갑니다. 조금 얻었다 싶으면 그것은 실제로는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설령 내 입으로 물었다고 생각하고 삼켰다고 생각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갈증은 더 생기고, 배는 더 고프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특별히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 배고파 해야 하고 목말라 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것은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저희가 해갈을 받을 것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만족, 영원한 평안, 영원한 충족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목마르기만 한 것에 매달리지 말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라. 이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요, 이것이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사는 지혜로운 길이다.'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합시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실감나게 와닿습니까? 아마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몇 분 안되실 것입니다. 틀림없이 모두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을 날마다 손에 들고 읽는 우리까지도 그 말씀이 참 진리인 것으로 생각되면서도 가슴에 와닿는 것은 별로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목마름, 배고픔' 이라는 단어가 원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깊이 알게 되면 더 거리감을 느낄 것입니다. '페이논테스(peinontes)'라는 헬라어 단어는 약간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이 없나?' 하고 냉장고의 문을 열어 먹을 것을 찾을 때 느끼는 시장기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먹을 것을 찾아서 생명을 걸고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는 북한 사람들이 체험하는 배고픔입니다. '딥손테스(dipsontes)'라는 헬라어 단어는 '무엇을 좀 마셨으면 좋겠는데, 차 한잔 주십시오.'라고 할 때 느끼는 약간의 목마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광야로 들어왔습니다. 며칠 동안 여행을 한 후에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그 때까지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고 온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오아시스가 있을 것이고, 시원한 생수가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고 타는 갈증을 참고 왔던 것입니다. 해는 벌써 뉘엿뉘엿 넘어가서 이제는 더 여행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 봐도 마실 물이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 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너무나 목이 말라 혀가 입 천장에 달라붙는 고통을 느끼면서 난동을 부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마름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딥손테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언급하신 이 말씀의 정신은 배고파 죽어가는 자가 먹을 것을 찾듯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자가 한 방울의 물을 애걸하듯이 의를 구하는 자가 배부름과 해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말씀이 우리 자신과는 약간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그 정도로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이 본문을 보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겸손한 마음에 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서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우리도 이 말씀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그 말이 그 말이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성령께서 여러분과 만나시지 않는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배가 고파 죽어 가는 자가 먹을 것을 찾듯이, 목이 말라 죽어 가는 자가 한 방울의 물을 애걸하듯이 의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가 무엇인지 꼭 밝혀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에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그 표준에 맞게 사는 것, 그 표준에 맞게 행동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에서는 의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의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 16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주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자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세상에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배우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으며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헤매는 법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왜 회개해야 하는지,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지, 왜 하나님과 이웃만을 사랑해야 하는지, 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 왜 십자가를 지고 때로는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왜 때로는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추구하는 좋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지, 왜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나의 생명과 나의 가진 것, 나의 젊음을 때로는 주의 재단에 올려놓고 헌신하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 듣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은 아직도 성경 앞에 다가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성령께서는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니라. 너는 이 뜻대로 살아야 한다.' 라고 항상 우리 마음에 음성을 들려 주시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멘!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만 끝낸 분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사신 것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걸어 다니신 모습을 보고,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그가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죽으심을 보고, 그의 부활하심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은 바로 저런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만큼 의에 주리고 목마른 분이 없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 습니까?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주님은 여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는데 자기 생명을 거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며, 오늘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세상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이 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애매모호한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나 들을 수 있는 거룩한 한 구절의 성구가 아닙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룩한 백성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뿐만 아니라 이 거룩한 뜻을 추구하려고 하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열정을 우리 가슴속에 불러 일으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막연하게 이야기하면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을 해야 합니다.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는데, 시간 관계상 오늘 두 가지, 다음 주일 두 가지를 차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적당히 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을 살려면 네 가지를 꼭 해야 합니다. 첫째로 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아직도 예수 믿지 아니하는 형제 자매들을 향하여 하는 말입니다. 사랑의교회 밖에 있는 모든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죄 값으로 영원한 사망과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요, 강렬한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그 죄 값으로 영원히 심판받는 것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사랑의교회를 이 곳에 세우신 것이요,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4,5만 개의 교회를 세우신 것이요. 이 일을 위하여 전 세계에 수백만 개의 교회를 세우시고 오늘도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서 구원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의 갈증이 있어서 나오신 분이 계시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수천 명이 지금 함께 예배를 드리지만 이 가운데 적어도 10% 이상은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중생 받지 못한 분일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과 별로 관계가 없는, 마음의 문을 닫아 놓고 계시는 분일지 모릅니다. 이런 분들은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갈증을 가져야 됩니다. 사도 바울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절규했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여러분들은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손에 넣었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완전한 실패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어느 정도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 대왕이 31세에 갑자기 죽자 장례식 때 관 양쪽에다 구멍을 뚫어놓고 빈손을 밖으로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관을 운구할 때 시신의 양손이 뚫어놓은 구멍 주위에 부딪혀 덜거덕 덜거덕 한 것입니다. 천하를 손에 넣고 호령하던 알렉산더도 죽으면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누렸습니까?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까? 완전한 실패자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에 가끔 모습을 비치는 정주영 회장을 유심히 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20년 전 어느 크리스마스 축하 예배 때 제가 설교자로 초청을 받아서 맨 앞자리에 앉았 습니다. 라운드 테이블에 사람들이 다 앉았는데, 원래 제 옆자리가 정주영 회장의 자리였습니다. 그분이 저쪽에 서 계시면서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리 와서 여기 앉으시라고 권하자 그 때 그분이 한 말씀이 아직도 제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 같은 죄인이 어떻게 목사님 옆에 가서 앉습니까?' 그 말을 들으면서 '신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 내면에 영혼의 구원을 생각 하는 구석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지켜보니 그 분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그는 예수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전도할 수 있는 루트가 열린 것도 아닙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그의 최근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감각도 없고 감정도 없는 것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희로애락도 느낄 줄 모를 정도로 노쇠했습니다.

 

판단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남의 부축을 받지 아니하면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 최고의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쌓아 놓은 것 때문에 자식들 사이에 싸움 붙인 것 이외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까? 이제 그 분에게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구원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을 들고 가서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입니까?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은근히 영혼의 공포증이나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려고 자기 재산을 내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 같이 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우리나라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은 자식들에게 자기 재산을 유산으로 잘 남기지 않습니다. 상속해 주어봐야 세금만 많이 떼이고, 자녀들을 망치는 길인 줄 알기 때문에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막대한 재산을 쌓아 놓았어도 유산으로 그냥 다 넘겨주고 눈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움켜쥐고 있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자연히 사회의 어떤 기관에 기증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노틀담 대학교라는 그런 대로 괜찮은 학교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재정적으로 가장 든든한 학교들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캐톨릭 계통입니다.

 

최근에 그 학교 출신이 400억원을 기증했습니다. 학교에 400억원 정도를 기증했다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럼 왜 기증했겠습니까? 돈을 쌓기는 많이 쌓아 놓았는데 이제 죽을 날을 앞에 두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라 기껏 생각해낸 것이 복지재단, 혹은 학교에 기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거액을 기증해 놓고도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문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려면 누구에게든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3장 22절에 말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가 있어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데 그 의가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분들이 계시면 이 시간 예수님 앞으로 빈 손 들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빈 손 들고 나오십시오. 손에 무엇이라도 들고 있으면 그것은 여러분이 구원받는데 대단히 치명적인 장애가 됩니다. 명예든지, 부든지, 권력이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아무 소용없습니다. 다 비우고 빈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을 여러분이 갖고 계시면 여러분이야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배고프지 아니하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지난 주일날 세례 간증을 네 분이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김순복 자매가 간증하신 것을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어 버렸습니다. 절에 나가다가 어떤 아주머니를 알게 되었는데, 그 아주머니와 인연이 되어 그 분의 아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조금 행복하게 사는가 싶더니 아들 하나를 낳아 놓고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험한 인생의 파고에 지쳐서 있을 때 그가 사랑의교회로 인도를 받았던가 봅니다. 이제 그의 믿음은 너무나 아름답게 자랐습니다. 예배시간에 나와서 앉을 때마다 자기가 지금까지 헛되이 살았다는 마음의 후회를 많이 하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간증을 끝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예수를 왜 이제야 믿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행복한 예수를 왜 사람들은 안 믿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멋진 말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솟고 있습니까? 생수가 솟고 있는 것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챤으로 교회문턱만 드나든다는 마음의 가책을 받으시는 분들은 지금부터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자리에 나와 앉아있다는 그 자체가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어떤 갈증이 있기 때문에 나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빈 손 들고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예수님 믿으시고 예수님이 주시는 배부름, 예수님이 주시는 해갈을 여러분이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은혜를 간절히 사모해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까? 밥 먹을 때 머리 숙이고 기도하는 것이고, 집에 가면 성경 가끔 읽는 것이고,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입니까? 이것이 신앙생활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생각할 때마다 저는 항상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떠올립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속에 푹 쌓여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 분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밤이고 낮이고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을 믿고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항상 믿고 의지하는 그 분이 누구십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이것만큼 대단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말만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나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 말씀이 한두 마디 말로 때울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까? 한두 해 뜨겁게 믿었다고 해서 모두 이해될 문제입니까? 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루라도 안 보면 안달이 나 못 견딜 정도 로 좋아해서 결혼하여 30년을 함께 산 아내도 나를 위해서 피 한 방울 흘려주지 않으려고 샐쭉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 분이 나 같은 것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분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갈증이 없으십니까? 한 번 만나면 끝날 문제입니까? 한두 번 이야기 들었다고 다 알게 됩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완전히 안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 그 크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무슨 수로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이라니 이것은 정말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내가 무엇인데 그 분이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그 분이 어떤 분인가 알고 싶어. 그 분을 만지고 싶어. 그 분 얼굴을 가까이 가서 들여다봤으면 좋겠어. 그 분하고 하룻밤이라도 같이 있어 봤으면 좋겠어.' 하는 갈증, 배고픔을 가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알고 싶어하고, 주님을 갈망하고, 그 사랑에 대한 비밀을 좀더 이해하고 싶어서 마음에 갈증과 배고픔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날마다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윗도 시편 42편 1,2절에서 이렇게 자신의 갈 증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우리에게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 말입니다. 유대 나라는 건기가 되면 비가 한 방울도 안 옵니다. 그런 건기에 사슴이 목이 말라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다니느라고 정신 없이 헤매는 것은 사생결단하는 행동입니다. 그 사슴의 갈급함을 자신의 갈급함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그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심정을 가지는 것이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우리의 모습을 두고 '즐거운 거지'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즐거운 거지입니다. 거지들 중에서도 기분 나쁘게 구걸하는 거지가 있고 정말 기분 좋게 구걸하는 거지가 있습니다. 기분 나쁘게 구걸하는 거지는 아직도 거지 경력이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사람이고, 기분 좋게 구걸하는 거지는 한 30년 거지 경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어떻게 하면 내가 한 20억쯤 축재를 해볼 수 있을까? 어떻게 주식을 사서 갑자기 30억을 만들어 볼까?' 하는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다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녁에 어떻게 하면 호화로운 호텔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하룻밤을 즐겨 볼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가지 소원 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끼니마다 배만 안 고팠으면 좋겠다. 어쩌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맥주캔이나 하나 던져 주면 정말 좋겠다. 그것 마시고 오늘 저녁에 잠 좀 자겠다.' 생각이 소박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소박한 거지 생활을 20년 정도만 하면 황제가 되라고 해도 안 합니다. 왜냐하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입니다. 오직 거지가 최고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은 이 거지 근성이 있습니다. 생각이 단순합니다. 세상에서 명예를 누리고, 재물을 쌓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식투자를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아파트를 30평에서 90평으로 늘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와 같은 복잡한 생각에 별 흥미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중심은 단순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을 좀더 알고 싶다. 그분의 사랑을 좀더 가슴에 풍성히 담았으면 좋겠다. 그 분과 함께 저 하늘나라에서 1분이라도 손잡고 걸어 봤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은혜를 사모한다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간절함을 갖고 있는 분들은 주일이면 누구보다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합니다. 적어도 10분 전에 나옵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정도 일찍 나오면 주차장 공간이 없어서 약간 돌아도 지각은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되도록 앞 자리에 앉아서 목사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아무리 생활이 바빠도 하나님 말씀을 펴놓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이 직접 나에게 주시는 레마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어느 사업하시는 분인데, 아무리 사업에 쫓기고 바빠서 저녁에 보통 10시, 11시에 집으로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 와서 몸을 씻고 집안 식구들과 이야기를 다 나누면 잠자리 들기 전에 성경을 펴놓고 5장을 읽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본인에게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 시간에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음성을 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업에 대해서도 아이디어를 주신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도 가끔 해답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에 흥미를 끄는 텔레비전 프로들이 많은데도 보지 않고 이렇게 말씀을 펴놓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분의 간증이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IMF가 터져서 모두가 어려울 때에 자기 사업도 매우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그 때 하루는 장인이 부르시더니 '자네, 인테리어 사업 좀 해봐.' 하시더랍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있는 사업도 자금이 없어 힘듭니다. 더군다나 저는 인테리어의 '인'자도 모르는 사람인데 어떻게 인테리어 사업을 합니까?'

 

그런데 장인 어른이 '그래도 한번 해봐.' 하시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다. 나이가 들어 노망을 하나?'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그 날 저녁에도 씻고 성경을 펴놓고 앉아서 읽는데, 그 날 따라 출애굽기 18장을 읽었는데 모세가 장인의 말을 듣고 천부장, 백부장을 세워서 백성들을 재판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 참 이상하네. 하나님께서 인테리어 사업을 하라고 말씀하시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다음날 회사에 나가서 어떻게 연결이 되어 부도 직전에 있는 인테리어 회사 하나를 인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회사가 잘 나간다고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저는 가끔 기도가 무엇일까 생각할 때 이런 것을 떠올려 봅니다. 인공위성이 굉장히 무겁지 않습니까? 몇 톤짜리입니다. 그 인공위성을 저 대기권 밖으로 밀어 올리려면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로켓이 필요합니다. 뒤에서 화염을 내뿜으며 그 인공위성을 밀어 올려야 그것이 대기권 밖으로 껑충 뛰어 올라가서 안정이 되고 괘도를 바로 잡아 지구를 돌게 됩니다.

 

기도는 이처럼 우리를 대기권 밖으로 밀어 올리는 추진력이요, 로켓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신에 갇혀있는 우리 영혼은 육신이라고 하는 대기권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 꿇으면 기도의 힘이 우리를 육신의 대기권을 벗어나게 하여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도록 우리 영을 밀어 올립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시간은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대기권 밖에 영의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존전에 있는 것입니다. 육신 안에 갇혀 있는 자가 아니라, 육신 밖에서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 밀애를 하는 시간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의 맛을 아는 사람은 기도하고 나면 항상 얼굴이 밝습니다. 왜냐하면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생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깊이 하고 일어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굶주린 영혼에 주님께서 시시때때로 맛있는 만나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부를 것이요.'라는 주님의 말씀은 현재분사형입니다. 이것은 수시로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고 수시로 우리를 배부르게 먹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는 좋은 식당이 있는데 한번 가서 먹고는 '이제 됐다.' 하면서 평생 다시 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맛있는 음식 맛을 한 번 봤다 하면 언젠가 또 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정말로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나서 다시는 안 만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면서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고 예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으면 그 다음에 '또, 또, 더, 더, 더' 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원리에는 냉정한 데가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원리입니다. 세상에서 부익부 빈익빈은 악입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거룩한 법칙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을 가지고 주님 앞에 계속 기도로 다가가고, 말씀으로 다가가고, 예배로 다가가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자꾸 더 주십니다.

 

그래서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가버립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40~50년 동안 했는데, 이 정도 믿었으면 됐지. 무엇을 그렇게 안달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면 벌써 40~50년 믿으면서 받은 은혜를 송두리째 다 뺏겨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다 안다. 오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라는데 설교가 다 그렇고 그렇겠지. 어디 보자. 얼마나 잘 하나.' 하면서 앉아 있다면 벌써 그 사람은 갈급한 영혼이 아닙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 있다고 생각하고,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던 것까지 자기도 모르게 다 뺏겨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 나는 주님을 아직 다 모릅니다. 나는 은혜가 더 필요합니다. 남편도 나의 빈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재산도 어림없습니다. 내 마음에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오를 만큼 다 올랐습니다. 그러나 올라와 놓고 보니 남는 것은 공허감 밖에 없습니다.' 세상 것은 먹으면 먹을수록,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일으킵니다. '주님, 이제 주님께서 나의 빈 공간을 채워주십시오.

 

이 시간도 말씀해 주십시오. 이 시간 주님께서 저를 만나 주십시오. 생수를 주십시오. 필요한 은혜를 주십시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나오면 그 동안 하나님께서 얼마나 주셨는지 모르지만 '너에게 이미 그만큼 있는데 왜 또 달라고 하느냐?'라는 말씀은 절대 안 하십니다. 또 주고 또 주고 또 주십니다. 이것이 천국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은혜를 받고 믿음이 좋아지는 사람은 계속 좋아지고, 좋은 듯한 사람은 계속 뒷걸음질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한 분들은 구원받기를 갈망하십시오. '형제여, 내가 어찌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낮이고 밤이고 던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생수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이렇게 아름답게 신앙생활하며 예배드리는 사람들이지만, 항상 주님을 더 알기를 사모하는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 앞에 자주 앉으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배 시간에 정성을 쏟으십시오. 진정 즐거운 거지처럼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그 놀라운 모든 은혜들을 내가 받아 누리고자 하는 갈증을 가지고 주님을 믿으면 우리 하나님께서 풍성한 축복, 배부름의 축복을 우리 모두에게 남김 없이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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