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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 3:7-16 )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0.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립보서 3:7~16

 

 

 

희망의 2002년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은혜와 축복이 사랑하는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인데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13절과 14절 말씀을 보세요.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했습니다.

 

세계적인 유명한 화가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쇠는 쓰지 않으면 녹이 씁니다. 물은 고이면 본래의 깨끗함을 상실하며 썩어 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태만은 우리 마음의 활기를 앗아갑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마지 하여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는 장면 세 가지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가지 목표를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과 그가 세우신 목표사이에는 죽음이라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을 지나 갈보리산 언덕까지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느혜미야 6장 3절에 보면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람 느혜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는데 이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이 도무지 협력은 하지 아니하고 빈정대기만 했습니다. 이처럼 느혜미야 앞에는 여러 가지 장애가 가로질러 있었습니다. 네 번씩이나 느혜미야에게 성벽 재건하는 일을 중단하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인 것을 믿는 뚜렷한 목표가 느혜미야에게 있었기 때문에 끝내 성곽 재건을 단념하지 아니하고 계속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순절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 베드로는 백성들을 향하여 담대히 증거 했습니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이 패역한 이란 말은 어느 곳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기는 가는데 그 가는 방향과 목표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의미가 없는 존재인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피안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무엇을 향하여 추구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표가 없이 가고 있다면 그것은 패역한 것입니다. 방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찾기는 찾아도 찾지 못하고 하기는 해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시냇물이나 강물은 흘러가는데 그 목표가 있습니다. 시냇물은 흘러 강물이 되고,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갑니다. 시냇물이 흐르지 못하면 그것은 늪이 되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그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면 그 물이 고여 썩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자연히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이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항해자의 여정이 되지 못하면 우리에게 이 새해도 한낱 괴로운 짐에 불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해자의 생활 자세로, 꾸준히, 확실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목표가 뚜렷해야 힘차게, 그리고 꾸준히 전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이 죄책감만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생활입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개는 지난날의 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의식을 떨치고 일어서 선한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회개는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만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묵은해를 지내 보내고 새해 첫 주일을 마지 하였습니다. 우리의 앞날은 후회가 아닌 새 결단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잃어버린 세월의 일기를 보며 얼룩진 과거 때문에 눈물만 흘리고 가슴 아파 할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과감히 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고 활짝 웃으며 새해를 마지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하얀 백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우리는 아직 삶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가 말함대로 "인생이란 성취가 아니라 추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매일 매일 좇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추구하는 말은 목표와 병행합니다. 목표가 없이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방향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각 사람에게는 놀라운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믿고 각 사람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꾸준히 개발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사이 여러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대학 진학 때문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 자녀가 대학에 진학만 하면 다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미국의 하버드대학교는 미국에서도 가장 오랜 대학이면서 소위 명문 대학입니다. 많은 수재들이 그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대학에서 베이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한 머리가 가장 우수한 학생 그러니까 1등에서 15등까지로 졸업한 사람들을 조사했는데 졸업 후 20년 될 때까지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못한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머리가 좋다고, 지능지수가 높다고, 우수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인생에 성공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머리가 얼마나 좋으냐 하는 것보다도 인생에 대하여 얼만 정열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최후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지능이 아니라 정열입니다. 요샛말로 IQ보다 EQ가 더 중요합니다.

 

정열은 생명의 연소작용입니다. 내 생명의 불꽃이 뜨겁게 타는 것입니다. 촛불은 타야 빛이 나고 뜨거워집니다. 촛불이 되지 않으면 빛도 열도 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람된 일을 위하여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우리의 생명을 촛불처럼 태워야 합니다. 정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 정열이 벗이 살아가는 사람을 비교해 보세요. 건강한 사람과 앓는 사람만큼이나 다릅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정열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생활 그것이 곧 정열의 삶입니다.

 

정열은 인생의 강장제 입니다. 정열은 생활의 활력소입니다. 정열이 있을 때 우리는 열중합니다. 정열이 없으면 인생은 한낱 권태의 연속이요, 지겹고, 하품이 날 따름입니다. 정열은 우리에게 발랄한 생기를 주고, 강한 흥미를 유발하고, 끊임없는 활동의 자극제가 됩니다.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 베트란드 러셀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학창시절에 나보다 재주가 뛰어난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승리했습니다. 왜냐? 나에게는 정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귀한 말입니다.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정열입니다. 정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위대한 것은 정열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을 들으면서 정열이 넘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된 그것을 잡을 고 좇아가노라." 노 사도의 마음에 아직도 정열의 불이 활활 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개발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악하게 될 수도 있고, 선하게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위대한 성자에게는 가장 사악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극악무도한 사람에게도 가장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 지니고 있는 모든 재능은 선과 악의 양면으로 쓰여 질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누구나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출생한 환경에 구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유에 태어난 한 아기가 세상의 구주가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통나무집에서 태어난 아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자신의 비참한 출생 환경을 딛고 일어선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의 자세 입니다. 어느 학교를 다녔느냐? 어느 직장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장래를 어떤 방향으로 결정하느냐 하는데 따라서 인생의 성패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사람은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른 꿈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사람을 하나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어느 조용한 시골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어려서 정식교육을 받을 만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목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 있을 때는 의자에 올라가서 목사처럼 설교하는 흉내를 내곤 했다고 합니다. 그는 노래에도 천부적인 재질이 있었습니다. 음악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합창단원이 되었습니다. 청년시절에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해서 열 살이 넘어 학교에 갔는데 모든 과목 '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음악 감상에도 열의가 대단해서 어떤 때는 앉은자리에서 와그너의 작품 '로엔그린'을 연속해서 열 번이나 감상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14살 때 아버지를 여였습니다.

 

그의 조국이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하자 그는 전대에 지원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훈장도 받았습니다. 그가 군에 복무할 때 참호 속에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 왔습니다. 그는 강아지와 가까워지며 먹이를 나눠먹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그 강아지를 훔쳐갔습니다. 그는 아끼던 강아지를 잃고 너무 섭섭해서 며칠동안을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여 자기 마을 아이들에게 예쁜 연도 많이 만들어 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 어린아이가 의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아파서 우니까 그는 어린 아이 처럼 자기도 의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아픔을 같이하고 아이를 대신 하여 이를 아프게 한 그 의자를 때려줄 정도로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29살 때 구에서 제대했지만 나라를 위해서 계속 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도대체 개인의 영화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로지 다른 사람을 도우며 그들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34살 때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서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사랑하라고 권면할 정도의 착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십니까?

 

그의 이름을 들으시면 아마 여러분은 놀라실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되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악마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하던 그가 수백만의 사람을 무참하게 죽이고, 전대미문의 수난을 강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사람은 꿈을 가져야 하는데 바른 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꿈은 자동차보다 중요합니다. 자동차는 얼마 안 있으면 낡아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꿈은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꿈이 있는 동안 우리는 지칠 줄을 모릅니다. 꿈이 있는 한 사는 보람이 있고 의욕이 넘칩니다. 어떤 어려움도 참을 수 있습니다. 꿈이 있는 한 우리 삶에는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룰 수 있다고 믿을 때 놀라운 일을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면 구해야 합니다.

 

무엇을 구합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상력이라고 하는 대단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내게 좋은 것인지 혹은 남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지금 내가 그것을 성취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지, 더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생각하고 기도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긍정적이고 확실한 대답이 나오면 이것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절대로 망설이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십니다.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세요. 긍정적인 자세로 기도하세요. 그것이 반드시 실현될 날이 올 것을 내다보면서 기도하세요.

 

저는 요사이 기도 할 때마다 하나님이 금년에 우리 교회에 허락해 주실 것들이 눈에 선하게 나타납니다. 물론 이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실 것이 내다보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단계씩 실행해 나아가는데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결코 지름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신앙이 우리를 일으켜 일하도록 고무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최선을 다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에 품은 꿈이 있습니까? 믿고 구합시다. 부모된 우리의 소원은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인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신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해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절대로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선하게 보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요소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일을 시작하여 꾸준히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자세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는 것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시작하느냐? 아니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능력과 믿는 자는 상호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에게 능력이 부족한 이유는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나님께 구합시다. 그리고 확실히 믿읍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말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구하라 그러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구하고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내 가까이 계시지 않습니다"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래요? 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떼어놓았습니까? 그 책임은 우리편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사실 오래 참는 사람의 전형은 농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오래 참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시간표를 작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그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오델로'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상처가 한 수간에 아물어 낫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곤 합니다. 우리에겐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본 받아 인내를 기르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유익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어떻게 했습니까? 소극적으로,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렸습니다. 지난날의 죄와 허물, 실수, 후회스런 일을 잊어 버려야 합니다. 후회는 우리를 이중으로 약하게 그리고 이중으로 불행하게 합니다. 과거는 우리 삶의 이정표였지 앞날을 제시하는 방향표는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뒤엣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지나간 과거는 우리의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분노나 적개심 같은 것을 모두 없애 버립시다. 지난날의 성공도 잊어버립시다.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의 실패도 잊어버립시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기 쉽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면 적극적으로, 목표를 향하여 좇아가야 합니다. 좇아가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거나, 주변을 살필 여가가 없습니다. 오직 목표에만 집중합니다. 우리는 오직 앞만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분명히 소유하고 있는 날은 오직 오늘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을 성실한 자세로 임한다면 엄청난 능력을 얻어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시고, 이 새해를 맞게 된 것을 생각할 때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의 충만하신 능력이 힘이 되어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갑시다. 좇아가는 사람은 뒤돌아 볼 시간이 없습니다. 옆에 있는 것 보려고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 금년도 주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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