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지난주에 이어서 다시 어려운 주제, 예수님의 육체가 어떤 점에서 성전이 되었는가? 좀 더 진도 나가겠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의 육체가 요한복음 1장 14절에 근거하여 성전이 됐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성전은 돌로 된 성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로마제국 전체 모든 영역에서 가장 큰 성전이었습니다. 로마제국 안에 있는 주피터 성전보다 더 컸고, 페르가몬에 있는 성전보다 더 컸고, 이스타르게이트, 고대 로마제국 통치가 미치는 모든 성전과 비교해도 헤롯성전만큼 큰 성전이 없습니다. 헤롯성전이 가로 400미터 세로 300미터로 돼 있으니, 엄청나게 넓죠? 그것이 헤롯 성전의 터입니다. 그건 46년째 지어지고 있지만 완성이 덜 되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46년째 발주하여 공사가 진척중인 성전은 고대사회에서 그 크기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는데 이 성전에 대한 도발적 태도가 예수를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립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안식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 이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논란거리는 됩니다. 예수님이 지키지 않았던 율법은 세 가지입니다. 정결율법,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정결법을 어긴 거죠. 그다음 예수님이 어긴 율법은 안식일의 신성성을 파괴하는 것, 그다음 예수님이 어긴 율법은 이방인과 불가촉천민들, 즉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유대종교가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포기해버린 죄인들, 창녀들, 사회적 부랑아들을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선포한 것, 이 세 가지가 율법에 대한 예수의 도발입니다. 안식일법, 정결법, 이방인접촉법, 이걸 도발했는데 이 모든 율법에 관한 도발은 성전에 대한 훼방, 성전에 대한 도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6장 등 재판받는 현장에서 예수님에게 쏟아지는 모든 죄목은 성전을 허물어뜨린다, 성전을 파괴하겠다, 성전을 허물어뜨린다는 말 자체도 죄가 됩니다. 성전을 한 번 걷어 찬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파괴해버리고 허물어뜨리겠다고 말한 것 자체가 죄가 됩니다. 성전, 영어로 말하면 세크리드 센터, holy of holy, 가장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대종교에 예수가 성전을 공격했습니다. 예수가 성전을 공격한 이유는, 제가 늘 반복합니다. 출애굽기 40장 34절, 열왕기상 8장 11절, 이제는 적지 말고 암송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 성전에 대한 이야기가 다 나와요. 몇 구절 안 됩니다. 암송하려고 마음먹으면 다 암송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국민교육헌장을 다 암송한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암송할 수 있어요. 성경구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 있다, 이사야 6장 3절, 성전이 여호와의 영광을 모신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계신다는 결정적인 표지가 영광이라고 그랬죠? 그런데 이 영광을 프리즘, 동광기에 집어넣고 보면 은혜와 진리라고 그랬죠?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죄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여 죄를 탕감하여 주는 겁니다. 죄를 탕감하여 줄 때마다 죄 짓기 전보다 더 거룩해지고 더 깨끗해지기 때문에 죄 탕감의 의미가 있죠. 그래서 제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에 나온 비유를 들었죠. 제1부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한 번도 탈영하지 않은 병사의 충성심과 한 번 탈영했다가 용서를 받아서 전선에 투입된 병사의 충성심, 어떤 게 더 큽니까? 전쟁의 성과에서? 한 번 탈영했다가 돌아와서 용서받은 병사의 전투력이 훨씬 큽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한 번 은혜 받고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경우에는 죄 짓기 이전보다 훨씬 더 부가가치가 많은, 훨씬 더 의로움을 많이 생산할 때 죄사함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만일 죄 용서를 받고 원상복귀 되고, 죄사함의 감격이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이윤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장사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죄사함은 은혜를 받고 죄를 용서를 받는 까닭은 진리 안에서 사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신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영광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는 죄를 씻어주는 역할입니다. 지금 이 교회에 은혜가 있다는 말은, 가향교회에 하나님이 머문다면 가향교회 안에서 죄사함 받는 사람이 일어나야 합니다. 가향교회와 여의도 순복음교회 영락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면, 여호와의 영광이 이 교회에 함께 한다면 죄사함의 은혜가 경험돼야 합니다. 죄사함의 은혜를 일으키는 여호와의 영이 자유롭게 활동해야 합니다. 죄를 사해주고 재생시키고 갱생시키는 영이 우리 가운데 활동해야 할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서 바른 길로 가는, 즉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능력을 활동, 진리의 영이 또한 있어야 한다, 은혜와 진리의 영이 마음대로 활동해야만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성전에 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종의 신적 보호였습니다. 이 신적보호자가 여호와의 영광인데, 예수의 육체 안에 머무는 여호와의 영광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 한복판에 계신다는 즉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있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40장 34-35절을 펴보세요.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열왕기상 8장 11절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영광, 구약에서 말했던 그 영광, 시내산 정상에 머물렀던 그 영광, 성막에 머물렀던 그 영광, 성전을 가득 채웠던 그 영광, 이사야를 경악시켰던 그 거룩한 영광, 에스겔을 놀라게 했던 그 거룩한 영광이 예수의 육체 안에 머무는 것, 구약에서 많은 예언자들을 놀람으로 몰아넣고, 많은 예언자들을 새사람 만들었던 그 영광이 예수의 육체 안에 있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 11절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여기가 이제 중요합니다. 예수의 육체는 걸어 다니는 성전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죄를 용서하여 갱생시키는 몸뚱이, 예수의 몸은 문둥병자를 갱생시키는 매개물입니다. 예수의 몸에 문둥병자가 닿으면 낫습니다. 정확하게 성전이 하는 겁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육체는 문둥병자나 혈우병 걸린 사람들이 터치했을 때 치료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영광과 접촉한 겁니다. 예수의 말이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 세리장, 마태 이런 흉악한 세리의 양심을 죄사함의 힘을 고취시켜서 새사람 만들어서 진리 안에 살도록 도와줬습니다. 요한복음 8장입니다. 간음하다 붙잡혀서 새벽에 끌려나온 여인을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된 상태가 죄를 용서받은 겁니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게 얼마나 중요하느냐면, 우리 한국교회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여호와의 영광이 임재하는 참된 교회라면 한국교회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합니다. 한국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와 신부님들의 설교와 강론은 법무부 장관이 해야 할 일, 경찰청장이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누가 합니까? 목사님 설교가 합니다. 구역장님의 설교가 하고 목사님의 안수기도가 다 합니다. 왜? 한 번 목사님의 설교를 듣자마자 양심이 청결케 됨으로 법무부장관과 경찰청장이 할 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게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거룩한 정도가 압도적으로 높아버리면 참아낼 수 없는, 즉 견딜수 없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 분노는 참으로 순수한 분노이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돌로 된 성전,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버린 성전에 대해 갖는 분노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은 분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부패할 때 온몸으로 표현하는 분노가 사로잡습니다. 그걸 질투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가 850명이 사마리아에서 진을 치면서 이세벨과 아합왕의 조종을 받아서 예루살렘 이스라엘 전역을 지주들의 종교로, 가난한 농민들을 압박하고 소작인들을 물 먹이는 거짓된 종교가 됐을 때 엘리야의 거룩한 영은 한 사람밖에 없는 영이었지만 엘리야는 참지 못하고 거룩하고 화염 같은 말씀을 토해냈지 않습니까? 주님의 전에 대한 열심, 진짜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게 시편 69편에 나옵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수 안에 가득 찼기 때문에 강도의 소굴로 바뀌어버린 성전을 볼 때 참을 수 없었습니다. 강도의 소굴로 바뀐 성전, 이건 마가복음 11장과 마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왜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됐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지금 교회와 성전이 거의 같습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 그리고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왜 있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로마 제국에 흩어졌던 교포들이 올 때 로마의 동전을 가지고 옵니다. 로마의 동전, 데나리온을 가져옵니다. 그 데나리온을 성전 세겔로 바꾸어줄 때 환차이익이 많이 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환차이익을 누가 관장하느냐면, 대제사장들의 금융업, Banking industry를 하는 사람들이 합니다. 대제사장은 우리 서울 같으면 과천 안성 평택 성안 이런 곳에 대제사장 전용목장이 다 있습니다. 대구 안동 순천 진주 등에서 믿음 좋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동네에서 키운 소나 양을 몰고 옵니다. 한 400km 오면 이놈들이 지쳐서 제물이 되기에는 분위기가 이상해집니다. 너무 많이 걸었기 때문에 눈동자가 풀어져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는 다우너 소처럼 돼버립니다. 주저앉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평택 성안 등에서 제사장 직영목장에서 키운 이놈들은 두 시간 만에 와서 옆에서 눈동자가 파릇파릇하게 있으면 진주에서 온 오서방 박서방이 제물 여기 있습니다, 딱 가져가면 제사장이 판결을 내립니다. 불합격! 말라기를 인용합니다. 병든 제물을 바치다니, 인용하면서 이건 원래 시가가 100만 원짜리입니다. 100만 원짜리 소를 몰고 왔는데 400km를 몰고 왔더니 이 소가 지쳐서 20만원에 팔립니다. 그러고 나서 150만 원짜리 성안 제사장 직영목장에서 온 그 소를 삽니다. 그러니까 경건하고 믿음 좋은 지방민들은 제물을 바꿔치기 하면서 엄청난 손해를 봅니다. 이 모든 업을 대제사장과 그 민간업자들이 다 감당합니다. 예수님은 그걸 강도의 소굴이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부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예산이 10억가량만 넘어가도, 서울시내 교회 어른 성인교회가 350명 되면 예산이 10억이 됩니다. 성인교회가 350명 되면 1년 예산이 10억이 됩니다. 그럼 1천명은 얼마나 될까요? 3500명은 얼마나 나올까요? 100억이 되겠죠? 3만 5천명은 얼마나 될까요? 1천억이 됩니다. 우리 숭실대학교 예산이 2천억입니다. 대학교 예산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보면 한 국가의 이상인구를 1만 명으로 봤습니다. 남자 1만 명이 있는 나라가 하나의 국가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의도에 있는 그 교회는 나라가 엄청 많은 나라가 연합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서 재정부장이 됐거나 재정장로가 됐다면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기존 원장이 됐을 때는 거룩한 직책이 아니라 세속 직업이 돼버립니다. 실제로 은행에 있는 지점장들이 그 큰 교회 헌금을 주일에 와서 가져갑니다. 청원경찰 두 사람과 헌금을 다 가져갑니다. 그럼 이 돈은 어떻게 합니까? MNF 같은 펀드, 단기성, High return High risk,에 투자를 합니다. 그래서 분당에 있는 교회는 100억 정도 되는 헌금을 단기성 고수익 펀드에 투자했다가 50억을 잃고 50억만 가져왔는데 그것이 들통이 났습니다. 문제는 그 교회는 들통이 났지만 지금 많은 교회가 그 짓을 하고 있는데, 그 돈은 무슨 돈입니까? 정확하게 그 돈은 하나님께로 가는 돈이 아니라 High return High risk 으로 가는 돈입니다. 그 돈은 천국에서 아파트 하나를 분양받고 싶어 하는 타락한 분자들의 투기성 자금입니다. 그래서 우리한국교회에 거짓된 복음으로 한국교회에서는 구로동과 관악구 교인 분포 보다는 서초동과 강남구 기독교가 훨씬 더 많아질 가능성이 높은 이유가 구로동과 여기는 일단 헌금을 낼 돈이 없습니다. 이번에 금천구 관악구 20.1% 알죠? 금천구는 통계도 안 잡힙니다. 금천구 관악구가 얼마나 가난한지 몰라요. 금천구 관악구에 산다, 그 자체는 다시 말해서 통계가 안 잡히는 동네에 산다, 이 사람들은 돈이 없어 헌금을 낼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천국 같은 데 아파트를 분양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 옥성오가 <아버지 옥한흠>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 내용에 아버지를 조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책 전체는 따뜻한 화해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하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기독교에 대해 조롱을 퍼붓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편중된 기독교, 자본주의에 물든 기독교를 전파하는가를 아들이 계속 공격하고, 아버지는 계속 이 책을 읽어보라, 아버지가 2005년에 아들에게 책을 선물합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아들은 책을 씁니다. <긍정의 함정>, 아버지에게 보내면서 국제제자훈련원에 낸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응답합니다. 이런 책은 우리 출판사에서 낼 수 없다, 2005년부터 2011년까지 가시 돋친 이메일이 오고 가는데, 점점 옥한흠 목사님이 아들의 교회비판에 마음이 열립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화해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아버지 강남 서초동 신학에 대한 조롱의 절정이 펄시 콜레가 쓴 <내가 본 천국>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유명했던 책인데, 여기 대부분은 그 책이 유행했을 때 여러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책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순복음교회 강남에서 수백만부가 팔린 책입니다. 그 책의 내용은 이겁니다. 펄시 콜레란 사람이 천국에 갔다 온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놀려서 펩시콜라라고 했습니다. 펄시 콜레가 천국에 갔더니 헌금 많이 한 사람이 좋은 아파트에 살고 아파트가 under construction, 공사 중이라는 팻말이 붙었는데 거기는 헌금 작정했는데 안 하는 사람들 아파트입니다. 그다음 모든 미국에 있는 차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미국 중산층 이상의 삶이 천국사회라는 겁니다. 저는 그 책이 나오자마자 이 책의 이단성을 너무너무 소리쳐 외쳤습니다. 그런데 저는 언더그라운드 가수처럼 언더였습니다. 지금도 언더지만 그때는 더 언더였는데, 제가 여의도순복음교회 갔습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그 책이 엄청나게 팔린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갔는데 그때가 83년 정도 됩니다. 갔더니 여의도 순복음교회 목사님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그 책을 파는데, 마치자마자 그 책이 정말 불티나게 팔리는 걸 봤습니다. 문제는 옥한흠 목사가 이 책을 사랑의 교회 설교시간에 극찬을 한 겁니다. 그래서 아들이 그럽니다. 아버지 이 황당무계한 정신병자의 책을 어떻게 선전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럽니다. 너는 천국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어? 저는 천국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 지상에서 가늘고 길게 살렵니다. 펄시 콜레가 말한 이런 천국을 절대로 저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가시 돋친 대화를 합니다. 지금 우리한국교회에 모인 돈은 정확하게 High return High risk, 단기 고수익 채권에 몰린 돈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 아파트 하나를 분양받고자 하는 서초구 강남구 사람들의 투기성 자본입니다. 그러면 금천구 사람들은 뭡니까? 금천구 가리봉동 사람들은 지상의 삶이 고달프기 때문에 또 다른 생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달픕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애완용 고양이로 태어나는 불교 교리가 더 마음에 드는 겁니다. 강남에 애완용 고양이는 보험료만 20만원 냅니다. 발톱 손톱 다 깎아주고요. 그런데 금천구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발톱을 깎아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다 깎아야하고요. 인생이 너무 고달픕니다. 다시 말해서 지상의 삶이 척박하거나 삶이 부서져버리면 내세에 대한 꿈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내세, 아편을 먹어서 내세가 진짜보다 더 믿어지게 만들어서 돈을 끌어들이는 사람들, 이건 진짜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지금 한국의 잘못되고 거짓된 강도의 소굴처럼 바뀌어서 서민의 호주머니를 꺼내는 것은 너무 잘못됐습니다. 이것에 대한 분노가 예레미야 7장 11절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시편 69편 9절을 통해서 이런 강도짓, 즉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한 자리 차지하고 싶은 열망, 이 땅에서 이미 호화롭게 살고 있는 그자들이 천국까지 침범하려고 하는 마음에 예수님은 마음이 너무 부서져서 분노를 하셨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분노한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구 신학자들이 주석하는데 하나도 쓰지 않고 지나가는 데는 분노하는 예수님입니다. 서구인들의 대부분 주석서는 분노하는 예수님은 passing over 합니다. 왜 분노하는 예수님을 쓰지 않느냐면 분노는 서구인들의 정서에서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의 태도라는 겁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맥락에서 분노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지극히 거룩한 사람이 낼 수 있는 마지막 카드입니다. 예수님이 분노한 겁니다. 어떤 사람이 분노해야만 효력이 있냐면 평소에 노를 전혀 안 내는 사람이 분노해야 합니다. 일단 분노를 평소에 많이 하는 사람들은 예언자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평소에 분노를 안 하는 사람이 분노해야만 하늘의 소통이 일어나는 분노가 됩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좋으시다가 드디어 600만 불의 사나이가 되시고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가 되셨는데, 예수님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일단 허리띠를 푸셨습니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남자가 허리띠를 푼다는 말, 허리띠를 풀어서 노끈을 만들고 돌려서 짐승을 때리시고 그다음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고, 이건 아주 터프하신 겁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소는 부자들의 제물입니다. 양은 중산층의 제물입니다. 소망교회 사람들은 전부다 소를 드립니다. 금천구 사람들은 전부 다 비둘기를 드립니다. 비둘기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대제사장과 결탁한 민간 종교사업자에게 엄청난 이득을 주기 때문에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박철수 목사님과 박득훈 목사님이 이런 점에서 가장 일관성이 있습니다. 박득훈 목사님과 박철수 목사님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있기 때문에 그분들은 지금 너무 많이 따돌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박득훈 목사님은 분노하는데 익숙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절대로 화를 내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한국교회를 비판하다 보니까 점점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예수님의 육체는 당신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거짓종교인들을 식별하시는 감식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낼 수밖에 없고 그것들을 그냥 둘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액션에 강한 분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이런 장면들을 서구 신학자들이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느냐면 한 줄로 처리해버립니다. 저 같으면 이걸 굉장히 길게 처리할 것 같은데, 시편 101편 보세요. 하나님은 매일 아침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아침마다 악인을 끊어내시고 멸절시키고 성전을 정화시켜서 하나님과 소통이 일어나도록, 여호와의 영광이 그 안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입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표적을 요구했죠? 이건 구약의 역사에서 오래된 겁니다. 표적은 하나님이 주신 임명장입니다. 즉 예언자로써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예언자로써의 일종의 임명장입니다. 그래서 임명장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겁니다. 엘리야 모세 정도 된다는 뜻입니다. 엘리야 모세 정도면 이거 견딜 수 있겠는데 네가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니라면 왜 이렇게 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없는 말입니다.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여긴 몇 가지 맥락이 생략되었습니다. 무슨 맥락이 생략되었느냐면 왜 갑자기 이 성전을 헐라는 말이 나왔는가는 생략되었는데, 이 성전, 자기 몸을 가리키면서 이 성전이라는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맥락과 똑같은 말이 이런 말입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고 계속 하니까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여러분, 요나가 무슨 일을 당했습니까? 며칠 만에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나왔죠? 삼일 만에 나왔죠. 예수님은 자기가 삼일 만에 부활한다고 믿었던 것은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는 강력한 구약의 본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참조적인 말씀을 하셨고, 구약 인용적인 말씀을 하셨고, 구약의존적인 말씀을 하신 거예요. 3일 만에 예수님이 자기가 부활하실 거라는 요나의 표적 맥락과 똑같은 말을 한 겁니다. 아마 요나의 표적도 이때 말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했습니다. 무슨 표적? 표적 보여 달라고? 내가 보여줄 표적은 예수님 자신이 요나처럼 죽었다가 삼일 만에 일어나는 표적밖에 없다, 내가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본문이 그 뒤에 이렇게 나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엄청난 짓을 하느냐고 물으니까, 내가 비유를 한 가지 말해줄게, 하면서 포도원 소작인 비유를 말합니다. 그래 내가 말해줄게, 어떤 권세냐고? 포도원 소작인 비유를 말해 줄 텐데 잘 판단해보아라, 나는 하나님 아들의 권세로 일을 한다, 그런데 포도원 소작인 비유가 이런 의미입니다. 종들을 포도원 소작료 거두러 보냈더니 종들을 다 죽여 버리고 마지막 아들까지 죽여 버리는 포도원 소작인들의 만행을 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에 파송된 아들이 자기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아들로서 즉 성전을 일으켜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죠? 열매를 거두어가는, 소작료를 거두러 가는 지주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께 땅을 분향 받은 임차인입니다.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이사야 5장 7절, 공평과 자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느냐면 공평과 자비와 거룩함과 의로움과 우애가 가득 찬 사회를 만들어서, 이방인도 불쌍히 여기고 남자 여자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이 기대하는 공평과 정의, 그것이 열매입니다. 그 소작료를 받으러 온 아들을 너희가 죽였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내가 아들로써 이렇게 한다, 그런데 포도원 품꾼 소작인의 비유 앞에 무슨 말을 했느냐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내가 대답하지, 하면서 먼저 했던 말이 세례요한의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세례요한의 세례운동이 하늘로부터 온 세례운동이냐, 인간이 스스로 일으킨 운동이냐, 묻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대제사장들마저도 세례요한의 세례운동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운동인 걸 인정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운동을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운동이면 내가 묻는다, 내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을 때 요단강에 올라올 때 들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느냐? 세례요한이 무엇이라고 증거 했는지 아느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세례요한의 세례가 신적인 기원이 있는 세례라면 그때 선포된 나의 사명도 신적으로 보존된 사명이다, 라고 말하면서 두 가지 점에서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해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권세다, 16절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내 아버지 집, 문제는 하나님을 아무도 1인칭 단수 소유격으로 써서 내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단 말이에요. 이스라엘 누구도 우리 아버지라고 까지는 불렀지만 내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않았는데, 너무 독특합니다. 요한복음 5장 18-19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지금 성전을 이렇게 뒤엎는 열정은 누가 하는 일입니까? 성전을 뒤엎는 건 누가 하고 싶은 거예요? 강도의 소굴된 성전을 청소하고 싶은 건 누가 하고 싶은 일을 대행하는 거예요?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고도의 책임의식을 아들의식이라고 말합니다. 고도의 주인의식은 아들의식이라고 말해요. 한국교회를 향하여 고도의 맏아들 의식이 있을 때, 한국교회에 대한 비탄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신학교 동기 중 한 명이 저한테 너무 아주 기분이 안 좋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왜 한국교회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까? 제교회 목회나 열심히 하지, 한국교회에 대해서 비탄이 많고 울분이 많습니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구약이 아니라 예언자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 같이 종말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제가 쓴 <사도행전>을 읽어보고 너무나 자기가 은혜를 받았음과 동시에 끝까지 속이 불편하더라는 겁니다. 왜? <사도행전> 목사님 책을 보니까 목사님은 기존교회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무언가 뒤집어야 속이 시원한 것 같은 내용이 너무나 많다고, 맞습니다, 그게 지금 제가 느꼈던 바입니다, 어떻게 개교회 목사님 한 분이 이렇게 한국교회 전체를 싸잡아서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불편한 말을 계속 했습니다. 저는 한 동안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심히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비탄을 가져오고, 그런데 저는 아직까지 열심이 특심하지 못하여 집을 엎지도 못하고 현재까지 비둘기파는 사람에게 이런 말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냥 조용히 책만 쓰는데 그 사람이 또 그 책을 읽고 반발을 하니까, 그런 사람이 다 모이면 우리는 이제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겁니다. 그분도 지금 아직까지 크게 성공을 못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만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되면 우리는 불려가는 겁니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이런 거칠고 도발적인 분노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치명적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에릭 메텍시스라는 사람이 쓴 <본회퍼 순교자 스파이 목사> 이런 책을 보면 제가 추천서를 썼는데, 한 시대에 지극히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곳에 살고 있고, 지극히 악마적인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이 저곳에 살면 이 두 사람은 반드시 결승전에서 만납니다. 그 책은 본회퍼의 삶과 히틀러의 삶을 따로따로 보여줍니다. 본회퍼는 본회퍼의 자기 인생을 도모하고 히틀러는 히틀러의 자기 인생을 도모하는데, 이 두 사람이 32강 16강 8강 4강 결승전에서 만납니다. 그런 스토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지극히 의로운 삶을 추구하면 반드시 결승전에서 히틀러적 악마를 만나게 되고, 우리가 정말 성령 충만하면 이런 액션에 버금가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극히 거룩해지면 지극히 거룩하신 영이 우리교회에 임하면 저에게 임하면 우리도 장사하는 집을 만들어버리는 교회에 대해서 이런 도발적인 언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무서운 겁니다. 저는 이게 무서워요. 이런 선택까지 가는 게 무서워요. 저보다 훨씬 거룩한 사람이 많기를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뒤에 서 있기만 해도 되는 상태, 양진일 박규준 이런 사람들이 앞서고, 더 훌륭한 사람들이 도끼 들고 설 때 그냥 가서 옷만 맡아 주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데, 문제는 점점 사람들이 없어지고 제가 앞줄에 서서 전부 다 제 뒤에 서 있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이게 됩니다. <모던 타임스>라고 하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보면, 찰리 채플린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데모하는 사람의 앞잡이가 됩니다. 찰리 채플린은 자기도 모르게 깃발을 흔들면서 가는데 뒤에 데모대가 와서 깃발을 들고 서버려서 찰리 채플린이 졸지에 데모 주도자로 잡혀 갑니다. 그런 꼴입니다. 저는 저 혼자서 신림동에 언더에 있다가 계속 글을 썼는데, 어느 새 제가 한국교회에 이런 걸 외치는 사람 앞잡이가 돼버렸습니다. 이만열 교수, 박득훈 목사, 이제 아무도 이런 일에 관심을 안 갖기 때문에 지극히 마이너리그 선수인 우리들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이너리거인 우리가 장식에 떠오르게 됩니다. 원래 이런 상황이 되면 안 됩니다. 진짜 훌륭한 분들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야 하고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어야 합니다. 금천구와 가리봉동 사람들이 다닐 수 없는 교회, 서초구와 송파구와 강남구 사람들이 성황을 이루는 이런 교회가 바로 강도의 소굴과 같고 단기성투기자금의 유입과 같은 그런 현장이라는 겁니다. 결론 맺습니다. 이런 성전을 뒤엎어서 내 아버지 집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하나님과 만민의 소통이 일어나는 집, 이때 만민은 무엇입니까? 땅 끝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햇빛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 제 인생이 이렇게 고달픕니다,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집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하는 성전의 참기능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땅 끝에서 유배당한 사람, 죄를 너무 범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올라가 만나는 겁니다. 만민이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 예수 육체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이 됐기 때문에, 예수 이름은 성전 자체가 되었고, 예수의 찢어진 육체는 성전으로 가는 휘장을 열어젖힌 것과 똑같은 상태가 됐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0절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의 찢어진 육체는 성전으로 가는 지성소에 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었습니다. 결론 맺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의롭기만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비탄과 탄식으로 악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는 것, 내가 의로운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면 나는 드디어 악한 자와 조우할 수밖에 없고, 악한 자와 육체를 매개한 도발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틴 루터와 캘빈은 그들 성향이 절대로 로마 교황청과 맞붙을 그런 기개가 없었습니다. 로마교황청과 맞붙고 싶지 않았지만 루터와 캘빈과 츠빙글리 이런 사람들은 너무 거룩한 불꽃의 화염에 온 몸이 타들어갔기 때문에, 거룩한 영이 그들을 지배했기 때문에 결국은 로마교황청과 한 바탕 일전을 결승전에서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처드 베스트가 청교도시대 때 모든 부패한 목사님들과 일단 일전대승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예루살렘 성전을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여기지 맙시다. 강도의 소굴처럼 우리 내면이 하나님의 채찍질을 당해야 할 만큼 부패한 성전이 됐다고 믿고, 우리가 하나님과 오랫동안 영적 소통이 사라져버린 예루살렘 성전처럼 됐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이 분노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채찍질을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참다운 접촉하심이라는 것, 성령의 참다운 역사하심이라는 것, 부정적인 하나님의 채찍경험, 전복하시는 경험, 이것도 성령 충만한 경험의 일부라는 것을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지만 우리가 죄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지극히 부패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을 피했을 때는 우리를 채찍질해가면서까지 우리의 모든 안정된 관료주의적 책상을 뒤엎으시고 우리의 이익구조를 절단 내시면서 까지도 하나님과 소통을 원하시는 거룩하시고 참 좋으신 하나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먼 예루살렘 이야기를 할 수 없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한국교회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마음에 오셔서 오랫동안 단절된 소통으로 장사하는 집처럼 더러워져버린 제 마음의 성전을 전복해주시고, 제 마음에 가득 찬 성전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하나님과 우주적 소통을 회복하는 참된 영적갱신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헌금기도+축도)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과 오랫동안 소통이 단절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의 신선한 음성이 들리지 않고, 비둘기파는 소리와 돈 쏟아지는 소리만 들리는 퇴락한 성전 같은 저희 마음에 들어오셔서 거룩하게 전복해주시고, 저희의 나태를 채찍질로 때려주시고, 저희에게 분노를 터트려주셔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게 도와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참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아편중독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자비와 임재만 경험하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 분노를 뜬눈으로 경험하여 우리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 뜻을 온전히 영접하게 도와주소서. 주님, 우리 기독청년들이 강도의 소굴로 바뀌어버린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를 향한 참다운 비탄이 일어나게 하시고 분노가 일어나게 하시고 한국교회를 거룩한 분노로 가득 찬 청년들이 거룩하게 쇄신하고 갱신하고 일신하는 데 앞장서게 하여 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하루에 한 데나리온 벌 수 있는 직장을 갖지 못한 젊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한 데나리온을 벌 수 있는 포도원을 주시고, 자존심을 잃지 않을 일터를 허락하여 주시고, 결혼 적령기에 도달한 청년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배필을 만나게 도와주시고, 정말로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배필을 허락하셔서 창세기 1장 26-28절을 실현시키기를 원하신다면 혼돈 없고 분별 있게 각각 배우자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주님의 채찍질과 주님이 전복하는 거룩한 분노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우주적 소통과 영적회복을 간절히 기원하는 가향교우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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