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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기었노라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6 : 25∼33
`96 애틀란트 올림픽'과 관련하여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주인공을 들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올림픽 성화에 점화를 한 왕년의 권투스타 무하마드 알리 일 것입니다. 그의 모습이 점화대에 나타났을 때 현장에 앉아 있던 관객은 물론이요, TV를 시청하던 온 세계인이 함께 놀랐습니다.
그가 파킨슨 병세로 인해 흔들거리는 손으로 점화를 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한편의 드라마였습니다. 그 장면은, 다음날 모든 세계의 매스컴들이 무하마드 알리에 대하여 대서 특필하기에 충분한 극적인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인간 감동의 드라마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알리의 위대한 인간 승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흑인과 백인의 화합의 상징이라 표현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알리에 대한 사람들의 찬사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날 제가 그 장면을 보면서 느낀 것은 오직 하나―인간 승리의 허망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말하는 승리란 결코 참된 승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당시 18세의 소년으로 금메달을 딴 알리는 그 이후 20년 동안 세계 프로 권투 헤비급을 지배, 위대한 복서로, 위대한 승리자로 불후의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어떠합니까? 선수 생활 중, 상대선수로부터 가격 당한 펀치드렁크의 후유증으로 불치의 파킨슨병에 걸려 자기 스스로 자기 몸을 제어할 수도 없는 불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 54세인 그의 나이를 생각할 때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 동안 쟁취했던 그 수많은 승리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의 승리가 그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망가뜨려 놓았다면, 그가 도대체 무엇을 이겼단 말입니까? 자기의 생을 걸었던 것 때문에 벗을 수 없는 병마의 고통을 당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패배자가 아니겠습니까?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지난 8월 4일 무하마드 알리에게 다시 금메달을 수여했습니다. 60년 로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알리가 36년이 지난 지금 다시 메달을 받게 된 까닭은, 당시 알리 스스로 자신이 받았던 금메달을 강물 속에 던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의기양양하게 고향인 캔터키주로 돌아왔건만, 흑인인 자기 자신에게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인종차별 주의가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 백인 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금메달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재 수여된 금메달을 알리는 또 다시 강물 속에 던지지 않았습니다. 3만 4천여 관중의 열렬한 박수 속에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등장한 알리는 다시 받은 금메달에 입을 맞추며 감격에 겨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의 순간이 벌써 3주나 지난 지금, 그 금메달이 알리의 인생에 무엇을 보상해 줄 수 있겠습니까? 다시 금메달을 걸었다고 해서 알리의 허망한 승리가 참된 승리로 회복되겠습니까? 그 금메달이야말로 오히려 인간이 추구하는 승리의 덧없음을 증명해 주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36년전 버렸던 금메달을 다시 받았다는 것은, 지나간 자신의 인생이 패배였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올림픽 남자 100m 결승에서는 캐나다의 베일리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의 기록은 9.84초로써 세계 신기록이었습니다. 종전 기록은 2년전 미국의 버렐이 스위스의 로잔에서 기록한 9.85초였습니다. 말하자면 베일리가 2년만에 세계기록을 0.01초 갱신한 것입니다. 60년전 100m 세계기록은 10.24초였습니다. 말하자면 60년동안 100m기록은 0.4초 빨라진 것입니다. 그 0.4초를 위해 지난 6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뛰고 또 뛰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승리자들이 탄생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모든 승리, 모든 기록은 베일리의 신기록 앞에서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베일리 역시 영원한 승자일 수는 없습니다. 그의 기록 역시 누군가에 의해서 갱신되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0.01초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애를 쓸 것입니다. 운동장에 영원한 승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잠시동안의 승리요, 찰나적인 승리에 불과하기에 참된 승리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베일리가 자신의 젊음을 바쳐 세계기록을 0.01초 단축한 만큼 그의 삶이 행복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60년 동안 기록이 0.4초 앞당겨진 만큼, 인간 삶의 질이 향상된 것도 아니기에, 인간이 추구하는 승리란 긴 안목에서 볼 때 더더욱 덧없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승리란 운동장의 선수들만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절한 생존경쟁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승리를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이기기를 원하며, 이기기 위해 온갖 노력과 열정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겼을 때에는 승리의 감격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그 감격은 결코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승리는 영원한 승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얻는 승리란 알리나 베일리의 승리처럼 유한한 승리요 한시적인 승리일 뿐이기에, 오늘 승리했다는 것은 내일의 패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승리를 얻고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큰 승리를 얻으면 얻은 만큼 오히려 더 불안해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 승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으면서, 또 언제 빼앗길는지 알지 못하는 불안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참된 승리가 있습니다. 결코 패배의 전주곡이 아닌, 영원한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 영원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33a)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른바 최후의 만찬을 가지십니다. 식사후 주님께서는 무릎을 꿇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다시 자리에 앉으시어 제자들에게 마지막 강론을 행하신 바, 그 내용이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6장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지난 1년여 동안 그 말씀에 대해 깊은 묵상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체포당하시기 직전, 그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에게 그처럼 긴 강론의 말씀을 주신 이유를 본문에서 밝히고 계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 그처럼 긴 가르침의 말씀을 주신 까닭은 부자가 되는 비법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나 권력에 이르는 첩경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의 이유,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안의 존재임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이란 이 세상에서의 무사안일이나 천하태평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미풍도 없는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밤에도 불안과 초조로 잠못 이루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승리자는 승리자대로 승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패배자는 패배자대로 또 다시 패배의 쓰라림을 겪지 않으려고 불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세상을 살며 환난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얼마든지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추구하는 자이기에 불의를 좇는 자보다 현실적으로 더 큰 환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그 어떤 큰 환난도 결코 건드릴 수 없는 평안, 결코 허물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평안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해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그와 같은 절대적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절대적인 평안을 수실 수 있는 까닭은, 주님만이 세상을 진정으로 이기신 영원한 승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이기셨습니까? 인간을 억누르는 죄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므로 영원한 생명의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기고서도 그 승리 때문에 펀치드링크에 시달리는 무하마드 알리의 승리처럼 허망한 승리가 아닙니다. 베일리의 승리처럼 누군가에 의해 또 다시 갱신되어질 일시적인 승리가 아닙니다.
영원히 부활하시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주님의 승리는 완전무결한 승리, 참된 승리, 영원한 승리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안에서 절대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주님의 영원한 그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가 되는 까닭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담대하란 단어 는 `즐거워하라' `용기를 가져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언젠가는 깨어져 버릴 유한한 승리를 얻고서도 얼마나 당사자들이 기뻐합니까? 하물며 영원한 승리에 동참한 자라면 어찌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을 유한하게 만든 죄와 죽음을 이긴 자에게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가 어찌 매사에 용기를 가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세상을 승리한 승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란 더 이상 이 세상의 덧없는 승부에 인생을 거는 자일 수는 없습니다. 이미 영원한 승리를 얻은 자답게 죄로부터 자유하는 진리의 삶,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지향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승리만을 인생 최대의 목적으로 삼고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직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그와 같은 자는 이 세상에서의 승리를 수백번 얻는다 할지라도 자신과 타인을 결국엔 패배케 하는 어리석은 자일뿐입니다.
관계 당국에서는 금번 연세대 사태를 일으켰던 한총련 지도부를 끝까지 추적해서 와해시키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릇된 이념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추구하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을 도구로 전락시킬 뿐 아니라 폭력으로 체제를 전복시키려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승리를 위해서 농성장을 빠져나가려는 학생들을 몽둥이로 위협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을 따르던 학생들마저도 패배자로 만드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한총련과 우리 사이에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며칠 동안 경주에서 지내었습니다. 첫날 저녁 숙소의 방에 들어갔을 때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96년 8월 20일 새벽 4시부터 모 기업이 주관하는 대형 행사 관계로 다소의 소음이 예상되오니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기업은 해당 분야에서는 판매실적 1위를 기록하는 기업입니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갑자기 마이크 소리가 밤하늘의 정적을 깨트린 것이 새벽 1시 30분, 그래도 견딜 수는 있었습니다. 한참 지나 느닷없이 지축을 뒤흔드는 함성소리가 들렸습니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약 3천명에 달하는 그 회사 직원들이 모두 새빨간 T 셔츠를 입고 발을 구르며 함성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 함성은 사주의 사열이 끝나기까지 무려 한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 뒤 1시간에 걸친 구보가 끝난 뒤, 새벽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무려 8시간 동안이나 사장의 특별 교육이 계속되었습니다. 주제는 한가지 ― 오직 이기자는 것, 최후의 승리자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세뇌교육이었습니다. 사주가 원하는 승리를 얻기 위해 직원들을 철저하게 도구화시키는 무서운 시험장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그곳에서 한총련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김일성을 보았습니다. 히틀러를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삼고, 그 승리를 위해 인간을 비인격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결국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자는 결코 죄악과 죽음의 벽을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겨우 몇 십년에 불과한 이 땅에서의 유한한 승리를 위해 영원한 승리를 상실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서의 승리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의 승부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영원한 패배와 불안으로 행하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에 동참하십시오. 아니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자가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승리자답게 죄로부터 자유하는 삶,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평안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 함께 하신 그분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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