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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구할 것인가? 죽일 것인가?/마가복음 3:1-6

by 【고동엽】 2021. 12. 14.

생명을 구할 것인가? 죽일 것인가?

 

마가복음 3:1-6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 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 지라 2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가 엿보거늘 3예수께서 손 마른 사 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4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 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 잠하거늘 5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 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 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한 40대 초반의 그리스도인 자매 님이 건강체크 과정에서 암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암이 오랫 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행한 선고를 받게 되셨 습니다. 이 분에게는 중학교 다니 는 아들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이 자매 님에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첫째는 고 통스럽지만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이라도 이 땅에서 더 오래 생존 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어차피 이것은 고칠 수가 없는 병이 기 때문에 집에서 편안히 요양을 하 면서 덜 고통스럽게 죽음을 대비하 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 받았습니 다. 이 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 면서 내가 엄마로서 무엇이 최선일 까? 아내로서, 엄마로서 내가 어떻 게 할까? 생각하다가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그러 면서 그 치료 받기로 결단을 하고 나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매우 감동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이 것이 가정 사역 전문 잡지에 난 것 을 제가 읽어 봤는데요. 이런 내용 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리스도인으로 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따 라서 나에게는 죽음이 준비되어 있 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에서의 삶 에 대한 미련은 없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엄마는 방사선 치료를 받기 로 선택했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너희들 때문에 그 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너희들이 틴 에너지의 시절, 사춘기의 인생의 가 장 중요한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너 희들에게 엄마를 필요로 할 때 내가 너희들 곁에 있어 주기 위해서다. 어떤 대가를 치루어서라도 나는 너 희들이 정말 필요했던 시간에 엄마 가 너희들 곁에 있었다는 그 기억을 위해서 나는 이 질병과 더불어 투병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내용이었습 니다. 이 분은 자기 자녀들에게 축 복이 되는 인생 그리고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 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 땅에는 이웃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단하는 사람들 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 대로 내가 살기 위해서 이웃들을 죽 이기로 결심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 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대조적인 두 가지의 선택의 사례, 이 두 가지 대조적인 선택의 케이스 가 본문 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바리 새인들을 향해서 도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의 4절을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 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 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선을 행하는 것 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어느 것이 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하느냐? 이것 이 주님의 질문이셨습니다. 저는 먼 저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를 하려고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본문에 이런 사람 들이 등장하지요? 그들이 누구였습 니까?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본문 의 6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 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결심했습니다. 바 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가장 대표적 인 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 입니다. 아주 대표적인 종교인들입 니다. 본래 이 바리새인들은 구약과 신약시대의 중간기라는 것이 있습니 다. 한 400년 동안의 중간 시대에 민족을 보호하고 자기 나라를 외적 을로부터 다시 빼앗기 위해서 그리 고 그들의 자랑스런 종교적 전통과 하나님의 율법, 모세의 율법, 토라, 그 율법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서 일어났던 사람들 소위 하시딤이라고 불리워졌던 경건한 사람들의 후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좋 은 사람들, 훌륭한 사람들이 어느 날 잘못된 발상, 잘못된 의식구조를 그들의 생각안에 수용하기 시작한 그 어떤 때부터 그들은 사람을, 이 웃을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죽이는 사람들로 변신해 가기 시작 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저도 어느날 잘못된 우리의 의식구조를 우리 안 에 갖기 시작할 때 이 바리새인들과 꼭 마찬가지로 이웃들을 죽이는 살 인의 행렬에 우리도 가담할 수가 있 다. 우리는 이 경고를 오늘 이 본문 을 통해서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 다. 사람을 실제로 죽이는 것만 살 인이 아니에요. 정신적 살인, 종교 살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바리새인들이 어 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두 가지 이 유를 본문에서 발견할 수 가 있습니 다.
첫째는 마음의 완악함 때문입니 다. 5절을 보시면
"저희 마음의 완 악함을 근심하사"
- 저희들의 마음 이 완악했다.- 본래 이 '완악하다' 란 단어를 연구해 보시면 이 단어의 본래의 뜻이 뭐냐 하면 자기 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이웃 들을 생각할 여지가 없는 자기만의 생각으로 굳어진 상태, 이 철저한 이기적인 생각으로 견고하게 굳어져 버린 마음의 상태를 가리켜서 성경 은 '완악하다'라고 말합니다. 전혀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 이 많잖아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아주 불유쾌한 사회, 이웃을 전혀 생각할 여지가 없는 사람, 철저한 이기주의, 죄성, 인간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 본질적인 부패성 -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죄악의 뿌리가 바 로 이기주의입니다. 이것 때문에 살 맛 나지 않고 직장에 가도, 가정에 와도 우리의 삶이, 환경이 불유쾌한 그러한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가장 사소한 일에서부터 우리가 이웃들을 헤아린다. 이것이 우리 안에 깨어나 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변화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형제가 저한테 와 서 제가 조크를 좋아하니까 저한테 유우머 하나를 전해 주었는데 아주 재미있는 조크예요. 아침부터 화장 실 얘기를 해서 참 죄송한데요, 어 떤 대학교 화장실안에 딱 들어가니 까 그런 낙서가 써 있더래요.
"기억 하라! 당신이 사색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은 사색이 되어 있다."
무슨 소린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 이런 작은 이 기심에서부터 시작해서 결정적으로 한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바이러스 같은 무서운 이기심의 정 체도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안 에도 종교적 이기심이 있을 수 있어 요. 이런 마음의 완악함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런 생각에 사로 잡 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살인자로 내 몰고 있었던 또 하나의 원인은 독단 적 신앙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단주의, 소위 dogmatism 이라는 것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특별한 신앙체험을 했어 요. 신앙체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예 요. 저는 여러분도 다 신앙체험 하 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내 신앙체 험을 절대화시키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똑같이 체험을 해야돼요. 체험 을 절대화 시키는 것이예요. 혹은 나에게 편리한 어떤 종교의식, 자기 가 좋아하는, 선호하는 종교의식을 절대화 시키는 것,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서 복음이외에는 아무 것도 절대화될 수 가 없어요. 그런데 체 험을 절대화한다든지, 종교의식을 절대화한다든지, 혹은 기독교의 많 은 교리적 강조점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어떤 부분을, 중요하지 않은 어 떤 한 부분을 절대화시킬 때, 그 때 우리는 독단주의에 빠질 수가 있습 니다.
바리새인들의 독단주의를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케이스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금식에 대한 생각, 둘 째는 그들의 안식일에 대한 사고 가 바리새인의 독단주의를 대표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금식에 대한 생각, 마가복 음 2장 1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 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 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 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금식 가지고 예수님께 시 비를 걸었습니다. 그 배경은 우리가 세리 마태가 주님 앞에 돌아와서 구 원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주님은 너무 기뻐 이 마태의 집에서 잔치를 여셨죠. 15절 마가 복음2장 15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잔치를 열면서 즐거움에 막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거는 거 예요. 아마 저희들만 먹는 것이 아 니 꼬웠는지. 우리들은 금식하는데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째서 당신들은 먹고만 있습니까? 금식, 필요한 겁니다. 좋은 겁니다. 저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이 금식의 좋은 교훈도 배웠으면 좋 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나 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루 세끼씩 먹고 살아 왔다, 그건 자랑 아니 예 요. 때때로는 굶어도 보셔야 합니다. 어저께는 기아 체험 같은 운동도 벌 어지는데 좋은 겁니다. 때로는 금 식도 좀 해 봐야 돼요. 깊이, 그 시 간을 아껴 가며 기도에 몰두하는 것, 이것도 좀 해 보셔야 해요. 문 제는 어디 있느냐면 자기의 금식에 대한 선호성을 절대화 시켜서 금식 하지 않는 이웃들을 정죄하기 시작 할 때 그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 금식은 1년에 한차례 하는 것입니 다. 1년에 한차례 속죄제일에 그들 은 금식을 했습니다. 물론 비상사태 가 벌어지면 금식하기도 했습니다마 는 종교적인 규례로서의 금식은 1년 에 한번씩 했어요. 그런데 어떤 사 람이,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 작했어요. 1년에 한번만 해서야 되 겠느냐 한 달에 한번은 해야지, 그 다음에 일주일에 한번은 하자 . 예 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1주일에 한번 가지고 되겠느냐 경건한 사람 들은 일주일에 두 번은 해야지. 그 래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어요.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 제자들이 금 식 안하는 것 같거든요. '왜 당신 들은 금식을 왜 안 하는가?' 그것 가지고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예 수님 대답이 뭡니까? 마가복음 2장 19절 보세요. 같이 읽겠습니다. '예 수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 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20절 까지 '그러나 신강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예수님이 금식을 부인하지 않았 어요. 금식은 좋은 것이다.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금식의 때가 아니란 말이죠. 지금, 마태가 돌아왔 습니다. 죄인 마태가 회개하고 돌아 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 금은 축제의 시간, 지금은 잔치를 벌려야 할 시간 , 지금은 즐거워야 할 시간 이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에 와서 금식 왜 안 하느냐고 시비를 건단 말이죠. 이것이 독단주 의예요.
또 하나는 안식일의 케이스입 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을 보세요. 같이 읽겠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 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 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안 식일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 잘 라 먹은 거예요. 그러면 좇아가서 '참 그 동안 시장하셨던 가 보죠?'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바리새인들 의 반응,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그 다음 절 마가복음 2장 24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 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겨우 하는 소 리가 안식 날 하지 못할 일을 하나 이까 하고 시비 걸었어요. 시비 잘 거는 사람은 바리새인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안식일, 왜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셨습니까? 안 식의 핵심은 안식일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셨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우리의 축 복,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안식일이라는 종교의식이나 전통을 절대화 시키는 것, 그러면서 안식일 안 지킨다고 돌아다니며 정죄하고 다녀요.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세 요. 마지막 절에 보면 27절, 28절 같 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 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 에도 주인이니라' 내가 안식의 주인 이다. 내가 안식일을 너희에게 주었 다. 왜 주었느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안 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 라, 바로 안식일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셨다. 그런데 생각 안 한다 말이죠.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 은 단순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 하게 지키라 그렇게만 말씀하는데 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몇 개 나 만들었느냐? 39개를 만들었어 요. 안식일에 하지말일 서른 아홉 개 39계명, 거기다가 계명마다 다시 세칙 여섯 개씩. 하나마다 6개씩 그 러니까 서른 아홉 개 곱하기 여섯. 얼마나 많아요. 그러니까 안식일 날 조금만 잘 못하면 이것 걸리나? 안 걸리나? 안식일 날 그것 때문에 스 트레스가 되요. 하나님은 우리의 유 익, 우리의 안식, 우리의 휴식, 우리 의 새로운 창조, 우리의 유익을 위 해 주셨건만 이것을 지키냐, 안 지 키느냐 그것 가지고 사람을 얽어 매 고 있었어요. 이제 안식일은 축복이 아니고 무거운 종교적 부담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 가지고 사람 들을 죽이고 있었어요. 바리새인들 이 어떻게 죽이느냐? 두 가지로 죽 일 수 있었습니다.
첫째 말로, 이것 가지고 시비하 면서 정죄하면서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 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 다 말로. 여기 마가복음 2장에 나타 난 바리새인들의 언어, 그들의 날카 로운 말, 사람들을 파헤치고 사람들 을 죽이고 사람들을 찌르고 있었던 그들의 부정적 언어의 정체를 헤아 려 보세요. 마가복음 2장 16절에 보 시면 '바리새인들의 서기관들이 예 수께서 죄인과 세리 들과 함께 잡수 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 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평범하게 하는 말이 아니 예요. 뭐라고 말했습니까? '어찌하 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좀 잔치를 열었으면 '무슨 일이예 요? 좋은 일이 생기신 모양이죠?' 그리고 좀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아 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 께 잡수십니까?' 자, 이 바리새인들 의 의식구조를, 일관성 있는 그들 의 의식구조를 살펴 보세요. 그 다 음에 24절 또 읽어 보세요. 마가복 음 2장 24절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 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오죽하면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었겠어요? '아, 참 안됐구나!' 저 는 이땅의 율법주의자들이 나중에 북한에 가서 이렇게 종교를 선전할 까 걱정이 예요. 배고파서 죽어 가 는 사람들에게 안식일 날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돌아 다닐까 봐 걱정이 예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 한 거예요. '보시오 어찌하여 안식 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이 것이 바리새인들의 말이 예요. 그들 은 이 말로 얼마나 그들을 정죄했어 요, 이웃들을 상처주고. 신앙 좋은 사람들이 이런 독단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새벽기도 얼마나 축복입 니까? 저는 우리 교인들이 새벽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철야기도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 축복 이 되었다 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정죄하고 돌아다니 면 안된 단 말이죠. '당신은 어찌하 여 새벽기도회도 안하시고' 이러시 면 안 된단 말이 예요. 그 다음부터 남 정죄가 시작한단 말이죠. 큐티 얼마나 좋은 축복입니까?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큐티할 수 있기 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큐티하는 사람이 큐니 안 하는 사람 정죄하지 마세요. '크리스챤 즘 되 갔고 큐 티도 안하고 당신이 인간이냐고' 그 것은 자기 신앙으로 남들을 정죄하 는 거란 말이죠. 어떤 사람이 주일 빠졌는데 '당신 집사가 되어 가지고 주일 성수도 안하고 당신이 집사 야?, 잡사야?' 주일날 안 보이면 ' 집사님 아프지 않았어요? 무슨 일 계셨어요?'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이웃들을 생각하지 않는 가 시도친 언어, 날카로운 칼날처럼 날 카로운 언어로 우리가 이웃들의 가 슴에 상처를 주고 이웃들을 허는 일 들이 얼마나 많아요. 언어 조심해야 되요. 오죽하면 시편기자가 '하나님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소서' 잠언에 보면 '칼로 찌름 같이 함부 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지혜로운 말, 선한 말, 아름다운 말, 이웃을 세우고, 이 웃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말 대신 에 우리가 생각 지 않은 말, 종교적 인 독설로 우리가 이웃들에게 상처 준 말들이 얼마나 많아요. 말로 우 리는 이웃들을 죽이는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편파적 행 동으로 이웃들을 죽일 수가 있습니 다. 편파적 행동, 선택적 교제. 여기 보면 예수님 보고 어떻게 당신이 죄 인과 세리들과 먹을 수 있느냐? 제 가 어떤 아주 교회 중직에게 이런 도전을 받은 적이 있어요. 목사님,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 목사님은 같 이 다닙니까? 제가 그랬습니다. ' 저라도 같이 교제하지 않으면 누가 교제하겠어요? 그 사람' 이 선택적 인 교제, 물론 사람이 더 좋아하는 사람, 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가 있죠. 그러나 선택적 교제에 익 숙해져 보면 나는 늘 교제하는 사람 과 교제하고 어떤 사람, 일단의 사 람들,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많은 사람들을 무시하기 시작할 수가 있 습니다. 내가 노골적으로 이웃들을 헐지 않아도, 이웃들을 무시함으로 이웃들을 죽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집에서 화초 길 러 봐도 그 화초에 관심 주지 않고 그 화초를 무시해 보세요. 며칠 지 나면 시들시들해져요. 남편에게 사 랑 받지 못하는 아내들 보세요. 남 편의 따뜻한 손길, 눈길, 손길 받지 못하는 아내들 보세요. 시름시름 해 요. 이웃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무 시하는 것 이것처럼 이웃을 죽일 수 있는 독소가 없습니다. 이웃들을 살 리려면 자꾸 봐야 되요. 그리고 자 꾸 괜히 만져야 되요. 좀 봐요. 옆에 사람 보세요 좀. 째려 보지 마시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좀 봐 주시고. 우리의 눈길, 우리의 손길 이것이 이웃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웃들을 무시하기 시작할 때 이웃 들이 죽어 가기 시작합니다. 바리새 인들이 그거예요. 얼마나 이 바리새 인들의 독사 같은 시선 때문에 오죽 하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독사 같은 자들이라 했겠어요. 죽어 가고 있었던 수 많은 이웃들.
자, 이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를 해보십시다. 생명을 살리 는 사람들. 누구였습니까? 대표적인 사람. 예수님이시죠. 자, 본문에 어 떻게 시작이 됩니까? 마가복음 3장 1절에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 가시니.."
안식일이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이었을 것입니다. 다 시 회당에 들어가신 그날. 그냥 가 서 예배만 드린 것이 아니예요. 거 기서 좀 봤습니다. 손 마른 사람이 있더라구요. 예배를 드리는 자 가운 데 손 마른 사람. 예수님은 그를 보 셨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그 말할 수 없는 그 불쌍히 여기는 심 정과 그 특유의 자비를 가지고 손 마른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손을 쓸 수가 없는 사람. 손을 쓸 수가 없는 사람. 본문을 해석하는 어떤 유대인 고전에 보니까 이 사람에 대 한 얘기가 나오는데 전설일 수도 있 지만 이 사람이 석수장이였답니다. 석수공. 돌을 깎아서 일하는 사람. 그가 손이 말랐다. 이건 치명적인 일입니다. 더 이상 직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폐인이다. 이제. 얼마 나 이 사람이 인생에 대한 좌절과 낙망에 빠졌겠어요? 주께서 이 사람 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은 어떻게 봤습니까? 이 사람을. 자, 2절 보세요. 2절. 다같이 읽겠습니 다. 3장 2절 시작.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이사람 고치나 안 고치나 보 자.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관심이예 요. 이 불쌍한 사람. 내가 어떻게 도 움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이런 사고 가 전혀 없다 말이죠. 복음적 사고 가 없어요. 복음적 사고. 복음적 의 식구조가 없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복음을 받아들인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안에도 복음적 사고나 복음적 생활 양식이 없을 수가 있습 니다. 이 마가복음 2장을 우리가 깊 이 시간 있으면 연구해보시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금식논쟁. 하다가 예수님이 이 얘기를 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로운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낡은 가죽 부대 에 넣어선 안된다."
무슨 얘기인 줄 아세요? 새로운 시대가 왔어요. 예 수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생 활 양식, 의식구조가 없어요. 이건 정확히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도 가능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예수 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술을 받아들였지만 우리의 생활양식, 우리의 의식구조는 아직 도 비복음적이예요. 여전히 우리는 율법주의적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을 수가 있어요. 율법주의적 의식구조.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그 구조 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내 삶이 이 웃들에게 복음이 아니예요. 내 삶이 이웃들에게 Good-news가 아니예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이웃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는 우리 인생을 살 수가 있을까요? 두 가지가 필요해 요. 사람들을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사 람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진지 하게 모색하는 삶의 태도. 두가집니 다.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람을 소중해 여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특별 히 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 다. 한 구약학자는 구약 성경을 읽 다가 깜짝 놀랬어요. 구약성경을 계 속 읽고 있다 보니까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편 견을 갖고 계시다. 편애하신다. 누구 를 편견 하시는가 구약을 가만히 보 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고아, 과부, 나그네얘기가 구약에 그렇게 많이 나오거든요. 하나님은 이들을 편애 하신다. 맞는 얘깁니다. 맞는 얘기. 우리가 약한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 된 사람들 그들을 어떻게 다루는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 사람을 소 중히 여기는가 말이죠 여기서부터 우리의 복음적 삶의 모습은 시작되 는 것입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 다음에 사람을 도와야 합니 다. 실제로 도와야 합니다. 자, 예수 님이 어떻게 도우셨어요? 세리에게. 세리의 문제는 세리에게는 돈은 있 어요. 세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인간쓰 레기. 사람들이 버리고 소외된 인생. 그래서 예수님이 세리를 도울 때 어 떻게 도우셨습니까? 그를 상대해 주 셨어요. 그리고 그와 더불어 앉아서 잔치를 열고 계십니다. 그것이 뻔히 그 사회에 문제가 될 것을 알았어 요. 아니, 예수가 저 죄인들과 함께 앉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리를 공개적으로 상대해 주셨습니 다. 그것이 그의 필요였기 때문입니 다. 그의 필요를 도와주었습니다. 손 마른 사람에게는 어떤 도움을 줄 수 가 있습니까? 손을 펴는 일입니다. 그가 필요했던 그 도움은 바로 그 도움이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까 지 이웃들을 도울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일들은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일. 그 분은 어떻게 도우셨습 니까? 예수님은
"네 손을 펴라"
5절 에 보니까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가 회복되었더라' 저 는 손만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지 않 아요. 그 순간 그 사람 좌절과 낙심 속에 미래를 포기했던 이사람. 인생 에 대한 자존감, 희망이 회복되는 순간. 그의 삶이 회복되는 놀라운 순간 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 니다. 예수님은 그것만 도우신 것이 아니라 저는 이 사람의 영적 문제도 도우셨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이 마가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의 행동.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교훈이 많이 생략되어 있어요. 전 그 부분도 도왔을 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웃들을 돕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을 돕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안식 일에 이 사람을 치료했잖아요.
"안 식일 범한 자여"
그 오해를 받으면 서도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이 한 사람을 향한 이 한 인간을 향 한 진지한 예수님의 사랑. 아니 그 를 사랑하기 위해 마지막에 예수님 은 십자가까지 가신 것입니다. 자기 를 희생하고 자기를 죽이고 이웃을 살렸던 예수님. 이런 마음. 이런 태 도로 우리는 이웃들을 향해서 나아 가고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우 리는 이웃을 죽이는 자들일까요. 살 리는 자들일까요.

저는 최근에 아주 감동적인 얘 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중학교 선생 님의 얘기예요. 중학교 1학년을 가 르치고 있는 여선생님, 그리스도인 여선생님의 얘기입니다. 자기 반에 가르치는 학생이 하나 있는데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대요. 아주 top. 성 적이 아주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들 어왔던 학생이었는데 한 1년 동안에 이 학생이 망가져 가는 거예요.. 점 점 성적이 뚝뚝 떨어집니다. 반항적 인 아이가 되가고 불량한 학생이 되 어갔습니다. 점차 친구들이 그를 따 돌리기 시작합니다. 선생님들도 그 를 문제아로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친구가 없어요. 그는. 점점 반항적이 되가고 그는 점점 학교 수업을 거부 합니다. 선생님이 '이유가 있겠지.' 이 학생에 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부 모가 별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별거하고 있다 는. '그랬구나' 환경조사서를 봤더니 배경이 기독교인이예요. 자기도 기 독교인이니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어느날 양쪽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 었습니다.이 선생님이.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걸어보니까 따로따로 있어요. 이미. 같은 집에 있지 않고 따로따로 있었습니다. 아들 성적문 제로 의논하고 싶다고 학교에 오실 수 있냐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 소에 양쪽 부모를 학교에 같이 오시 게 합니다. 와서 보니 깜짝 놀랐어 요. 혼자뿐인 줄 알았는데 자기 아 내가 있거든요.자기 남편이 있거든 요. 처음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이 선생님에게 아주 좀 안 좋은 태 도로 나오시더래요. 그리고 설명을 드렸대요.
"이 아드님의 이 성적을 도울 수가 있는지 그리고 제대로 자 기 인생의 페이스를 찾으려면 두분 중의 한분의 도움 가지고는 안되고 두분의 도움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두분을 다 학 교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선생님에게 충격이 되었던 이 학 생의 시험지 답안지하나를 보여드렸 답니다. 이 선생님이 영어 가르치 는 선생님이었는데 답안지에, 어느 날 답안지에 한문제도.답을 하나도 안쓰고 낙서를 해버렸대요. 전체를.. 그의 일종의 반항이었죠.
그런데 이 학생의 휘갈겨 쓴 낙 서에 맨 마지막부분에서 이 학생의 마음속에 있었던 진실을 이 선생님 이 본 것입니다. 거기다 빨간 줄을 쳐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걸 좀 보시죠."

휘갈겨 쓴 낙서의 밑바닥에 숨어 있었던 이 학생의 진실한 독백이 기 록되어있었습니다.
"아빠 엄마 난 누구하고 살아? 난 누구하고 살아? 이혼하면 누구하고 살아? 아빠 엄마 난 누구하고 살아.. 아빠 엄마 난 둘다 필요해. 난 둘다 필요해"
그리 고 또 한마디 마지막에 맨 구석에
"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 아빠 엄 마 우리를 사랑해?"
보여준 순간, 순간 아버지가 고개를 떨어뜨립니 다. 엄마도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깊 은 정적이 지났습니다.
"두 분이 기 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지요? 저도 그리스도인 입니다. 기도해 드릴까 요?"
선생님이 이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기도하자 순식간에 교무실은 통곡의 장으로 변합니다. 어깨를 들 썩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합니다. 이 것이 이 가정의 회복의 전개가 되었 다고 합니다. 다시 합쳤어요.이 부부 는. 그리고 이 아이는 다시 인생의 길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 님이 쓴 글을 제가 직접 읽어봤는데
"맨 마지막에 함께 기도하고 교정을 나서는 이 부부. 이 학생의 아버지 와 엄마. 교정을 나설 때 나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광경을 보았 다. 내 생애에서 이것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이웃을 살 리는 축복. 저와 여러분은 이웃을 살리는 자일까요? 죽이는 자일까 요? 기도하십시다.

우리가 쏟아내는 말들.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는 이웃들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이웃을 살릴 수도 있습니 다.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으로 우 리는 우리의 자식들을 살릴 수도 있 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주 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 를 지셔야만 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살리 는 자. 주께서 나를 살려주시었기에 내 남은 여생을 걸고 이웃들을 구원 하고 이웃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 기는 이웃을 세우는 자로 살아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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