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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그리스도인 / 골로새서 4:10-14

by 【고동엽】 2021. 12. 9.

사랑받는 그리스도인

골로새서 4:10-14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인물들 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도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참으로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인물이 누가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학자입니다. 우리는 누가를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의 삶을 보면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인인 것을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을 가장 아름답게 쓴 전기입니다. 완전한 작품으로 세계 역사상 그만한 전기를 남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어떻게 성령의 능력을 받아 활동했는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행적과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분야를 우리에게 남겨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우리 머리속에 잘 기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누가에 대한 평가를 사도 바울이 한마디로 표현했습니다.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

사람이 자기를 평가할 때 간단한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을 간단하게 역사에 한 마디로 남길 수 있는 일, 그것은 세상에 태어난 가장 큰 보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 ‘사랑을 받는다’는 말을 헬라어로 'ajgaphto;"'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냥 인간적인 우정이나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외모가 아름답다든지 매력이 있어서 사랑하는 에로스적인 사랑도 있고, 자기 자식이라든지 가족들을 사랑하는 필리아적인 사랑도 있고, 하나님의 희생적인 헌신으로 받는 아가페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도 바울은 누가를 가리켜 아가페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이 편지에서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있으면서 바울을 도운 사람이고, 마가는 마가복음을 쓴 바나바의 생질이고, 유스도는 할례당 당원인데 이 사람들의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할례당’은 당시에 유대교인으로서 할례를 받으면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4절)

누가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고 데마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라고 했습니다. 이때는 같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 세상 향락에 취해서 사도 바울 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누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성경을 통하여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안디옥이라는 말을 많이 쓴 것을 보니까 안디옥에서 출생한 헬라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직업은 의사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드로아에서 바울을 만난 후 계속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에 동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사니까 병원을 경영해서 돈을 벌어야 될텐데 그것을 포기하고 사도 바울을 개인적으로 동행하면서 주치의로 돌봐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도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도 그 배에 함께 탑승해서 지중해에서 배가 파손되어 사경을 헤맬 때 사도 바울을 돌봐 주었고 결국은 로마의 감옥까지 따라가서 그를 돕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 어떻게 누가가 그 배에 탑승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동승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나는 사도 바울의 노예다. 그래서 나도 따라가야 한다.”해서 따라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훌륭한 문학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의사의 입장에서 잘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다른 성경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생애를 생생하고 박진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읽으면 눈물이 나지 않는데 누가복음을 읽으면 눈물이 납니다. 그것은 누가가 눈물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전기를 탄생으로부터 비교적 생생하게 기록했는데 마리아를 직접 방문해서 마리아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를 기록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와 한 얘기는 마리아 외에는 아무도 모르거든요. 또 예수를 잉태할 때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왔던 이야기, 엘리사벳의 집을 찾아갔을 때 있었던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주인공을 직접 만나지 않고는 기록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누가에 대한 사도 바울의 평가 한마디가 그의 생애 전체를 담고 있는데 “사랑받는 의원 누가”라는 말은 누가는 사랑받는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물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사랑할 사람을 예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착해서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행동이 좋아서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려고 예정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지금도 사랑받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받아줄 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입니다. 그는 당대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요, 의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인간적으로 영화롭고 부요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눅 1:2-3).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각하에게 복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 1:2). ‘내가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가리킵니다.

여기 ‘데오빌로 각하’라는 말을 썼는데 ‘데오빌로 각하’가 누구일까? 이 사람의 신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데오빌로 개인 한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방대한 글을 쓰고 있을까요?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가는 이 글을 많이 사람이 읽기를 원하고 있는데 어찌 한 사람에게만 보냈겠습니까 아마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심정으로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오빌로라는 말의 뜻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다 각하입니다. 물론 그때 당시에 어느 감독이나 황제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비밀은 사회적인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가진 것 자체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어느 개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 ‘각하’입니다. 데오빌로 목사, 데오빌로 장로, 데오빌로 권사, 데오빌로 집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 하나 가지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데오빌로라는 말을 누가복음, 사도행전 서두에 쓰고 있다는 것은 누가 자신이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의원 누가’ 이는 벌써 데오빌로 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받고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야 됩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받도록 하기 위해서 태어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려고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받을 사람이 되어주는 것은 하나님을 한없이 영화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자녀로 태어난 것은 우리 부모님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 부모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에게 그런 행복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나는 세상에 잘못 태어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이루는 것인데 하나님께 근심을 끼친다면 잘못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에게 “너는 태어나지 않았더면 좋을뻔 했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됨에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행동이 나빠서, 충성하지 않아서 그것은 두번째입니다. 그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건적인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붓 아버지나 아저씨의 관계입니다. 집에서 종살이 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해야 주인이 사랑해 주지만 자식은 먹고 놀아도 사랑해 줍니다.

우리가 애인을 만날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눈에 반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좋아하는 것은 창세 전에 예정된 사람이지만 돈 보고 사랑한다든지, 가문, 인물을 보고 사랑하는 것은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가 충성한다고 사랑하고, 헌금 많이 한다고 사랑하고, 일 많이 한다고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세 전부터 이미 자녀로 사랑했습니다.

누가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깨달았기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바울 곁에서 겸손과, 희생과, 섬김의 일생을 삽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위해서 겸손하고, 그 사람을 섬기고, 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우리가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그 밑에서 겸손하고, 섬기고, 희생할 때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누가가 바울과 함께 최후의 순간에 감옥에서 함께 있었던 비밀이 뭐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므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를 사랑해야 되겠다.’ 이것이 누가의 마음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마음 때문에 자기 모든 생을 포기하고 그 고난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결국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누가를 사랑했습니까 이제는 사람에게 잘하는 누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국 우리는 사람과 살아야 합니다. 문제도 사람하고 사는데 있습니다. 사람과 안살면 간단한데 사람하고 살려고 하니까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부부간의 갈등입니다. 직장이 마음에 안들면 그만 두면 되고, 교회 목사가 안맞으면 떠나면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떠나지 못하고 살아야 할 관계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부부이고 하나는 예수님과 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떠나면 지옥가야 되는데 어떻게 떠납니까 부부간에 이미 만났으면 잘 살아야 됩니다. 잘 못살면 지옥이니까요.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주님의 형상이 내 속에 들어와야 됩니다. 겸손, 섬김, 희생 이 세가지가 따라 붙어야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것이 바로 누가 속에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니까 그렇게 흘러간 것입니다.

누가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쓰면서도 자기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고통을 분담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 함께 있습니다.

필리핀에 유명한 부자 사업가 아들 중에 카풍카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니까 화장실과 목욕탕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가 나는지 불결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장한테 그랬습니다. “학장님,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공부합니까? 좀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알았네. 내가 알아서 조치할테니 가 있게”

조금 뒤에 이 학생이 화장실에 가 봤더니 누가 청소를 하는데 보니까 학장님이 직접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학장님이 기쁘게 청소하다가 이학생을 보고 “조금 있다가 들어오게 깨끗하게 한 후에 들어와야지.” 하고 말했습니다. “학장님, 청소부를 데려다가 청소를 하도록 하지 왜 직접 하십니까” “천국은 바로 이런 것이라네. 더러운 곳이 있으면 내가 먼저 치우고, 쓰레기가 있으면 내가 먼저 치우고, 내가 먼저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일하는 것이라네. 자네는 부자집 아들로 여기에 왔기 때문에 불결해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다네. 더러운 것을 보면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치우는 사람이 되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말로는 잘합니다. 그러나 몸이 함께 해 주어야 됩니다.

 

대만 정부 하면 장개석 총통을 생각합니다. 장개석이 일본 사관학교를 다닐 때의 일입니다. 이 일본 사관학교는 중국 사람들이 쓰는 화장실과 일본 사람들이 쓰는 화장실이 달랐는데 일본 사람들이 쓰는 화장실은 깨끗했는데 중국 사람들이 쓰는 화장실은 아주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놀려댔습니다. 그때 많은 중국 생도들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장이 중국 화장실을 보니까 일본 화장실 보다도 더 깨끗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깨끗해졌을까’ 하고는 교장이 밤중에 잠을 자지 아니하고 지켜봤습니다. 새벽 2시가 되니까 한 사람이 간소한 복장을 하고 와서 청소를 하는데 보니까 장개석이라는 생도에요. 그때 교장이 속으로 ‘저 사람은 장차 중국 대륙을 지도할 큰 인물이 되겠구나!’ 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주치의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다섯번이나 39대 맞는 태형을 맞았습니다. 그는 갖은 고난과, 굶주림과 역경 속에서 때때로 괴롭히는 안질과 매맞는 상처로부터 오는 고통으로 인하여 신음해야 했습니다. 그때 이런 것들이 짓누를 때 의사인 누가가 곁에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곁에 잠시도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사랑받는 의사였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교수는 가르치는 일로,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 일로,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 일로, 뭐든지 자기 분야에서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아무리 인간적으로 마음씨가 착하다 하더라도 교인들 은혜도 못받게 하면 사랑받지 못합니다. 의사가 온유하고 기도는 많이 하는데 병을 잘 못고친다면 사랑받지 못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충성스럽게 쓰임받는 자가 착한 종입니다.

누가는 하늘나라에 갈 때 사랑받는 사람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그것을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스데반이 죽는 것을 옆에서 보고 그것을 누가에게 얘기 해 주어서 그것을 기록했다고 하지만 들은 것만 가지고는 그렇게 못씁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스데반을 머리속에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의원 누가” 이것은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다 사랑받는 데오빌로 성도가 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 사랑받는 스데반처럼 면류관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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