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1~9
예루살렘 성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행랑의 집' 혹은 '감람의 집'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통했습니다. 이 연못가에는 행랑 다섯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지방은 더운 곳이기 때문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행랑을 짓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그 행랑 안에 많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관절염으로 다리를 저는 사람, 혈압으로 쓰러져 팔 다리가 말라가고 있는 사람, 여러 가지 환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은 물이 동했습니다. 오늘도 화산지대인 일본이나 아이슬란드에서는 자연 온천물의 호수가 있는데, 가끔 그 물이 동해서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도 가끔 동하는데, 그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그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병이 낫는다고 하면 많은 환자들이 병이 나으려는 마음에서 모여드는 법입니다. 글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병 고침을 받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병이 낫는다고 하니까 낫고자 하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들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이 환자들이 우글거리는 베데스다 연못가를 거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너무 너무 비참한 환자 하나를 보셨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 병에 시달려서 자기의 몸조차도 움직일 수 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환자 중에서 예수님의 눈에 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환자들은 대개 병원이란 데는 다 찾아다녀 보았지만 고침을 받지 못한 난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병원에서도 못 고치던 병을,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이 동할 때 빨리 뛰어들어 고침 받았다고 하니 나도 그렇게나 해 볼까 하는 막연한 희망 속에 찾아온 환자들이었습니다. 이 비참한 광경은 어쩌면 그 당시 유대인의 정신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이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못하는, 말하자면 영적인 절뚝발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서 그와 같은 고귀한 특권과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특권과 신분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말하자면 혈기 마른 사람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생존경쟁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찾아온 환자들은 가끔 연못의 물이 동하는 그때 얼른 들어가면 고침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연못가 행랑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연못의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물이 동할 때 누가 먼저 들어가나 하는 것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신 이 환자는 사실 이 축에도 끼일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이 환자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병이 생긴 지 38년이나 된, 그러니까 그의 일생을 병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살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죽어가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정도로 비참한 환자였습니다.
그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사라진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기 몸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지도 한두 해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저 '이러다가 언젠가는 가겠지' 하며,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가 없어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이 환자는 너무 너무 괴로워서 굶어 죽기라도 할 생각으로 며칠씩 식음을 끊어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지 않으니까 배는 고픈데 정신이 맑아지고 음식 냄새만 나면 너무 자극이 커서 도무지 더 참을 수 없어 음식을 되찾아 먹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환자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낍니다. 38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가 처음 병이 들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꽃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병 문안을 하고 위로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죽었다면 그를 위해서 고별예배에 참석하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만일 그의 병이 회복되었다면 친구들이 모여서 축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병으로 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건강이 회복되지도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병 문안 오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그의 방에는 이제 꽃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달이 바뀌고 해가 지나는 동안에 이 불쌍한 환자는 이웃들에게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38년이나 병석에서 고생하는 동안에 그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연못가에 누워 물이 동하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립니다. 그런데 물이 동하면 매번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차례를 빼앗겼습니다. 아마 차례로 줄을 지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우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반복되는 실망은 이 환자에게 있어서 참기 어려웠습니다.
연못가에 있던 다른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쌍한 환자는 그 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불쌍했습니다. 그래도 이 환자는 아주 포기하지 아니하고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하는 기대 속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계속 노력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를 거니시다가 이 불쌍한 환자를 보셨습니다. 지난 주일 생각한 혈우병으로 12년 동안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용기를 내어 군중들의 틈을 뚫고 들어가 예수님의 옷을 잡았습니다.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섰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하고 있는 이 38년 된 환자에게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친구가 없는 사람에게 친구가 되셨습니다. 슬픈 사람에게는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소망 없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되셨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부활이 되시고 생명이 되셨습니다.
여기 절망적인 환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38년 된 환자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것은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환자 자신이 자기가 얼마나 어려운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환자에게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아무 쓸데없는 미신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그 불쌍한 환자를 도와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벌써 오래된 환자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씀 한마디로 38년 동안 절망의 심연에서 헤매던 이 환자에게 일루의 소망이 생겼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이 환자의 대답에서 그의 형편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 환자는 베데스다 연못물이 동할 때 그것을 보고 자기가 물 속에 뛰어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써서 움직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벌써 다른 사람이 물 속으로 들어가곤 해서 번번이 실패하고 낙심하고 주저앉기를 38년간이나 했습니다.
이 환자는 이제 거의 체념하고 포기 상태에 놓여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환자를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 절망 상태에 있는 환자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희망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 환자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 분이 이 연못의 물이 동할 때 나를 들어 물에 넣어주시려는가 보다.' 그래서 이 환자는 자기의 가련한 상태를 그대로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우리의 사정을 그대로 아뢰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조금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환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동할 때 환자를 물에 넣어줄 정도의 분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구걸하는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며 보통 기도하러 성전에 가는 사람들에게 하듯 돈 몇 푼을 구걸하려는 마음에서 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거지에게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이 거지는 '이 분들이 나한테 얼마나 주시려나?' 하는 기대 속에서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면서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베드로의 손에 붙들린 이 앉은뱅이, 평생 한번도 걸어본 경험이 없는 이 사람이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뛰어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할렐루야!
이 앉은뱅이는 사실은 돈 몇 푼을 바랐습니다. 그런데 결국 돈이 문제가 아니라 평생 앉은뱅이로 지내던 사람이 온전히 성한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절망적인 환자에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얼른 생각할 때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38년 된 환자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너무 당연한 질문 아닙니까? 물으나마나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병에 시달리면서 희망이라고는 이미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거의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환자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비록 그 어느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는 못해도, 그는 낫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간절히 원하면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이 그것을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이 환자는 진정으로 간절히 그의 병이 낫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조건은 그에게 결코 좋지 못했습니다. 그는 적당한 시간에, 그러니까 물이 동할 때 연못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좋은 조건이 생기기를 기다리며 삶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좋은 조건이 주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룰 때가 가장 적절한 기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정말 변화하기를 원하느냐?"
만일에 우리가 지금의 이 상태에서 족하게 생각하면 우리 심령에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하려면 변화해야겠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38년 된 이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마음 중심의 간절한 소원을 그대로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처참한 상태를 그대로 말했습니다. 누구나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 은혜를 받습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앞으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알고 주님에게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계속 계속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이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입었던 겉옷을 벗어던지고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때 맹인 바디매오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요청했습니다.
"주님, 보기를 원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능력을 믿는 고백일 뿐만 아니라 바디매오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12년 동안 혈우병으로 앓고 있던 이름 모를 여인은 병이 낫고자 하는 것이 그 여인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병이 낫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이 고생만 하고 물질만 낭비하고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 여인은 갈릴리에 병을 고치는 분이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내가 그분의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얻을 터인데" 하는 간절한 소원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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