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가지 큰 죄악 - ④탐심
누가복음 12:13-21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의 에 브라암 링컨 대통령은 아주 휴머가 뛰어난 그런 지도자로 우리에게 알 려져 있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어렸 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한 번은 그의 집에서 두 자녀가 싸움을 하다 가 아마 그 싸우는 소리가 보통 이 상으로 요란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 러니까 이웃 사람이 달려와서 도대 체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이 집 에. 이때 링컨은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나와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뭐, 염려하지 마십시오. 인 류의 보편적인 문제가 일어났습니 다.' 말이 좀 이상하잖아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도 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그러니까 제 가 제 아이에게 호도과자 셋을 주었 더니 이 두 놈이 한 사람이 두 개씩 갖겠다고 벌어진 싸움입니다.
이 탐심이라는 것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 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성 경 본문에도 이 유사한 문제가 취급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치 는 교사로서 인기가 대단했던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가 있는데요.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 12장 1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 만명이 모여 서 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그러니까 수 만명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의 교 훈을 청취했던 것을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지요. 그때 예수께서 제자 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한참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갑자기 무리 가운 데 한 사람이 튀어 나와 예수님께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13절 '무리 중에 한 사 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하니' 아마도 형제가 있었는데 그 형제의 부모 혹은 아버지가 졸지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간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이 두 형제에게 나란히 나누어져야 할 터 인데 아마도 그 형이 동생 몫으로 돌아갈 유산까지도 아마 자기가 착 복해 버린 것 같아요. 구약의 법에 의하면 장남은 언제나 맏아들은 다 른 형제들에 비해서 갑절을 가지도 록 구약에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참 좋은 법이라고 생각을 합 니다. 왜냐하면 제가 장남이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 리 아버지가 물려줄 게 별로 없어서 내가 받을 이익이 없습니다마는 그 러니까 형제가 살았다고 할 것 같으 면 형에게 3분의 2가 가고 동생에게 3분의 1이 가는 것이 합당했을텐데 아마도 3분의 1마저 형이 가로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억을했 겠죠 그래서 예수님 앞에 튀어나와 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게 된 것입니 다. 내 형을 명령해서 유업을 나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14절을 보시 면 예수님의 대답이 아주 의외의 대 답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 는 자로 세웠느냐 우리가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접근해서 예수께서 공정 한 분배에 대한 관심이 없으셨다든 지 혹은 정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자 로 그들 앞에 다가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물런 이 형에게 문제가 많죠. 그러나 이 말을 하는 그 동생,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까 지도, 동기까지도 살피시는 분이기 에 그 형 못지 않은 동생의 마음 속에 밑바탕에 깔려 있는 동일한 어 떤 문제를 보신 거예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기 것을 달라고 요구 하는 동생의 마음 속에도 꼭 같이 자리 잡고 있는 탐심이라는 그 문제 의 뿌리를 주께서는 보셨던 것입니 다. 그리고 그 다음 절에 보시면 15 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탐심의 죄악을 말 하게 되면 우리는 흔히 부자들의 죄 악을 얼른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부자들의 문제만은 아니지요. 가난한 사람도 부자를 비 판하고 부자를 정죄하는 가난한 사 람의 마음에도 꼭 같이 탐심이라는 내적인 죄악은 여전히 존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삼 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탐심에 도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유형의 탐심. 이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 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예수께서 사용하신 생명이라 는 단어는 매우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것은 그냥 우리를 존재케 하는 생 물학적인 생명이라는 단어가 아니고 이것은 어떤 기쁨 보람 의미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생명이라는 뜻이예 요. 어떤 질적인 생명. 그러니까 제 가 이것을 세속화된 단어로 다시 바 꿀 수가 있다면 사람의 행복한 인 생, 생명이라는 말은 행복한 인생 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 면서 예수님께서 이어서 한 비유를 16절 이하에서 한 비유 우리가 잘 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어 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 다.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 서는 탐심이라는 죄악의 정체를 규 명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 탐심의 죄악에서 해방될 수가 있 느냐라는 해방의 비밀을 우리에게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자, 탐심은 어떤 죄일까요? 본문의 비유의 가르 침으로 돌아가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로, 탐심이란 우리의 이기심 을 살찌우는 죄악인것입니다. 자, 비 유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16절 '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절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이 부 자의 독백이 시작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가로 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자, 이 짤막한 독 백 가운데 여러분 지속적으로 반복 되는 단어 하나가 있었죠? 어떤 단 어입니까? 나라는 단어예요. 일인 칭 대명사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 다. 자,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 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내 모든 곡식과 물 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내가 내 영 혼에게...우리 말 번역에서 읽어도 적어도 여섯 번씩이나 나라는 단어 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원문에 는 그 보다 훨씬 더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어리석 은 부자의 의식 속에 얼마나 철저하 게 자기 중심의 세계였는가를 볼 수 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죄악 에 대한 시리즈의 말씀을 시작하면 서 거의 매 번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만 사람이 자기를 위한다든지, 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든지 자기를 존귀히 여긴다든지 그 자체를 우리 가 정죄할 필요는 없어요.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누구 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 기룰 위하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만 위하는 것, 이것은 죄악이예요. 이때부터 우리는 탐심 이라는 늪 속에 빠져들어 가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탐 심의 지배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 고 일단 우리가 탐심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는 치유하기 어려운 병적 인 이기주의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어떤 글에 보니까 병적인 이기 주의자의 모습을 비유하기를 브레이 크가 고장난 자동차에 비유했더라구 요. 컨트롤할 수 없어요. 이젠 질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것을 자기 손에 쥐기 위해 서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어리석은 부 자에게서도 그런 경향을 읽어 볼 수 가 있습니다. 18절에 보시면 더 크 게 짓고 더 많은 물건을 쌓아 두리 라. 더 많은 물건, 더 많은 곡식 더 더더.. 이것이 바로 병적인 이기주의 자의 삶의 모습인 것을 볼 수가 있 습니다. 성경은 지옥을 묘사할 때 이 지옥을 다른 말로 무저갱이라고 말합니다. 무저갱. 무슨 뜻이죠? 이 바닥이 없다. 바닥이 없는 깊은 심 연, 지옥은 끝없는 욕망의 세계, 그.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 옥에 가서도 더더 하고 목마르게 소 리치는 불만의 감옥이 지옥의 정체 라고 성경은 그리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기입니다마는 저 유명한 세계적인 부호인 쟌 락팰러라는 남 겨 놓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 번은 이 사람이 신문 기자와 인터뷰 를 갖게 되었는데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고 해요. 당신은 참 부자인데 당신이 축적한 이 모든 재물로 당신 은 만족하십니까? 락펠러가 대답하 기를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얼 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락펠러가 대답하기를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어요. 'Just little more' 조금만 더. 저는 잠실벌이 개 척이 될 때 제가 아는 어떤 교인 집 사님의 가정을 심방했던 적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한 13평 조그마한 아 파트의 집을 장만하고 얼마나 기뻐 하시는지. 같이 축복하고, 같이 예배 를 드렸는데 얼마 후에 심방을 갔더 니 그 분이 목사님 기도제목이 있는 데 기도해 주세요. 뭡니까. 우리 집 갖게 되어서 너무나 기쁜데, 저희집 소원은 20평 아파트로 이사가는 겁 니다. 그러더라구요. 그리고 얼마 후 에 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 집을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기도하면 더 잘 응답되데 요.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우리 집 의 평생 소원은 화장실이 두 개인 아파트로 이사가는 것입니다. 조금 만 더. 조금만 더. 그래서 헤어나오 기 어려운 이 죄악의 정체 이것이 바로 탐심이예요. 우리의 이기심이 끝없이 살찌우는 죄악 이것이 바로 탐심의 정체입니다. 탐심은 어떤 죄 악일까요?
둘째로, 탐심은 이웃을 향해서 문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죄악인 것 입니다. 내가 이웃을 향해서 문을 닫게 만드는 범죄인 것입니다. 여러 분, 본문에 나타난 부자의 독백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부자의 독백 가 운데 이웃이 고려된 흔적이 있습니 까? 이웃이 언급된 적이 있나요? 이 본문의 독백 가운데 당신이라는 말이 나온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 렇게 하리라. 내가 이 곡식을 어찌 할꼬. 내 곡간을 헐고 내 곡식과 내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이 부자의 언어 속에는 당신이라는 말이 존재할 여 백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부자의 세계, 그것은 네가 없는 나만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유대교 출 신의 철학자 가운데 마틴 부버라는 사람이 쓴 아주 세계적인 명저인 나 와 너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당신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 는 거예요.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 는 존재할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 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라는 사실 입니다.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이 어리석은 부자 농부 그러나 이 부자 도 나름대로 어떤 성공을 하기까지 는 얼마나 많은 이웃들의 참여와 이 웃들의 도움이 있었을까요? 그가 농 사를 짓기 위해서는 씨앗 가게 주인 의 도움을 받아서 씨를 아마 뿌렸을 겁니다. 그가 농사를 짓기 위해서 농기구 제작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는 농사의 기구들을 활용했을 것 이고, 그가 부렸던 소나 말을 정성 스럽게 키워 놓은 어떤 가축 사육자 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의 농사일을 확장하기 위해서 곡간을 짓기 위해서 아마도 그는 은행 융자 를 위해서 은행 이웃들의 도움을 받 았을 것이고 그의 밭을 일구는 작업 을 위해서 많은 소작인 그의 주변 동료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 에는 여전히 나밖에 없는 거예요. 나만 잘 살면 그만이예요. 이웃은 살든 죽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웃의 수재가 나든 어떻게 되든 나 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얘기 에 불과합니다. 얼마 안있으면 이 지구는 60억의 인구가 될 것이라고 신문에서 보도되고 있습니다. 여러 분 60억의 인구 가운데 그 약 10분 의 1, 6억 정도는 매일 밤에 채워지 지 못한 창자를 붙들고 잠자리에 든 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시나요? 이 세상에는 날마다 약 4만명 정도가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 십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는 100명 정도의 아기 가운데 40명 정도는 영양실조로 회복 불가능의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한 평생을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매년 십 만명에 달하는 어린 아이들이 비 타민A의 결핍으로 장님이 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아시나요? 나만 살면 돼요? 우리가 성경의 마 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을 읽어 보면 .자, 이 세상이 마지막 심판을 받습 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는 최후의 모습을 가르켜서 성경은 바벨론이라 고 부릅니다. 계시록 18장에 보면 이 바벨론이 무너지는 참담한 광경 을 묘사합니다. 이 바벨론이 왜 무 너질까요? 성경 학자들에 의해서 이 바벨론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 습니다 때로는 로마의 다른 명칭으 로서 바벨론을 사용했다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카톨 릭이 전성시대를 이룰 때 이 바벨 론을 카톨릭에 비교한 적도 있어요. 그러나 정당한 해석은 아니라고 생 각을 합니다. 우리가 계시록 18장을 읽어보면 이 바벨론의 정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소유 중심의 가치관이 빚어내고 있는 이 세상, 특별히 물 질주의와 쾌락주의로 대표되는 이 세상에 모습인 것이 현저합니다. 우 리가 계시록 18장에 보시면 이 바벨 론이 망하는 마지막 순간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18장 15절 이하 에 보면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 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가로 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 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 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다 이 쾌락 주의와 물질주의로 대표되던 세상 소유중심의 가치관을 벗어내지 못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너 지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이 광경을 보여주면서 계시록 18장에 서론 부, 4절에 보면 이런 경고를 합니다. 내 백성아 내 백성아 너희들은 거기서 나와서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 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우리가 이 바벨론적 라이프 스타일을 모방 해서는 안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백성아, 내 백성들만이라도 이런 죄에서 나 와라. 나와라. 그러나 이 시대를 살 아가고 있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이 물질주의적이고 그리고 쾌락중심의 가치관을 극복하며 살아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구약 에서부터 하나님은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킵 니다. 그 중에 십일조 그런데 십일 조에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식의 십일조가 요구되고 있었습니 다. 이 회식의 십일조가 뭐예요? 다 십일조 가지고 와서 함께 먹는 거예 요. 나눔의 원리가 강조되고 있어 요. 또 매 삼년 마다는 구제의 십일 조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것은 옵션이 아니라 의무였습니다. 주님은 거의 의무로써 나눔의 중요 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만 살면되요? 그래서 탐심은 이웃 과의 관계를 차단시키는, 이웃을 향 해서 창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죄악 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세 번째로 탐심은 우리 삶의 주 인되신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는 범 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을 포함해서 성경은 결코 물질의 필 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너희 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또 성 경은 가난이 미덕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또 부나 물질을 창출하 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 다.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 나 중요한 것은 뭐냐. 이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룰 알고 그 주인의 뜻대로 그 물질을 선용할 줄 아는 분명한 가치관이 우리에게 확립되어 있는가를 성경은 묻고 있습니다. 그 렇지 못하고 만약 이 탐심의 노예가 되면 내가 물질을 부리는 자가 아니 라, 물질이 나를 부리게 되면 돈이 나를 소유하게 되면 내가 돈을 소유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소유하 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탐심의 죄악 속에 빠집니다. 그리고 탐심의 죄를 갖게 되면 우리 눈이 멀어요. 안 보여요. 인생의 판단이 흐려지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 니다. 하나님을 못 보고 살아요. 여 러분이 구약 성경에 민수기 22장을 보면 아주 재미나는 얘기 하나가 기 록되고 있습니다. 거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경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영향력이 소위 모압지방 지경까지 확장되게 되었습니다. 그 러자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모압 사람들이 위협을 받습니다. 모압 왕 가운데 발락이라는 왕이 있었습니 다. 이 발락 왕이 위협을 느낀 나 머지 안되겠다, 이스라엘을 어떻게 좀 망하게 할 수가 있냐? 적어도 영 향력을 축소시킬 수가 있을까 그래 서 복수를 사용합니다. 복수를 사 용하는데 이스라엘 선지자 하나를 삽니다 그 선지자가 발람이라는 선 지자예요. 발락이 발람을 고용을 했 어요. 뇌물을 줍니다. 뇌물을 주어 갖고 네가 이스라엘을 좀 저주하라 자기 민족을 저주하라는 거예요. 처 음에는 주저도 했지만, 이 뇌물이 들어오니까 눈이 어두워졌어요. 그 래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저주 하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나 갑니다. 발람이 발락 때문에 발딱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 갑 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귀가 안 가 요. 그러죠? 나귀가 낑낑거리고 있 는 거예요. 길을 안 가는 거예요, 왜 냐하면 나귀 앞에 뭐가 보였어요. 하나님의 천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 는 거예요. 너 가면 안돼. 그런데 나 귀는 보는데 발람 선지자는 그걸 못 봐요.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선지 자가 나귀를 두들겨 팹니다. 세 번 씩 나귀를 두들겨 패니까 왜 패냐고 나귀가 소리를 질러요. 하나님이 안 보이냐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디 보이느냐말야. 그때 하나님이 한 순 간 선지자의 눈을 열어 주셨어요. 그러니까 보여요. 하나님의 천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뛰어 내려와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사람 이 탐심에 젖어 버리게 되면 눈이 멀어요. 맹목적인 인간이 돼요. 하 나님이 안 보여요. 그리고 세상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상실됩니다. 탐심은 무서운 죄입니 다; 나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 내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못보게 만드는 죄악이 바로 탐심의 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이 탐심이라 는 죄에서 해방된 인생을 살아갈 수 가 있을까요?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두 가지만 기억하십 시다.
첫째는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 를 날마다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 니다. 우리 물질의 주인을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의 주인이 누구겠어요. 하나님이시죠. 자, 드디 어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 어리석은 부자에게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 까? 본문의 20절에 보시면 '어리석 은 자여,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런데 이 장면이 아주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자, 조금 전에 그 부자의 독백은 어떤 독백이 었습니까? 내 물건 내 곡식을 어찌 할꼬. 내가 곡간을 더 크게 짓고 내 곡간에 내 물건을 가득가득 쌓아두 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심지어 자 기 목숨까지 자기 것이라고 소리칩 니다. 내 영혼에게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그래, 다 네 거 라고 생각하는 네 영혼이라고 생각 하는 네 영혼을 내가 가져가리니 그 러면 네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지 금 이것이 'ownership'의 문제예요. 소유권의 문제예요. 누구거냐?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그러나 하나 님이 내가 가져가겠어 네 생명 끝 그러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세상 떠날 때 가져가는 사람을 본 일이 있으세요? 가지고 가는 사람? 유 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남긴 에피소 드 가운데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그 의 유언을 따라 그가 죽어서 들어간 알렉산더가 들어간 관에는 양쪽에 구멍을 팠다고 그러죠.그리고 양 손 을 관 바깥으로 내밀었대요. 빈 손 으로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간다. 여러분 세상 떠나시는 사람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시는 분을 보셨습니까? .세상에 태어날 때는 두 주먹을 이렇게 불끈 쥐고 태어납 니다. 욕망을 위한 인생을 시작합니 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가는 날 우 리가 쭉 피고 떠나갑니다. 아무 것 도 가져가지 못해요. 아무 것도 가 져가지 못해요. 온 세상을 정복하고 더 정복할 땅이 없어서 울었다는 알 렉산더도 두 손을 펴고 갔어요. 아 무 것도 가져가지 못해요. 그것을 미리 준비해야 된단 말이죠. 내 것 은 없다. 하나님이 잠시 맡긴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정하면서 우리가 그것을 망각하지 않고 날마다 살 수 있어요. 저는 이 것을 위한 제일 좋은 경건의 practice가 그것이 규칙적 헌금의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십 일조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예요. 십 일조의 정신. 주님의 것을 주님에게 바친다. 그런데 십분의 일만 주님 것이 아니예요. 십일조에 대한 가장 커다란 오해는 십분의 일만 바치면 의무를 다했다. 주님의 것이니까. 십 분의 일만 주님의 것이예요? 아닙니 다. 십분의 십 전체가 다 주님의 것 이예요. 이 모든 것의 주인이 주님 이신데 그 중에 구체적으로 십분의 일을 떼어서 바쳐서 하나님의 일에 성별함으로써 내 모든 소유의 주인 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겠다는 내 신앙고백적 행위예요. 실제로 이스 라엘 백성들은 십분의 일만 바치지 않았습니다..full time 사역자 레위인 을 support 하는 십일조. 또 회식의 십일조 아까 말한 구제의 십일조 이 것을 다 합하면 거의 23%씩 매달 바쳤어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규칙적 습관, 규칙적인 헌금의 드림 의 습관 이것은 내 모든 소유의 주 인이 하나님이시다. 내가 아니다. 하 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영적인 자기 훈련의 작업인 것입니다. 하나 님, 당신이 주인이십니다. 그때 우리 가 자유를 얻어요. 자유를 얻어요.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정말 탐 심에서 자유하려면 참된 부요의 삶 을 살아야 합니다. 참된 부요의 삶. 진짜 부자의 삶. 뭘까요? 본문의 마 지막 절을 다 같이 읽어보세요. 21 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 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 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께 대하 여 부요치 못한자. 바꿔 말하면 진 짜 부자는 누구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 요한 자, 이것이 진짜 부자란 말이 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배부른 사람,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평안 으로, 하나님의 기쁨으로, 그 하나님 의 가치로 가득차 있는 사람. 쉽게 말할까요? 하나님으로 배부른 인생. 그것이 진짜 부요한 삶이예요. 저는 이 고백이 이런 사람의 고백이었다 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의 고백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니 내게는 부족함이 없다.' 이것이 부자 아니예요? 다 가져서가 아니예 요. 살제로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전부 가 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전부 로 삼은 사람의 그 고백 나는 부족 함이 없다. 이것이 진짜 행복한 사 람 아닌가요? 이것이 부요한 사람 아니예요? 내가 무언가 못가지고 있 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만 더 더 하는데 하나님으로 꽉 차있으면 더 원하는게 없잖아요. 뭘 더 원해요. 하나님으로 꽉 차있는데.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존재로 가득 찬 인생. 요즘 신문에 보시면 카톨릭에 서 성 테레사, 마더 테레사, 테레사 수녀가 죽은 뒤에 이 테레사 수녀를 성자로 만드는 문제를 카톨릭 안에 서 지금 토론이 되고 있습니다. 'saint', 성자의 반렬에 추앙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근데 반대 여론이 있어요. 그 반대 여론 가운데 하나 가 뭔가 하면 돈을 많이 기증을 했 는데 테레사 재단에. 그 일부분의 돈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는 거예 요. 근데 테레사를 옹호하는 측에서 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건 테레사 수녀가 돈을 착복을 했다든지 그랬 다는 것이 아니라 테레사 수녀는 워낙 돈에는 관심이 없었던 여자기 때문에 관리에 있어서 부분적인 mistake 이 있었다. 그것은 옥의 티 와 같은 것이지만 그의 본심이 그녀 의 본심이 어떤 돈에 대한 다른 의 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돈에는 워낙 관심이 없었다. 저는 그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을 해요. 아마 세인트 가 될 거예요. 카톨릭에서 성자로 추앙이 될 것입니다. 한번은 이 수 녀가 테레사가 미국 순회 집회를 하 는 도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굉장히 부자를 만났대요. 근데 테레 사 수녀에게 뭐 좀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뭐가 필요하십니까? 'What do you need the most?"
당 신이 뭐가 제일 필요하십니까? 뭐가 제일 필요하세요? 테레사 수녀가 빙 그레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저요?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주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그분이면 족합니다.예수 그리스도면 족합니다."
저는 이게 진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고 생각 을 해요. 그리스도가 구원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소망인 것 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능력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내 소 망이고 구원이고 능력이고 나의 꿈이고 나의 자랑이고 나의 기업이 고 나의 피난처고 예수가 나의 구원 이시라면 뭐가 더 필요해요? 예수로 꽉 찬 인생, 성령충만한 인생, 그리 스도로 꽉 찬 인생, 정말 그리스도 의 임재가 그리스도가 나의 자랑이 되고 그리스도가 나의 프라이드가 되고 그리스도가 나의 기쁨이 되고 그리스도가 자랑이 되어버린 인생이 라면 누구나 지금도 이 고백은 가능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어요. 이 탐심에서 참으로 자유한 인생, 이 자유의 삶 이 여러분과 저의 삶이 되시기를 주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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