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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 1 행28:30~31

by 【고동엽】 2021. 12. 4.

성령충만 1 행28:30~31 박영선 목사 구원의 완성 시리즈 16 of 20강 녹취

 

 

 

주제 요약

사도행전에서 성령충만, 성령세례라고 할 때, ‘능력/역동성/기적이런 측면에서

신자들이 보통 이해하고 있는데,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측면만 있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방언 (성령세례) 같은 표적을 내려주신 원래 목적,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의 전도나 입교가.. 너무도 받아들이기 힘든 전통인데,

그 성령의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입교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공식적인 증표, 나타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을, 너무 능력/역동성/기적측면에서만 보지 말고,

원래 목적은 이방인의 입교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 승인이었다’.. 는 주제입니다.

 

아래 내용은, 성령충만에 대해 모든 면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간과하기 쉬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서론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구원의 구원을 감격을 가진 성도들이 바라는 신앙의 승리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에 대한 승리

구원 받은 성도의 죄에 대한 승리는

윤리적 도덕적인 승리이기 이전에, 자기 의를 깨트리는 것으로

하나님은 성도를 승리하는 과정을 겪게 하신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죄에 대한 승리는,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하여

그리스도만 의존케 함으로 그 승리하며 나아가는데,

반대로 성도들이 현실로서 느끼는 것은, 신앙적으로 내가 실패하고 있다..

라고 느끼는 그런 오해가 있습니다.

실패가 아니고, 잘 가고 있습니다. 자아와 자기 의가 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대는 성령 충만하여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싶다는 그런 소망입니다.

이것도 잘 안됩니다.

 

첫 번째 그 신앙상의 승리도,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나타났듯이

성령충만한 그래서 힘 있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헌신하고 싶은 것도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자기 기대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런가요? 실제로 그런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제로 신앙의 승리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인도하시고 간섭하시고 계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실패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성령 충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한 삶을 실제로 허락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우리가 잘못된 기대를 하고 있어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성령 충만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충만에 대한 이해를

이 시간에 사도행전에 걸쳐 잠깐 이해를 하고

구체적인 성령 충만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성령충만이라는 이런 표현은

굉장히 오해되고 있는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성령 충만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식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강력하게 나를 장악하시는 체험으로 이해합니다.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그렇게 체험하시고 그렇게 기대하는 것만 있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18절에서 말하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 이때에 성령 충만은

그렇게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완전한 성령님의 장악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2장의 성령충만도 이해해야 하지만, -능력적인 측면-

5, 5:22절의 성령충만도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인격적, 순종적 측면-

 

그런데 우리는 행2장의 성령충만만 정답으로 생각하는

그 편견으로 인하여

성령 충만이 신자들이 구할 수 있는 신앙상의 최고의 필요이고 내용이면서도

실제적인 성령충만에 대한 성경의 이해는 부족한 상태에 있습니다.

 

 

본론 / 성령충만은 이방인 입교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이 주신 표적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는 전통 속에 살았던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과 복음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일이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어떤 표적(성령세례, 방언)이 아니고는 불가능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우리가 추적해서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를

이해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4~5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성령세례가 약속됩니다. 성령세례가 약속이 되는데

이것은 이것과는 자꾸 혼동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임하여 그 전에 없었던 힘이 생겼다라고 자꾸 생각하시는데

그 쪽으로만 가지 마시고,

보혜사 성령은 왜 오신다고 그랬어요?

 

예수님 대신에 오시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일이.. 성령님의 기본적 사역입니다.

무슨 능력 쪽으로.. 그건 부차적인 일입니다.

 

성령이 오심은 세상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와 함께

예수께서 그런 세상을 구원하려고 죽으사, 그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다.’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16:7~14

 

성령께서 누구에게 오시는 겁니까.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시는 겁니다.

그리하여 임마누엘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라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내주하러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특별한 체험, 특별한 감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부수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게 주된 성령의 사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 의미를 추정해 봅시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의 임하심은, 능력으로 채워지는 일이,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권능은 어떤 권능인가하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갈 권능입니다.

 

그런데 이 일들은 마태복음 28:18절 이하의 말씀과 함께

한국교회에 아주 중요한 미션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근거 구절인데

그 강조점 하나를 놓치고 있는데.. 봅시다.

 

마태복음 28:18~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을 읽으실 때, 여러분들이 초대교회 유대인들이 아니라서 자꾸 놓치는 것이에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이 이방인에게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구원은 이스라엘 것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온 것이지

이방을 위해서 온다고는 아무도 생각 안 했습니다.

나중에 사도행전에 그것이 분명하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1. 2장 사건

사도행전 2장에 가시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러니까 이 오순절 성령강림에 특별한 성령강림의 증거는 뭐냐 하면

다른 방언이었습니다.

 

2:7~11절에, 16가지 나라 말이 나온 것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성령강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모든 나라 모든 족속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끔찍하고, 상상하지도 못하는..

이방 선교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세례라는 표적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방인.. 모든 족속 모든 인종 각 개인의 상태와 조건에 관계없이

십자가로 구원을 얻는다.. 가 지금 확인되고 있는 자리의 것입니다.

 

2장 성령세례, 성령충만 사건의 핵심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구원 받아야 한다.. 는 의미에서

16개국에 이르는 방언이, 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자 개개인이 받는 능력으로서의 방언(성령세례)

그것을 주신 주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요3: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성령세례(방언) 받지 못하면, 천국에도 못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거에 한때 있었던 해프닝이었습니다.

 

2. 8, 사마리아 성령강림 사건

사도행전 8장에 빌립집사의 사마리아 선교가 나오죠.

 

8:14~17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게 이제 사도행전의 성령세례에 관한 아주 중요한 논쟁거리입니다.

구원을 얻는 일이 (1차로) 따로 있고, 성령 세례를 받는 일이 (2차로) 따로 있다.’ 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죠. 1)

 

이스라엘 백성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구원의 민족이었을 때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어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표는, 할례였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이 이스라엘인, 신앙적으로 이스라엘인이며

그것이 구원 받는 표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구원을 얻었다는 표가 뭘까요.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 집사가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왜 그때는 성령이 임하시지 않다가..

사도들이 가서 안수를 하니까 성령을 받았느냐.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때까지 아직 구원은,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구원을 받은 증거라는 전례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방인 포함)에게, 구원이 허락되어 있다는 것이,

그 전까지는 없었던 역사적인 시점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허락되어 있는데,

지금 사도들도, 이방인 선교를,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땅 끝까지였고, 모든 족속이라고 명을 받고 있지만..

사도들이 모릅니다.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것이 구원 받은 자들의 어떤 표라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자기들이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일을

빌립 집사가 가서 복음을 전하여, 저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것을

사도들이 가서 세례를 주어, 안수를 하여 성령이 임함으로써

어떤 사도행전에 어떤 과도기적 과정이 설명되느냐 하면

 

성령이 임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니라하는 증거가

공식적으로 확인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빌립 집사가 사도는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도, 믿는 자가 복음을 증언하여 구원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실제 구원이라는 것을 성령이 임해서 증언해주시면 그만이지만

 

아직은 세상에 그런 예가 없으니까, 사도들이 확인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무집행을 해줘서, 사도인 베드로가 요한이 와서

안수하여 성령이 임함으로써,

이들이 구원 받은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사도들이 확인 시켜주고

이제 성령이 임하면 그것이 구원을 얻은 것이다. 라는 것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 소개를 이것을 공식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해주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10, 고넬료 성령강림 사건

사도행전 10장에 가보면 분명하게 나옵니다.

그것이 사마리아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자기네 민족으로 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나라로 치지 않고 경멸했던, 혼혈인들입니다.

 

행10:44~48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이번에는 거꾸로 나타났죠.

아까 행8장은, 구원이 먼저 일어나고,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사도들이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게 하여

<그 구원 받은 것이 사실이다> 라는 것을 증언하고

<성령이 임하면 구원을 얻은 것이니라> 하고 증거가 소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10장의 경우에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

베드로를 부르라고 해서 만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 전할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하나님이 불러서 간 것입니다.

 

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성령이 먼저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들도 구원을 얻었구나. 하고

자기 눈으로 성령이 임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물로 세례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뒤에 문제가 되요.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베드로, 당신은 왜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었느냐?’

 

지금 우리는 신약 시대에 이만큼 2000년 역사를 알고 있으니까

이방인이 구원 얻는 문제에 대해서 별로 놀라지 않지만

그때 당시에는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행2, 8, 10, 19장에 나타난 성령강림(성령세례) 사건은

이방인 선교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보증해 주시는 표

그 일차적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신자는.. 예수를 믿고 나서, 성령(방언)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그 주된 1차적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강림 사건은 (주로 방언으로 해석하는데요)

이방인 선교 하라고.. 그게 하나님 뜻이라는 표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선교>에 그 표적을 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지, 1:8, 18:18~20참조

방언이, 신자가 확실히 구원 받았다는 증표로 주신 표적은 아닙니다.

 

19, 에베소 사건

191~7절을 읽어보세요.

 

아볼라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그러니까 여기는 이제 바울은 공식적인 사도가 아니에요. 이 당시에.

나중에 사도로 인정을 받지만, 처음 열두 명에 끼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제 사도로 부름을 받고 이 일을 하는데

그가 에베소 교회에 와보니까, 아볼로가 와서 먼저 복음을 전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무엇부터 물어봐요.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를 묻는다는 말이에요.

왜 묻지요?

그것이 구원의 증표거든요.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고, 제대로 구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저들이 믿고 그리하여 성령을 받지요.

 

그러니까 어디로 옮겨가고 있느냐 하면

<성령이 임하신 것이 구원 받은 증거다.> 이것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할례로부터 성령으로 옮겨가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으로 국한 되었던 구원의 대상이

이제 사마리아와 유대와 땅 끝까지 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것을 어떻게 보고 싶어 하냐면

성령의 의하여 권능을 받고 힘 있게 역사하는 것으로만 강조를 해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자. 이런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전체를 힘과 역동성(능력)으로만 이해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의 그 구원의 충분성,

예수로 말미암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성, 그 혜택이 모든 시대,

모든 족속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그 일의 예수님의 죽음이 전 세대 전 민족에게 구원으로 실제적으로 찾아가고 있느냐.

이렇게 전체적으로 읽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성령행전을 이렇게 성령의 폭발성 같은 역동성으로만 이해를 하면

사도행전을 끝에 시시하게 끝나요.

 

사도 바울이 잡힌 곳에서 성경공부를 계속 하니라., 이렇게 하고 끝난다고요.

(사도행전의 끝이, 전혀 역동적이지 않죠)

그렇게 읽으면 끝에 가서 재미가 없어지죠.

 

우리는 사도행전 후서를 씁시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

열심을 내는 것에 대해서 비난을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일하심의 모든 근거는

십자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의 능력이

우리 모두를 구원했고 찾아왔고 우리로 헌신케 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우리한테 할 일 다 했고

이제 우리가 주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만 남은 것 같은

그런 식의 발상을 가지는 것은, 신앙 상의 정확한 이해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령 능력) 하셔도 됩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났습니다.

 

 

마치는 말

 

그래서 우리는 오늘 날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그냥 우리에게는 그냥 확인 되는 성령의 임재는 느껴지지 않느냐.

이게 이제 답답하거든요. 로마서 8:9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꼭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먼저 가지게 되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성령을 받았나, 안 받았나,

이 확인에 몰두하게 되고, 그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나는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으로 갑니다.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일은,

순교의 자리를 앞에 두고서, 하는 고백이 진짜 고백입니다.

오늘날처럼, 그저 쉽게 고백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신 줄 무엇으로 아느냐.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지로 확인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기적을 목격한 자들에게서도

성령의 역사 없이는 그가 눈으로 보아 가지고는 예수를 믿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체험이 우리를 확신케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보거나 우리가 체험한 기적들로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야 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 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누구시고 내가 누구인 줄을 압니다.

 

이런 구원의 확신 문제, 구원을 확인하기 위한

성령 임재에 관한 이런 문제들을 아주 기독교 교회사 속에서는

아주 오래된 어느 시대에나 일어나는 일반 성도들의 현실적인 고민거리들입니다.

 

왜냐 하면 서두에 시작한 것과 같이 내가 정말 구원을 받았고

성령께서 임하시고 계시다면 내 신앙 형편이 왜 이것 밖에는 안 되는가.

이것과 물려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신앙 생활을 제대로 된 구원을 확보했다면

이것보다는 나아야 되지 않는가., 라는 현실적인 자기 신앙에 대한 불만족이

구원 자체의 의심으로, 그것을 확인하려니까

내 고백 가지고는 모자란 것입니다.

 

, 나는 예수를 믿는다. 또는 결심, 각오, 헌신, 다 동원해 보았으나

결과가 안 나타나니까 틀림없이 성령께서 안 오신 탓이다.

성령께서 오신다면 내가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이것보다는 더 크게 되어야 할 것이다.. 해서

잘 아시는 대로 앙심 먹고 성령 받으러 산 기도를 가는 것입니다.

 

그걸 흉 볼 것은 없습니다. 그 심정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해봤으니까요.

이 모든 문제는 지금 앞에서 제가 다윗, 베드로, 바울을 언급해서 확인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성령 충만도 우리가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의 기대와 다른 현실 때문에

우리가 왜 예수 믿는 현실이 이 꼴이냐,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탓이다..

이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현실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보다는 훨씬 나아야 된다고

다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 승리가 있어야 하겠고

헌신된 신자로써의 삶의 멋진 현실이 있어야 하는데

지지고 볶는 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거든요.

 

그래서 1차적인 답은 무엇이었죠?

하나님이 우리를 신앙 상으로 승리를 주시기 위하여

그 과정으로 삼으시는 것은, 문제 삼으시는 핵심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죄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자기 의를 꺾는 것입니다..

 

이제는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이죠.

성령 충만은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시고 찾아 오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를 고백케 하신 것으로

충분히 우리는 우리가 성령께서 임재하신 존재라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확인 방법은 없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성령께서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임재를 주시는 적이 있는데, 그것은 언제나 이런 경우입니다.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을 때.

-또는 특별히 그에게 위로하며 확인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어떤 분발과 각성할 계기가 필요하면 오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필요하다면

언제나 그에게 더 특별한 간섭으로

그를 하나님의 자녀의 마땅한 완성의 자리에서 실패치 않게 개입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뭐냐 하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지금 잘 하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물론 잠자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요)

 

다음 시간에, <16, 성령충만 2>에서

제가 이 내용을 성령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과

구원의 완성을 지금 한 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고

우리에게 간섭하사 이루시는가를 여러분들에게 증언하겠습니다.

 

그것을 들으시면 지금 우리가 가지는 이 갈증들, 우리 자신에 대한 이 불만,

그래서 생겨 파생되는 구원 받는 것이 맞나, 하나님의 사람이 맞나,

이런 오해들이 무엇 때문에 생겼고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성경 말씀으로 확보하여 확신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

 

1) 소위 ‘2nd blessing’이라는데, 웨슬리가 주장했습니다.

그런 형식으로 은혜를 받는 사람도 일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모든 크리스천에게 100% 적용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설교는, 사람이 중생할 때 (그 중생이 회개를 동반한 확실한 경우)

벌써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무슨 ‘2차의 별도 성령체험이 필요하냐?’인데

1차 중생이 결단주의로되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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