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복음의 능력 / 박영선 / 구원의 완성 제3강

by 【고동엽】 2021. 12. 4.

지난 시간에도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만 한국 교회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를 예수 천당이라는 이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 구원확신, 헌신, 천당, 이라는 조금 더 발전된 내용을 한국 교회가 가지게 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근데 이런 식의 이해가 예수를 믿으면 천당간다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확신하여 살아생전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다라는 이해는 구원 자체에 대한 이해 발전은 없습니다. 구원 자체에 대한 이해는 거기에 진전이 없고 구원을 얻은 자가 가지는 보답, 이라는 차원에서의 헌신이 한국 교회의 중요한 신앙 행위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전에 핍박기에 최??(1:22) 목사님으로 인해 유명해진 예수 천당으로 표현되었던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에 관한 이해와 오늘날 평화기에 한국 교회가 부흥기를 가지고 그 헌신으로 열매를 맺어온 성공 시대에 가지는 구원에 대한 이해는 그런 의미에서 다 원색적이고 일차적인 죽어서 천당간다에서 발전된 것 이상은 없는 셈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가 남은 생애 동안 주를 위하여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우리가 해결했다 할 수 있으나 구원 자체에 대한 이해는 아직 부족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성도들이 자신에 대해서만은 이제 더 이상 뭐 할 게 없는, 구원은 해결된 것 같은 확신을 가지게 되어서 신앙 생활이 타인을 위한 일, 대표적으로 전도나 선교로 내용이 이해되고 자신을 위하여 구원이라는 약속 속에 남겨진 일이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치 못하는 오늘날 한국 교회 신앙 형태를 낳았습니다.

 

다른 의미로 매우 구원파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에게 일어날 모든 구원이 끝났다라고 믿는 것인데 지난 번에 설명한대로 신분과 운명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으로써는 다 끝난 일이고 동시에 진행되고 완성되어야 할 구원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의 이해와 약속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라고 말씀드린 부분을 우리 한국 교회가 좀 더 이해해야할 것으로 믿습니다. 구원에 대한 말씀을 좀 더 성경적으로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 이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3~6절)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3절에서 6절까지의 구원에 관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그의 은혜와 신실하심과 약속을 따라 예수 안에서 이루셨고 그리고 장차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자리까지 목적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부족해보인다면 11절을 봅시다.

 

(에베소서 1장 11~12절)

엡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1: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는 구원의 미래적 완성이 좀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구원은 지난번에 설명드린대로 이미 일어난 구원이 있고 진행되는 구원이 있고 기다려야할 약속의 미래에 완성되는 구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신학적으로 칭의, 성화, 염화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죄와 사망에서 꺼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찬송이 되는 자리까지 목적된, 그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12절에 있는 설명이 아주 기억할 만하죠?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더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구원받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찬송이 되는 겁니다. 은혜와 구원을 하나님 앞에 찬송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찬송으로 돌리는 것도 틀리지 않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의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고귀함과 복됨과 영광됨으로 인하여 구원 받은 그의 백성들이 영광에 지극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 이것이 구원에 대한 성경의 설명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을 확신하여 남은 생애를 주를 위해 산다는 헌신으로 일찍 연결되어서 쓸모 있는 인간이 자꾸 되려고 합니다. 큰일을 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일이 힘에 부쳐서 우리를 써먹으려고 구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우리를 목적으로 하고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가 은혜에 보답하느냐로 영광을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의 영광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라는 것이 구원에 가장 잘 나타난다는 차원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가 드러나서 영광을 받으신다라는 차원으로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쓸모 있음, 능력이나 유용함의 문제가 아니고 됨됨이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신적 의도와 내용으로 충만한 자의 아름다움, 영광, 거룩함, 이런 됨됨이를 따지고 있지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서 감동시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게 만들었냐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헌신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항복,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소원들이 빚어내는 반응입니다. 쓸모 있고,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놀라움에 대한 반응입니다. 내용과 그로 완성되는 우리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광에 대한 이해가 구원에 대한 본질적 이해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강조하다시피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시고 약속하시고 작정하셔서 우리의 생애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진행되어서 완성될 영광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서 조금 더 구원과 구원에 연결된 복음 문제를 조금 더 소상히 풀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1장으로 가겠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란 뭐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게 복음입니다. 좀더 성경적인 의미를 충실히 살려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뭐가요? 복음이요. 복음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살아나셨다.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를 들어 에베소서 1장에서 이렇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7절.

 

(에베소서 1장 17~19절)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엡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절 얘기가 그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백성삼기 위하여 어떤 능력을 도입했는지 아느냐. 어떤 힘으로 간섭했는지 아느냐. 어떤 능력과 열심을 동원하여 이 일을 진행하는지 아느냐. 이겁니다. 20절. 그 능력이.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와 실제적인 힘을 다 포함하여, 그 능력이.

 

(에베소서 1장 20~22절)

엡 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두 가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 이게 복음이죠. 무엇 때문에 구세주가 오셨습니까. 복음의 목적이 먼저죠. 구원을 주시려고.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또 부활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인한 구원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이 계속되는 사역 속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요, 사랑이요. 우리가 이해한대로 복음입니다. 구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복음과 구원의 관계는 보시다시피 복음은 구원을 시작하시고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며 능력이며 그 능력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고 부활하사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속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지금 시행되고 있는데 마치 우리는 십자가로 구원이 끝나버린 것처러 생각해서 죽을 때까지 이 은혜를 보답하기 위한 일을 하자라는 미션으로만 가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소중한 일입니다. 성도들이 마땅히 주를 위해 살아야하고 주의 뜻을 이루며 주의 나라와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을 아직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구원의 시작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도 지금도 과제거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며 진행되는 은혜요 복들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디모데전서 1장으로 가보겠습니다. 12절 이하에 복음의 자기간증이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16절)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의 고백은 우리가 주로 바울이 유명한 사도요,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구원에 대한 감격과 헌신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요,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맡기고 밖에 나와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교회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위해 쓴 편지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헌신과 열심을 강조하는 부분이 아니고 교회에서 무엇을 주의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다룬 부분입니다. 1장 3절.

 

(디모데전서 1장 3~4절)

딤전 1: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딤전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다른 교훈, 이게 큰 문제였습니다. 어느때나 그렇듯이 기독교가 가지는 가장 큰 일차적인 적은 성경적인 내용 아닌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루는 교훈은 이단사설들이 아닙니다. 분명합니다. 예수 믿지말고 다른 거 믿자는 얘기는 분명 우리가 구분이 되는데, 이 디모데전서의 다른 교훈을 경계해라는 것은 이단사설이 아니고 같은 신앙을 논하고 같은 고백을 논하는데 빗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 일어나는 가장 큰 오류 중 하나입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이뤄가고 있는 그의 나라와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것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묻기보다 가르치고 주의를 주죠. 디모데야. 교회에 봉사하며 교인들을 교훈하며 가르칠 때에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내용으로 양식을 삼고 있는가를 봐라. 양식을 삼는다는 것은 그것을 먹어서 크고 있느냐. 그것을 먹고 싸우느냐, 그것을 먹고 크고 있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다른 교훈, 다른 교훈은 4절에 있는 것과 같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양식으로 준 것을 먹지 않고 놓고 이것 갖고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틀린 거라는 거죠. 옳은 데 다른 소리를 할 수 있어요. 이걸 먹으면 콜레스테롤이 올라간다든가, 이걸 먹으면 당뇨에 걸린다든가. 옳은 소리지만.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은 이런 변론으로 인하여 누가 더 똑똑한 가로 오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 말이 옳을지라도 그렇게 해서 나는 너보다 똑똑하다 너는 나만 못하다라는 논쟁을 야기시킨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되는 것이죠. 경계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말씀을 허락하시며 함께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것은 그 안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으로 각각의 구원이 진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뒤에 이렇게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0절)

딤전 1: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다른 교훈을 하는 자를 경계해라 하면서 나오는 말이죠. 바른 교훈은 무엇이냐. 바른 교훈이라는 것은 건강한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의학적 용어입니다. 먹고 커야 돼요. 건강해져야 하는데 논쟁을 해서 누가 옳으냐라는 우월감의 싸움을 하거나 지적 자랑을 하거나 양식 삼지 않는 일들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이단사설만큼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의 진전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5절에서 봤습니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이 뭡니까? 사랑은요, 가장 중요한 것이 잘난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제 12절 이하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자기간증을 연결해보게 되는 겁니다. 10절에 있었던 다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입니다. 경계의 목적은 5절에 있는 바와 같이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어야 하는데 이걸 가지고 싸움박질이나 하자 그러고 시비걸고 따져서 먹고 크지 않는 자가 잘못하는 것이다라는 거죠. 그러면서 11절.

 

(디모데전서 1장 11절)

딤전 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그러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는 하지 말고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는 것은 다 복음이라구요.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이죠. 우리의 믿음, 가르침, 복음들은 다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가야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자신의 성장에 위해서 쓰여진다는 얘기는 듣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듣고 선택한 걸로 끝나버렸습니다. 예수를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로 한 번 제시되고 믿은 다음에는 타인을 위해서만 가지 자기 자신 안에 구원의 완성이 계속되는 문제는 한국 교회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얘기입니다. 12절.

 

(디모데전서 1장 12~16절)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의 능력은 나 같은 것을, 훼방자요,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를 여기까지 바꿔놓는 능력이니라. 이것을 서두에다 질문으로 만들었습니다만 겉으로는 비슷해요. 구원을 얻고 감격하고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해도 본문이 딱 들어맞아 보인다니까요. 바울이 훼방자요, 핍박자였는데 하나님께 구원을 얻고 은혜를 얻고 내 남은 인생은 주를 위하여 살겠습니다. 라고 이걸 이해해도 하나도 어색한 데가 없다니까요. 3절부터의 내용과 연결해보니까 지금 바울이 하고 싶은 얘기는 바른 교훈, 하나님께서 허락한 능력의 복음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겁니다. 이 무식한, 이 미련한 나를, 여기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얼핏 읽으면 그래도 알고 한 짓은 아니니까 용서할 만하다. 그런 느낌이 들 뻔하죠. 그게 아니고 정말 알짜 무식쟁이였다. 이겁니다.

 

성경에서 무식하다는 것은 죄의 큰 내용 중 하나입니다. 거역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큰 죄의 목록이죠. 그런데도 구원을 입어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본이 되게 하려 하셨다는 거죠. 내가 한 헌신이요 내가 한 작정이요 내가 한 감격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종까지 세워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어떤 은혜와 어떤 의지와 어떤 능력을 동원했는가를 보이시는 거라니까요. 복음이란 이런 것이다. 날 봐라. 이 장면에서 나를 본 받느 자 되라 그럴 때 신앙의 핵심을 말하는 것이지. 올바른 방향을 위해 본 받으라는 것이지 내 헌신과 결단, 의지를 본받으라 그러지는 않습니다. 우리 안의 요인과 우리 안의 조건이 있다고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말하자면 사도 바울의 고백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고백은 끝이 17절로 이렇게 마쳐집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

딤전 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왜 하나님께 하나님께 영광이 가겠습니까. 왜요. 하나님으로부터만 출발하고 하나님만이 하셨고 하나님께 속하신 것으로 채우시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허락하시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하나님께 감사로 갑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구원을 점검함에 있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믿음이 조건이 아니라는 걸 설명할 때 그랬습니다. 믿음의 법을 확인하는 법. 거기 자랑이 있냐, 없냐를 확인하기로 했죠. 나는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라고 믿음을 조건으로 삼으면 자랑이 되서 너는 왜 안 믿냐, 라고 말을 하게 된단 말이죠. 잘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결정하거나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믿게 된 것입니다. 이미 하나의 결과거든요 하나님 은혜의 결과인데 우리는 조건으로 인식합니다. 거기서부터만 의식이 있기 때문이죠. 구원에 관한 우리의 감각이 믿음, 혹은 회개로 시작되는 데 밖에 없습니다. 그 전은 감각이 없어서요. 믿음이니 회개니 다 감각이 회복된 것은 이미 살아난 증거거든요. 살아나야 생명이 돌아와야 믿든지, 선택을 하든지 회개를 하든지 할 수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신앙의 어떤 지점에 있어서 시작이던 과정이던 완성이던 성경이 우리가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를 물을 때는 언제나 이 판별식을 갖다대는 겁니다. 그게 자랑입니다. 바울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보십시오. 내가 나댄 것은 내 신 안이다. 하나님께만 영광.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은 지금 디모데전서에서 보시는대로 바울이 이해한대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대로 제대로 이해하자면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과정을 이루시고 끝내신다. 까지가 내용이면서 약속이면서 작정이요,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야 말 의지요, 능력으로 약속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남을 위해서만 믿지 않고 구원을 먼저 얻었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 신자된 인생을 삽니다. 로마서 5장을 보십시다.

 

(로마서 5장 1~2절)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이 일들은 신앙적으로 디모데전서에 등장한 바와 같이 거짓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랑으로 가는 것입니다. 능력으로 가지 않고 성품으로 간다는 걸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가는데, 문제는 두고두고 더 우리가 언급을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8장에. 사랑은 이런데까지도 등장합니다. 8장 1절.

 

(고린도전서 8장 1~3절)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지식과 사랑을 비교하고 있죠.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사랑으로 가야된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 는 건 옛날 고대 사회는 그 국가가 섬기는 신에게 제사로서 육류를 동물들을 제물로써 바치고 나서야 시장이 흘러나왔습니다. 육류 고기들은 다 우상 신에게 바친 제물이었습니다. 기독교 인들은 그래서 그것을 먹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고기 먹지 않겠다 했던 게 이것과 같은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제 고기 맛을 이미 들인 예수 믿는 사람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저 같이. 고기는 먹고 싶고. 고기 먹으면 우상 제물이라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 몰래 먹는 일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실제로는 신자들 속에 먹어도 된다. 왜냐. 우상은 없으니까. 우상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없는 거 아니냐. 없는 거 앞에 놔뒀다고 해서 왜 못 먹냐.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 제사 음식 먹으셔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귀신이 돌아오지도 않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 잘난 건 알겠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신자를 위해 너 먹지마라. 그럽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고, 우상 제물을 먹는 걸 보면 하나님과 다른 신을 동시에 섬겨도 되나. 로마 시대에 여러 신이 있었잖아요. 아폴론, 주피터, 여러 신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로 그의 신앙을 혼돈시키고 약화시킬 수 있으니까. 네 음식으로 인하여 네 형제를 실족케 하지마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먹던지 마시던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가 등장하는 겁니다. 지식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이 사랑으로까지 가야 한다. 이렇게 사랑이 오거든요. 우리가 우리 신앙을 점검할 때 여러분이 일 많이 하고 사랑이 없어지는 일은 잠깐인 거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일 경쟁을 벌여놓으면 싸움이 많습니다.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이런 이유로 등장합니다. 12장에 등장하는 모든 은사들을 13장으로 끌고 가는 가운데 연결 구절이 뭐냐면 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큰 은사 그러면 사랑이냐.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보이겠다는 것은 분명 사랑이죠.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너희에게 좋은 길을 보이리라. 둘이 같으냐, 그렇지 않습니다. 큰 은사란 교회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라는 차원에서 기왕이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자 되라고 권면합니다. 무슨 은사던지 은사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타인을 위한 것이다. 타인을 위하는 최고의 원칙은 사랑이다. 그래서 13장이 12장의 은사장을 이어서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사랑으로 연결되는 이유입니다. 사랑은 어떻다는 거죠.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굳히지 않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이겁니다. 2절.

 

(고린도전서 13장 2절)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참 무서운 말입니다. 사랑 없이 하면 소용 없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적인 내용은 본체가 사랑이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사랑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영어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Withour love, I am nothing. 내가 없는 겁니다. 내가 사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본질이어야 합니다. 사랑에서부터 무슨 말이든지 나와야 합니다. 무슨 행동이든지. 하루 아침에 절대로 안 됩니다. 아는 데 30년. 해야겠다 결심하는 데 30년. 실천은 해보지도 못하고 보통은 돌아가시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싸움입니다. 이걸 우리가 평생동안 어떻게 배우느냐. 우리 인생 속에서. 내가 가진 열심. 내가 가진 고백. 내가 가진 소원. 그것이 실력으로 나타나기에 얼마나 많은 것을 넘어와야 되는가. 속에서 배우는 게. 결국은 무슨 싸움이냐면 내가 죽어야 된다는 싸움입니다. 의욕을 가지고 열심을 가져도 도무지 이 신앙의 완성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은 불을 붙여서는 안 일어납니다.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하는 얘기입니다. 결혼할 때 부부가 사랑에 불타서 해요. 그때 사랑은 정열과 진심입니다. 우린 그게 단 줄 알아요. 살아보면. 정열과 진심으로는 사랑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끝나고 설문조사를 해야겠습니다만, 몇 달만에 부부 싸움을 하셨습니까. 3년이면 뭐 온갖 정이 다 떨어진다. 이게 뭐 통계인데, 우리가 왜 놀라냐 하면 진심과 열정이면 사랑이 성립이 되고 사랑이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믿습니다. 살아보면 그렇지 않죠. 사랑엔 더 많은, 다른 요소가 있다는 걸 배웁니다. 뭡니까. 오래 참는 겁니다. 우리 말은 좀 물러요. 영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Long suffering. Love is long suffering. 환장하겠죠. 딱 맞죠 지금 형편에. 여러분, 참으세요. 애를 끊자. 누가. 평생 같이 살기로 서약한 배우자가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이 일본 해군을 놓고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집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면서 어디선가 ??(37:58), 나의 애를 끊나니. 마누라가 호각을 불곤 했던 모양이죠. 이거 해나가는 겁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얼마나 많이 기다려야, 얼마나 많이 참아야, 결국 어디로 가야만 되느냐. 자기가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게 사실은 신앙의 완성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대로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지어다.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진행하시고 베푸시는 은혜에. 여러분을 맡기는 참다운 헌신으로. 신앙의 기쁨. 인도함을 받는 여러분이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냉수한그릇 창고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