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롬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구원문제를 논할 때,
구원의 은혜성이 당연히 제일 초점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다’ 이렇게 선언되고 있죠.
그런데 이 은혜를 강조하면,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로마서 5장에 있는 식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거든요.
우리가 구원을 요청하거나,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구원시켜 달라고 빌기 이전에,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거든요.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구원함을, 이미 받았다 말이죠.
말하자면, 우리의 반응이나, 무슨 각성이나, 결단 이전에
구원이 사실은 우리에게 성취되었다 하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고,
우리의 결단이니, 영접이니, 믿음이니 하는 것들은
조금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말하면 이미 결과이지, 조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당연히 무슨 질문이 나오느냐면 ‘그럼 우리는 뭐야?’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장1절이 바로 그 이야기인데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말이 그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은혜로, 공짜로 구원을 주고
나의 조건이나 나의 반응이 아무 이유가 안 된다면,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느냐..’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죠.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이런 의아스러운 생각이 나와야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을 제대로 설명하는 겁니다.
이 구원 문제에 대해서, 이런 식의 설명이 가장 많이 쓰일 겁니다.
(약간 성경의 설명과 빗나간 것인데
성도들은 이쪽을 더 쉽게 이해하는.. 그런 설명입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셨다.
'누구든지 그 은혜를 믿고 가져가지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그러니까 밥상위에 밥을 다 차려났다, 와서 먹기만 하면 된다.'
이런 식의 설명을 제일 많이 하고 있고, 성도들에게도 이게 제일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이제 각각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 까지도.. 그것도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것까지도 아니라는 겁니다.
주 안에서 이루어놓은 구원을, 공짜로 아무나 믿음으로 선택하고 가져가는 싸움이
구원이 아니고,
구원이라는 결과가 우리 안에, 예수로 인하여 우리 안에,
결과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고 얘기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구원의 소극적 측면, 적극적 측면
▶그러니까 무슨 질문이 나오냐면, ‘그럼 우리는 뭐 하는 겁니까? 우리가 할 일이 뭐 있습니까?’
‘그럼 우리가 예수 믿는 이후로, 우리의 책임과, 우리의 할 일이 뭐가 남았습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 해주신다면서요?
그럼 우리가 열심 낼 필요 없이, 계속 죄에 거하고 있어도 되겠네요?
라는 질문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당연히 나와야,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렇게 설명하면, 예외 없이 이 생각이 든다니까요.
‘아니 이게 뭐야 이런 구원이 어디 있어?’ 라고 말이죠.
▶그래서 이러한 질문이 생기는 이유는,
구원을 죄로부터의 용서함, 사망으로부터의 면제, 영원한 형벌로 부터의 구제라는
소극적 측면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가 본문 롬6:2~4절,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앞으로 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게 뭐있어?’ 라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이 벗어남,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벗어남이, 구원의 전부인줄 알고 있으니까
‘남은 일, 내가 할 일은 없네요?’ 라는 질문이 나오고,
이제 앞으로(구원 받은 후) 우리에게 책임으로, 명령으로
구원의 완성으로의 남은 내용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구원을 소극적 측면에서만 논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다 이루어버렸고,
우리는 할 일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만,
구원의 적극적 측면(성화)이 남아있는 거죠.
오늘 이 시간(5강)과 다음시간(6강)에 걸쳐서, 이 문제를 충분히 좀 확인해 볼 것입니다.
◑이루어진 구원, 바라보는 구원
▶로마서 5장으로 가 보십시다. 로마서 5장에서 구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앞에 있는, 로마서 4장에서는 뭘 설명 하냐면,
구원이 우리에게 결실하게 되는, 믿음(의 법칙)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5장에 와서는, 이제 그래서,
우리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라는데,
이 구원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 진 것과 바라 봐야 할 것으로,
두 개로 나눠진 것을 보게 됩니다.
이루어진 구원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하는 것입니다. 이미 얻은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무슨 시각으로 표현 하냐면,
하나님과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5:1절에 있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일어난 일, 완료된 일입니다.
바라봐야 할 구원, 즉 기다리고, 소망해야 되는 일로 5:2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는 기다려야 할 구원, 완성되어야 할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꺼낸 측면과 (출애굽에서)
-영생으로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가나안으로)
나중에 우리가 출애굽 사건에서 이 문제를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만,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
애굽에 노예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뭔가 하면,
애굽을 벗어나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을 논할 때
애굽에서 ‘나오는’ 것만 가지고 논하고 있고, (칭의)
‘가야할’ 곳을 이해하지 못해서 (성화, 영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을 때,
‘이제 우린 뭘 해야 되는가?’라는 혼란은,
바로 구원을 소극적 측면에서만 알고 있고, 적극적 측면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5장 1절과 2절이 ‘이미 얻은 구원(1절)’과
‘봐라 바야 할 구원(2절)’을 설명하고,
현실적으로 3절 이하의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는
완성을 향하여 가는, 현실에 대한 설명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
또는 제가 표현하는 것으로 ‘신분과 운명’은 이미 확보되었고,
그 일에 더 이상 우리가 더 할 일이 없고,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완성되었고 영원합니다. (이루어진 구원)
그러나 성화 또는 영화,
제 설명으로는 수준의 구원, 완성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그 목적, 결과를
주의 약속 안에서 소망하며 바라보며 달려가야 합니다. (바라보는 구원)
그 완성을 위하여, 그 완성의 목표를 향하여,
신자의 현실 속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완성을 위한 그 과정과 방법이 뭐냐 그럴 때,
대표적인 표현으로 ‘환난’이라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왜 환난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나중에, 좀 더 깊게, 이 강의 말미에 다룰 것입니다.
◑본론/ 성화, 구원의 완성에 꼭 필요한 - 환란
▶5:3절에 환난(키워드)이 느닷없이 등장을 하죠.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렇게 환난이 등장하는데, 환난이 등장하는 이유가 뭐냐?
그 다음 단어들을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환난을 여러분이 잘 아는 데로 시련이요, 곤고함이요, 난관들이요, 실패요,
그런 것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과 다른, 좌절들을 의미합니다.
그게 뭘 만든다고요? 인내를 만든다고 그럽니다.
그 다음엔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소망..은 여기서 구원의 완성을, 궁극적 승리를 말합니다.
인내..는 말 그대로 인내이지만, 경험이라는 뜻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이란 본문을 ‘환난은 경험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죠.
‘인내는 연단을’ 여기서 ‘연단’이란 .. 인격적 성숙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성숙되는 겁니다.
이 말들은 종합해 보면 환난의 필요성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 우리가 가진 믿음이
더 깊고, 강하고, 높아지는, 좀 더 높은 차원으로의 발전/성숙해 가야 하는데,
그 첫 단추는 환란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요셉의 예
▶이런 문제에 대한 아주 성경에 대표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시편 105:16절부터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셉의 생애야 말로, 본문 로마서 5장 3절~4절의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는
이 내용에 아주 적합한, 잘 어울리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6~19
한국교회에서, 성도들이 아마 제일 좋아하는 다섯 사람 중에 요셉이 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벌써 17살 때 그 비전을 가지고 또 억울하게 팔려가고,
죄수가 되었으나, 믿음으로 지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승리하여
대제국에 총리가 되는, 그리하여 가족과 나중에는 결국 나라를 구한,
세상을 구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이해는 사실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거나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오해를 많이 하는 부분이 뭐냐 하면,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사람들에게는 본성인 탓입니다.
누가 훌륭해지고 위인이 됐으면, 그 사람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위인이요, 영웅이 될 만한 소지를 갖고 있었는가를 찾아서
그 사람을 본보기로 삼아 이 사람같이 되자, 이 사람같이 하자라는 교훈을 끌어내는 것,
그것이 우리 사람들이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또는 뭐 후손들을 채찍질하는 교육과 강화에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쓸 만한 사람을 골라서 하나님의 일에 써먹었는가? 이게 아니고,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능력과 은혜로
이 무익하고 미련하고 완악한 인간과 인생에 개입하셔서
어떻게 인간을 복되게 만들어 놓으셨는가? .. 하는 기록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내용을 복음이라 하지,
잘난 사람 뽑는 것이 무슨 복음이겠습니까!
서두에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신앙은 구원자체에서도,
또는 구원을 얻은 성도들의 현실적인 신앙생활 어느 곳에서도
자랑이라는 것이 없는, 감사만 있는.. 그런 이해가 신앙적입니다.
시편 105편에 간략하게 기록되어있는 요셉의 모습을 예를 들면,
18절에 있는 바와 같이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었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그러니까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이 말을 요셉에게서 영웅적, 위인적 조건을 발견하려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뭐로 들리느냐하면, 요셉이 하나님이 그에게 준 약속과
그에 허락한 비전을 붙잡은 근거부족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이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는
전혀 주어가,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며, 그의 마음에 들 때까지 저를 훈련시켰다는 뜻이지,
요셉이 어떻게 그 말씀을 붙잡고, 이를 믿음으로 버텨냈는가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 해갖고는 우리들의 본성을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금 더 살펴봅시다.
18절, ‘그 발이 차꼬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
예전의 관주성경을 보시면 ‘그 몸’에 ‘각주 1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밑에 각주를 보면, ‘1, 히, 혼’이라 되어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 ‘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말을 ‘그 몸’로 의역한 것이지요.
‘그 몸이 쇠사슬에 매었다.’라는 표현은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 혼을 쇠사슬이 꿰었다.’라는 뜻입니다.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하면, 육체적으로만 고생을 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신앙적인 고생을 했고,
정신적, 신앙적 고생은, 본인의 의지나 믿음을,
말하자면 시험받는 시련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시련이냐? 우리말에 아주 적합한 게 있습니다.
‘혼비백산’했다는 뜻입니다.
혼비백산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깊은 절망과 좌절을 맛보는 자리까지 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왜냐면 워낙 많이 요셉은 잘난 사람으로, 위인으로 이미 많이 우리가 들어와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면, 모두 쉽게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좀 더 찾아봅시다. 창세기 37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4명의 부인중에 제일 사랑했던 라헬의 소생이거든요.
아주 사랑해서 그에겐 채색옷을 입혔다는데,
우리말 번역에는 채색옷이라 해서 색동저고리 같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겠습니다만
긴 옷, 왕족이나 입는 그런 고급한 옷으로도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여튼 요셉은 일하는 작업복을 입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늘 외출복 같은 옷을 입고, 형들 양 치는데 갔으니, 일을 했겠습니까?
게다가 뭘 했냐하면 2절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였더라.”
‘철딱서니 없었더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꿈을 꾸죠. 잘 아시는,
형들이 묶은 볏단이 와서 절하고, 또 해와 달과 열한별이 와서 절하는 이런 꿈을 꿉니다.
보통 이걸 요셉의 비전으로 많이 이해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건 요셉의 비전이 아닙니다.
왜 아니냐하면, 꿈은 꾸고 싶은 데로 꾸는 사람이 없습니다.
꿈은 가장 수동적인 것입니다.
꿈은 자기가 원해서 꾸는 그런 사람은 곤란한 사람이죠.
꾸고 싶은 데로 꾸면 누가 영화를 제작하겠습니까? 오늘밤에는 벤허를 보자,
그러면 여러분 짠하고 벤허가 꿈에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요셉의 비전이라고 보기 힘든 이유는
요셉도 자신의 야망이거나 부푼 어떤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도 개꿈 같아서 형들에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결국 미움만 샀죠.
그러나 39장에서 보는바와 같이, 그는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 청지기가 됩니다.
자, 이 내용을 잘 보시면 요셉은 분명히 하나님이 이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겁니다.
요셉이 의도한 길이 아닌, 그리고 본인이 만족해하는 그런 길도 물론 아닙니다.
이건 환란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이 길을 준비해 놓고 뭘 하고 있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셔서 그가 형통한자라고 자꾸 이야기 합니다.
▶이 37장과 39장에 등장하는 요셉의 이 약점 속에,
그 가운데 뭐가 끼어 있냐하면 유다 이야기가 끼어있습니다. 38장에.
유다가 얼마나 끔직한, 윤리적인, 실수를 하는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을, 유다와 비교해서,
요셉 안에서 그리고 있는데, 그 인생은 고달픈 인생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 요셉이 종으로 팔려 가는 거나
또는 뒤에 예를 들면, 39장 19절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의 생애를 보면 어긋나고 있죠. 우리의 기대가.
그러나 계속적으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신 길이고,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길이고, 그 길에 ‘형통하다’ 그럽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에게 따돌림을 받아서 팔려 간 것도 형통하다 그러고,
남의 집에 가서 종살이 하는데 형통하다 그러고,
무고를 당해서 옥에 갇혔는데도 형통하다 그래요.
그걸 아까 시편 105편 식으로 이해를 하자면, 다시 한 번 105편으로 보세요.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이니까 확인을 분명하게 합시다. 시편 105편 18절,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그러니까 그 말씀이 응하고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는 일에 형통한 길인 겁니다.
본문 로마서 5:3~4절에 의하면, 요셉의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구원의 완성)을 이루었는데,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성공해서 형통했다’가 아니고,
요셉이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에 형통했다’입니다.
환란을 통해서요! 이해가 되십니까?
이렇게 형통하다는 걸 여러분이 인정하셔야 됩니다.
◑적용/ 구원의 소극적 차원만 이해하는 현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또는 구원이라는 것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만 구원을 이해해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남은 이미 구원이 완성되어 끝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식으로,
믿음도 예수를 믿고 결단하고 감격하면 믿음이 다 끝났다고 생각을 하죠.
그 다음에 신자들이 기대하는 건,
그 앞길은 이 믿음으로 형통한 길이 열릴 거라 자꾸 기대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얻은 구원과 우리가 이제 고백하고,
나의 것으로 가진 이 믿음의 고백이 있자마자 하나님이 뭘 준비하시냐면 하면
환난을 준비하신데요.
왜요? 이 환란이 경험(인내)을 얻게 하신답니다.
아, 이거 이해하셔야 합니다. 경험을 얻게 한답니다. ‘환란은 인내를’
경험(인내)이 여기서 왜 필요하죠?
이와 같죠.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아는 거죠.
우리가 가진 이론이, 우리에게 이론적으로 확보되어 있는 것이
실제에서 활용되고, 능력이 되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성경이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해서 그 불타는 사랑이 얼마나 갑니까?
왜요? 우리는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냐하면 인간적인, 이상주의입니다.
아마, 무식해서 가지는, 사랑은 진심과 열정이 전부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동일하게 믿음도 진심과 열정이 전부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해에 관한 문제고 결단의 문제라 생각을 하지,
연습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연습이 우리 현실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제일 많이 기대하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기로 목숨을 걸고 작정했으니까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멋진 인생이 주어지리라고 기대를 합니다.
엘리야가 되고, 모세가 되고, 바울이 되고, 요셉이 되는,
그렇게 안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 물을 먹이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수영을 배웁니다.
요셉의 생애가 아주 중요한 것은, 요셉이 어디서 크느냐,
그는 물론 신앙을 가진 소년이었음을 추정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은 아버지한테 칭찬 받는 게 다인 신앙이었죠.
그러니까 그가 잡혀 와서 시편 105편 18절에 보는바와 같이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쇠사슬이 그 혼을 꾀었다는 이 표현은, 요셉이 지금 완전 정신이 나간 겁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뭐하시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게 가치가 뭔가?
가장 근본적인 의심과 절망의 자리에까지 그가 들어갔던 것을 말합니다.
그가 이 난관을 믿음으로 지켜낸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의외의 일로 이제 풀려나지 않습니까?
▶나중에 이제, 시편 뒷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요셉이 총리가 되고
이제 기근이 들어서 형들이 식량을 사러 왔을 때 형들과 만나는 이야기가
사실 성경이 쓸 때 없는 소리를 기록할 여지가 없거든요?
요한복음에 의하면 ‘주께서 행하신 기적을 다 쓰려면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둘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지금 한 줄이 아까운 책인데
그 형들하고 만나서 티격태격하는 이야기가, 나머지 창세기를 다 차지하고 맙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형들이 오고 요셉이 바라보고 형들을 고문해서,
말하자면 함정을 파서 놓죠. 돈을 다시 자루에 넣어주고, 시므온을 인질로 삼고,
다시 막내아들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그러고, 그렇게 몇 번을 하는데
그게 그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냐하면
요셉이 형들하고 티격태격 하는걸 일일이 다 나열하고
지들끼리 ‘거봐라 이런 일이 너 때문에 생겼다, 요셉에게 우리가 한 것 때문에’,
또 반복하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때 다시 반복하고
그 장면이 자꾸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중요한 성경에 그 쓰잘데 없어 보이는 내용을 길게, 세밀하게 자꾸 반복하고 있습니다.
뭘 하고 있냐하면, 요셉이 아직 응어리가 다 안 풀린 겁니다.
요셉은 화해할 마음이 아직 없습니다.
절반은 원한이 있고, 절반은 혈육의 정이 있는, 그 갈등을 사실은 보여주고 있고,
갈등이 뭐로 해소 되냐 하면, 형들이 자기를 팔아먹고 고민했구나,
그걸 요셉이 확인하고, 형들이 자기를 팔아먹을 때보다 컸구나를 확인합니다.
그 장면에 가장 중요한 대목은, 옛날에 요셉을 팔아먹었던 형들로부터 바뀌어 있습니다.
그들이 왜 사이가 좋지 않았냐하면, 어머니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서로 간에 참 어려운, 별로 화목이 안됐는데,
그때는 형제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고 아버지 걱정시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
유다가 우리 아버지를 슬프게 할 수 없다, 나를 종으로 삼으라 이런 대목들을 보고
요셉이 뭘 깨닫냐 하면 ‘나를 여기에 앞서 보내어 우리 가족을 구하게 하셨고,
우리 가족은 가족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듯이 그동안 훈련시켜서
내가 온 자리에 우리 형들도 대리고 왔구나’ 를 확인하는 겁니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것이 녹는 겁니다. 이 길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고,
손해 본 길이 아니고, 하나님이 작정하여, 여기 이 말씀 그대로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이 작정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내 인생과 저들 인생을 이렇게 간섭하여 이 경지에 오게 했구나!
라고 확인해서 항복하는 것입니다.
형들과 울고, 안고, 화해를 하죠.
그게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지금 로마서 5장에서 보는 이 이야기입니다.
왜 환난이 오는냐? 왜 환난이 오느냐?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과 우리에게 이제 만들어주신 믿음이 실력을 가져야 됩니다.
(이 논지를 설명하려고, 요셉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
◑마치는 말
구원의 충만, 믿음의 충만으로 가기 위해선 환난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왜요? 환난이 생기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환난이 생겨야,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봅니다.
환란이 생기면 우리의 한계를 보고, 우리의 한계를 보면 뭐가 좋으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새삼스럽게 확인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믿음을, 환난을 통해서 믿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압니다.
믿음을 어려울 때만 쓰는 게 아니라, 형통할 때도 써야 된다는 것,
매사에 믿음을 동원해야한다는 겁니다.
믿음이 모든 일에 우리의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의 우리 된 정체성을, 우리의 내용이라는 것을,
그가 경험으로 자기의 실력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럼 뭐가 드러난다고요? 인내가 경험이라고 했죠?
뭐로 가요? 연단으로 가게 됩니다.
연단은 뭐라고요? 성숙으로, 증거로,
우리가 무얼 하는 사람인가? 무얼 믿는 사람인가?
우리가 누구인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이 모든 게 “환난”이 만들어내는, 이걸 잊지 마세요.
이 문제를 보면,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신앙생활을, ‘남을 위해서 쓸모 있자(섬기자)’라는 것은 훨씬 부수적인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이 본질적입니다.
그것이 구원에 있어서의 첫 번째 초점입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어떠함에 관한 싸움입니다.
됨됨이가 우선이고,
그 사람이 그에게 부과된 인생과 현실에서의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로, 그의 됨됨이가 발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다 무시하고
일(교회 봉사)로써,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려고 그러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너무 많은 일과 프로그램으로 꽉 차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잘하고 있는 거지만,
한번 확인을 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수주일을 한다, 새벽기도를 한다, 식기도를 한다, 훌륭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그게 자신이 신자인 것을 설명하는, 드러내는 유일한 표현법이여서는 안됩니다.
삶의 전 영역에 대하여 신자인 다름이 드러나는, 내용과 기준이 다른,
그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훈련받고 있는 과정이며
우리가 누구인가가 증명 되어야 할 책임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 훈련들과 그런 완성이 어디서 되느냐
그럴 때 이 시작부터 그랬다는, 우리가 얻은 구원이 뭐냐?
그 구원이 어디로 가야 하는냐? 우리가 가진 믿음이 뭐냐?
그 믿음을 어떻게 채우고, 무엇으로 채워야 하느냐? 를 위해서
하나님은 요셉의 생애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앞에 환란을 놓고 있습니다.
▶우리 어느 시대나 그러겠습니다만, 우리주변에도, 한국교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와 하면 된다, 믿으면 뭐든지 된다,
남북통일을 원하고, 이 나라의 평화와, 예수 믿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열심을 부리는 것을.. 우리 모두가 당연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근본 목적은
신자들이, 바로 이런 구원과, 거기에 허락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향하는 완성을 위하여,
그에게 믿음과 구원을 확인하시고, 감격케 하시고,
진심을 가지고 소원케 하시는 주님, 그 내용을 채우시고,
그 실력을 늘리셔서 하나님의 자녀에 마땅한 됨됨이의 완성으로 인도하시는 것,
이것이 신자의 신앙 현실이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길이라는 것,
우리 모두 이해해서
매일매일 하찮은 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키우고 계시고, 그래서 우리 신앙 인격이 채워져 가고
인도함을 받아 신적경지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롬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구원문제를 논할 때,
구원의 은혜성이 당연히 제일 초점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다’ 이렇게 선언되고 있죠.
그런데 이 은혜를 강조하면,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로마서 5장에 있는 식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거든요.
우리가 구원을 요청하거나,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구원시켜 달라고 빌기 이전에,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거든요.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구원함을, 이미 받았다 말이죠.
말하자면, 우리의 반응이나, 무슨 각성이나, 결단 이전에
구원이 사실은 우리에게 성취되었다 하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고,
우리의 결단이니, 영접이니, 믿음이니 하는 것들은
조금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말하면 이미 결과이지, 조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당연히 무슨 질문이 나오느냐면 ‘그럼 우리는 뭐야?’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장1절이 바로 그 이야기인데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말이 그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은혜로, 공짜로 구원을 주고
나의 조건이나 나의 반응이 아무 이유가 안 된다면,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느냐..’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죠.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이런 의아스러운 생각이 나와야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을 제대로 설명하는 겁니다.
이 구원 문제에 대해서, 이런 식의 설명이 가장 많이 쓰일 겁니다.
(약간 성경의 설명과 빗나간 것인데
성도들은 이쪽을 더 쉽게 이해하는.. 그런 설명입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셨다.
'누구든지 그 은혜를 믿고 가져가지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그러니까 밥상위에 밥을 다 차려났다, 와서 먹기만 하면 된다.'
이런 식의 설명을 제일 많이 하고 있고, 성도들에게도 이게 제일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이제 각각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 까지도.. 그것도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것까지도 아니라는 겁니다.
주 안에서 이루어놓은 구원을, 공짜로 아무나 믿음으로 선택하고 가져가는 싸움이
구원이 아니고,
구원이라는 결과가 우리 안에, 예수로 인하여 우리 안에,
결과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고 얘기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구원의 소극적 측면, 적극적 측면
▶그러니까 무슨 질문이 나오냐면, ‘그럼 우리는 뭐 하는 겁니까? 우리가 할 일이 뭐 있습니까?’
‘그럼 우리가 예수 믿는 이후로, 우리의 책임과, 우리의 할 일이 뭐가 남았습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 해주신다면서요?
그럼 우리가 열심 낼 필요 없이, 계속 죄에 거하고 있어도 되겠네요?
라는 질문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당연히 나와야,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렇게 설명하면, 예외 없이 이 생각이 든다니까요.
‘아니 이게 뭐야 이런 구원이 어디 있어?’ 라고 말이죠.
▶그래서 이러한 질문이 생기는 이유는,
구원을 죄로부터의 용서함, 사망으로부터의 면제, 영원한 형벌로 부터의 구제라는
소극적 측면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가 본문 롬6:2~4절,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앞으로 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게 뭐있어?’ 라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이 벗어남,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벗어남이, 구원의 전부인줄 알고 있으니까
‘남은 일, 내가 할 일은 없네요?’ 라는 질문이 나오고,
이제 앞으로(구원 받은 후) 우리에게 책임으로, 명령으로
구원의 완성으로의 남은 내용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구원을 소극적 측면에서만 논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다 이루어버렸고,
우리는 할 일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만,
구원의 적극적 측면(성화)이 남아있는 거죠.
오늘 이 시간(5강)과 다음시간(6강)에 걸쳐서, 이 문제를 충분히 좀 확인해 볼 것입니다.
◑이루어진 구원, 바라보는 구원
▶로마서 5장으로 가 보십시다. 로마서 5장에서 구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앞에 있는, 로마서 4장에서는 뭘 설명 하냐면,
구원이 우리에게 결실하게 되는, 믿음(의 법칙)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5장에 와서는, 이제 그래서,
우리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라는데,
이 구원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 진 것과 바라 봐야 할 것으로,
두 개로 나눠진 것을 보게 됩니다.
이루어진 구원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하는 것입니다. 이미 얻은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무슨 시각으로 표현 하냐면,
하나님과의 관계로 표현하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5:1절에 있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일어난 일, 완료된 일입니다.
바라봐야 할 구원, 즉 기다리고, 소망해야 되는 일로 5:2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는 기다려야 할 구원, 완성되어야 할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꺼낸 측면과 (출애굽에서)
-영생으로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가나안으로)
나중에 우리가 출애굽 사건에서 이 문제를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만,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
애굽에 노예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뭔가 하면,
애굽을 벗어나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을 논할 때
애굽에서 ‘나오는’ 것만 가지고 논하고 있고, (칭의)
‘가야할’ 곳을 이해하지 못해서 (성화, 영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을 때,
‘이제 우린 뭘 해야 되는가?’라는 혼란은,
바로 구원을 소극적 측면에서만 알고 있고, 적극적 측면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5장 1절과 2절이 ‘이미 얻은 구원(1절)’과
‘봐라 바야 할 구원(2절)’을 설명하고,
현실적으로 3절 이하의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는
완성을 향하여 가는, 현실에 대한 설명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
또는 제가 표현하는 것으로 ‘신분과 운명’은 이미 확보되었고,
그 일에 더 이상 우리가 더 할 일이 없고,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완성되었고 영원합니다. (이루어진 구원)
그러나 성화 또는 영화,
제 설명으로는 수준의 구원, 완성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그 목적, 결과를
주의 약속 안에서 소망하며 바라보며 달려가야 합니다. (바라보는 구원)
그 완성을 위하여, 그 완성의 목표를 향하여,
신자의 현실 속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완성을 위한 그 과정과 방법이 뭐냐 그럴 때,
대표적인 표현으로 ‘환난’이라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왜 환난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나중에, 좀 더 깊게, 이 강의 말미에 다룰 것입니다.
◑본론/ 성화, 구원의 완성에 꼭 필요한 - 환란
▶5:3절에 환난(키워드)이 느닷없이 등장을 하죠.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렇게 환난이 등장하는데, 환난이 등장하는 이유가 뭐냐?
그 다음 단어들을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환난을 여러분이 잘 아는 데로 시련이요, 곤고함이요, 난관들이요, 실패요,
그런 것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과 다른, 좌절들을 의미합니다.
그게 뭘 만든다고요? 인내를 만든다고 그럽니다.
그 다음엔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소망..은 여기서 구원의 완성을, 궁극적 승리를 말합니다.
인내..는 말 그대로 인내이지만, 경험이라는 뜻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이란 본문을 ‘환난은 경험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죠.
‘인내는 연단을’ 여기서 ‘연단’이란 .. 인격적 성숙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성숙되는 겁니다.
이 말들은 종합해 보면 환난의 필요성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 우리가 가진 믿음이
더 깊고, 강하고, 높아지는, 좀 더 높은 차원으로의 발전/성숙해 가야 하는데,
그 첫 단추는 환란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요셉의 예
▶이런 문제에 대한 아주 성경에 대표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시편 105:16절부터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셉의 생애야 말로, 본문 로마서 5장 3절~4절의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는
이 내용에 아주 적합한, 잘 어울리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6~19
한국교회에서, 성도들이 아마 제일 좋아하는 다섯 사람 중에 요셉이 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벌써 17살 때 그 비전을 가지고 또 억울하게 팔려가고,
죄수가 되었으나, 믿음으로 지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승리하여
대제국에 총리가 되는, 그리하여 가족과 나중에는 결국 나라를 구한,
세상을 구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이해는 사실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거나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오해를 많이 하는 부분이 뭐냐 하면,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사람들에게는 본성인 탓입니다.
누가 훌륭해지고 위인이 됐으면, 그 사람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위인이요, 영웅이 될 만한 소지를 갖고 있었는가를 찾아서
그 사람을 본보기로 삼아 이 사람같이 되자, 이 사람같이 하자라는 교훈을 끌어내는 것,
그것이 우리 사람들이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또는 뭐 후손들을 채찍질하는 교육과 강화에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쓸 만한 사람을 골라서 하나님의 일에 써먹었는가? 이게 아니고,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능력과 은혜로
이 무익하고 미련하고 완악한 인간과 인생에 개입하셔서
어떻게 인간을 복되게 만들어 놓으셨는가? .. 하는 기록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내용을 복음이라 하지,
잘난 사람 뽑는 것이 무슨 복음이겠습니까!
서두에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신앙은 구원자체에서도,
또는 구원을 얻은 성도들의 현실적인 신앙생활 어느 곳에서도
자랑이라는 것이 없는, 감사만 있는.. 그런 이해가 신앙적입니다.
시편 105편에 간략하게 기록되어있는 요셉의 모습을 예를 들면,
18절에 있는 바와 같이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었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그러니까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이 말을 요셉에게서 영웅적, 위인적 조건을 발견하려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뭐로 들리느냐하면, 요셉이 하나님이 그에게 준 약속과
그에 허락한 비전을 붙잡은 근거부족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이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는
전혀 주어가,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며, 그의 마음에 들 때까지 저를 훈련시켰다는 뜻이지,
요셉이 어떻게 그 말씀을 붙잡고, 이를 믿음으로 버텨냈는가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 해갖고는 우리들의 본성을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금 더 살펴봅시다.
18절, ‘그 발이 차꼬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
예전의 관주성경을 보시면 ‘그 몸’에 ‘각주 1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밑에 각주를 보면, ‘1, 히, 혼’이라 되어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 ‘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말을 ‘그 몸’로 의역한 것이지요.
‘그 몸이 쇠사슬에 매었다.’라는 표현은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 혼을 쇠사슬이 꿰었다.’라는 뜻입니다.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하면, 육체적으로만 고생을 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신앙적인 고생을 했고,
정신적, 신앙적 고생은, 본인의 의지나 믿음을,
말하자면 시험받는 시련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시련이냐? 우리말에 아주 적합한 게 있습니다.
‘혼비백산’했다는 뜻입니다.
혼비백산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깊은 절망과 좌절을 맛보는 자리까지 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왜냐면 워낙 많이 요셉은 잘난 사람으로, 위인으로 이미 많이 우리가 들어와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면, 모두 쉽게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좀 더 찾아봅시다. 창세기 37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4명의 부인중에 제일 사랑했던 라헬의 소생이거든요.
아주 사랑해서 그에겐 채색옷을 입혔다는데,
우리말 번역에는 채색옷이라 해서 색동저고리 같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겠습니다만
긴 옷, 왕족이나 입는 그런 고급한 옷으로도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여튼 요셉은 일하는 작업복을 입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늘 외출복 같은 옷을 입고, 형들 양 치는데 갔으니, 일을 했겠습니까?
게다가 뭘 했냐하면 2절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였더라.”
‘철딱서니 없었더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꿈을 꾸죠. 잘 아시는,
형들이 묶은 볏단이 와서 절하고, 또 해와 달과 열한별이 와서 절하는 이런 꿈을 꿉니다.
보통 이걸 요셉의 비전으로 많이 이해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건 요셉의 비전이 아닙니다.
왜 아니냐하면, 꿈은 꾸고 싶은 데로 꾸는 사람이 없습니다.
꿈은 가장 수동적인 것입니다.
꿈은 자기가 원해서 꾸는 그런 사람은 곤란한 사람이죠.
꾸고 싶은 데로 꾸면 누가 영화를 제작하겠습니까? 오늘밤에는 벤허를 보자,
그러면 여러분 짠하고 벤허가 꿈에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요셉의 비전이라고 보기 힘든 이유는
요셉도 자신의 야망이거나 부푼 어떤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도 개꿈 같아서 형들에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결국 미움만 샀죠.
그러나 39장에서 보는바와 같이, 그는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 청지기가 됩니다.
자, 이 내용을 잘 보시면 요셉은 분명히 하나님이 이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겁니다.
요셉이 의도한 길이 아닌, 그리고 본인이 만족해하는 그런 길도 물론 아닙니다.
이건 환란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이 길을 준비해 놓고 뭘 하고 있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셔서 그가 형통한자라고 자꾸 이야기 합니다.
▶이 37장과 39장에 등장하는 요셉의 이 약점 속에,
그 가운데 뭐가 끼어 있냐하면 유다 이야기가 끼어있습니다. 38장에.
유다가 얼마나 끔직한, 윤리적인, 실수를 하는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을, 유다와 비교해서,
요셉 안에서 그리고 있는데, 그 인생은 고달픈 인생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 요셉이 종으로 팔려 가는 거나
또는 뒤에 예를 들면, 39장 19절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의 생애를 보면 어긋나고 있죠. 우리의 기대가.
그러나 계속적으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신 길이고,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길이고, 그 길에 ‘형통하다’ 그럽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에게 따돌림을 받아서 팔려 간 것도 형통하다 그러고,
남의 집에 가서 종살이 하는데 형통하다 그러고,
무고를 당해서 옥에 갇혔는데도 형통하다 그래요.
그걸 아까 시편 105편 식으로 이해를 하자면, 다시 한 번 105편으로 보세요.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이니까 확인을 분명하게 합시다. 시편 105편 18절,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그러니까 그 말씀이 응하고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는 일에 형통한 길인 겁니다.
본문 로마서 5:3~4절에 의하면, 요셉의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구원의 완성)을 이루었는데,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성공해서 형통했다’가 아니고,
요셉이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에 형통했다’입니다.
환란을 통해서요! 이해가 되십니까?
이렇게 형통하다는 걸 여러분이 인정하셔야 됩니다.
◑적용/ 구원의 소극적 차원만 이해하는 현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또는 구원이라는 것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만 구원을 이해해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남은 이미 구원이 완성되어 끝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식으로,
믿음도 예수를 믿고 결단하고 감격하면 믿음이 다 끝났다고 생각을 하죠.
그 다음에 신자들이 기대하는 건,
그 앞길은 이 믿음으로 형통한 길이 열릴 거라 자꾸 기대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얻은 구원과 우리가 이제 고백하고,
나의 것으로 가진 이 믿음의 고백이 있자마자 하나님이 뭘 준비하시냐면 하면
환난을 준비하신데요.
왜요? 이 환란이 경험(인내)을 얻게 하신답니다.
아, 이거 이해하셔야 합니다. 경험을 얻게 한답니다. ‘환란은 인내를’
경험(인내)이 여기서 왜 필요하죠?
이와 같죠.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아는 거죠.
우리가 가진 이론이, 우리에게 이론적으로 확보되어 있는 것이
실제에서 활용되고, 능력이 되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성경이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해서 그 불타는 사랑이 얼마나 갑니까?
왜요? 우리는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냐하면 인간적인, 이상주의입니다.
아마, 무식해서 가지는, 사랑은 진심과 열정이 전부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동일하게 믿음도 진심과 열정이 전부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해에 관한 문제고 결단의 문제라 생각을 하지,
연습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연습이 우리 현실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제일 많이 기대하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기로 목숨을 걸고 작정했으니까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멋진 인생이 주어지리라고 기대를 합니다.
엘리야가 되고, 모세가 되고, 바울이 되고, 요셉이 되는,
그렇게 안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 물을 먹이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수영을 배웁니다.
요셉의 생애가 아주 중요한 것은, 요셉이 어디서 크느냐,
그는 물론 신앙을 가진 소년이었음을 추정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은 아버지한테 칭찬 받는 게 다인 신앙이었죠.
그러니까 그가 잡혀 와서 시편 105편 18절에 보는바와 같이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쇠사슬이 그 혼을 꾀었다는 이 표현은, 요셉이 지금 완전 정신이 나간 겁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뭐하시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게 가치가 뭔가?
가장 근본적인 의심과 절망의 자리에까지 그가 들어갔던 것을 말합니다.
그가 이 난관을 믿음으로 지켜낸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의외의 일로 이제 풀려나지 않습니까?
▶나중에 이제, 시편 뒷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요셉이 총리가 되고
이제 기근이 들어서 형들이 식량을 사러 왔을 때 형들과 만나는 이야기가
사실 성경이 쓸 때 없는 소리를 기록할 여지가 없거든요?
요한복음에 의하면 ‘주께서 행하신 기적을 다 쓰려면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둘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지금 한 줄이 아까운 책인데
그 형들하고 만나서 티격태격하는 이야기가, 나머지 창세기를 다 차지하고 맙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형들이 오고 요셉이 바라보고 형들을 고문해서,
말하자면 함정을 파서 놓죠. 돈을 다시 자루에 넣어주고, 시므온을 인질로 삼고,
다시 막내아들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그러고, 그렇게 몇 번을 하는데
그게 그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냐하면
요셉이 형들하고 티격태격 하는걸 일일이 다 나열하고
지들끼리 ‘거봐라 이런 일이 너 때문에 생겼다, 요셉에게 우리가 한 것 때문에’,
또 반복하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때 다시 반복하고
그 장면이 자꾸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중요한 성경에 그 쓰잘데 없어 보이는 내용을 길게, 세밀하게 자꾸 반복하고 있습니다.
뭘 하고 있냐하면, 요셉이 아직 응어리가 다 안 풀린 겁니다.
요셉은 화해할 마음이 아직 없습니다.
절반은 원한이 있고, 절반은 혈육의 정이 있는, 그 갈등을 사실은 보여주고 있고,
갈등이 뭐로 해소 되냐 하면, 형들이 자기를 팔아먹고 고민했구나,
그걸 요셉이 확인하고, 형들이 자기를 팔아먹을 때보다 컸구나를 확인합니다.
그 장면에 가장 중요한 대목은, 옛날에 요셉을 팔아먹었던 형들로부터 바뀌어 있습니다.
그들이 왜 사이가 좋지 않았냐하면, 어머니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서로 간에 참 어려운, 별로 화목이 안됐는데,
그때는 형제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고 아버지 걱정시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
유다가 우리 아버지를 슬프게 할 수 없다, 나를 종으로 삼으라 이런 대목들을 보고
요셉이 뭘 깨닫냐 하면 ‘나를 여기에 앞서 보내어 우리 가족을 구하게 하셨고,
우리 가족은 가족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듯이 그동안 훈련시켜서
내가 온 자리에 우리 형들도 대리고 왔구나’ 를 확인하는 겁니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것이 녹는 겁니다. 이 길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고,
손해 본 길이 아니고, 하나님이 작정하여, 여기 이 말씀 그대로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이 작정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내 인생과 저들 인생을 이렇게 간섭하여 이 경지에 오게 했구나!
라고 확인해서 항복하는 것입니다.
형들과 울고, 안고, 화해를 하죠.
그게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지금 로마서 5장에서 보는 이 이야기입니다.
왜 환난이 오는냐? 왜 환난이 오느냐?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과 우리에게 이제 만들어주신 믿음이 실력을 가져야 됩니다.
(이 논지를 설명하려고, 요셉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
◑마치는 말
구원의 충만, 믿음의 충만으로 가기 위해선 환난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왜요? 환난이 생기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환난이 생겨야,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봅니다.
환란이 생기면 우리의 한계를 보고, 우리의 한계를 보면 뭐가 좋으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새삼스럽게 확인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믿음을, 환난을 통해서 믿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압니다.
믿음을 어려울 때만 쓰는 게 아니라, 형통할 때도 써야 된다는 것,
매사에 믿음을 동원해야한다는 겁니다.
믿음이 모든 일에 우리의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의 우리 된 정체성을, 우리의 내용이라는 것을,
그가 경험으로 자기의 실력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럼 뭐가 드러난다고요? 인내가 경험이라고 했죠?
뭐로 가요? 연단으로 가게 됩니다.
연단은 뭐라고요? 성숙으로, 증거로,
우리가 무얼 하는 사람인가? 무얼 믿는 사람인가?
우리가 누구인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이 모든 게 “환난”이 만들어내는, 이걸 잊지 마세요.
이 문제를 보면,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신앙생활을, ‘남을 위해서 쓸모 있자(섬기자)’라는 것은 훨씬 부수적인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이 본질적입니다.
그것이 구원에 있어서의 첫 번째 초점입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어떠함에 관한 싸움입니다.
됨됨이가 우선이고,
그 사람이 그에게 부과된 인생과 현실에서의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로, 그의 됨됨이가 발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다 무시하고
일(교회 봉사)로써,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려고 그러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너무 많은 일과 프로그램으로 꽉 차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잘하고 있는 거지만,
한번 확인을 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수주일을 한다, 새벽기도를 한다, 식기도를 한다, 훌륭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그게 자신이 신자인 것을 설명하는, 드러내는 유일한 표현법이여서는 안됩니다.
삶의 전 영역에 대하여 신자인 다름이 드러나는, 내용과 기준이 다른,
그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훈련받고 있는 과정이며
우리가 누구인가가 증명 되어야 할 책임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 훈련들과 그런 완성이 어디서 되느냐
그럴 때 이 시작부터 그랬다는, 우리가 얻은 구원이 뭐냐?
그 구원이 어디로 가야 하는냐? 우리가 가진 믿음이 뭐냐?
그 믿음을 어떻게 채우고, 무엇으로 채워야 하느냐? 를 위해서
하나님은 요셉의 생애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앞에 환란을 놓고 있습니다.
▶우리 어느 시대나 그러겠습니다만, 우리주변에도, 한국교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와 하면 된다, 믿으면 뭐든지 된다,
남북통일을 원하고, 이 나라의 평화와, 예수 믿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열심을 부리는 것을.. 우리 모두가 당연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근본 목적은
신자들이, 바로 이런 구원과, 거기에 허락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향하는 완성을 위하여,
그에게 믿음과 구원을 확인하시고, 감격케 하시고,
진심을 가지고 소원케 하시는 주님, 그 내용을 채우시고,
그 실력을 늘리셔서 하나님의 자녀에 마땅한 됨됨이의 완성으로 인도하시는 것,
이것이 신자의 신앙 현실이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길이라는 것,
우리 모두 이해해서
매일매일 하찮은 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키우고 계시고, 그래서 우리 신앙 인격이 채워져 가고
인도함을 받아 신적경지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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