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드린 자녀.
삼상 1: 19-28.
요즘 개그 프로그램 중에 ‘출산드라’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뚱뚱교 교주라는 이름으로 나와 사이비 교주 흉내를 내는데 그 때문에 기독교 일각의 반발도 있는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그 뚱뚱교 교주의 코메디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먹다 지쳐 잠이 들면 축복이 있으라’라는 노래입니다.
저도 그 코메디를 보면서 실없이 웃곤 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다 그 뚱뚱교 교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먹다 지쳐 잠이 드는 것 외에 딱히 뭐 할 일이 없는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코메디는 요즘 사람들이 너무 날씬한 사람들만 인정하고 뚱뚱한 사람들이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발성을 띠고 있는 코메디입니다. 살다보면 뚱뚱할 수도 있고 날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차별을 받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을 고발하는 코메디는 나름대로의 사회성이 있는 좋은 코메디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교인들 중에는 교회를 비하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코메디는 코메디 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가지고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잘못하면 우스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코메디를 보면서 정말 먹다 지쳐 잠이 들고, 그것을 반복하다가 아주 잠이 들어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장난처럼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묘비에 이렇게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먹다 지쳐 잠이 들다’ (?.....)
저는 뚱뚱해 지는 것도 조금 염려가 되지만, 정말 걱정이 되는 것은 한번 왔다 가는 인생 정말 먹다 지쳐 잠이 드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입니다. 저는 밥이나 먹다가 가는 인생을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저희 큰 아버님은 왜정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당시로서는 거부셨는데 그 적지 않은 전 재산을 다 바치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몸으로도 독립군이 되어 싸우셨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으셨다가 무기로 감형되어 감옥생활을 하시다가 해방이 되어 풀려나신 분이셨습니다. 옥중생활 당시 받은 고문으로 평생을 불편한 몸으로 사셨고 평생 가난하게 금호동 단칸 셋방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현충일 날 아이들의 손을 잡고 큰 아버님 묘에 가면서 아이들에게 큰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여기에 묻히셨다고 말 할 때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묘역에는 적지 않는 애국지사들의 묘가 있습니다. 묘비에 그 분들의 활동상이 간단하게 적혀져 있는데 그것을 하나, 하나 읽어 나가다 보면 얼마나 큰 감동을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저 분들의 저 희생이 있어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광복된 조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구나를 생각하면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해방된 조국에서 체포나 죽음의 위험이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 편안함이 지나쳐서 정말 코메디처럼 밥이나 먹다가 지쳐서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많습니다. 무언가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하여 땀도 흘리고 할 수 있다면 피도 좀 흘리고 그래서 그 열매를 맺어 많은 사람들이 그 열매를 먹고 사는 것을 보다 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요즘 하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씩 나이가 먹어가면서 점점 더 그와 같은 불안감을 느낍니다. 한국 남자의 평균 연령이 72세라고 합니다. 어제와 오늘 출근을 하면서 라디오를 들으니 한국 남자들의 1/3이 암에 걸린다고 합니다. 저는 30대 말부터 당뇨를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평균보다 일찍 죽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암에 걸린 확률 1/3은 정말 소름끼치는 확률입니다. 평균나이까지 산다고 하여도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확률은 더 떨어집니다. 잘못하면 병에 걸려 일하지 못하고 그냥 연명하느라고 바쁘게 고생하다가 인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참 많이 바쁩니다.
교회도 중요하고 가정도 중요하지만 좀 보다 큰일을 하고 싶습니다. 나라를 살리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밥이나 먹다가 지쳐서 잠이 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뷔페식 레스토랑이 제일 먼저 생긴 것이 아마 을지로 5가 국립의료원에 있는 스칸디나비아라는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청년 때 교회 장로님이 그곳에서 저녁을 사 주신 적이 있는데 얼마나 환상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즘은 뷔페식당에 가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습니다. 가게 되면 본전생각에 아무래도 과식을 하게 되고, 과식을 하고 난 후에는 언제나 후회막급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건강식을 찾는데 그중에 하나가 보리밥에 된장국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귀할 때는 잘 먹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해결되다 보니 잘 먹고 산다는 것이 별 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양복을 맞추었습니다. 당시 저는 세운상가에서 점원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양복 값은 제 한 달 월급이 좀 넘는 돈이었습니다. 그 만큼 옷이 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옷장마다 옷이 넘쳐서 처치 곤란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 달 월급이며 누구나 양복을 몇 벌씩이라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되고 보니 양복을 입고 좋은 옷을 입는다는 것도 별 큰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청년들이 잘 입고 다니는 옷 중에 찢어 진 청바지가 있습니다. 옛날에 가난하여 옷이 귀했을 때 찢어진 청바지는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부하여져 옷이 흔해진 이 시대에는 찢어진 청바지가 패션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보리밥이 건강식이 된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범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 입고 잘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느 이상이 되면 별 큰 의미가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일 중에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먹다 지쳐 잠이 드는 삶이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만 해도 그것은 이미 축복이 아닙니다. 북한에 비하면 우리 남한이 경제적으로 부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세계 일등인 나라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경제만 해도 벌써 먹다 지쳐 잠이 드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큰 화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귀한 인생을 그저 잘 입고 잘 먹고 사는데 걸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5월 달이 되었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 올해는 하나님과 씨름하는 해가 되자 설교 하였던 것이 정말 엊그제였었는데 벌써 5월 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 2월 달부터 저의 시간과 세월은 두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벌써 5월’이라는 방향의 시간과 세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직도 5월’이라는 방향의 시간과 세월입니다.
지난 2월 달 코스타 집회를 위하여 출국하는 인천공항에서 메일을 체크하다가 아들로부터 제가 할아버지가 되게 되었다는 반가운, 정말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황홀함은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10월 중순이 되면 그렇게 기다리던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 소식을 듣기 전 태몽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손주를 낳게 되면 이름으로 지을 글자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아침 해 욱(旭)자와 햇빛 희(曦)자였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꿈에 글자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잠을 깨어 생각해 보니 그 욱(旭)자와 희(曦)자는 제 이름 동호(東昊)와 같은 뜻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날 밤 심한 비바람이 쳤었는데, 제가 태어난 새벽 비바람이 그치고 아주 햇빛이 맑게 비치는 날이 되었다고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동쪽 하늘의 아침 해 같은 사람이 되라고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런데 제가 꿈에 받은 글자가 바로 아침 해와 그 햇빛을 뜻하는 글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욱(旭)자를 넣어 이름을 짓고, 딸을 낳으면 희(曦)자를 넣어 이름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아들 며느리에게 메일로 보냈더니 아들 며느리도 좋아하며, 아들을 낳으면 형욱(亨旭)이라고 짓고, 딸을 낳으면 민희(民曦)라고 짓기로 하였다면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형통케 하는 햇빛 같은 삶을 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형욱아, 민희야.>라는 제목으로 벌써 몇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아들 셋을 기르면서도 가끔씩 편지를 썼었고, 그 편지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신앙과 인생을 교육할 수 있었습니다. 손주들에게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태중에 있는 손주에게 벌써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 째 편지에서는 아이들의 이름을 뜻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름처럼 나라와 민족의 햇빛으로 사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사람들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살다보면 세상이 아름답지 못하고, 사람들이 아름답지 못하여 실망이 될 때도 있겠지만, 실망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싫어하지 말고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햇빛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어둔 세상과 사람에 실망을 하여 저들을 싫어하고 미워한다면 어떻게 형욱이가 될 수 있고, 민희가 될 수 있겠느냐며 세상과 사람을 깊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두 번 째 편지에서는 아이들이 평생 자신의 주제로 삼고 살아야 할 성경 구절과 찬송가를 일러 주었습니다. 제가 제 복중의 손주들을 위하여 찾아 준 성경은 이사야 30장 26절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그 성경을 찾아 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의 햇빛 같은 사람이 되라’ 일러 주었습니다.
손주들의 이름과 삶에 딱 들어맞는 찬송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제가 평소에도 좋아하던
358장 찬송이었습니다.
<아침 해가 돋을 때 만물 신선하여라. 나도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새로 오는 광음을 보람 있게 보내고, 주의 일을 행할 때 햇빛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한번 가고 안 오는 빠른 광음 지낼 때 귀한 시간 바쳐서 햇빛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밤낮 주를 위하여 몸과 맘을 드리고 주의 사랑 나타내 햇빛 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아멘.
저는 저 뿐만 아니라, 제 사랑하는 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이 낳을 제 손주들 그리고 그 손주들이 낳을 제 후손 중에 단 한 사람도 밤낮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만 생각하며, 남보다 좋은 것을 먹고, 남보다 좋은 옷을 입는 것에 목숨 걸고 사는 뚱뚱교 교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 묘비에 <먹다 지쳐 잠이 들다>라고 쓰고 싶지 않습니다.
저와 제 자녀와 손주와 후손은 모두가 다 어둔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힘든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실망하지 아니하고, 그 세상을 사랑하며 그 세상과 사람들을 비추는 햇빛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데 삶의 목표를 두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이 저와 제 사랑하는 후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저와 제 사랑하는 후손들뿐만 아니라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후손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자식이 없어서 하나님 전에서 울며 기도하던 한나에게 하나님은 자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식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아들로서 키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아들로 키우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젖 떼자마자 하나님께 드립니다.
결국 한나의 아들은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인물이 됩니다. 사무엘이 됩니다.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나라와 민족과 세상의 햇빛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됩니다. 어머니 한나의 기도와 어머니 한나의 결단이 사무엘을 만들었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우리 부모들이 다 한나와 같은 기도를 하고, 한나와 같은 결단을 한다면 우리의 모든 자녀들은 다 사무엘이 될 것입니다.
제 큰 아이가 한동대학교에 입학을 하여 한 한기를 마쳤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재수하여 소위 명문대학에 가고 싶어 하였었습니다. 우리 한국은 선배들이 후배들을 끌어주는 사회인데 자기를 이끌어 줄 훌륭한 선배들이 없는 학교의 졸업생이 된다는 것이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제가 제 아이에게 해 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학교 덕 보기보다, 학교가 네 덕 보았으면 좋겠다.> 정말 입니다. 그게 제 소원입니다. 학교 덕을 보는 사람보다, 학교가 덕을 보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나라와 세상의 덕을 보며 사는 사람보다 나라와 세상이 덕을 보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겨우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장난감으로 키워서는 안 됩니다. 쓸데 없는 경쟁심을 가지고 남보다 더 좋은 것을 먹고, 남보다 더 좋은 옷을 입기 위하여 욕심 부리며 사는 뚱뚱교 교인으로 키워서는 안 됩니다. 뚱뚱교 교주를 만들기 위하여 과외 시키고, 유학 보내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 그리고 손녀와 손자를 하나님이 쓰시는, 하늘이 쓰시는 그런 인물이 되도록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위하여 기도하고, 실제로 사랑하는 자녀를 한나와 같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보다 큰 뜻과 기도를 가지고 자녀를 키우는 한나와 같은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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