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하고 기도하면 용서된다.
이한규 목사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어느 날, 영국의 웰링턴 제독이 불량 병사를 총살하기로 결정하고
총살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변화시키려고 교육도 하고, 징계도 하고, 감옥에도
가두었지만 너는 반성하지 않았다. 이제 총살시킬 수밖에 없다.”
바로 그때 그 병사 친구가 제독에게 말했다:
“제독님! 제독님이 다 하셨지만 한 가지 하지 않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네, 용서입니다.”
그 말을 듣고 웰링턴 제독의 마음에 갑자기 감동이 생겼다.
“네 말이 맞다. 이제 그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겠다!”
그 뒤 이 병사는 아주 모범적인 병사가 되었다고 한다.
진정한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강도가 변화된 이유
마태복음에 보면,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둘 다 예수님을 욕했다. 마 27:44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두 강도 중 하나가 예수님을 조롱하자
나머지 한 강도는 조롱하는 그 강도를 꾸짖으며 말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눅 23:40-41
그렇게 말한 후에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 하소서” 눅 23:42
그 고백을 받으시고 예수님은 그에게 천국을 허락하셨다.
마태복음에서는 두 강도가 다 예수님을 욕했는데
왜 누가복음에서는 두 강도 중의 하나는 큰 변화가 생겼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하신 용서의 말씀 때문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하신 가상칠언 중 첫 번째 말씀인 용서의 말씀이다.
처음에는 두 강도가 모두 예수님을 욕했지만(마태복음 기록)
예수님의 용서의 말씀을 듣고, 그 중 한 강도는 변화되었다.
그 말씀을 듣고, 십자가 위의 한 강도는 깊은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된 것이다.(누가복음의 기록)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이고, 십자가의 핵심 의미이다.
용서는 내 힘과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1. 기도해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용서의 기도를 하셨다.
용서는 쉽지 않다. 인간의 의지나 결단으로는 용서가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다.
아직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미운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기도하라 눅 6:28
우리는 하나님께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용서의 은혜’만 구하지 말고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용서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살면서 너무 큰 상처를 받으면 기도도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기도하려고 할 때 마음에 평강이 생긴다.
기도하면 내가 상처를 주지 않고, 상처를 당한 것이 축복이고,
내가 배반하지 않고, 배반당한 것이 축복임을 깨닫게 되고,
상처 안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그때 그에게 있는 상처는 급속히 아물게 될 것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하면 길이 막히지만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용서하면 길이 열린다.
기도하면 용서할 수 있는 있는 용기가 생긴다.
기도하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단점은 보이지 않고 장점만 보이게 된다.
▲2. 사람의 연약성을 이해해야 한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남이 고통당한다는 것을 모르고, 고통을 주기도 하고
남이 고통당한다는 것을 알고도, 고통을 준다.
둘 다 인간의 연약성이다.
어느 날, 한 유대인 기자가 히틀러의 참모로 수많은 유대인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밀착 취재했다.
처음에 기자는 그런 사람은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재판정에서 그의 삶을 들으면서 기자는 아이히만을 동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를 이해하자 용서하는 마음도 생겼다고 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에게 얼마나 실수가 많은지 모른다.
말 하나에도 얼마나 실수가 많은가? 우리는 모두 실수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정의의 잣대로만 그를 정죄하지 말고
침착하게 그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실 그 사람의 잘못은 대개 과거에 우리가 저질렀던 잘못이고
현재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이다.
사람이 가깝게 지내면 상대방에 대한 기대치 가 높아
사소한 것으로 실망할 때가 많지만
우리는 기대치보다 이해치 를 높여야 한다.
▲기도제목을 빙자한 수법, 수작
상대방의 약점을 정면으로 공격하지 말고
진짜 약점과 수치스런 일은 딴 사람에게 최대한 공개치 말아야 한다.
기도제목을 나눌 때에도
“우리 남편이 외박을 자주 하는데 기도해주세요.
우리 남편이 도박에 빠져 있는데 기도해주세요!”는 조심해야 한다.
기도제목을 나눈다는 명목으로 남편을 욕하고 험담하는 말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다른 구역으로 퍼져나가면 큰 문제 거리가 될 수도 있다.
기도제목을 나눌 때 지혜롭게 나누지 않으면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이 험담과 가십을 전파하는 시간이 된다.
어찌 되었든지 교회와 가정에서는 남에게 흠이 될만한 얘기는
입에 자물통을 달고 하지 말아야 한다.
▲3.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대단한 것으로 알고
“일곱 번까지 할까요?”라고 마치 큰마음을 가진 것처럼 물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마 18:22
이것은 490번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라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이다.
두 번, 세 번, 일곱 번이라고 세기 시작하는 용서는 이미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복수를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복수할 때 “내가 이제까지 몇 번이나 용서했는지 알아!”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특히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어 그 기도가 응답받기를 원하는 분들은
반드시 내 주위에 용서할 대상이 없는가를 살펴서 먼저 그를 용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않으면 기도응답도 막히기 때문입니다.
▲4. 상처를 잘 잊어야 한다.
주님은 군중들의 악한 행동도 금방 잊으셨고,
제자들의 배반도 금방 잊으셨고,
또한 십자가에서 조롱하던 강도의 행동도 금방 잊으셨다.
주님의 용서가 한이 없는 이유는
한이 없이 받은 상처를 금방 잊어버리셨기 때문이다.
용서는 상처를 잘 잊어버려야 가능하다.
▲과거사를 재론하지 말자
예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기억하는 기억력이 없으시다.
그처럼 우리도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려야 한다.
부부싸움을 해도 현재의 일로 싸워야지 과거의 그 일을 끄집어내서
“옛날에도 그랬지 않느냐?”고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용서한 죄를 재론하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과거의 상처를 재론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상처에 매달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다.
과거가 현재를 가두는 감옥이 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하루 빨리 과거의 감옥 문을 열고 미래로 나가야 한다.
그 상처도 하나님의 훈련과정이었음을 믿고 나가야 한다.
▲팔이 안 붙는 이유
한 사람이 팔이 부러져 병원에서 치료했는데 부러진 팔이 붙질 않았다.
의사가 환자에게 “이상하게 부러진 팔이 잘 붙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환자가 말했다;
“그럴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이 팔로 아내를 심하게 때렸거든요.”
그래서 아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를 받았다.
그때야 비로소 팔이 붙기 시작했다.
그 임상결과를 보고 폴 뚜르니에는 말했다.
“병과 도덕성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암뿐만 아니라 고혈압, 당뇨, 두통, 손발 마비 증상,
구토, 위장병, 신경통, 설사 등의 수많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마치는 말
내가 용서하면 나도 변화되지만, 그 사람도 변화된다.
주님의 용서하는 기도를 듣고 한 강도가 변화되었다.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가 바울을 변화시켰다.
우리의 용서의 기도가 우리 배우자를 변화시키고,
우리 자녀와 가정과 교회를 변화시킬 것이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용서하기만 힘써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높이 들어 쓰실 것이다.
미국 문필가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용서는 자기를 짓밟는 사람에게 향수를 뿌려주는 풀꽃 향기와 같다!”
그처럼 용서는 아름다운 것이다.
용서는 축복받는 가장 위대한 길이다.
우리가 용서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
오직 용서만이 사는 길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건너가야 할 다리를 스스로 파괴하는 사람이다.
용서란 중심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용서가 어렵다.
그러나 용서가 어렵기 때문에 용서하면 능력이 나타나고,
질병이 떠나가며, 축복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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