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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행의 죄/고린도전서 5장

by 【고동엽】 2021. 11. 29.
음행의 죄
고린도전서 5장



오늘 고린도전서, 에~ 5장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많은 문제들 앞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린도 교회는 이 문제를 극복하고 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오늘 두 번째 문제인데요. 첫번째 문제는 분쟁의 문제, 혹은 분열의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안에 나누어짐이, 분쟁이 있었습니다. 이 분쟁에 대한 바울의 권면을 우리가 1장부터 4장까지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음행의 문제였습니다. 음행. 부도덕의 문제. 우리가 이 죄의 내용을 5장 1절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5장 1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 도다." 에~ 이 죄의 내용은 고린도 교회의 어떤 성도, 어떤 성도가, 아마도 굉장히 두드러진 성도, 어쩌면 리더쉽의 위치에 있었던 성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아비의 아내를 취하고 있었다. 아비의 아내, 원문에 보면 '아비의 아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아비의 여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비의 여자. 그럼 어떻게 되요? 어머니가 아니겠죠. 어머니면 표현을 어머니라고 했겠지 설마 아비의 여자! 이렇게 표현을 했겠습니까? 성서학자들은 틀림없이 그것이 계모였을 것이다. 아비의 첩, 아버지가 좀 방탕한 분이였고 여자들이 아마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아비의 여자중의 한 사람과 관계하고 있었다, 취하였다라는 말이 현재형입니다.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 시제. 그러니까 그 관계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불륜의 관계가 가족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종의 근친상간의 범죄, 불륜의 범죄가 한 가족 안에 있었고 그것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도, 또 오늘의 교회 안에도 이것은 있을 수 있는 존재할 수 있는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 가운데도 이런 가족 안에서의 범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분쟁이라는 것, 고린도 교인들 안에서 나눠지고 있었던 분쟁의 문제, 분열의 문제는 외형적으로 교회를 파괴하고 또 고통을 가하는 사건이었다면 이런 교인들의 은밀한 범죄, 불륜의 범죄, 혹은 이 사람이 어떤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면 이런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의 음행의 범죄, 이것은 교회의 내적인 거룩함을 파괴하는 범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더 커다란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고린도 교회는, 또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상당히 둔감한, 혹은 의도적으로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고 빗겨갈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죄를 무시하고 그들 안에 있었던, 그들 가운데 있었던 죄를 무시하고 이런 죄를 덮어버리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변명하던가 자기를 자랑하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들의 상태를 가리켜서 바울은 그것이 그들의 교만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의 교만함이라고 말합니다.
2절 같이 읽겠습니다. 2절 다같이 시작.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음, 이 사건을 통해서 바울 사도는 이런 음행을 포함한 이런 죄에 대한 교회의 태도, 교회가 죄를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죄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당연한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겠는가를 바로 이 고린도전서 5장을 통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교훈을 몇 가지로 우리가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뭐냐 하면 "그 죄를 통한히 여겨라" 우리가 죄에 대해서 마땅히 가져야 할 합당한 첫번째 태도가 있다면 죄를 통한히 여겨라 라는 사실입니다.
2절에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통한히 여기지 아니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에 대해서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는 그 죄를 통한히 여기는 태도 입니다.
에~, 뭐 통한이라니까 무슨 이상한 단어가 아니고 죄를 슬퍼하라 이 말입니다. 죄를 슬퍼하라. 근데 이 슬퍼한다는 단어는 본래 원문에서 어떤 때 많이 씌어 졌느냐면 이 단어가 죽은 사람을 인해서 애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변에 어떤 사람이 죽죠. 나와 가까운 사람, 또 내가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우리 주변의 가까운 이웃일 때 그가 죽음을 당할 때 우리는 애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심히 슬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린 주변에 죄를 범한 사람들에 대해서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 말입니다.
우리 주변의 어떤 이웃들이 다른 사람들이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잘못된 태도, 두 가지 잘못된 반응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면 그것을 은폐시키거나 합리화시켜주는 것, 그것을 도와 준다고 생각을 해요. 그 사람의 죄를 내가 숨겨준다든지 혹은 합리화시켜주고 대신 변명을 해주고 그래서 그것이 내가 그 사람을 도와준다고 우리는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 잘못된 반응은 또 그와의 반대로 정반대의 극단적인 태도라고 할 수가 있는데 막 그 사람의 죄를 떠들고 돌아 다니면서 그 사람을 막 정죄하는 태도. 이 두 가지가 다 잘못된 것이에요. 이것은 다 그 사람을 신앙적으로 돕는 일에 전혀 유익함을 가져 올 수가 없는 잘못된 태도. 우리는 종종 우리 주변에서 어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죄 속에 빠질 때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에 설 수가 있어요.
두 가지가 다 잘못된 것인데 하나는 뭐냐 하면 숨겨준다든지 또, 아 그 사람은 이래서 그랬다 괜찮다, 합리화 시켜주고 변명한다든지 이것도 잘못이고 또 그것을 막 떠벌리고 다니면서 가십으로 만들고 그 사람의 얘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 막 떠벌리고 다니면서 그 사람을 아주 뭐 파괴시키고 정죄 시킬려는 태도 이것도 또 다른 극단적인 잘못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란 말예요. 여기서 단어가 그런 단어에요. 그런 마음으로 슬퍼하라, 그런 마음으로 슬퍼하라. 함께 슬퍼하는 태도. 나의 죄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이렇게 함께 슬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슬퍼하면서 에~ 그것을 마치 그 사람의 영혼의 죽음처럼 육체의 죽음이 슬픔인 것처럼 그 사람의 육체보다 더 소중한 그 사람들의 영혼의 죄 때문에 어두어지고, 또 죽어가고 있는 그 모습을 인하여 영적인 죽음을 인하여 우리가 함께 슬퍼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갈라디아서 6장 1절 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 갈라디아서 6장 1절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도 그 형제들의 범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다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뤄야 하느냐. 자, 갈라디아서 6장 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으흠~ 우리가 범죄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범죄한 사람에 대해서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는 긍극적으로 그 사람이 그 상태에서 바로잡힐 수 있도록 그래서 올바른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 사람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중요한 태도는 뭐냐면 나도 같은 죄에 빠질 수가 있다 그걸 생각하면 그 사람을 마구 정죄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도, 나도 그런 위치 그런 자리에 있었다면 어쩌면 나도 같은 범죄를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태도. 이것이 우리 주변의 범죄하고 있는 이웃들에 관해서 가져야 할 첫번째로 가장 중요한 태도 입니다.
그것을 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번역을 할 때 아주 한문을 섞어서 아주 재밌는 단어를 여기 썼어요. 통한히 여겨라. 죄를 통한히 여겨라. 죄를 슬퍼하라. 결국 죄에 대해서, 기독교적 대답, 성서적인 치유, 유일한 대안은, 그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 회개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 진지한 회개 속에는, 언제나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3가지 요소. 지적 요소가 있고, 감정적 요소가 있고 의지적 요소가 있어요. 진정한 회개는 언제나 이 3가지 요소를 포함합니다.
첫째로 지적 요소라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 그 죄를 부인하면 해결이 안 돼요. 그리고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이건 존경할 만한 사람이에요. 뭐 사람이 죄를 범할 수도 있죠. 죄를 범하지 말아야지, 뭐 인생을 살아보면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해요? 네, 제가 죄를 범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회개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감동이에요. 이것이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다울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죄에 대한 지적인 회개, 죄를 바로잡는 회개의 올바른 스텝, 지적인 스텝은 우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지적 요소에요. 회개의 지적 요소.
두번째 회개의 정적 요소는 뭐냐면 우리가 그것을 진지하게 인정 했다면 거기에 아픔이 있다는 말이죠. 그 슬퍼하는 것에. 이게 감정적 요소에요. 회개의, 진정한 회개가 포함해야 할 감정적인 요소는 에~ 지적으로 그것을 인정할 때 인정하게 되면 아프죠. 여러분 자기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픈 일입니다. 예, 아픈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 아픔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피해서 살짝 카바해 버리거나 다른 말로 피해가던지 이렇게 해 보려고 애를 쓴단 말이죠. 그럼 해결이 안 된단 말이죠. 맞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창피하고 부끄럽고 이걸 인정한다는 것이. 그러나 인정하고 나면 고통스럽죠. 아주 고통스러워요. 그 단계를 지나야 합니다. 감정적인 고통스러움. 슬퍼하는 겁니다.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회개의 의지적 요소가 있어요. 그것은 떠나는 것이에요. 죄를 떠나는 것이에요. 결단하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도록 그 죄에 계속 내가 거하지 않도록 그 죄에서 떠나 가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서 나는 이제 죄와 결별한다. 예수께서 범죄한 사람들 항상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면서 마지막에 선언하신 말씀. 간음,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죄를 범하지 않고 떠나요 그 자리에서. 이게 의지적 요소에요.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그래서 언제나 감정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슬퍼함입니다.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 네 흔히 우리 한문에서 우리 '회개'라는 단어가 두가지 단어로 되어 있어요. '회'와 '개' 이 두가지 단어로요. '회'라는 것은 이런 감정적 요소를 겨냥한 것이에요. 후회함. 내가 후회한다, 부끄러워한다, 슬퍼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회개가 아니죠? 뭐가 있어야 돼? '개'가 있어야 돼요 '개'가. 이 '개'가 있어야 돼. 고쳐야 된단 말입니다. 그 죄를 계속 거하면 안됩니다. 그 죄에서 떠나야 한단 말이죠. 이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란 말이죠. 그것이 진정한 회개에요. 근데 거기에 반드시 감정적인 요소가 있다. 슬퍼함이 있어야 된다. 슬퍼만 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 그러나 정말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슬퍼하는 단계가 있어야 된다. 나의 죄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 이웃들의 죄. 내가 직접 범한 죄가 아니지만 이웃들의 죄에 대해서도 슬퍼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한 교회 안의 범죄일 때는 우리가 공동체잖아요. 우리가 지체잖아요. 한 지체가 병들면 어떻습니까? 같은 아픔을 느껴요. 에~ 발가락이 아프면 상관없어요? 나하고? 발가락 문제에요? 예? 한번 발가락 앓아보세요. 제가 발가락이 아프면 여기 서 있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금 제가 맹렬한 활동을 여기서 하고 있는 부분은 주둥입니다. 하하! 주둥이와 발가락은 상관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네. 발가락이 아파서 내가 설 수 없을 없다. 그럼 내 실존의 밑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하하! 설 수가 없어요, 도저히 설 수 없어. 말할 수가 없어요. 연관되어 있어요. 그것이 지체에요. 그것이 지체. 자, 교회의, 에~ 식구들 중의 한 사람이 범죄 했다. 그거 남의 일이 아니에요. 우리 일이에요. 우리 일. 그럼 어떠해야 되요? 같이 아파야 되요. 정말 같이 아파야 되죠. 자. 마치 그것을 내가 범한 것처럼, 그 죄를 내가 범한 것처럼 같이 아파야 하죠. 같이 부끄러워하고. 요즘 참 이상한 사건이 자꾸만 TV에 나오고 그러는데 남의 일처럼 보지말고 우리 일이다 우리가 함께 부끄러워 하고 우리가 함께 아파하고 우리가 함께 통회하고 통한히 여기는 죄를 통한히 여기라. 죄를 통한히 여기라.

두번째로, 자 이 죄에 대한 두번째 스텝이 뭐냐면 죄를 판단하라.
죄를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3절부터 5절까지 말씀에 자, 우리 3절 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다." 이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 그 사건의 전모를 이미 내가 파악하고 있다. 바울이 말이에요. 나는 그것을 이미 파악했다. 바울이 그것을 하는 이유는 이 말을 하는 중요한 이유는 내가 이미 파악했고 또 그 사실 여부를 이미 판단 했는데 너희들은 아직도 이 문제를 다루지 않고 그냥 미적미적 이것을 가지고 있구나. 여러분 병이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병은 빨리 발견할수록 좋은 것이죠. 병은 빨리 발견해야 되요. 조기 발견을 해야 되요. 그리고 조기 처리를 해요. 조기 수술을 하던가 떼내던가 뭘 빨리 빨리 발견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의 죄도 마찬 가지입니다. 빨리 판단하고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아요. 그걸 자꾸만 미루어 두는 것은 그렇게 좋지 않단 말이죠. 빨리 그것은 처리해 버리는 것이 좋다. 바울은 그것을 판단했다 이 말이죠. 판단했다.
에~, 바울이 이 말을 이런 식으로 한 것이 아녜요. 내가 그 사람에 관해서 그럴 줄 알았다 뭐 그런 식의 얘기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개인적 유감의 피력이 아닙니다. 바울의 궁극적 관심은 어디 있냐면 교회의 리더로서 그것이 공동체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느냐 거기에 관심이 있었던 거에요.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빨리 이것이 판단되고 어, 처리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얘기한 겁니다.
그럼 어떻게 판단되어야 한다고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습니까? 이미 2절에서 바울은 해결책을 제시했어요. 2절에서. 다같이 읽겠습니다. 2절 다시 한번 시작~. "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현대 교회에서는 참 받아들이기 힘든 메시지에요. 그러나 일단 이렇게 죄를 범한 사람을 교제가운데서 분리시켜야 한다는 것이에요. 우리들의 교제 가운데서 분리시켜야 한다. 더 정확한 말을 쓰면 요즘 우리 교회에서는 현대 교회에서는 듣기 힘든 소리지만 출교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출교. 교회의 교제 가운데서 뜯어내야 된단 말이죠. 물론, 이것이 처음 죄를 범했다 해서 무조건 출교 시키자 이렇게 조처하는 것은 아니에요. 아마도 이 사람은 아마도 이 사람은 이 범죄한 고린도교회의 이 교인은 그전에 어떤 경고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가서 권면도 했을 것이에요. 회개하십시오라고 말도 했을 것이에요. 그러나 그는 회개를 거절하고 그 범죄, 불륜의 상태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이에요. 그리고 만약 교회가 이것을 허용한다면 아 뭐 이렇게 개판치고 불륜해도 교회에서는 집사할 수가 있는 것이로구나.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다 이 말이죠. 바울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래서 거룩한 공동체 안에 이런 죄가 계속 오염되고 확산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바울 사도는 거기서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하면 거기서 어떤 판단을 제시합니다.
5절 같이 읽겠습니다. 5장 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5장 5절 시작~.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사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싶었다는 것은 나는 이미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 이런 사람은 나 같은 경우에는, 그러나 교회적으로도 이런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 주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도대체. 그 사람이 아직 교회 안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어떤 성도가 교회 안에 교회의 교제 안에 있다는 말은 교회의 보호라는 우산 아래 있는 것을 의미해요. 마치 우리 자식들이 부모를 속썩이고 잘못합니다. 그래도 가정 안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해요? 계속 부모가 어떻게 해요? 책망도 하고 너 고쳐야 돼, 너, 너 그렇게 잘못하면 안돼, 막 야단도 치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정이라는 보호의 우산아래서 우리의 자녀들이 살고 있음을 말해요. 그런데 끝끝내 자녀가 계속 말 안 듣고 계속 그러면 나중에 어떻게 할 수도 있어요? 네? 너 나가 그럴 수가 있어요. 너 나가. 너 집에서 나가. 나가면 어떻게 돼요. 더 이상 가정의 보호라는 우산이 그를 지켜 줄 수 없어요. 최악의 상황입니다만. 니 맘대로 해 그러면. 하도 화가 나면 부모가 그럴 수도 있잖아요. 너 니 맘대로 살아. 교회에서도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가 있단 말이죠. 너, 그러면 니 맘대로 가서 해봐라. 교회 안에 있을 땐 지도도 해주고, 권면도 해주고, 회개하라 그러고 그 우산 아래 있지만, 교회 바깥을 나간다는 말은 뭐에요? 이게 사탄에게 내어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사탄에게. 그 사람이 범죄한 것도 사탄의 영향 때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을 때는 그래도 회개의 권면이 있고 성도들의 그를 향한 기도가 있고 책망이 있고. 그것이 있어요. 그러나 딱 벗어나게 되면 제 맘대로 사는 것이에요.
사탄이 봐줄 것 같아요? 마귀가 범죄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을 이용하고, 이용한 것에 불과해요. 사탄에게 이용당하던 자들은 사탄의 품안에 돌아오게 되면 어떻게 하냐면 사탄이 아주 밟아버려요. 파멸 시켜요. 그것이 사탄의 본성이에요. 처음에 이용했어요. 너, 죄 좀 범하고, 아, 그래서 교회를 좀 흔들어봐라. 네, 그러나 사탄이 아주 자기 품안에 오게 되면 아주 밟아버려요. 그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뭐냐 그 생명 가져 가는 거에요. 하나님이 그대로 이 사람을 버려두시겠다는, 그것은 죄를 회개치 않는 사람, 성도로서 죄를 회개치 않고 계속 죄 가운데 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뭐냐면 육체적 사망이에요. 죽음이에요.
바울은 그것을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더 자세히 말합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고린도전서 11장. 30절 말씀. 고린도전서 11장 30절 입니다. 같이 읽을까요. 11장 30절 시작~.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 이는 성찬식을 경솔히 여기고, 함부로 참여 하는 사람에 대한 바울의 경고 입니다 여기서. 그런데 이 성찬식이 뭘 상징하냐면 주의 만찬의 가장 중요한 상징은 주님과 나 사이의 교제의 상징이에요. 교제. 근데 죄는 이 교제를 깨뜨립니다. 교제를 단절시킵니다. 그리고 계속 이 사람이 죄 가운데 거하게 되면 그러니까 죄 가운데 있으면서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주의 만찬을 더럽히고 그런다면, 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뭐냐.
30절에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자는 자가 적지 않다. 하나님이 징계하는 어떤 스텝을 보여주고 있어요. 처음에 약하게 하세요, 약하게. 그래서 빨리 깨달아라 약하게. 그래도 깨닫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약하게 했는데도 깨닫지 않으면, 병들게 하세요. 오해하지 마세요. 모든 병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녜요. 모든 병이. 그러나 어떤 병은 죄 때문에 올 수도 있다. 어떤 병은 죄를 회개치 않기 때문에 올 수도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일단 자기가 연약해지고 병들면 한번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게 좋아요. 하나님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습니까? 그래도 회개하는 것이 없다. 그러면 처음에는 약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그래도 깨닫지 않으면 너 누워서 생각 좀 해봐. 또 침대에 눕혀 놓으시고, 병들게 하시고. 근데 병든 상태에서도 계속 회개치 않아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요? 눕혀 놔도 깨닫지 않으면 뭐예요? 너 아주 자, 그냥. 그래서 잠자는 자 여기 잠자는 자는 육체적 사망이에요. 그냥 생명을 가져 간단 말예요. 생명을 가져가. 왜냐면 이 사람은 살아도 계속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밟아 버리는 거에요. 하나님을 욕되게 할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가져가신다 이 말이에요.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예요. 다시 돌아 오세요.
고린도전서 5장, 5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5장 5절에 이런 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에 내어 주었으니 이는 무엇을 멸하고?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뭐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녜요. 한번 예수 믿으면 구원은 받아요. 그러나 계속 죄만 범하고 살아가는 육신. 더 이상 이땅에 존재해야 할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생명을 가져가신단 말예요. 그리고 차라리 죄 덜 범하고 구원 받은 영혼으로 내 앞에 와라. 불러 가실 수 있단 말이죠. 여기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우리가 죄를 충분히 두려워해야 할 이유를 여기서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죄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죄를 무서워하고 죄를 판단하는 것이 필요해요.

그 다음에 마지막 세 번째는 죄의 오염을 막아야 합니다. 죄의 오염을 막아라. 첫째로는 죄를 슬퍼하고 통한히 여기라. 죄를 판단하라. 그 죄가 어떤 죄인가를 분명히 우리가 잘 판단해 봐야 해요. 그리고 세 번째로 죄의 오염을 막아야 합니다. 죄의 전염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전체가 사실은 에~ 고린도전서 5장 전체가 여기서 가르치고 있지만 그러나 특별히 6절에서 13절 마지막 절까지 죄의 오염을 막으라. 그리고 그 막는 방법을 이미 제시했어요. 죄의 오염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네? 그 죄인을 그 사람을 회개치 않는 그 죄인을 교제가운데서 분리시켜야 한다 이말예요. 교제 가운데서 분리시켜야 된다. 마치 암세포를 뜯어 내야 되는 것처럼. 그래야 계속 퍼지지 않죠.
그 이유는 두 가지에요. 공동체가 교회라는 공동체가 성결함을 거룩함을 보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의도도 있어요.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자기의 죄를 처절히 깨닫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고 그가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근데 죄를 계속 관용만 하면 깨닫지 못해요. 아, 죄를 범해도 되는 구나. 아, 죄 범해도 괜찮으네. 교회서 집사도 할 수 있고 아무래도 괜찮고. 우리가 하나님을 우습게 알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어떤 조처가 일어나게 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해요? 죄를 두려워 함이 생깁니다. 본인도 그렇고. 그래서 언젠가는 이 사람이 돌아올 수 있는 회복의 기회를 오히려 그렇게 해서 진지하게 줄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거나 경홀히 여기지 않도록 할 수가 있단 말이죠.
자, 그것을 바울은 이미 제시했어요. 그래서 2절에서 왜 물리치지 않았느냐 이런 사람을. 그리고 6절에 보세요. 6절, 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6절 다같이 시작~.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교인들 가운데는 그런 죄를 범한 사람을 단순한 생각에서 그냥 보호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보호한다. 그건 보호가 아녜요.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안 좋고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도 안 좋고 일단 분리를 시켜야 돼요.
그럼 어떻게 실제로 분리시킬 수 있느냐? 과거의 교회에는 권징과 치리가 잘 실시되었습니다. 현대 교회에선 그것이 참 어려운 것이 사실이에요. 우선 권징과 치릴하면 이걸 잘 따라 주어야 하는데 따라, 따, 따르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에요. 잘못하고 교회가 자기를 징벌했을 때 네, 제가 그 징계를 받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에요. 죄를 범했어도 이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에요. 전 그래서 다윗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네, 나는 잘못했습니다. 이건 위대한 사람이에요. 나를 뭐 교회가 모욕했다, 뭐, 교회를 걸고 심지어 법정에 고발하는 사람도 있고. 현대 사회 속에서는 참 이 권징과 이 치리의 실제 적용이 참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떤 면으로도 죄인을 좀 분리시키고 죄를 경고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저는 여전히 필요하고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왜냐면 퍼지기 때문에, 누룩이 퍼지는 것처럼 이 누룩이 죄의 상징적이어서 퍼진단 말예요. 그것이 잘못된 영향을 준다. 주변 사람들에게 응, 죄 범해도 괜찮다, 이렇게 적당히 해도 괜찮다 말이지 그런 메시지를 줄 수 있단 말이죠.
퍼진다 말이죠 이것은. 퍼진다. 그러니까 이제 고린도 교회 안에 하나의 오해가 일어났어요. 죄인들과 분리되라니까 이세상에서 그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 믿지 않는 사람들 얼마나 죄인들이 많습니까! 내가 그런 사람들과도 상대를 안하겠다. 뭐, 이런 사람들이 생겼어요.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그것은 믿지 않은 사람을 얘기한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을 얘기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 오해를 시정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죄 범하는 사람들하고 내가 상대를 안하겠다. 가만히 봐서 죄를 범하는 사람을 상대 안하겠다. 그럼 어떤 사건이 발생할까요. 이 세상에는 하도 죄인이 많으니까 상대할 사람이 아예 없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한 오해가 없도록 여기 9절, 10절에서 아주 흥미 있는 말씀을 합니다.
9절 10절 같이 읽어요. 9절, 10절 시작.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자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내 얘기가 그얘기야.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죄인들은 사귀어라. 오히려. 그래야 전도도 할거 아녜요. 그 사람이 회개도 할거 아녜요.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믿는다고 말하면서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이 문제다. 이런 사람. 이렇게 쉽게 생각하시면 되요. 바울은 여기서 어떤 신학자가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 교회는 배와 같다. 교회는 배와 같다. 배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바닷속에 있어야 해요. 배는 바닷속에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 바닷물 속에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배는 반드시 바닷물 속에 있어야 되지만 응, 물이 무섭다고 해서 배가 바다를 떠나면 뭐예요. 배가 아녜요, 그거는. 장식품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배가 아녜요. 배는 바닷물 속 한복판에 있어야 되요. 그러나 문제는 바닷물이 뱃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요. 그럼 큰일이에요. 그럼 물을 퍼내던가 어떻게 분리를 시켜야 된단 말이죠.
자, 교회는 세상 한 복판에 있어야 되요. 교회가 세상을 떠나면 안돼요. 이 죄 많은 세상 한복판 속에 교회는 있어야 되요. 그러나 문제는 교회라는 배 안에 세상의 세속성인 죄가 교회 속으로 넘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요. 이건 안돼요. 그러면 그 배는 항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미션을 우리의 거룩한 사명을 복음선교의 사명을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사명을 수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요. 그래서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요? 분리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단 말이죠. 그래야 우리는 교회는 세속화를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이 말은 믿지 않는 사람들 죄 범한 사람들과 사귀자 말란 말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아라. 그리고 11절 이렇게 말합니다.
11절 다 같이 11절 시작.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 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 물론 그 사람이 처음 교회에 나왔다.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다. 그리고 죄를 범하고 있다. 그러면 도와 줘야 되요. 빨리 예수 믿고 복음 전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러나 이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람인데 죄를 범했다. 그리고 계속 회개 안하고, 죄 가운데 거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은 매우 악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해요?
출교 시키던가 쫓아내던가. 뭐, 출교라는 법적인 권징이 시행하기 어려워서, 이 사람이 아직도 뭐 출교해도 나 나오겠다 그러고 나오면 어떻게 할 수 없죠. 그렇다면 이 사람을 상대하지 말아야 돼요, 아무도. 아무도 상대하지 말아야 돼. 자기가 깨닫도록 해야 돼. 이런 사람하고 교제하면 안돼요. 아, 교회가 당신에게 너무하지. 사람들이 아 그러면서 자기가 그 사람 도와준다고 가서 식사하고 세상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다고 괜찮다고 힘을 내라고 용기를 내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러면 안된단 말예요. 그러면 안된단 말예요. 그러면 그 사람 돕는 게 아녜요. 그 사람이 죄를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돼요. 그저 그 사람을 상대하지 말아야 해요. 그러면 아 내가 죄를 범했더니 이렇게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대하는 구나 그래야 좀 깨닫지. 그래야 깨닫는다구.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서 그 사람을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돕지 못할 수가 있다. 이거 중요한 얘기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얘기예요.
오늘 이 말씀에서. 12절 그래서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뭐 상관 없어요. 그걸 뭐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우리는. 그러나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리라. 믿고 구원 받고 교회의 회중, 지체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으면서도 이런 상태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저는 뭐 이런 것을 교회적인 회의에 붙여서 어~ 할 수가 있다면 뭐 하겠죠. 뭐 그러나 이것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것은 지혜롭게라도 이런 사람을 교회 교제 가운데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게 목회를 할려고 저는 애를 써왔어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근데 가끔 문제가 뭐냐면, 이러한 성경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 목사님이 너무 하신다. 아녜요. 이런 사람은 분리를 시켜야 돼요. 신자라고 하면서 회개치 않는 사람 어떤 종류의 사람들입니까?. 11절에 다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어떻게 해? 음행을 해요. 음행. 음행의 죄에 계속 머물러 있어요. 또 탐람. 물질적인 탐욕. 그래서 경제적으로 잘못하고 잘못 관리하고 말예요. 돈 잘못 관리하고 탐람하는 것. 우상 숭배. 미신 숭배하고 크리스챤이라고 그러면서. 후욕. 이 후욕이라는 것은 이것은 말을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에요. 후욕. 파괴적인 말, 부정적인 말. 여러분 교인들이라 그러면서 계속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만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아예 상대를 하지 말아야 되요. 이런 사람들이 잘못된 영향을 끼쳐요, 주변에. 자꾸만 잘못된 영향을 끼쳐요. 술 취하고 토색. 이것은 아주 물질을 뺏어 오는 사람, 남의 것을 뺏어 오는 사람, 도적질 하고 그러는 사람. 이런 사람은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는 먹지도 말라. "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에서 이러한 사람을 분리시켜 우리의 교제가 거룩한 교제가 보호해야 된다. 이것이 바울의 교훈입니다.
이것을 실제로 우리가 적용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어렵죠. 쉽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혜롭게 오늘 같은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선 희망적인 얘길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됐겠나. 이런 문제를 고린도교회가 그럼 바울이 이렇게 권면 했을 때 어떻게 했느냐. 고린도교회는 잘 순종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처리를 했어요. 그래서 어떤 결과가 가져 왔느냐 에~ 고린도후서를 보면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결과부터 제가 말씀드릴게요. 고린도후서 2장. 5절부터 보면 그 결과가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2장 5절부터 보면. 자 고린도후서 2장 5절 이하에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지도자인 나만 근심케 한 것이 아니라 너희 모두를 그 사람 때문에 우리가 근심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내가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자, 6절 "이러한 사람이 뭐예요?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
교회가 어떤 결정을 했을 때 교회가 어떤 사람에 관해서 어떤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을 때 여러분이 그럴 때 교회의 결정을 존중해 줘야 되는 거에요. 교회가 나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되면 교회에 어떻게 영적인 권위과 질서가 설 수가 있냐말예요. 같이 따라줘야 돼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린다든지 그것은 교회를 돕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돕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이거 그들이 자기가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단 말예요. 벌 받는 것이 합당하다. 벌 받는 것이 합당하다. 족하도다 그랬어요.
그러나 거기서 끝나진 않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그 다음이 중요해요. 7절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이제는 시간이 지나갔어요. 이제는 그가 그 벌을 받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아마 그 죄를 떠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죄를 떠났어요. 그럼 어떻게 되요? 다시 받아 줘야 돼요. 이제는 회복시켜줘야 되요.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를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이제는 사랑을 저에게 나타내라 또 회개했다면 언제라도 회개했다면 뭐예요? 우리가 태도를 즉시로 바꿔야 해요. 그 사람을 받아줘야 돼요. 수용해야 돼요. 회복시켜줘야 돼요. 사실 왜냐면 그것이 그 사람을 일시적으로 징계한 이유가 왜 그렇습니까? 그를 파멸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뭐예요? 그렇게 해서 깨닫고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그를 돌아올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의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회개한 증거가 나타난다면 즉시로 어떻게 해야 돼요. 사랑하고 받아주고 회복시키고 이것이 성경의 원리라는 것을 바울 사도가 여기서 강조한 것입니다.
1800년대 중엽에 재미난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로부터 약 150년 전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헝가리의 의사선생님 가운데 의학자 가운데 아~ 세모 루이스라는 분이 있었어요. 세모 루이스라는 의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종의 산부인과 의사와 같은 사람인데 산모들이 저,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그 당시 만해도 한 백년 전만 해도 태어나는 아이들의 생존률이 전 세계적으로 아주 희박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다 죽었어요. 근데 이분이 가만히 판단한 것이 뭐냐면, 의사나 간호사들이 손을 씻지 않고 산, 그 아이, 출산하는 아기를 돕는 과정에 있어서 그런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것을 어, 그가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간호사나 의사들에게 그 소독제에 손을 씻고 하자고 제안을 했어요. 근데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미쳤다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그리고 더러운 곳에서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의 말을 듣지 않고 아이들은 계속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의 병실 안에서만은 깨끗한 아이들의 생명이 보전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깨달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말을 심한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그렇게 까지, 그렇게 까지.
우리는 이따금씩 죄를 범한 사람을 우리가 책망할 때에 우리는 종종 동정을 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까지 할 수가 있니. 아닙니다. 그것이 결국은 본인을 도와 줄 수가 있고 교회의 거룩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가르칩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좀 더 거룩한 패가 되어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서 항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을 거룩하게 지키고 보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본문은 가르칩니다. 죄의 무서움, 죄로부터 우리자신을 분리하는 거룩의 중요를 이 시간에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모두 죄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나나 이웃들이 죄를 범할 때에 그 죄에 대해서 슬퍼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정말 우리가 죄로부터 우리 자신이 지켜지고 죄로부터 교회가 지켜지게 도와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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