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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대각성/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수가성 여인(요 4:1-18)

by 【고동엽】 2021. 11. 28.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사적으로 전도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찾아가셔서 대화를 통해 구원하신 예는 본문밖에 없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결혼생활에 실패했습니다. 첫 남자 이후에 네 남자를 다시 거쳤지만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만났는지 모르는 남자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실 때 존귀한 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성경 첫 페이지에 남녀를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녀는 순서에서 선후가 있을 뿐 동등한 인격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주경학자 메튜헨리는 「남자가 머리라면 여자는 그 머리의 왕관」이라고 말했습니다. 남자가 정련되지 못한 흙에서 만들어졌다면 여자는 정제된 흙에서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직접 흙에서 만드셨지만 여자는 갈빗대에서 만드셨기에 한 단계 높은 재료로 만드신 것입니다. 남자와 평등한 존재로 창조된 여자는 남자의 보호 아래 사랑받으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하나님을 향해 반역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은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여자는 남자에게 사정없이 짓밟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 혼자 망하기 싫으니까 남자를 끌어들인 죄값을 지금까지 고생하며 톡톡하게 지불하며 사는 것이 여자의 운명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여자는 남자의 사유재산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이스 철학자 이스포텔레스는 “여인이 만약 자기 남편과 동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노예가 주인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녀가 동등하게 취급받는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는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노예처럼 취급해야 질서가 잡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풍조는 16세기가 되어서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루터는 “계집 아이는 남자보다도 말을 빨리 배우고, 걸음마도 빨리 배운다. 왜 그런지 아는가? 잡초는 좋은 곡식보다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자에게 투표권이 영국에서 허용된 것은 19세기부터입니다. 그만큼 수천년 역사를 통해 여자는 너무 천대를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오시자 타락한 남자들이 짓밟아 놓은 인격을 파격적으로 대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여자를 처음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처음 증거되기 시작할 때 유럽에서 처음 신자는 여자였습니다. 얼마나 주님이 여자를 극진히 대우하셨는지 모릅니다.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 보실 때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큰 죄인이기 때문에 먼저 불러 대우하셨습니다.
흔히 교회 안에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은 것을 이상하다 말하는데 사실은 당연한 것입니다. 전혀 비판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마다 여권이 신장되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자기들의 인격과 권리를 되찾으며 모든 악습을 타파하고 인간으로 존경을 받는 사회로 탈바꿈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그렇게 해 왔던 것입니다. 여기 있는 여자 분들도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은혜입니다. 100년 전만 태어났어도 이런 축복은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 이전에 살았다면 비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자들의 신분과 권리를 존중해 주어 성경 속에는 여자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서 가장 여성을 존중히 여긴 경우를 찾으라면 요한복음 4장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도 지나가시다가 사마리아를 찾아오셨는데 여자 하나를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사마리아까지 그 길이 얼마나 먼길인지는 모릅니다. 새벽에 예루살렘을 출발하여 정오에 수가성에 도착하셨습니다. 적어도 4-5시간을 햇빛을 받으면서 걸어오셨습니다. 이름도 밝힐 수 없는 이 무명의 여인을 위해서, 세상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생활도 깨끗하지 못한 여인 하나 구원하기 위해 그는 끔찍한 사랑을 가지고 수가라는 마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어떤 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소크라테스, 공자, 불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찾아오셔서 그 천한 여자의 영혼을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는 이 보배로운 사랑에 모든 여성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여인들이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성을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미친 영혼 하나 건지기 위해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희생시키신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은 영혼 하나를 귀중하게 보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서 국제 결혼을 한 여자들을 만나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배움이 짧아 영어를 잘못하고, 한국말도 오래 안쓰다 보니 말을 하는데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니고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여인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사님 자신은 도무지 그런 여인에게는 마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대화 중에 이러면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안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여인을 만나셨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찾아오셔서 만나 주셨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 주셔서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전달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기 나온 우리 모두를 그와 동일하게 사랑하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신분, 과거 등을 묻지 않으십니다. 있는 그대로 여러분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수가성 여인이 겪는 몇 가지 고통이 있었습니다.


1.정신적 고통이 있었습니다.
고독이 제일 먼저입니다.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여섯 번째 살고 있는 남자, 보나마나 뻔한 사람입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의지하는 것이지 언제 또 헤어질지 모르는 신분입니다. 마음이 갈리도 없습니다. 얼마나 삭막한 관계입니까? 이 여인은 잠을 자다가도 깨어 일어나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이런 여자는 당연히 이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생활을 하는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은 사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나기가 두렵습니다. 두문불출입니다.
사마리아만 해도 물 길러 나올 때는 아침 저녁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아무도 없는 시간에 살금살금 물 길러 나와 물을 긷고는 도망치듯 돌아갔습니다. 얼마나 고독한 여자입니까? 고독은 여자만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인 고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아십니까? 성경에 보니까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선악과를 하와가 먼저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먹은 뒤에는 공동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물으실 때에 아담은 “당신이 내게 주어 함께 살게 하신 저 여자가 내게 주므로 먹었나이다” 변명했습니다. 고독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저는 하와가 그 말을 남편으로부터 듣는 순간에 고독이 탄생했다고 봅니다.
“내가 먹고 싶어서 먹었습니다” 했으면 하와가 그렇게 고독하지 않았을 텐데 모든 책임을 하와에게 떠넘겼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급하니까 자기에게 다 뒤집어 씌웠습니다. 모든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순간에 여자에게 고독이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독의 탄생을 그 시간으로 잡고 싶습니다. 아무리 행복한 부부생활이라고 해도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고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팔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원래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다 결혼생활까지 원만하지 못하고, 의지할 울타리도 없고, 남들로부터 멸시받는다고 하면 정말 미칠 정도가 되어 버립니다. 흔히들 현대인들은 역사상 가장 고독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칼 로저스라는 현대 심리학자는 현대인의 고독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①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를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현란한 현대문명 속에서 나 자신을 도둑맞은지 이미 오래입니다. 돈에 인격을 값싸게 팔아 넘긴지 이미 오래입니다. 쾌락에 내 고귀한 인격까지 팔아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송두리채 상실해 버린 텅텅 빈 로보트가 된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합니다.
②자신을 내어 줄 만한 대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기대만큼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독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보려면 내 생명을 몽땅 주고도 아깝지 않은 어떤 대상을 찾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때만이 참으로 고독하지 않을 수 있고, 그때만이 날마다 삶의 의욕을 가지고 활활 타오를 수 있는데 나를 송두리채 바칠 만한 대상이 없습니다. 이러므로 인간은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철저한 개인주의의 울타리는 더 높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기 좋다는 유럽사회에서 최근의 통계를 보니까 고독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10명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고독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 고독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수가성 여인의 그 고독이 남의 고독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이 느끼는 고독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갈등이 있다면 사랑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에 굶주린 여인인지 여섯 번째 남자, 할 수 없어 의자하고 사는 남자, 여러분, 얼마나 사랑에 굶주린 사람입니까? 저는 성경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택하라면 솔로몬을 들고 싶습니다. 처첩이 천명이니까 실상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갈려 버리면 찢기고 찢겨 버립니다. 이 여자도 벌써 여섯 번째 남자입니다.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만큼 사람을 처참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면 가치를 상실해 버립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살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으면 자기 가치를 발견합니다. ‘나는 사랑을 받고 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그런 삶의 의미를 송두리채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사랑받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어느 긴 다리의 난간에 꽃다발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거기에 꽃다발을 걸어 두었느냐고 지나가는 관광객이 물었더니 그 난간에서 아래를 쳐다보고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방금 전에 스포츠 카를 몰고 온 여인이 개 한 마리를 품에 안고 투신 자살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꽃다발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타고 온 스포츠 카 안에는 쪽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이 개 외에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더 살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투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이만큼 비참해집니다. 처음으로 오신 분들, 이 시간 조용히 한번 자문해 보세요. 이 세상에 정말로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처럼 무조건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사랑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입니까? 솔직한 대답을 하시면 스스로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영적인 고통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영적인 고독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정신적인 고통이요, 고독이요, 갈등이었지만 그 외에 영적인 고통 하나가 더 있었는데 사실은 이것이 더 심각한 것었습니다. 그것은 창녀처럼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 남모르게 가슴 속에 겪는 양심, 가책감이었습니다. 아무리 술을 퍼 마셔도 술취할 때뿐이지 술만 깨면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 하는 가책감,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과 공포에서 이 여인은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양심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라도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악한 사람이라도 양심은 살려 놓습니다. 인간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떳떳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밑바닥에는 불안과 공포가 깔려 있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 레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골수분자입니다. 이 레닌이 죽음을 앞두고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 압박을 받고 있는 대중은 자유를 얻어야 했다. 공산주의로 해방을 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취한 방법은 한층 더 압박과 잔인한 대학살만을 선동했을 뿐이다. 나는 생사의 악몽에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자들의 피로 붉게 물든 망망대해 가운데 버려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지난 일을 뉘우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 짐승 같은 사람의 마음에도 양심은 있었던 것입니다. 수십 만의 사람들을 피흘리게 했지만 양심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여자는 구원자를 기다리는 영적인 갈등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 “나는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말이 나오는데 아마 영적인 갈등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이제 희망을 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제발 좀 살려 주십시오” 하고 허우적거리며 애타게 부르짖는 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 하나님 나 좀 살려 주세요” 하는 이 울부짖음을 주님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가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양심의 가책이 있나요? 양심의 가책이 계속 남아 있을 때 결과가 어떻게 되어지는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수가성 여인처럼 구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내 힘으로 죄악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며, 내 힘으로 양심의 가책을 무마시키지도 못하며, 내 능력으로 이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인생은 아닌가요. 오늘 주님이 해답을 주십니다. 이 수가성 여인을 보세요.
예수님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메고 물 길러 왔습니다. 물동이는 유대 나라에서는 양가죽입니다. 그들은 양가죽을 메고 답니다. 물동이를 메고 왔는데 그것을 옆에 두고 예수님과 대화하다가 여자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 버렸습니다. 변화가 일어나자 여자는 물길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물동이를 내버리고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뛰어가면서 “내가 과거에 악한 일을 많이 했던 것을 알아 맞추고, 가르쳐 준 위대한 선지자가 있다. 와서 보라. 그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 구원자가 아니냐!”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여자의 얼굴이 얼마나 환하게 밝았을까요? 그 여자는 오늘날까지 수가성 사람들에게 비쳐진 그런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었습니다. 무언가 막힌 것이 확 뚫려 버린 여자였습니다.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오늘 저녁에 주님께서 똑같은 변화를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을 믿기 위해 나온 여러분에게도 허락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었지만 아직도 아직도 수가성 여인의 마음처럼 놀라운 변화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교회에만 적당히 다니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밤에 여러분 새롭게 주님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여자가 이런 변화를 맛보기까지 주님은 이 여자를 세 단계로 다루십니다.


첫째, 여인의 관심을 영적인 것으로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시다가 여인에게 “미안하지만 물좀 주시오”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는 우물가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무시하고 물을 길으려고 하는데 물을 달라 하니까 얼굴도 들지 않고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시비조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또 그가 네게 무슨 선물을 주려고 하는지 알았다면 두말 않고 물을 주었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네가 그에게 물을 주었으면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이 말입니다.
여자의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아니,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 어디서 솟아나는 샘물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다음에 주님께서 여자의 관심을 돌립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마시는 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자가 들으니 참으로 희한합니다. 한번 마시기만 하면 절대로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 하고 가슴 속에서 퐁퐁 솟아나는 샘물로 마르지 않는다고 하니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생수를 마셔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여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물을 마실 때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감을 잡은 것입니다.
“아, 주여. 그런 생수가 있으면 나에게도 주옵소서!” 매달립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물질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물을 마셔야 목이 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빵을 먹어야 배고픈 것을 막을 수 있고, 돈을 가져야 마음 속의 욕망을 채울 수 있다는 물질적인 욕구.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는 내면에 있고, 영적인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자는 분명히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이라야 만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치밀어 올라오는 것이 있어야 인간은 만족할 수 있다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인간은 물질을 가지고 육체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안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에서부터 그것을 해결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여자가 찾고 있는 문제의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내면의 욕구불만, 이루지 못한 어떤 꿈, 또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얻기를 사모하는 비전, 야망, 이런 것을 전부 소유해야만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에 원하는 대로 끌어들였습니다. 전도서 2장 10절 이하를 보면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0-11) 말했습니다.
많은 인간이 솔로몬처럼 속습니다. 그래서 50평 집을 짓고 살다가 만족하지 못하면 100평 집을 짓습니다. 100평을 짓고도 불안하니까 맨션을 짓고 살지만 그래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욕망대로 끌어들여 야망이, 자기의 내적 충족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처럼 생수를 마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물물을 마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속는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해답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돈과 쾌락이 없어서 문제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고독해서 문제가 생긴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내면에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예수 믿는 것은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채로 마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시원한 생수가 넘쳐흐릅니다. 예수님은 “네가 고독하지 않으려면 남자와 대화를 해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사랑에 갈증을 느끼면 누구하고라도 사랑을 해보아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마음에 가책이 있느냐? 선한 일을 하면 가책이 없어진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으니까 지금까지 그를 괴롭혔던 사랑의 갈증, 고독의 고통, 자책의 두려움 등이 일시에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네로 뛰어들어가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모든 목마름이 해갈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마스터 키입니다. 문제는 다양하지만 대답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린이들이 모여 있는 유아실에 가 보았습니다. 아이들을 엄마가 예배하는 동안 떼어놓고 달래려 간식도 주고, TV도 틀어 놓았지만 이것이 전혀 통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고독하고, 불안하고, 사랑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증상이 있었지만 해답은 하나입니다. 엄마 하나 뿐입니다. 엄마만 곁에 오면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고독, 그리움 등이 일시에 해결됩니다. 그 시간에 완전히 해결됩니다. 아이는 엄마만 오면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오면 마음 속에 질병은 여러 가지 진단이 내려지지만 깨끗히 치료됩니다. 생수가 터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생수와 같은 역할을 어떻게 하시는 것일까요? 솟아나는 역할을 하시는 것일까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안에 들어가십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오시기만 하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던 공백들이 가득히 차게 됩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내 마음을 가득히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이 강둑을 넘는 하수처럼 채우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솟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매일 솟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식탁을 마련하고 초청하십니다. 교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와 밀접한 사랑의 교제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마음의 고통을 들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남의 모든 문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을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의미로 내 마음에서 생수가 솟는 것입니다. 매일 새롭습니다. “예수님 오시옵소서” 영접하면 예수님은 오셔서 생수, 즉 샘물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처한 모든 환경에서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느낌은 매일같이 생수를 떠 마시는 기분입니다.
오늘 저녁에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이 영적이라는 것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둘째, 죄를 인정하게 하셨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으면 내게 주시옵소서!” 여인이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을 돌리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와라”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생활을 보면 여섯 남자 중 누구를 데려와야 할지 모를 상황입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말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여인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그 먼길을 찾아오셨는데 그분이 그걸 모르시겠습니까? “네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없다. 지금까지 다섯하고 살았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네 남편은 아니야.”
여인의 내면에 숨어 있는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왜 주님이 이 여자에게 이토록 아픈 상처를 찌르시는 것일까요? 주님이 잔인해서 찌르시는 것일까요? 왜 찌르실까요? 왜 이 여자의 수치스런 부분을 들추어내십니까?
막힌 곳이 있으면 통하지 않습니다. 정말 여자의 배에서 생수가 끊임없이 솟아 오르려면 막힌 곳이 없어야 합니다. 막힌 곳을 없애려면 회개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그래도 내놓고 “주여, 나는 그런 인간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용서해 주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에 막혔던 생수가 터집니다. 주님이 그 여자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남편들은 누구입니까?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 기쁨이 없고, 마음의 풍성함이 없는 사람들, 그 이유는 하나 뿐입니다. 숨은 남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확 변해 버린 사람처럼 여러분도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막힌 곳이 뚫려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숨은 죄를 가지고는 생수가 터져 나오지를 않습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 주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자신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자가 대화하는 중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오시면 내가 지금 숙제로 알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했더니 “너하고 말하는 내가 바로 그니라” 하셨습니다. 아멘! 여자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자기 앞에 계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그 순간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여자는 주님이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신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것도 보이지 않고, 여인이 마시는 것도 보이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게 마셔 버렸습니다. 벌써 속에서부터 생수가 터져 나옵니다. 못견딥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진정으로 그를 만난 사람은 이 생수가 터집니다. 오늘 저녁 처음 나온 분들,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세요.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세요. 여러분에게 생수가 터집니다. 생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한 생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생수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마시고 먹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와서 믿는 것이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이미 믿고 있는 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날마다 맛보며 기쁨 속에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초가집에 살아도 천국에 사는 기쁨을 가지고 사십니까? 실패하는 자리에서도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 마음은 항상 아름다운 천국을 말할 수 있습니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수가성 여인의 마음에 생수가 터졌습니다. 오늘까지 사랑, 고통, 고독의 갈증이 해결되었습니까? 아무 인간도 그 여자를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예수님을 모심으로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의 고통, 진통, 두려움, 처자 앞에서, 남편 앞에서는 가리고 삽니다. 마음 속으로는 울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오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를 수가성 여인처럼 천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 예수 그리스도를 수가성 여인처럼 믿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예수께서 들어와 자리하실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의 암흑의 골짜기에서 찬송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 마음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매일 식탁에 마주 앉아 먹으며 대화를 나누듯이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그와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주시는 평안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주시는 기쁨을 그릇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넘쳐 날 것입니다. 오늘 여기 나오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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