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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유언(왕상 2:1-4) / 지용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6.

다윗의 유언
열왕기상 2:1-4


다윗 같은 인물은 역사에 몇 사람 없습니다. 다윗은 역사보다 큰 인물입니다. 역사를 빛내고 역사를 창조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가슴이 넓은 위대한 정치가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어우러지게 하여 통일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음악의 천재로 수많은 찬송을 작곡 작사했으며 악기도 잘 다루었습니다. 또 그는 뛰어난 명장, 뛰어난 영웅이었습니다. 사자도 쳐죽이고, 골리앗도 쳐죽이고, 백전 백승하는 명장이었습니다. 또 사랑할 줄 아는 가슴을 지닌 정서가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리가 있어서 친구 요나단과의 의리를 그의 아들 대에까지 지켜 주었고,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기억했다가 반드시 은혜를 갚는 매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 그는 참으로 귀한 인물입니다.
그런 다윗도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인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 이 세상 사람이면 다 가는 길인 죽음의 길을 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잘 낫든 못 낫든, 똑똑하든 똑똑하지 않든, 부자든 가난하든, 누구든지 그 길을 다 갑니다.
그래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길을 간 다음에는 두 갈래 길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님을 믿은 사람은 영생, 천국길로 들어가고,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불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의 관문은 누구나 다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의 죽을 날이 임박하매』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그 날도 임박해졌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죽을 날은 아직 몇 십 년이 남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까지 저는 미국의 소식을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TV를 보지 않기 때문에 더구나 밤늦게는 전혀 보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오늘 아침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평소 하던 대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시자마자 물으셨습니다.
“미국의 소식을 아니?”
“무슨 소식요?”
“큰 난리가 났단다.”
“무슨 난리요?”
“불이 나고 야단났어.”
저의 어머니께서도 난리난 것만 아시지, 다른 것은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뉴욕에 계시는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시면서 미국 심장부에 테러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들려 주셨습니다.
미국을 상징하는 그 빌딩이 만화에서처럼 무너지고, 백십 층, 백 층, 구십 층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을 알면서도 그 똑똑한 사람들이 그냥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불에 타 죽을 수 없으니 1초, 2초라도 더 살려고 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거기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변호사라고 다 같은 변호사가 아닙니다. 뉴욕의 변호사들은 다른 지방의 변호사들과 다른 대접을 받습니다. 사업을 하든 무엇을 하든 뉴욕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 굉장한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그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V.I.P.들로 연봉이 몇 십억이나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똑똑한 사람들이 아침에 출근해서 그렇게 죽을 줄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나이 든 사람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젊은이도 많이 죽었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의 종말을 모릅니다. 꼭 중한 병이 들어야 죽고 나이가 들어야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측하지 못할 일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 오늘 끝나고 내일 끝나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일 죽을 사람이 오늘 부부 싸움을 하겠습니까? 내일 죽을 사람이 오늘 죄 지으러 가겠습니까?
떳떳하게 살아서 ‘아, 오늘 끝이네.’ 해도 당황하지 않고 황당해 하지 않고 아버지 나라에 갈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은 일생 복이 있었지만 마지막이, 죽음이 복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세운 다음 “아들아,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하는 유언, 마지막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유언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갑니다. 유언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의 아들에게 유언, 마지막 말을 다 합니다. 다윗은 끝까지 복이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까지도 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으면 비행기 사고나 배 사고나 자동차 사고나 그 어떤 사고로 죽어도 우리 영혼은 하늘 나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누구나 천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하늘 나라로 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까지도 은혜가 되고 많은 사람에게 간증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지막이 은혜롭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대구의 한 교회 지도자는 이발관에서 면도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별로 자랑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우리 죽음의 자리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은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할 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여러분이 5분 후에 세상을 떠난다면 가족에게, 아들딸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해라. 좋은 대학에 붙어라.”라고 하겠습니까?
다윗은 아들에게 무어라 했는지 다윗에게 배워 봅시다.
“아들아, 나는 이제 곧 죽게 된다. 그래서 내가 네게 말한다….”
이것은 다윗 일생의 엑기스입니다. 그가 일생을 산 후 아들 솔로몬에게 “내 아들은 이렇게 살기를 바란다.”하고 솔로몬을 위해 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도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여러분과 제게 성령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복된 삶이다.’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유언 그 첫째가 무엇입니까?
“힘써 대장부가 되라.”
따라 합시다.
“힘써 대장부가 되라.”
이는 “배짱을 갖고 살아라. 용기 있게 살아라. 강심장으로 살아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야, 담대하라. 지극히 담대하라.”
세상에 이런저런 어수선한 일과 어지러운 일이 생겨도, 산이 바다에 던져지고 바다 물이 산을 뒤엎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담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흥해도 담대하고 망해도 담대하고 죽을 자리에서도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생각해 보니, 양을 치고 있을 때 사자가 와도 자기가 담대하게 맞으니 사자가 도망을 갔습니다.
여러분, 담대하면 적이 꺾입니다. 독수리가 꿩을 잡아먹으려고 따라가면 꿩이 도망을 갑니다. 계속 도망을 가도 독수리가 끝까지 따라가면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된 꿩이 휙 돌아서서 독수리에게 덤벼듭니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독수리가 깜짝 놀라 도망을 갑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다윗이 담대하니 사자도 이기고 골리앗도 이기고 모든 적을 다 이겼습니다.
정치도 담대하게 해야 합니다.
담대하지 못하면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담대하면 어디에서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제 친구 목사님 중에 아주 담대하고 배짱이 좋은 목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얼마나 담대하고 배짱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 목사님과 저 그리고 다른 목사님들, 이렇게 일곱 명이 일 년에 한 번씩 만나고 있는데, 저희들이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던 이십 수 년 전의 일입니다. 여름 휴가를 맞이하여 저희 일행이 포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깡패가 저희 일행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빈자리가 없자 몸이 조금 왜소한 한 친구 목사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야, 일어나!”
그 목사님이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뭘 봐. 빨리 일어나!”
친구 목사님의 얼굴이 발개지더니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눈이 부리부리한 그 깡패가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옆에 있던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주여,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기도만 했습니다. 제가 권투를 7년이나 했습니다. 그러나 전도사이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그 사람을 그냥 두어야 할지 그 사람과 싸워야 할지를 정말 몰랐습니다. 바로 그 때 배짱 좋은 친구 목사님이 깡패에게 다가가 그의 두 손을 꽉 잡고는 말했습니다.
“늙은 사람이 젊은 놈에게 한 번 맞아 볼래?”
그 목사님은 힘이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그 깡패는 ‘내가 포항 깡패인데 이 깡패는 또 어디 깡패지?’하는 표정으로 기가 팍 죽어서 “미안합니다.”라고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 자리에 다시 앉았습니다.
여러분, 혹 여러분과 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도 제가 여러분을 도와 줄 것이라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저 기도만 하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지, 싸울 사람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런데 제 친구 목사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과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그 때가 새벽이었는데 버스를 타려면 두 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했습니다. 밤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대구까지 왔으니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의자에 앉으려고 대합실을 한바퀴 돌아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누워서 잠을 자는 바람에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저는 구석에 가서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목사님은 팔을 벌리고 가장 편한 자세로 자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일어나요! 일어나! 이게 앉으라는 의자지, 누우라는 침대요? 이게 의자지, 침대요?”
잠을 자던 사람이 큰 소리에 놀라 일어나 앉았습니다. 친구 목사님이 저보고 앉으라고 하더니 목사님도 앉았습니다. 그래서 두 시간 반 동안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 목사님이 목회도 얼마나 잘 하시는지 모릅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겨도 얼마나 배짱이 좋은지 담대하게 목회를 잘 하십니다.
담대해야 적도 꺾을 수 있습니다. 담대하지 않으면 적을 꺾지 못합니다. 마귀 앞에서도 담대해야 마귀를 꺾을 수 있습니다.
왕도 담대해야 나라를 다스리지, 두려워 떨며 비실비실하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합니다. 지금 미국 부시 대통령이 아주 담대하니 아랍권의 나라들이 덜덜 떠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도 담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담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잠언 28장 1절에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우리 가슴이 의로워야 담대합니다. 물론 싸움판에서는 실력이, 주먹이 있어야 담대합니다. 그러나 인생살이는 우리의 의가 있어야, 거리낌이 없어야 담대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파출소나 경찰서 앞으로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파출소나 경찰서 앞은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답니다.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파출소나 경찰서 앞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거리끼는 것이 있으니 경찰서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파출소 앞을 지나든 경찰서 앞을 지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의인은 경찰을 만나든 형사가 집에 찾아오든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오래 전 형사 세 명이 제 사무실로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알아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때 제 처제가 해외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인적 사항을 조사하기 위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내 집에 형사 백 명이 몰려와도 의인은 떨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경찰 한 명만 만나도 가슴이 세 근 반, 네 근 반 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흉악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십 년이 지나도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교통 경찰이 그 범인을 잡았습니다. 한 교통 경찰이 점심 식사를 하러 급하게 식당으로 뛰어들어가니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도망을 쳤습니다. 경찰은 수상해서 그 사람을 따라가 잡았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흉악한 살인 강도였던 것입니다.
도둑은 제 발이 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롭게 살면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겠습니까마는 적어도 내 양심에 떳떳하게만 살아도 담대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의인이 되는 것은 내 생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1절 말씀대로 예수를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어도 내 생활이 바쳐주지 못하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도 움칠합니다.
‘저 귀신이 내 비밀을 공개하면 어떻게 할까?’
그러나 의롭게 산 사람은 귀신을 만나도 “사탄아, 물러가라!”하며 담대합니다.
우리의 생활을 잘 관리해서 담대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아내 앞에서도 떳떳하고 아이들 앞에서도 떳떳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떳떳하고 내 양심에 떳떳하게만 살아도 우리는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담대해야 됩니다.
“아들아,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라는 말은 겸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겸손은 겸손이고 용기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무슨 유언을 했습니까?
“너는 하나님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할렐루야!
다윗이 일생을 살았습니다. 개인적인 생활도 하고, 가정 생활도 하고, 국가도 다스려보고, 전쟁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이디어로 했을 때는 쓰라린 현장을 만나게 되고 후회하게 되고 낭패를 당하게 되고 전염병을 만나기도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는 무엇을 해도 형통했고 어디에 가도 승리했습니다.
그러니 솔로몬에게 “솔로몬아, 내 말을 잘 들어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말씀대로, 계명대로, 증거대로만 살아라.”라고 유언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중히 여기고 그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50년도에 월트 디즈니가 한 친구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랑 가 볼 곳이 있네. 함께 가 보세.”
디즈니는 친구를 L.A.에서 40km 떨어진 허허 벌판에 데리고 가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수년 내에 이곳에 환상적인 낙원이 건설될 걸세. 그러면 이 지역의 땅이 금값이 될 테니 땅을 조금 사두게.”
“에이, 이 사람. 무슨 꿈 같은 소리를 하나? 허허 벌판을 사두었다가 뭘 하게?”
“수년 내에 이곳에 내가 분명히 낙원을 만든다니까. 환상적인 낙원을 만들 거라니까. 그러면 금값이 될 테니 땅을 사두란 말일세.”
그러나 그 친구는 디즈니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1955년 7월, 거기에 디즈니랜드가 세워졌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땅 값이 금값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 친구가 디즈니의 말을 듣고 땅을 사두었으면 미국의 재벌이 되었을 텐데, 귓등으로 들었다가 얼마나 후회를 했겠습니까?
친구의 말은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예언은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가정에서나 회사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그대로 다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대로 믿었다가 망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천 년 동안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살아보니 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성경 말씀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저는 어디에 가도 성경을 꼭 갖고 갑니다. 어디에서나 성경의 음성을 듣고 적용하려 합니다.
얼음 창고를 작동시키는 한 사람이 얼음 창고 안에서 시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창고 안에는 등겨가 가득한데 시계를 잃어버렸으니 어떻게 찾겠습니까? 그러나 그 시계는 아주 비싸고 의미가 있는 것이라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라 꼭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부들에게 말했습니다.
“얼음 창고에서 내 시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시계는 내게 너무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 꼭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내가 큰 보상을 하겠습니다.”
그는 거기에 큰돈을 걸었습니다. 인부들이 쇠스랑을 갖고 와서 등겨를 뒤적이며 창고 안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나 시계를 찾지 못했습니다. 모두 포기하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린 소년이 시계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찾았니?”
“간단해요.”
“뭐가 간단해?”
“귀를 기울이고 조용히 있으니 등겨 속에서 째깍째깍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찾았습니다.”
참 지혜로운 소년입니다. 쇠스랑으로 등겨를 휘저어서 시계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여 시계 소리를 듣고 시계를 찾은 것입니다.
소용돌이치는 이 세상에서 동분서주한다고, 막 뛴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성공하게 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나?’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한 귀한 분이 제게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기도합시다.”라고 말한 뒤, “하나님, 지금 귀한 분과 대화를 하려고 하는데, 이 시간을 축복해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니 은혜 가운데 5분만에 대화가 끝났습니다.
하나님 음성을 들으며 하는 일은 시간도 절약되고 헛수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음성을 들으려 애쓰면 성경에 있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또 성경에 없는 것은 성령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말씀을 귀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가 좋은 것을 얻나니』
88올림픽 때 프란체라는 가난한 미국인 할머니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미국에도 가난한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지 모릅니다. 수년 전, 제가 뉴욕 할렘가를 지나가다가 울었습니다. 흑인 아이가 길에서 수박을 먹고 있었는데, 파란 껍질만 남기고 흰 부분까지 다 먹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수박을 먹을 때 대부분 빨간 부분도 남기는데,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수박 껍질이 하늘하늘할 때까지 숟가락으로 다 긁어서 거기에 사카린을 넣어 먹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껍질로 전을 부쳐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저는 지금도 빨간 부분을 남기지 못합니다. 예전에 심방을 다닐 때 수박을 대접 받으면 저도 모르게 빨간 부분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막 먹다가 ‘이러면 안 되지.’하고,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남겨 놓고 오곤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수박이 비교적 싼 편이지만, 미국에서는 비쌉니다. 그러니 미국의 할렘가에 가면 요즘에도 파란 껍질이 나올 때까지 수박을 먹는 아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프란체 할머니도 미국인이었지만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88올림픽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 제일 싼 여관에서 컵 라면을 먹으며 지내다가 부산 UN 묘지에 묻혀 있는 자기 남편 무덤의 흙 한 줌을 갖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너무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아주 낡은 비닐신을 신고 오셔서 왜 그런 고물신을 신고 왔는지 물으니 그 사연을 말해 주더랍니다.
할머니의 남편이 UN군 하사관으로 한국 전쟁에 왔다가 전사해서 UN 묘지에 묻혔답니다. 할머니는 남편이 묻혀 있는 한국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돈이 없어서 오지 못하고 있다가 한국에서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부푼 가슴으로 7년간 성냥 공장에 다니며 먹지 않고 쓰지 않고 돈을 모아 한국행 비행기 삯을 마련했답니다. 그동안 할머니가 만든 성냥을 한 줄로 이으면 미국에서 한국까지 이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한국에 있을 때 성탄절 선물로 좋은 고무신을 보내어 주었답니다. 한국에 올 때 그 고무신을 신고 오려 했는데, 너무 소중한 것이라 도저히 신을 수가 없더랍니다. 남편이 보내준 그 고무신을 신고 남편 무덤에서 취한 흙 한 줌을 손에 쥐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할머니는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 제 마음이 찡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선물로 받은 그 신발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좋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더 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말씀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유언을 통해 여러분과 제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다음 다윗은 무어라 유언을 했습니까?
“네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 네 마음과 뜻을 다하여 순종하라.”
우리가 겉으로 하나님께 아무리 예배를 잘 드리고 순종을 잘 하는 것 같아도 마음에 기쁨이 없고 정성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섭섭해 하시겠습니까?
남편에게 친절히 대하고 식사 대접을 잘 하고 빨래를 잘 하고 집안 정리를 잘 해도 아내의 속마음이 딴 데 있으면, 그 남편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또한 그 아내도 참으로 불행한 여자일 것입니다.
행동과 마음이 함께 갈 때 그것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행동과 마음이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솝의 어릴 때 일화 중 재미난 것이 있습니다.
이솝의 아버지가 이솝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목욕탕에 가서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 알아보고 오너라.”
“예.”
이솝이 목욕탕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한 사람이 목욕탕 바로 앞에 있는 큰 돌멩이에 걸려 넘어질 뻔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누가 재수 없게 돌을 여기에 뒀어?”하더니 그냥 목욕탕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금 있으니 또 한 사람이 그 돌멩이에 걸려들었습니다. 그 사람도 역시 “왜 돌멩이가 여기에 있어?”하더니 그냥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이솝은 재미가 있어서 목욕탕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거기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돌멩이에 걸린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하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한 아이가 목욕탕으로 가려다 돌멩이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러자 뒤에 오던 어떤 아저씨가 그 아이를 일으켜 준 후 “누가 돌을 여기에 두었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겠네.”하며 그 돌멩이를 옮겨 놓고 목욕탕으로 들어갔습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거기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던 이솝이 집으로 돌아오니 눈이 빠지게 그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왜 이제 오니?”
“예,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목욕탕에는 사람들이 많더냐?”
“한 사람뿐이었어요.”
“그러면 오늘은 목욕을 편하게 할 수 있겠구나.”하며 아버지는 아들 이솝의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목욕탕 문을 여니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아니, 한 사람밖에 없다더니?”
그러자 이솝이 “아버지, 사람이라고 다 사람입니까? 사람 같아야 사람이지.”하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도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같이 살아야 사람이지.”하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 나라에 천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은 다 받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따르지 못하고 마음이 따르지 못하면 자랑스러운 교인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을 때 신앙까지 다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을 때 다시 신앙의 옷을 입습니다. 그래서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을 살아갈 때는 교인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는 교인도 있는 것입니다.
옷은 갈아입어도 되지만 신앙의 옷, 믿음의 옷은 갈아입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어디에서 우리 얼굴만 보고도 ‘아하, 저 분은 다르네.’라고 말할 수 있는 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우리 입의 말만 듣고도 ‘아하, 저 분은 크리스천이네.’라고 할 수 있는 성도, 마음과 행동이 함께 하는 자랑스러운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이런 유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자자손손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네가 이 말씀을 이루어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솔로몬아, 내가 너에게 유언했듯이 너도 자녀 교육을 잘 해서 자자손손 왕이 이어지는 복을 받도록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과 저의 축복이 우리 대에서 끊어져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은혜, 우리의 축복, 우리의 믿음이 대를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관리도 잘 해야 되지만 무엇보다 우리 자녀들을 잘 살펴서 믿음의 길로 올곧게 가도록 인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수년 전, 미국의 한 잡지에 ‘나의 아들, 나의 원수’라는 타이틀의 슬픈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기사를 쓰신 분이 퇴근해서 집에 들어서니 마약에 중독된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겠다며 칼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소리쳤습니다.
“너 칼 버리지 못해!”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마약에 중독되어 눈이 뒤집힌 아들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려 하니 부부가 함께 지하실로 도망을 쳤습니다. 지하실 문을 닫자마자 뒤쫓아온 아들이 칼로 문을 찍으며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아들의 칼에 죽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권총을 뽑아들었습니다.
“칼을 버리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그러나 아들은 끝까지 칼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방아쇠를 당겨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잡혀가 재판을 받았는데 무죄로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 아버지가 쓴 글이 ‘나의 아들, 나의 원수’입니다.
이것을 남의 이야기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녀들을 그냥 두면 우리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잘 길러 놓은 자녀는 나의 자랑, 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잘 기릅시다. 자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래서 축복이 대를 잇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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