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사무엘하 24:16-18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그 마른 뼈들을 어느 의사가 살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그 마른 뼈들을 향하여 말씀을 대언하게 하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마른 뼈에 살이 붙고 힘줄이 생겨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건강이 꼭 마른 뼈 같아서, 사업이, 부부 관계가, 자녀가, 어떤 상황이 마른 뼈 같아서 포기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다시 일으키실 수가 있으십니다.
오늘 제가 전하는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대통령의 연설이 아니라, 교수의 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는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변화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치료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장 6절)
오늘 주시는 말씀과 능력을 믿음으로 받게 되셔서 이 시간이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화가 처음으로 발명되어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버몬트 시의 한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될 때, 한 무리의 카우보이들이 생전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습니다. 재미나는 광경이 펼쳐지다가, 모든 관객이 숨을 죽이며 긴장해서 보는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아리땁고 고운 한 백인 아가씨를 인디언 전사들이 달려들어 납치해 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아가씨가 끌려 가지 않으려고 반항을 하는데 인디언 청년들이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연발로 들렸습니다.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영사기를 돌리던 사람이 놀라서 상영을 멈추고 불을 켰습니다. 불이 켜지자 스크린에 총알 자국이 여섯 개나 뻥뻥 뚫려 있었습니다.
영화 속의 장면을 현실로 착각한 카우보이들이 인디언 전사들을 향해 총을 쏘았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안 모든 관객들은 배꼽을 잡고 마구 웃어대었고, 카우보이들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착각하니 조롱거리가 되고, 스크린에 상처만 내었습니다.
착각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친구가 보증을 서 달라고 할 때, 성경 말씀대로 냉정하게 거절하면 괜찮은데 성경 말씀보다 친구를 더 믿고 보증을 서 주다가, 세월이 지나면 몇 억이 되는 집을 날리고 친구의 빚마저 안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되지 않는 사업인데 꼬드김을 받아서 시작했다가 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사람을 사원으로 채용하면 안 되는데 착각해서 사원으로 채용했다가 회사가 흔들린 경우가 최근에 있지 않았습니까?
매사에 착각하지 않는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과 결혼하면 망하는데, 착각해서 결혼했다가 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적인 매력만 보고, 외모만 보고 신앙은 보지 않고 결혼했다가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매사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 빛나는 통찰력과 분별력으로 후회 없는 판단을 내리고, 후회 없는 도장을 찍고, 후회 없는 결정을 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윗도 착각을 했습니다.
자기가 어린 소년 시절에 골리앗 같은 장수를 맞아 싸울 때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이제 자기는 힘있는 나라의 왕, 백 삼십만 군대를 거느린 대국의 왕이고 모든 주변국들은 별 볼일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아도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주변국을 제패하고 대 제국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일 만에 칠만 명의 백성이 쓰러져 죽었습니다. 다윗은 아찔했습니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구나.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구나.’
하나님의 심판의 채찍의 천사가 내려와서 단과 브엘세바 쪽으로 손을 펴니 단과 브엘세바에서 사흘 동안 칠만 명이 쓰러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손을 쫙 폈습니다. 이제 전염병이 예루살렘 쪽으로 쳐들어 가는 것입니다.
목욕탕에는 더운 물 콕과 찬물 콕이 있어서 더운 물 콕을 열면 더운 물이 쏟아지고 찬물 콕을 열면 찬물이 쏟아지듯이, 하나님의 한 손에는 축복의 콕이 있어서 축복의 콕을 열면 그 집은 이래도 저래도, 무엇을 해도 잘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한쪽에 있는 재앙의 콕을 여시면 그 집은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천사들도 한편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배달하는 축복의 천사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심판의 채찍을 전달하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우리 양곡교회와 한국 교회, 여러분과 저의 가정에는 심판의 채찍의 천사가 심부름 오는 일이 없고, 축복을 배달하는 천사들만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예루살렘 수도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칠만 명 시체를 보시고는 마음을 바꾸셔서 천사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관 두어라. 그만 됐다. 네 손을 거두어라.”
그래서 전염병이 멈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다 끝났다. 올라 오너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하늘나라로 데려 가지 않으시고 그냥 거기에 세워 두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다윗의 반응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를 찍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불쌍히 여기셔서 영안을 열어 주시니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서 있는 천사를 보게 됩니다.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하나님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천사를 보고 다윗이 버들버들 떨었습니다. 백삼십만 명의 군사를 자랑했지만 삼일 만에 칠만 명이 쓰러졌으니 두 달이면 백사십만 명이 쓰러지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자랑하고 의지하는 군사는 한 명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성서학자들이 말하기를 죽은 칠만 명의 백성은 모두 군사들, 힘을 자랑하는 군사들이었다고 합니다.
다윗은 아찔해서 하나님 앞에 다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죄는 제가 지었습니다. 악한 일은 제가 한 것입니다. 착각은 제가 했습니다. 이 불쌍한 양 무리, 백성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벌을 내리십니까? 차라리 저와 제 아비 집, 제 친척을 치세요. 제가 죄인인데 왜 불쌍한 백성을 치십니까?”하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노가 풀리지 않으셔서 다윗과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하기 싫으셔서 갓을 보내셨습니다.
“왕이시여,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세요. 예배를 드리세요.”
왜 그 어려운 곤경에 처한 다윗에게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으라고 했을까요?
다윗은 순종했습니다. 열 일을 제쳐놓고,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가서 단을 쌓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깨닫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아하! 내 인생의 길이 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하고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백삼십만 군사의 숫자로 주변 국가를 얼마든지 제압하고 제국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국은커녕 칠만 명의 군사가 사흘 만에 쓰러지니 자기 인생의 계획이 다 물거품 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사기 9장에 보면, 아비멜렉이 자기 아버지의 다른 아들 칠십 명을 놈팡이, 건달, 깡패 조직을 고용해서 다 쳐죽였습니다. 칠십 명을 한 반석에서 다 쳐죽였는데, 한 아들만 피해서 도망을 갔습니다. 사람이 명예욕에 물들면 형제도 죽이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되어 천 년, 만 년 왕 노릇 하려고 했습니다. 형제를 죽이고 영원히 왕 노릇 하려고 했는데 삼 년도 못 갔습니다. 삼 년이 되자 마자 한 망대에서 어떤 여자가 맷돌 위짝을 떨어뜨렸는데 그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어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죽으면서도 자존심은 있어서 자기 병기를 맡은 경호원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 칼을 뽑아 빨리 나를 죽여라. 내가 여자한테 맞아 죽었다 소리는 듣기 싫다.”
그래서 그 경호원이 아비멜렉의 칼을 뽑아 그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는 두 번 죽었습니다. 한 번은 맷돌 짝에 맞아 죽고, 또 한 번은 자기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죽으면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내 인생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구나.’
예레미야 10장 23절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잠언 16장 9절에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자기가 계획을 세워서 인생 길을 걸어가지만,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 길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일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잠언 27장 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과 14절에도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하루 일을 모릅니다.
우리 나라 국회의원 한 분이 미국 유학을 갔다온 아들에게 좋은 외제 승용차 한 대를 사 주었습니다. 스웨덴 승용차로 안전하기로 세계에 알려진 차입니다. 그리고 그 자동차 회사에는 100명의 5분 대기조가 있어서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라도 그 회사의 차가 사고가 나면 몇 시간 이내에 달려가서 사진을 찍고 사고가 난 원인을 조사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이 다치지 않는 안전한 차를 만들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회사입니다. 그 좋은 회사의 차를 아들에게 사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그 좋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그 좋은 차를 타고 가다가 죽을 줄 알았으면 그 차를 사 주지 않았습니다.
아침에는 안개가 세상을 정복한 것 같아도 해가 뜨면 사라지듯이,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도 바람이 밀려오면 다 사라지듯이, 인생은 안개 같고 구름 같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름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구름, 사람 모양의 구름, 꽃 모양의 구름을 보십시오. 5분 뒤에 형체가 달라집니다. 어떤 구름은 주님 얼굴 같아서 바라보면 어느 사이에 황급히 변합니다.
사람도 잠시에 변하고 하루 사이에 운명이 바뀝니다.
그러나 여러분,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하늘의 구름이라도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면 그 모양도 형체도 영원하고,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는 한 흔들리지 않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출애굽 시대에 광야에서 하나께서 만드시고 붙잡으신 구름 기둥은 아무리 세찬 바람이 몰아쳐도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니 사십 년간 하늘에서 변함이 없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구름같이 약하고, 순식간에 변하는 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면 견고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구름 기둥처럼 불 기둥처럼 견고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27편 1절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면 흔들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부부,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삶, 이 나라 이 민족을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붙잡아 주십니까? 어떤 사람을 구름 기둥, 불 기둥처럼 잡아 주십니까?
오늘 본문의 교훈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 제단을 쌓으라.”
자동차 부품을 3만개 가까이 조립해서 자동차가 되지만, 금속 쇠붙이인 키가 없으면 자동차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자동차에 작은 키를 넣어서 시동을 걸 때에 엔진이 움직이고 전조등을 켤 수 있고 오디오와 라디오가 작동됩니다.
자동차 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예배는 인생에 있어서 자동차 키처럼 귀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굳게 서게 되지만 예배를 게을리 드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뜨겁게 드릴 때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너무 편안해져서 예배를 시큰둥하게 드리니 분별력이 약해져 착각하게 되고 하나님보다 군사를 더 의지하게 되어 칠만 명이 죽었습니다.
모든 재앙의 원인의 출발점이 어디입니까? 예배를 게을리 드린 것입니다.
예배를 게을리 드리다가 재앙이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여부스의 타작 마당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곳은 하나님께서 잊지 못하실 귀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윗보다 천 년 전의 사람인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쳐 예배를 드린 곳이 바로 그 땅입니다. 여부스의 타작 마당은 원래 모리아 땅입니다. 나중에 개간해서 농장이 되고 타작 마당이 되었지만 수풀이 우거진 땅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이삭을 바친 예배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 년이 지나도 그 예배를 잊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천 년 세월이 지나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면서 드린 그 뜨거운 예배를 잊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너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해라. 아브라함처럼 내게 뜨거운 예배를 한 번 드려 보아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는 아브라함처럼 뜨거운 예배를 생애에 몇 번이나 드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배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매미는 이슬을 먹고 살고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배 받으시는 즐거움에 사십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8장 1절과 9장 1절에도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3절과 6절에도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사과나무는 사과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가을에 사과나무가 굵고 빨간 사과를 많이 맺으면 주인이 흐뭇해 합니다. 그러나 시들시들한 사과 몇 개만 맺으면 주인이 사과나무를 뽑아 버리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은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듯이 주일 낮 예배, 밤 예배, 삼일 예배, 새벽 예배, 가정 예배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시고 구원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벌은 꿀을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께 예배를 올려 드려야 하는 것을 꿈에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은 성공하기 위해서, 자식을 기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결혼을 잘 하기 위해서,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자동차를 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첫째 목적은 예배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를 게을리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트십니다.
창세기 34장을 보면, 야곱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야곱의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 디나가 세겜 성의 추장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화가 난 디나의 오빠들이 묘한 작전을 씁니다. 칼을 품고 들어가서 세겜 성의 남자들을 다 쳐죽입니다. 그 일로 그 고을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야곱의 집을 쓸어버리려고 복수의 칼을 갑니다.
“들어온 사람이 동네를 팔아 먹는다더니,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야곱이 이 성을 이렇게 쓸어버리다니!”
야곱이 그 정보를 알고는 벼랑 끝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아, 하나님, 어쩌다가 이렇게 끝나게 되었습니까?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몰살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어쩌다가 내 딸이 강간을 당하고, 내 아들들이 칼부림을 하고,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까?’
벼랑 끝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야곱, 벧엘로 올라가라.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갈 때 너를 만났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라. 벧엘에 가서 제단을 쌓아라.”
그가 깨닫습니다.
‘아, 세겜 성에서 사업이 잘되고 재산이 불어나는 것 때문에 내가 예배에 게을렀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약속한 대로 예배를 드리지 못했구나. 벧엘을 잊고 살았구나.’
예배가 down 되니까 도덕이 down 되고, 그의 딸과 아내, 여인들의 의상이 야하기 그지 없고, 목걸이와 팔찌와 귀걸이에 우상의 마크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사람들과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구별이 없습니다. 액세서리도 구별이 없고, 옷도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신을 차리고 들으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속해 살지만 우리의 얼굴, 우리의 머리 모양, 우리의 의상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옷만 보아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구나.’라고 할 수 있도록 구별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야곱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방 신상을 다 버려라. 의복을 바꾸어라. 몸을 정결케 하라. 내 환난 날에 나를 도와 주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벧엘로 올라간다.”
그때 아들들이 반대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지금 주위의 모든 고을 사람들이 칼을 갈고 있는데 우리가 움직이면 칼에 맞습니다. 저 사람들의 노가 식을 때까지 기다립시다.”
그러나 야곱은 “가자. 지금 가야 된다.”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족끼리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은 자녀들과 의논해야 되지만, 어떤 일,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가족과 의논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일 낮 예배에만 참석할까? 밤 예배에만 참석할까? 삼일 예배도 갈까?”하고 의논해서 다수결로 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가장, 그 집의 신앙을 책임진 자가 명령해야 됩니다.
“가야 된다. 일어나라. 저녁 예배 드리러 가야 된다. 삼일 예배를 드리러 가야 된다.”
‘예배를 드리러 가야 된다(Have to go).’라고 명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새벽에 잠자는 것을 보면, 공부하다 지쳐서 잠자는 것을 보면 깨우기가 어렵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아이를 새벽 기도회에 나오도록 깨우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아이는 깨울 수 있지 않습니까? “일어나. 새벽 기도회에 가자.”라고 명령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고, 자식의 장래를 살리는 길인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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