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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시험을 극복한 믿음 (히브리서11:17-19)
인생에서 우리는 많은 시험을 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시험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누구나 부담을 느끼고 비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교육대회 시험을 아이들에게 준비시키고 있는데 아주 싫어합니다. 저희 집 세 번째 녀석이 하루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딸이 되어서 다 좋은데 한가지 안좋은 것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뭔데’라고 물었더니 ‘성경고사대회에 나가는 것이예요’라고 했습니다.그러나 몇 번 나간 첫째와 둘째녀석이 이렇게 충고를 막내에세 해주었습니다. ‘나도 1학년때에 처음 시험볼때에는 싫었는데 이제 자꾸 하니까 지금은 좋다’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짜증을 부리면 ‘나중에 상받을때 세상에서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을거야“라고 하면서 격려합니다.나름대로 시험의 맛을 보고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오는 축복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만나야 하는 시험도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면서 축복만 받고 시험은 받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어 어떻게 될까요? 믿음 생활에서 우리는 자기 기준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위험이 많습니다. 때로는 믿음인지 신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서 ‘시험’이란 용어는 3가지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련의 의미입니다.
야고보서1장 2절에 사용됩니다.‘내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이 시험은 시련의 의미입니다. 믿음생활할 때 시련이 옵니다.이 시련을 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까? 연단을 위해서입니다.학교에서 학생들의 실력을 연단하기 위해서 시험을 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 시련을 주십니다. 오늘 나에게 어떤 시련이 있습니까? 그 시련을 만날 때 어떻게 이겨야 합니까? 인내해야 합니다. 야고보서1장 3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합니다.어떤 시련이라도 인내하면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유혹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중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의미는 유혹입니다.그래서 주기도문의 의미는 “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유혹이 찾아옵니다. 돈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육체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세상유혹이 찾아옵니다. 저에게도 찾아옵니다. 장로님들에게도 찾아오고 모든 성도들에게 찾아옵니다.그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우리의 환경과 육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유혹 속에는 못된 사탄이 배후에 역사합니다. 이런 유혹에 빠지게 되면 베드로처럼 우리가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된 능력의 믿음이 시험을 이기게 합니다.
세 번째는 테스트의 의미입니다.
창세기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알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되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십니다.고전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합니다.초등학교 선생님이 초등학생수준에 맞게 시험을 냅니다. 대학교수는 그 수준과 형편에 맞게 시험을 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시험을 받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시험을 극복하였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에 오는 시험을 어떻게 극복하여야 합니까?
1. 언제 시험하시는가? 축복 뒤에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때는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잘 될 때에 시험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 보면 ‘그일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실때의 상황은 우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고 난 뒤였습니다. 얼마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아들 이삭이 사랑스러웠을까요?
특히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어느덧 나이가 100세가 되었을때에 사라가 90세가 되었을때에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고대하던 아기를 생산하였습니다.당시에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렇게 고대하고 기대하여서 얻은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사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아 이 아들을 얻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얻고 그 아들과 함께 사는 아브라함의 인생이야말로 정말 살맛났을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저희 처형집이 늦동이를 나았습니다. 위로 딸이 둘이고 셋째 아들 늦동이를 나았는데 둘다 마흔이 넘어서 얻었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을 얻고나서 형님되시는분이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 때문에 항상 싱글벙글하고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목적을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원하는 것은 거의 OK입니다. 장난감,게임기,옷,신발 필요한 것은 아낌없이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보니까 자식이 우상이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도 생각하여 보십시오. 어쩌면 아브라함의 가정에 하나님보다 그 아들 이삭이 더 사랑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2:2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까? 아브라함의 사랑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그러나 종종 우리가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을 사랑할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특별히 우리가 자녀를 아비로서 어미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자녀가 우상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정말 부모라면 자식을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 시편 127편 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제 시험을 주실까요? 하나님이 주시는시험을 보면 ‘축복 뒤에 시험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얻는 축복을 얻고 나서 시험이 왔습니다. 욥은 많은 물질과 자녀의 축복을 얻고 난 뒤에 시험이 왔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나서 시험이 왓습니다. 솔로몬은 많은 축복을 얻고 나서 하나님앞에 범죄하고 말았습니다.초대교회는 부흥하고 난 뒤에 시험이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건강하십니까? 물질의 형통함이 있습니까? 자녀들이 잘 되었습니까? 그 축복의 자리에서 정말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이전보다 더 하나님께 감사하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복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올라갈 때 잘될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나름대로 믿음에 성숙하다고 스스로 느끼면서 넘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무언가 이제는 나름대로 알 것같다고 칭찬할때에 넘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 안좋게 끝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도 중요하지만 나중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힘있을때에 축복의 상태에 있을때에 하나님의 복을 풍성하게 받아누릴때에 잘 감당하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요즘 한국교회에 아주 흐뭇하고 고무적인 미담이 있습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에서 약 25년을 시무하신 옥한흠 목사님이 지난 8월말일부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지금 나이가 65세이고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겟지만 서울 사랑의 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건강하게 부흥되고 있는 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나 불신자들 모두가 옥목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아직 법적으로도 5년을 더해도 상관이 없고 지금 한창 잘 나가는 때에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 40대후반의 목사님을 모셔와서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자리를 넘겨준 이유 성도들의 영적성숙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미련없이 자리를 넘겨준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명예심입니다. 나이가 50이 넘어가면서 알게 모르게 ‘자리’에 대해서 욕심을 많이 갖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분들이 그 자리를 내어놓는 것, 그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앉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내려올때 하나님께서 올리시고 버릴때 더 얻게하십니다.우리에게 주어진 때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시면서 살아가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열쇠가 무엇입니까?
17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열쇠는 오직 순종입니다. 여기 이삭을 드립니다. 진짜로 자기아들을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드리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받을때에 번제 시험을 순종합니다.아브라함이 ‘왜 하나님이 이삭을 드려야 합니까?’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한달만 기도하고 하겠느니다’미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내와 상의해보겠습니다’하지 않았습니다.사실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면 기이한 순종을 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미친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우선 그의 순종을 보면 즉각적인 순종이었습니다.그래서 여기에 ‘이삭을 드렸으니’‘독생자를 드렸느니라’고 합니다.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시험을 받을때에 얼마나 마음이 복잡하겠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22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라고 합니다.
여기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때에 아내와 상의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한다고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문제를 위해서 오직 유일한 길 순종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의 믿음 생활에서 많은 경우에 우리가 순종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해결하여 가면서 변명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얼마나 할말이 많겠습니까? 우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확하게 아들을 바칠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지 그 이유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해 이유를 묻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얼마나 할말이 많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약속하기를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씨를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그것도 25년만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법입니까? 하나님께 따지고 변명할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해 변명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그냥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만일 여기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와 대화를 하였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사라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입장에서 아들을 제물로 내어주는 일은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변명으로 제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종종 우리는 얼마나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들을 변명하고 핑계합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정말 우리가 목숨을 걸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순종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우리가 순종해야 할 때 좀 이해가 안되고 손해가 좀 있어도 우리가 그것을 내려놓고 순종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순종은 의지적인 순종이었습니다. 사람이 보통 결심을 하고 나서 3일만에 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면 이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종과 아들과 함께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3일간이었습니다. 장작을 메고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다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얼마나 그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리고 드디어 아들과 함께 모리아산정상에 올라갔을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아버지가 말을 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고 아버지에게 질문하면서 제사를 위해 준비하는 아들의 모습이 얼마나 안따까왔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드디더 아들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칼로 그 아들을 잡으려고까지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비가 자식을 그것도 100세에 얻은 아들을 칼로 죽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인간의 정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를 세우고 그 의지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지대로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외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끝까지 순종한 것입니다.
처음도 순종해야 하지만 과정도 순종해야 하고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순종을 잘 했지만 마지막에 순종하지 못했다면 지금까지의 순종이 허사였을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주여 우리가 처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순종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끝까지 순종할 때 그때 나타나셨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진짜 믿음을 본 것입니다.그리고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이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이레란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복”을 약속할 때 보면 “순종”과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게서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축복이 구원입니다. 우리의 노력 선행과 관계가 없습니다.그런데 조건적으로 축복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신명기 28장을 보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15:7-8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합니다. 여기 주님 의 말에 거하면 이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항상 따르는 순종을 말합니다. 그 순종이 있을때 모든 것을 원하는대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하는 믿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같습니다. 오늘 저와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끝까지 나의 감정을 내려놓고 나의 생각을 쳐서 복종하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여호와 이레의 귀한 복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시험을 이기는 힘은 오직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번제란 제물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순종할 수 있엇던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절에 보면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외아들 이삭이 번제로 드리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부활신앙이 시험을 이긴 힘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허무하고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가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으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합니다. 그 답이 오직 예수님께 있습니다.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활신앙을 갖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 중에서 부활의 약속처럼 우리에게 위대한 약속이 없습니다. 요한복음11장 25절 “나는 부활이여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십니다.우리 주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죽고 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미국교회탐방을 갔을때 미국교회를 통해서 색다르게 본 것이 하나있는데 많은 미국교회들이 교회당 앞 마당 정원에 무덤을 꾸며놓았다는 것입니다. 잔디밭으로 공원을 꾸미고 거기에 비석을 세워서 놓고 무덤을 꾸며놓았습니다. LA에 있는 수정교회의경우는 교회 앞 마당에 우리식으로 말하면 납골당을 꾸며놓았습니다. 마치 천국을 연상시키듯이 물이 흐르고 꽃나무가 피어있는가운데 잔디와 좋은 대리석들로 무덤을 장식해놓았는데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 무덤을 교회와 함께 두었는가? 그 이유가 바로 비록 지금 몸이 먼저 죽었지만 결국 나중에 이곳에서 부활하여 다시 함께 살아갈 형제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잠시 헤어져있다가 다시 만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신앙이 있을때 다시 일어섭니다. 죽어가는 암환자들이 부활신앙을 갖을때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사망의 위기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분들이 부활의 신앙이 있을때 죽음의 공포에서 일어섭니다.
여러분 겁쟁이 베드로를 보십시오.그가 3년간 주님으로부터 훈련받았지만 죽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하엿습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난 뒤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들려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하여 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시련과 시험이 와도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내 인생을 드리고 내 시간을 드리고 내 물질을 드리면서 주님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주님과 함께 살 것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이땅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께 헌신하면서 삽니다. 본문의 아브라함은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에 자기가 최고로 사랑하는 아들,자기 생명과도 같은 그 아들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아들을 드리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무모한 낭비가 아니라 위대한 헌신이요 투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고 부활신앙을 가졌던 바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고백하면서 그의 몸에서 예수님을 나타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소원이요 우리의 소원으로 주님 앞에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나가는 말 )오늘 하나님은 이시대의 아브라함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이제 우리가 그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순종으로 하나님의 새역사를 만들어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박춘수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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