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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찾는 가정〈창세기 24장 48~60절〉

by 【고동엽】 2021.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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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찾는 가정〈창세기 24장 48~60절〉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그대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대로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오늘은 이삭의 가정에 대한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생각해볼까 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소중한 아들입니다. 100세에 얻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굉장한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식을 낳아서 키웁니다마는 50세 이후에 낳은 자식, 즉 만득자(晩得子)에 대해서는 특별히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50세 이전에 낳은 자식은 진정한 부모의 마음으로 키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때로는 귀찮아서 구박하기도 하고 때리기도 했습니다. 무슨 일을 좀 하려고 해도 자식이 걸려서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에 반하여 50세가 넘어 만년에 자식을 키우게 되면 그처럼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잘못될 새라 애지중지할 뿐 아니라 자식 앞에서는 늘 모든 언행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아브라함은 50세도 아닌 100세에 독자(獨子) 이삭을 얻었습니다. 더구나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되돌려 받은 소중한 자식입니다.

아브라함은 일단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완전히 바친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로서 귀한 선물로 다시 받게 되었습니다.

세속적으로 보아서는 태어날 때에 얻은 자식이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모리아 산에서 되돌려 받음으로 비로소 얻은 자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이 장성하여 장가들 나이가 되었습니다. 자부(子婦)를 맞아들여야 합니다.

자부를 바로 맞아들여야만 마침내 내 아들, 올바른 아들로 자리할 수 있게 됩니다. 잘못되면 내 아들마저 잘못 되는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시점에 온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남의 사람이 잘 들어와야 집안이 화평하지 않습니까? 결혼이 인생과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하고,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의 소중한 복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부모를 잘 만나는 복이고, 둘째는 스승을 잘 만나는 복입니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나를 올바르게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배우자입니다. 남편이건 아내건 한번 삐끗하여 잘못되면 두 사람 모두 일생을 망치게 됩니다.

제가 볼 때는 참 안된 일입니다 마는 우리 교역자 가운데도 그런 분이 많습니다. 인격으로나 신앙적 소양으로나 여러 모로 훌륭한 분인데 부인을 잘못 만나서 목회에 실패하는 경우를 봅니다. 부인 때문에 일이 어렵게 됩니다. 한 교회에 오래 있지 못하여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합니다.

목회생활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인 잘못 만나면 3년마다 교회를 옮긴다' ---- 교인들과 친해질 즈음이면 꼭 말이 많아져서 옮겨야 하는 처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내를 바로 맞아야 함은 교역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생 전부 ---- 신앙적인 문제, 자녀교육 문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집안에 여자를 맞아들이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배우자를 만나는 일은 부모나 스승을 만나는 일보다 어느 정도 선택의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를 만나는 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낳아 주어서 태어난 것이지 내가 어머니 아버지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으니까요.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일생을 통해 만나는 스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학교도 잘 옮기고 선생도 잘 바꿉니다마는 선택권이 그리 넓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선택하고 아내를 선택하는 일은 적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 선택이라는 문제를 놓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이 속한 24장에서 몇 구절을 읽어보기로 합시다. 아브라함은 4절에서 그의 늙은 종에게 말합니다.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 이방 사람과는 혼인할 수 없으므로 친족 중에서 선택하라고 합니다.

인물이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습니다. 지금 같으면 사진이라도 보고 전화로 음성이라도 들을 수 있으련만 그 옛날에야 사진과 전화가 어디 있습니까?

이제 이삭과 리브가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리브가는 남편이 될 이삭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 한번 본 일이 없습니다. 음성 한번 들어본 일도 없습니다. 이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선택하는 일이 제3자의 중매로 이루어져 결정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선택이 과연 될 일이냐가 문제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결혼하기까지에는 두 사람의 택함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이러한 여자를 택하라 ---- 뒤에서 조종을 합니다. 그리고 늙은 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냅니다.

이 늙은 종은 자기 집에서 평생 자유의 종으로 신실하게 일해온 사람입니다. '당신 눈에 합당한대로 데려오시오' ---- 아브라함은 그로 하여금 이삭의 아내를 택하게 합니다.

택하고 결정함에 어머니 사라는 빠져 있습니다. 더불어 의논했다는 이야기조차 없습니다. 전적으로 두 사람이 알아서 합니다.

이삭도 자신의 아내를 맞는 일이지만 아버지와 신실한 종이 택해 주는 대로 순종합니다. 내가 보고 결정하겠다, 내가 데리고 살 여자니까 ---- 이러한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온 집안 식구가 한 신앙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고 또 당연해 보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이 일을 경영하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선택하는 것 같으나 실은 뒤에 계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합니다. 여호와께서 인도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순적히 만나게 해주실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참으로 훌륭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말마다 하나님이요, 때마다 묵묵히 기도합니다. 떠날 때에 기도하고, 가는 중에 기도하고, 사람을 만날 때에도 '이 사람입니까'하고 먼저 기도합니다. 만난 후에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애씁니다.

환영받는 순간에도 '이제는 다 되었다'하지 않고 다시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기도합니다. 또 40절에 이르러서는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 평탄한 길을 나아가면서 묵도를 계속했습니다. 4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 중매하러 가는 길, 일어나는 사건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50절에 가면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 라반과 브두엘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약혼 때에 많이 인용되기도 합니다. 'I have no choice.' ----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된다, 안 된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뜻이니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생겼는지, 취미가 맞을는지, 성격이 맞을는지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혼인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혼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혼인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배우자를 택함에 하나님은 저리 가라 입니다. 전혀 안중에 없습니다. 재산부터 셈하고 지위와 명예부터 따지려 듭니다. 근본이 잘못되고 동기(motivation)가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칼빈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칼빈 선생, 당신은 왜 결혼했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결혼했습니다" ---- 참으로 칼빈다운 대답입니다.

당시는 결혼하지 않은 채 성직 생활을 하는 것이 상례였기에 결혼한 칼빈이 특별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오로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하여, 좀더 훌륭하게 하기 위하여 결혼을 했습니다. 그것도 자식까지 딸린 미망인과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혼을 앞에 놓고 이런 것 저런 것 조건 따위나 따지며 복잡한 생각을 많이 하지만 의미 없는 일 입니다. 행복은 그런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가부를 말할 것이 없습니다. 뒷이야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선택권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진리를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누가 먼저 청혼하고 누가 먼저 승낙했는지, 이제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라고 꼭 이야기합니다. 어떤 여자 분은 현재의 남편이 1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며 구애를 하기에 하는 수없이 결혼 승낙을 했노라고 결혼 후 30년 동안이나 떠벌리고 다닙디다. 반대로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집사람을 3년이나 따라다닌 끝에야 결혼에 골인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여 1년 동안 기도하고 애를 써서 결혼하게 되었다" ---- 참으로 복 받을 마음씨입니다. 자기 쪽에서 먼저 그렇게 말하니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하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녀서…" ---- 못된 마음입니다. 회개부터 하십시오.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어 저분을 만났습니다" ---- 이런 마음이면 하나님께서 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마음 그릇이 있어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는 아무리 기도해도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 안에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셨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주관하셨다"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나이다' ----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시작도 신앙으로요, 끝도 신앙으로입니다. 중간에 이런저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삭의 가정에서는 이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축복만으로 두 사람이 만납니다. 얼굴을 본 일도 없고 나이도 모르며 취미는 더구나 모릅니다. 혼수는 아예 생각에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리브가를 처음 만났을 때에 얼마나 반가워합니까?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 살며 축복의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이 가정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편애(偏愛)입니다. 쌍동이를 낳았는데,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그 좋아한 이유가 다분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이삭은 점점 나이가 들면서 고기 음식을 좋아합니다. 집에는 양도 있고 소도 있지만 특별히 사냥해서 잡아온 들짐승 고기를 맛있어했습니다. 그래서 사냥을 잘하는 에서를 좋아하게 된 모양입니다. 반대로 어머니 리브가는 집안 일을 잘 도와주는 내성적인 야곱을 좋아합니다. 결국 편애 때문에 이 가정이 파탄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두 형제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갈라져야 하는 불행을 맞지 않습니까? 문제가 이렇게까지 벌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는 똑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똑같이 긍지를 느낄 수 있도록 대해야 합니다. 형이 공부 좀 못했다고 해서 '너는 왜 동생만도 못하냐'고 야단치면 이미 교육은 끝나는 것입니다. 다 버리고 맙니다. 동생 앞에서 형을 때려도 안되고 형 앞에서 동생을 나무라서도 안됩니다. 각자의 장점을 높이 평가해주고 단점을 덮어주면서 격려해야 합니다. 서로 비교하여 칭찬하고 나무라면 상처만 주제 됩니다.

아이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꾸중을 듣고 매를 맞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합니다. 내가 꾸중을 들어 마땅한가, 내가 지금 매맞을 짓을 해서 맞는가 ---- 나름대로 날카롭게 판단을 합니다.

혹시 어머니가 아버지께 책망을 듣고 나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아닌가, 아버지가 밖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 이러한 생각이 들게끔 했다면 충고는 이미 효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게다가 아이들 또한 체면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특히 친구에게 그렇습니다. 매맞고 책망 듣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체면과 자존심이 짓밟히는 게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충고는 전혀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서로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편애가 있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리브가는 야곱을 따로따로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로 해서 마침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형제 사이를 영원히 이간시키고 맙니다.

형제의 우애는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온전하게 사랑해야만 형제끼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모가 편벽된 생각이나 불공평함으로 자식들을 대하기 시작하면 자식들끼리는 좀처럼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먼저 내 부모님께 잘해야 내 자식도 나한테 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마구 대했는데 내 자식이 무엇을 배워 나한테 효도하겠습니까?

여러분, 진정한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가정이 어떤 모습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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