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카톨릭에 구원이 있는가? /라은성교수(총신 82회졸,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거나 질문해 보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로마 카톨릭들이 말하는 칭의론을 보게 된다. 이 질문은 곧 로마 카톨릭이 참된 복음을, 즉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또 고수하고 있는지에 초점이 모여진다. 복음들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말씀일 것으로 보면, 그들이 가진 칭의론을 자연스럽게 살피게 된다. 또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가장 두드러진 상이점들 중 하나가 칭의론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25년 동안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에 관해 직접적으로 어떠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단 말인가? 우리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가?”라는 외침이 로마 카톨릭 내부에서 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는 1540년과 1541년에 각각 보름스와 레겐스부르그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루터란과 로마 카톨릭 간의 화해를 도모하려고 했다. 이곳에서의 논의의 초점은 ‘칭의’에 관한 것이었다. 양쪽에서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라는 표현이었다. 이곳에서의 결정된 사항들이 “레겐스부르그 책”(Regensburg Book)과 “보름스 책”(Worms Book)이라는 것으로 나왔지만 칭의에 가르침에 관해 로마 카톨릭인들과 프로테스탄트들로부터 모두 거부를 당했다.
1. 트렌트 종교회의
두 차례의 회의를 실패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1500-1558)와 교황 폴 3세(1534-1549)는 교황 교서 『기뻐하라 예루살렘』(Laetare Hierusalem)을 발표하여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를 개최하였다. 트렌트인들이 다루었던 교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칭의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칭의를 다루는 1546년 6월 21일 회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종교회의의 신학적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칭의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장 주요한 이슈를 종교회의가 다루는 것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칭의론은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결정한 6번째 회기 법령을 지금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명한다. 하지만 누구든 은혜가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을 행하심을 먼저 이해하지 못하면 은혜로만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은혜를 전적인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지만 로마 카톨릭들은 은혜를 초자연적 도움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로마 카톨릭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성화시키고 강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영혼 속에 유입시키는 존재론적 어떤 영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협력과 동의를 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은혜를 받기 준비된 것은 은혜의 사역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은혜의 사역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 안에서 그리고 자선으로 말미암아 성화 속에서 우리의 협력을 반드시 일으킨다고 한다. 펠라기안 입장을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로마 카톨릭의 은혜관은 철저하게 세미 펠라기안적이고 펠라기안적이다. 세미 펠라기안 입장은 529년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정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수용ㆍ실천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들, 즉 트렌트인들이 말하는 칭의는 첫 아담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의 상태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의 상태와 은혜의 상태로의 ‘변환’(translation)이라고 한다. 이런 변환을 안겨다 주는 칭의는 죄의 사면만 아니라 내적 사람의 성화와 갱생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칭의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우리들의 마음에 부어주셔서 우리를 ‘변화’(transforming)시키셔서 존재론적으로 우리를 의롭 만드신다. 첫 번째 칭의, 즉 이런 변환은 세례적 중생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세례를 통해 원죄의 죄책이 경감되고, 죄의 속성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세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한다. 선행을 얻을 만한하게 되어 두 번째 칭의를 받게 된다. 두 번째 칭의는 성찬과 고해와 연관을 맺게 된다. 살아가면서 성찬에 참여하고 받듯이 고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성찬으로 인해 초자연적 삶이 조장되고, 고해성사로 인해 죄의 병으로부터 치유되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은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라는 세 가지 범주를 하나, 즉 칭의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오직 믿음만으로 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앵글리칸 사제에서 로마 카톨릭으로 전향한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10-1890)은 “우리가 믿음으로나 행함으로나 성례로 구원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하나의 교리를 의미하는데 성례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믿음으로 깊이 새겨지고, 행함으로 명시되는 은혜로 인하여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의미한다”고 했다. 이에 반하여 복음주의 신학자였던 칼 헨리(Carl Henry, 1913-2003)는 종교개혁자들에 반응하여 모였던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확정한 칭의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트렌트 종교회의(1547)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관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칭의가 “죄의 단순한 사면만 아니라 내적 사람의 성화와 갱생”을 의미한다고 고수했다. 칭의가 죄의 사면을 선포하는 행위만 아니라 내적 갱생과 성화의 변화하는 행위까지 포함됨을 주장했다. 칭의는 성화의 한 측면으로 이해되어진다. 구원은 부분적으로 치명적인 죄를 말미암아 상실될 수 있는 선천적인 의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죄인에게까지도 뻗치는 신적 은혜를 동반해야만 하는 선행에도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로마 카톨릭 견해는 구원을 위해 개인적 공로 체제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로마서 11:6의 바울의 말씀과 어울리지 않는다: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로마 카톨릭주의가 보기에는 칭의를 개인이 변화하는 것들 중 하나라고 여긴다. 이러한 견해는 2차 바티칸 종교회의(1962-65)까지 변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로마 카톨릭 자유주의적 대표 신학자라고 불리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다음과 같이 칭의론을 밝히고 있다:
고전적 프로테스탄트 칭의론에서 보면 사람의 칭의는 단순히 “사법적”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은혜로운 의지로 보신다는 의미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사람을 죄의 상태로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 칭의론 보다는 “내재적” 완성의 가능성, 즉 은혜가 사람의 본질에 신적 영향을 주어 설득시키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긍정적으로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며, 그 결과 자신의 완성을 향해 자유롭게 능동적인 경향이 사람에게 심기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로마 카톨릭 교리에서 완성을 향한 경향은 프로테스탄트 개념보다 ‘훨씬 내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진행되는 칭의와 내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의 본질적인 견해가 로마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제안하는 초교파적 대화가 있다. 위의 설명에서 보면, 과연 로마 카톨릭이 구원의 복음을 진실하게 고수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으리라 본다. 과연 그들이 구원의 복음, 참된 복음을 고수하고 있다면 그들의 구원관을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 ECT
그 이후 그들은 트렌트 칭의관을 지금까지 유지해 오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루터란들과 로마 카톨릭인들이 함께 모여 ‘연합 범위원회’(Joint Ecumenical Commission)를 창설하였다. 이 위원회는 둘 사이에 가장 걸림돌이었던 칭의에 관하여 논의하여 교회 간에 지속적인 상이점들은 해결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여 연합하자는데 뜻을 모았던 것이다.
1983년 9월에 미국 루터란-로마 카톨릭 대회가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는 제목으로 24,000자로 된 문서가 출판되었다. 이 문서는 5년간의 결실이었다. 그 때부터 칭의의 이슈는 초교파적 연합을 목표로 하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 간에 있는 모든 신학적 논의에 “결정적인 원리”로 불려졌다.
루터란-카톨릭의 본문에서 오직 믿음만으로에 대한 흥미 있는 변호하는 게르하르드 포르데(Gerhard Forde)는 칭의의 법정적인 면을 변호하는 것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
고전 문헌[종교개혁자들]에 나타난 것을 조금이라도 훑어보면 칭의와 전가라는 아이디어가 죄를 용서한다는 면을 먼저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에게는 그런 용어들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행한다. 그들은 주장하는 이슈를 약속하고, 선포하고, 선언하고, 설립하고, 결정한다. 구원에 대해 단순히 말하거나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구원을 주었다. 법정적 언어의 성격은 법적 용어와 은유적이기 보다는 실제로 법정에서 일어나는 판사로부터 석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빌헬름 단틴(Wilhelm Dantine)은 성경에 사용된 재판의 의미가 지배적이기에 칭의 용어 사용은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성경으로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고 마침내 그 앞에 우리는 서게 될 것이다.
포르데는 “만일 교회가 정확한 용어인 칭의에 요구된 용어를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면 교회는 전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되고 말 것이다”라고 한다.
루터란-카톨릭 대회에서 다루어진 이런 중요한 이슈들에 관해 포르데는 “이런 문제에 있어 대화의 무익한 면은 그것들에 관해 너무나도 부족했으며 유용하고 유익한 문제에서 이슈를 다루는 면에서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이슈들에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희미한 형식들만 더듬는 것 같다”고 하며 슬퍼했다. 계속하여 말하기를 “앞으로의 대화에서 필요한 것이 나타났지만 모든 초교파 대화에서 어려움은 내가 알기로는 거의 예외 없이 그러한 이슈들을 논의할 의도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한 칭의 이슈들은 신학적 견지에서 볼 때 너무나 기본적이기에 그것을 포기하거나 재 정의하는 것이 모든 신학적 입장을 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까? 다른 말로 하면 이 이슈를 가지고 카톨릭인들과 초파적으로 순수한 일치를 갖는 것이 프로테스탄트나 복음주의임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가. ECT 1
1994년 5월 복음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인들은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리처드 뉴하우스(Richard Neuhaus)가 주최하는 모임에 참여하여 “복음주의자들과 카톨릭들이 함께: 3천년 기독교 선교”(ECT,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The Christian Mission in the Third Millennium)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이제 ‘ECT’ 또는 ‘ECT 1’로 불린다. 이 성명서를 발표했던 단체는 “기독교 신앙과 선교에 관한 공감된 확신”을 발견하려고 했고 두 단체 간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의 분노를 식히려고 했던 데 있었다. '임신 중절 합법화 반대'(pro-life) 운동과 카리스마 갱생에 함께 참석했던 두 단체에 의해 발족된 것이다. 하지만 그 성명서는 두 단체의 교리가 특별히 구원론에서 논의를 깊게 하지 않은 가운데 빚어졌다고 여기는 복음주의자들과 카톨릭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구원론을 다루는 ‘ECT 2’가 발표되었다.
나. ECT 2
ECT 2 성명서는 “구원의 선물”(The Gift of Salvation, January 1998)이라는 제목으로 구원론에 있어 로마 카톨릭인들과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어떤 수렴된 것을 나타내려 했던 척 콜슨과 리처드 뉴하우스가 이끄는 단체에서 발표된 것이다. 여기에는 이신칭의 이슈를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19명의 복음주의자들과 16명의 로마 카톨릭인들이 서명했다. 자신들의 이름을 성명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단체를 대표 했다기보다는 개인적 자격으로 임했던 것 같다. 앞으로의 향방에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했던 문서로 여겨진다.
성명서의 7-8문단은 칭의에 관해 복음주의자들이 거의 문제를 삼지 않을 정도로 넓은 의미로 매우 우수하게 요약하고 있다.
칭의는 구원론에 관한 성경적 설명에 가장 중심적이고 결정적이다.
칭의는 우리 편에서 선행이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사랑에서 나오는 “순전한”(sheer) 은혜에 기초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복음(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칭의의 기초를 형성한다.
칭의는 기본적으로 법정적인데-우리가 더 이상 모반적인 적들이 아니라고 “선포”된다.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엡 2:8).
칭의는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받는다.
이러한 항목들은 바울 구원론과 조화를 잘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항목은 오직 믿음만에 대한 전통적 로마 카톨릭 입장과 조금의 마찰이 있을 것 같다.
선언에서 잠재적 위험은 8번째 항목인데 “믿음은 지적 동의만 아니라 마음, 뜻, 그리고 감정을 포함하고 변화된 삶을 주장하는 전 인격의 행위이다.” 이 말씀들은 어떤 복음주의자들에게 도전이 될 수도 있고 ‘지적 동의,’ ‘전 인격,’ 그리고 ‘변화된 삶’이라는 의미의 정의가 다양하게 해석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주권적 구원’(Lordship Salvation) 논쟁을 생각하고 있다. . . . 그 이유는 칭의와 성화 간에 있는 날카로운 구별점 때문이다. 게하르드 프로데는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 우리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신칭의는-그것 없이는 그것 안에서-항상 진 치는 교리를 항상 논의했다. 싸움을 거는 교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바울의 갈라디아 반대자들부터 펠라기우스, “선행”을 갈망하는 후기 종교개혁, 그리고 “값싼 은혜”를 두려워하는 데까지 불평의 탄원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거칠고 실재적 세상을 위해 너무 위험한 교리이다. 역시 도덕폐기론적 교리이다.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덕행과 도덕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적어도 한 사람은 그것을 그렇게 강요하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가르쳐 진다면 신학적으로 외톨이가 되어 기독교 삶의 실제 일-성화-에 잘 진척될 것이다. 전통적인 조직적 질문들은 이와 같은 관점에 집중되어 있다.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됨이 허위적 안정, 허위적 개인주의, 그리고 내재성으로 인도되는 것이 아닐까? 믿음과 선행, 칭의와 의, 개인 구원과 사회적 관심 간에 운명적인 분열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가? . . . 요약컨대 전통적 질문은 -그것 없이는 그것 안에서 있는 질문은 - 윤리학, 도덕적 과정, 그리고 덕행에 대한 교리를 매우 염려했다.
콜슨-뉴하우스 선언은 심적으로 모든 복음주의자들과 더불어 예민하게 쓰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위에 것을 참고해보면 그렇지 않는 것 같다. 8번째 문단은 함께 하고자 했던 두 전통들 내의 상이점들을 인식하고 있다. 성화에 관한 8번째 문단은 비슷한 질문을 일으킨다: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의 시작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와 더불어 적대감과 유혹에 대해 갈등하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갈등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위해 만족케 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견디도록 하심을 확신한다. 실패한다면 아직도 하나님께로 겸손한 회개를 하면서 되돌아갈 수 있고 그의 용서를 구하고, 받을 수 있다.
위의 첫 문장은 문제가 없다. 로마 카톨릭은 은혜라는 용어를 성례에 참여하므로 또 순종과 연관된 행위들에 참여하므로 신자가 잠길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이라고 한다. 두 번째 문장에 관해서 복음주의 계열에서 나누인다. 영원한 안정이나 보장된 점진적 거룩함에 과한 문장처럼 보는 전통적 카톨릭들에게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동일한 단어가 여러 방면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본질적인 방법으로 양편을 연합할 수 있는데 성명서로서는 매우 희박하게 여겨진다.
3. 그들에게 구원이?
로마 카톨릭과 루터란들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칭의론’ 문제이다. 칭의론 문제는 곧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로마 카톨릭 칭의론에는 은혜와 믿음을 표현하지만 ‘오직’(sola)을 넣으려고 하지 않는다. 은혜는 방편으로 요구되는 것이며, 믿음도 은혜에 응답과 협력에 요구되는 것이지만 결코 ‘오직’이란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은혜관은 529년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정죄 받은 세미 펠라기안 견해를 답습하고 있고, 중세 스콜라 철학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칭의’ 역시 로마 카톨릭은 ‘단회적’인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라 두 번의 칭의를 믿는다. 첫 번째 칭의는 세례에서 일어나서 선행을 행할 수 있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이것을 가리켜 ‘변환’이라고 한다. 하지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두 번째 칭의가 요구된다. 두 번째 칭의는 선행으로 말미암는다. 선행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요구된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를 받기 위해 이렇게 기도할 것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발령된 법령에서 가르친다 : “나를 변화시키소서. 내가 당신께로 나아갈 것이며, 우리의 자유에 경고를 받으리이다 라는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오 주님, 우리를 개종시키소서. 우리가 개종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를 받겠나이다.” 로마 카톨릭은 두 번째 칭의를 얻기 위해 부단히 선행을 요구하고, 선행을 위해 은혜를 받도록 한다. 늘 고해와 성찬에 참여하는 당위성을 갖는다. 두 번째 칭의를 받을 때까지는 결코 구원의 확신이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받은 칭의를, 즉 첫 번째 칭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친구와 가족이 된 후 덕으로 행하면서 그들은 사도가 말한 것처럼 날마다 갱생된다. 자신의 육체의 요소들을 고행정화하며, 성화에 이르도록 의의 도구로서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계명과 교회의 계명, 그리고 선행과 협력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은 의를 증진시킨다(increase). 기록된 것처럼 의로운 그들은 계속 의로워진다. 죽음에 이를 때에 의로워짐을 두려워 말라. 오직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 사람은 의로워짐을 알 것이다. 거룩한 교회는 칭의의 증진을 빈다: “오 주여 믿음, 소망, 그리고 자비로운 사랑을 증진시키게 하소서.”
칭의의 은혜를 받는데서 떨어진 사람들도 다시 의롭게 될 수 있다. 참회의 성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자극시키시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상실된 은혜의 자리로 복귀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칭의를 수리라고 부른다. 거룩한 교부들은 상실한 은혜의 파선 후 두 번째 부르심을 받는다고 한다. 세례 후 죄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은 참회의 성례를 제정하셨다.
복음 중에 복음인 ‘이신칭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엡 2:8-9) 말씀을 비추어볼 때 우리는 로마 카톨릭이 올바로 또는 참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음의 진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면 그들에게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음의 진수 외에 다른 것을 더불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여전히 있다고 여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또 그 복음의 진수와 더불어 다른 복음이 요구되어 구원을 받는다면 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여전히 있다고 여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종교개혁자들이 우리에게 생명을 무릎서고 가르친 복음이 무엇임을 믿느냐에 따라 로마 카톨릭들이 구원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들만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조건이 무엇이냐에 따라 판단해야할 것이다. 단적으로 또는 획일적으로 구원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아니라, 구원을 받는 복음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보는 것이 좋으리라 본다.
주의’와 ‘신자’ 구별해야 정당
‘로마가톨릭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거나 해 보았을 것이다. 이 질문을 해결하려면 두 가지로 생각해 봐야 한다. 로마가톨릭주의와 로마가톨릭인에 대한 것이다.
어떤 국가의 국민 한 사람이 그 나라 전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나라에 대한 평가대로 평해서도 안 된다. 개인은 각자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특성을 보고 나라를 평하거나 나라를 보고 개인을 평하는 것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굳이 한 나라를 평하려면, 그 나라의 헌법이나 역사 등을 보면서 평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판단기준을 ‘로마가톨릭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물음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로마가톨릭주의(Roman Catholicism) 구원관과 로마가톨릭 신자들(Roman Catholics)의 구원관을 나눠 살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로마가톨릭 신자들의 구원을 논하려면,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그 신자들 각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물어볼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 올바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가톨릭인들의 구원을 평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로마가톨릭주의의 구원관은 그들이 주장하는 교회법과 법령을 통해 평할 수 있다. 로마가톨릭의 구원관은 칭의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종교개혁 후, 그들은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를 개최하여 종교개혁자들을 정죄하고 자신들의 법령과 교회법을 제정하였다. 그때 제정한 것은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로마가톨릭의 신앙이 되고 있다. 두 차례 바티칸 종교회의가 열렸지만, 트렌트의 신조는 그대로 고수되고 있다.
특히 트렌트에서 결정한 6번째 회기 법령인 칭의론을 보면,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명한다. 하지만 누구든 은혜가 무엇이며, 은혜가 어떻게 행하심을 먼저 이해하지 못하면 은혜만으로 사람은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한다.
개혁신학은 은혜를 전적인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지만, 로마가톨릭은 은혜를 초자연적 도움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로마가톨릭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성화시키고 강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영혼 속에 유입시키는 존재론적인 어떤 영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협력과 동의를 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 것은 은혜의 사역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은혜의 사역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 안에서 그리고 자선으로 말미암아 성화 속에서 우리의 협력을 반드시 일으킨다고 한다.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로마가톨릭의 은혜관은 철저하게 세미-펠라기우스적이거나 펠라기우스적이다. 세미-펠라기우스의 입장은 529년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정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수용ㆍ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로마가톨릭이 말하는 칭의는 첫 아담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의 상태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의 상태와 은혜의 상태로의 ‘변환’(translation)이라고 한다. 이런 변환을 안겨다 주는 칭의는 죄의 사면만 아니라 사람의 내적 성화와 갱생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칭의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우리들의 마음에 부어주셔서 우리를 ‘변화’(transforming)시키셔서 존재론적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다. 첫 번째 칭의, 즉 이런 변환은 세례적 중생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세례를 통해 원죄의 죄책이 경감되고, 죄의 속성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세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한다. 선행을 얻을 만한하게 되어 두 번째 칭의를 받게 된다. 두 번째 칭의는 성찬과 고해와 연관을 맺게 된다. 살아가면서 성찬에 참여하고 받듯이 고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성찬으로 인해 초자연적 삶이 조장되고, 고해성사로 인해 죄의 병으로부터 치유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볼 때, 로마가톨릭이 주창하고 고수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함이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의 개혁신학의 구원관에서 볼 때 분명한 오류이다.
글=라은성 교수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역사신학
출처 : 개혁신학 연구원
글쓴이 : 고목사 원글보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거나 질문해 보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로마 카톨릭들이 말하는 칭의론을 보게 된다. 이 질문은 곧 로마 카톨릭이 참된 복음을, 즉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또 고수하고 있는지에 초점이 모여진다. 복음들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말씀일 것으로 보면, 그들이 가진 칭의론을 자연스럽게 살피게 된다. 또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가장 두드러진 상이점들 중 하나가 칭의론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25년 동안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에 관해 직접적으로 어떠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단 말인가? 우리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가?”라는 외침이 로마 카톨릭 내부에서 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는 1540년과 1541년에 각각 보름스와 레겐스부르그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루터란과 로마 카톨릭 간의 화해를 도모하려고 했다. 이곳에서의 논의의 초점은 ‘칭의’에 관한 것이었다. 양쪽에서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라는 표현이었다. 이곳에서의 결정된 사항들이 “레겐스부르그 책”(Regensburg Book)과 “보름스 책”(Worms Book)이라는 것으로 나왔지만 칭의에 가르침에 관해 로마 카톨릭인들과 프로테스탄트들로부터 모두 거부를 당했다.
1. 트렌트 종교회의
두 차례의 회의를 실패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1500-1558)와 교황 폴 3세(1534-1549)는 교황 교서 『기뻐하라 예루살렘』(Laetare Hierusalem)을 발표하여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를 개최하였다. 트렌트인들이 다루었던 교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칭의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칭의를 다루는 1546년 6월 21일 회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종교회의의 신학적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칭의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장 주요한 이슈를 종교회의가 다루는 것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칭의론은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결정한 6번째 회기 법령을 지금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명한다. 하지만 누구든 은혜가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을 행하심을 먼저 이해하지 못하면 은혜로만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은혜를 전적인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지만 로마 카톨릭들은 은혜를 초자연적 도움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로마 카톨릭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성화시키고 강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영혼 속에 유입시키는 존재론적 어떤 영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협력과 동의를 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은혜를 받기 준비된 것은 은혜의 사역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은혜의 사역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 안에서 그리고 자선으로 말미암아 성화 속에서 우리의 협력을 반드시 일으킨다고 한다. 펠라기안 입장을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로마 카톨릭의 은혜관은 철저하게 세미 펠라기안적이고 펠라기안적이다. 세미 펠라기안 입장은 529년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정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수용ㆍ실천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들, 즉 트렌트인들이 말하는 칭의는 첫 아담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의 상태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의 상태와 은혜의 상태로의 ‘변환’(translation)이라고 한다. 이런 변환을 안겨다 주는 칭의는 죄의 사면만 아니라 내적 사람의 성화와 갱생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칭의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우리들의 마음에 부어주셔서 우리를 ‘변화’(transforming)시키셔서 존재론적으로 우리를 의롭 만드신다. 첫 번째 칭의, 즉 이런 변환은 세례적 중생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세례를 통해 원죄의 죄책이 경감되고, 죄의 속성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세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한다. 선행을 얻을 만한하게 되어 두 번째 칭의를 받게 된다. 두 번째 칭의는 성찬과 고해와 연관을 맺게 된다. 살아가면서 성찬에 참여하고 받듯이 고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성찬으로 인해 초자연적 삶이 조장되고, 고해성사로 인해 죄의 병으로부터 치유되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은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라는 세 가지 범주를 하나, 즉 칭의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오직 믿음만으로 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앵글리칸 사제에서 로마 카톨릭으로 전향한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10-1890)은 “우리가 믿음으로나 행함으로나 성례로 구원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하나의 교리를 의미하는데 성례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믿음으로 깊이 새겨지고, 행함으로 명시되는 은혜로 인하여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의미한다”고 했다. 이에 반하여 복음주의 신학자였던 칼 헨리(Carl Henry, 1913-2003)는 종교개혁자들에 반응하여 모였던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확정한 칭의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트렌트 종교회의(1547)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관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칭의가 “죄의 단순한 사면만 아니라 내적 사람의 성화와 갱생”을 의미한다고 고수했다. 칭의가 죄의 사면을 선포하는 행위만 아니라 내적 갱생과 성화의 변화하는 행위까지 포함됨을 주장했다. 칭의는 성화의 한 측면으로 이해되어진다. 구원은 부분적으로 치명적인 죄를 말미암아 상실될 수 있는 선천적인 의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죄인에게까지도 뻗치는 신적 은혜를 동반해야만 하는 선행에도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로마 카톨릭 견해는 구원을 위해 개인적 공로 체제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로마서 11:6의 바울의 말씀과 어울리지 않는다: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로마 카톨릭주의가 보기에는 칭의를 개인이 변화하는 것들 중 하나라고 여긴다. 이러한 견해는 2차 바티칸 종교회의(1962-65)까지 변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로마 카톨릭 자유주의적 대표 신학자라고 불리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다음과 같이 칭의론을 밝히고 있다:
고전적 프로테스탄트 칭의론에서 보면 사람의 칭의는 단순히 “사법적”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은혜로운 의지로 보신다는 의미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사람을 죄의 상태로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 칭의론 보다는 “내재적” 완성의 가능성, 즉 은혜가 사람의 본질에 신적 영향을 주어 설득시키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긍정적으로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며, 그 결과 자신의 완성을 향해 자유롭게 능동적인 경향이 사람에게 심기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로마 카톨릭 교리에서 완성을 향한 경향은 프로테스탄트 개념보다 ‘훨씬 내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진행되는 칭의와 내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의 본질적인 견해가 로마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제안하는 초교파적 대화가 있다. 위의 설명에서 보면, 과연 로마 카톨릭이 구원의 복음을 진실하게 고수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으리라 본다. 과연 그들이 구원의 복음, 참된 복음을 고수하고 있다면 그들의 구원관을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 ECT
그 이후 그들은 트렌트 칭의관을 지금까지 유지해 오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루터란들과 로마 카톨릭인들이 함께 모여 ‘연합 범위원회’(Joint Ecumenical Commission)를 창설하였다. 이 위원회는 둘 사이에 가장 걸림돌이었던 칭의에 관하여 논의하여 교회 간에 지속적인 상이점들은 해결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여 연합하자는데 뜻을 모았던 것이다.
1983년 9월에 미국 루터란-로마 카톨릭 대회가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는 제목으로 24,000자로 된 문서가 출판되었다. 이 문서는 5년간의 결실이었다. 그 때부터 칭의의 이슈는 초교파적 연합을 목표로 하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 간에 있는 모든 신학적 논의에 “결정적인 원리”로 불려졌다.
루터란-카톨릭의 본문에서 오직 믿음만으로에 대한 흥미 있는 변호하는 게르하르드 포르데(Gerhard Forde)는 칭의의 법정적인 면을 변호하는 것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
고전 문헌[종교개혁자들]에 나타난 것을 조금이라도 훑어보면 칭의와 전가라는 아이디어가 죄를 용서한다는 면을 먼저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에게는 그런 용어들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행한다. 그들은 주장하는 이슈를 약속하고, 선포하고, 선언하고, 설립하고, 결정한다. 구원에 대해 단순히 말하거나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구원을 주었다. 법정적 언어의 성격은 법적 용어와 은유적이기 보다는 실제로 법정에서 일어나는 판사로부터 석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빌헬름 단틴(Wilhelm Dantine)은 성경에 사용된 재판의 의미가 지배적이기에 칭의 용어 사용은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성경으로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고 마침내 그 앞에 우리는 서게 될 것이다.
포르데는 “만일 교회가 정확한 용어인 칭의에 요구된 용어를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면 교회는 전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되고 말 것이다”라고 한다.
루터란-카톨릭 대회에서 다루어진 이런 중요한 이슈들에 관해 포르데는 “이런 문제에 있어 대화의 무익한 면은 그것들에 관해 너무나도 부족했으며 유용하고 유익한 문제에서 이슈를 다루는 면에서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이슈들에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희미한 형식들만 더듬는 것 같다”고 하며 슬퍼했다. 계속하여 말하기를 “앞으로의 대화에서 필요한 것이 나타났지만 모든 초교파 대화에서 어려움은 내가 알기로는 거의 예외 없이 그러한 이슈들을 논의할 의도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한 칭의 이슈들은 신학적 견지에서 볼 때 너무나 기본적이기에 그것을 포기하거나 재 정의하는 것이 모든 신학적 입장을 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까? 다른 말로 하면 이 이슈를 가지고 카톨릭인들과 초파적으로 순수한 일치를 갖는 것이 프로테스탄트나 복음주의임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가. ECT 1
1994년 5월 복음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인들은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리처드 뉴하우스(Richard Neuhaus)가 주최하는 모임에 참여하여 “복음주의자들과 카톨릭들이 함께: 3천년 기독교 선교”(ECT,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The Christian Mission in the Third Millennium)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이제 ‘ECT’ 또는 ‘ECT 1’로 불린다. 이 성명서를 발표했던 단체는 “기독교 신앙과 선교에 관한 공감된 확신”을 발견하려고 했고 두 단체 간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의 분노를 식히려고 했던 데 있었다. '임신 중절 합법화 반대'(pro-life) 운동과 카리스마 갱생에 함께 참석했던 두 단체에 의해 발족된 것이다. 하지만 그 성명서는 두 단체의 교리가 특별히 구원론에서 논의를 깊게 하지 않은 가운데 빚어졌다고 여기는 복음주의자들과 카톨릭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구원론을 다루는 ‘ECT 2’가 발표되었다.
나. ECT 2
ECT 2 성명서는 “구원의 선물”(The Gift of Salvation, January 1998)이라는 제목으로 구원론에 있어 로마 카톨릭인들과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어떤 수렴된 것을 나타내려 했던 척 콜슨과 리처드 뉴하우스가 이끄는 단체에서 발표된 것이다. 여기에는 이신칭의 이슈를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19명의 복음주의자들과 16명의 로마 카톨릭인들이 서명했다. 자신들의 이름을 성명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단체를 대표 했다기보다는 개인적 자격으로 임했던 것 같다. 앞으로의 향방에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했던 문서로 여겨진다.
성명서의 7-8문단은 칭의에 관해 복음주의자들이 거의 문제를 삼지 않을 정도로 넓은 의미로 매우 우수하게 요약하고 있다.
칭의는 구원론에 관한 성경적 설명에 가장 중심적이고 결정적이다.
칭의는 우리 편에서 선행이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사랑에서 나오는 “순전한”(sheer) 은혜에 기초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복음(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칭의의 기초를 형성한다.
칭의는 기본적으로 법정적인데-우리가 더 이상 모반적인 적들이 아니라고 “선포”된다.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엡 2:8).
칭의는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받는다.
이러한 항목들은 바울 구원론과 조화를 잘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항목은 오직 믿음만에 대한 전통적 로마 카톨릭 입장과 조금의 마찰이 있을 것 같다.
선언에서 잠재적 위험은 8번째 항목인데 “믿음은 지적 동의만 아니라 마음, 뜻, 그리고 감정을 포함하고 변화된 삶을 주장하는 전 인격의 행위이다.” 이 말씀들은 어떤 복음주의자들에게 도전이 될 수도 있고 ‘지적 동의,’ ‘전 인격,’ 그리고 ‘변화된 삶’이라는 의미의 정의가 다양하게 해석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주권적 구원’(Lordship Salvation) 논쟁을 생각하고 있다. . . . 그 이유는 칭의와 성화 간에 있는 날카로운 구별점 때문이다. 게하르드 프로데는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 우리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신칭의는-그것 없이는 그것 안에서-항상 진 치는 교리를 항상 논의했다. 싸움을 거는 교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바울의 갈라디아 반대자들부터 펠라기우스, “선행”을 갈망하는 후기 종교개혁, 그리고 “값싼 은혜”를 두려워하는 데까지 불평의 탄원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거칠고 실재적 세상을 위해 너무 위험한 교리이다. 역시 도덕폐기론적 교리이다.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덕행과 도덕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적어도 한 사람은 그것을 그렇게 강요하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가르쳐 진다면 신학적으로 외톨이가 되어 기독교 삶의 실제 일-성화-에 잘 진척될 것이다. 전통적인 조직적 질문들은 이와 같은 관점에 집중되어 있다.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됨이 허위적 안정, 허위적 개인주의, 그리고 내재성으로 인도되는 것이 아닐까? 믿음과 선행, 칭의와 의, 개인 구원과 사회적 관심 간에 운명적인 분열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가? . . . 요약컨대 전통적 질문은 -그것 없이는 그것 안에서 있는 질문은 - 윤리학, 도덕적 과정, 그리고 덕행에 대한 교리를 매우 염려했다.
콜슨-뉴하우스 선언은 심적으로 모든 복음주의자들과 더불어 예민하게 쓰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위에 것을 참고해보면 그렇지 않는 것 같다. 8번째 문단은 함께 하고자 했던 두 전통들 내의 상이점들을 인식하고 있다. 성화에 관한 8번째 문단은 비슷한 질문을 일으킨다: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의 시작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와 더불어 적대감과 유혹에 대해 갈등하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갈등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위해 만족케 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견디도록 하심을 확신한다. 실패한다면 아직도 하나님께로 겸손한 회개를 하면서 되돌아갈 수 있고 그의 용서를 구하고, 받을 수 있다.
위의 첫 문장은 문제가 없다. 로마 카톨릭은 은혜라는 용어를 성례에 참여하므로 또 순종과 연관된 행위들에 참여하므로 신자가 잠길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이라고 한다. 두 번째 문장에 관해서 복음주의 계열에서 나누인다. 영원한 안정이나 보장된 점진적 거룩함에 과한 문장처럼 보는 전통적 카톨릭들에게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동일한 단어가 여러 방면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본질적인 방법으로 양편을 연합할 수 있는데 성명서로서는 매우 희박하게 여겨진다.
3. 그들에게 구원이?
로마 카톨릭과 루터란들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칭의론’ 문제이다. 칭의론 문제는 곧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로마 카톨릭 칭의론에는 은혜와 믿음을 표현하지만 ‘오직’(sola)을 넣으려고 하지 않는다. 은혜는 방편으로 요구되는 것이며, 믿음도 은혜에 응답과 협력에 요구되는 것이지만 결코 ‘오직’이란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은혜관은 529년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정죄 받은 세미 펠라기안 견해를 답습하고 있고, 중세 스콜라 철학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칭의’ 역시 로마 카톨릭은 ‘단회적’인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라 두 번의 칭의를 믿는다. 첫 번째 칭의는 세례에서 일어나서 선행을 행할 수 있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이것을 가리켜 ‘변환’이라고 한다. 하지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두 번째 칭의가 요구된다. 두 번째 칭의는 선행으로 말미암는다. 선행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요구된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를 받기 위해 이렇게 기도할 것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발령된 법령에서 가르친다 : “나를 변화시키소서. 내가 당신께로 나아갈 것이며, 우리의 자유에 경고를 받으리이다 라는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오 주님, 우리를 개종시키소서. 우리가 개종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를 받겠나이다.” 로마 카톨릭은 두 번째 칭의를 얻기 위해 부단히 선행을 요구하고, 선행을 위해 은혜를 받도록 한다. 늘 고해와 성찬에 참여하는 당위성을 갖는다. 두 번째 칭의를 받을 때까지는 결코 구원의 확신이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받은 칭의를, 즉 첫 번째 칭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친구와 가족이 된 후 덕으로 행하면서 그들은 사도가 말한 것처럼 날마다 갱생된다. 자신의 육체의 요소들을 고행정화하며, 성화에 이르도록 의의 도구로서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계명과 교회의 계명, 그리고 선행과 협력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은 의를 증진시킨다(increase). 기록된 것처럼 의로운 그들은 계속 의로워진다. 죽음에 이를 때에 의로워짐을 두려워 말라. 오직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 사람은 의로워짐을 알 것이다. 거룩한 교회는 칭의의 증진을 빈다: “오 주여 믿음, 소망, 그리고 자비로운 사랑을 증진시키게 하소서.”
칭의의 은혜를 받는데서 떨어진 사람들도 다시 의롭게 될 수 있다. 참회의 성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자극시키시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상실된 은혜의 자리로 복귀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칭의를 수리라고 부른다. 거룩한 교부들은 상실한 은혜의 파선 후 두 번째 부르심을 받는다고 한다. 세례 후 죄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은 참회의 성례를 제정하셨다.
복음 중에 복음인 ‘이신칭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엡 2:8-9) 말씀을 비추어볼 때 우리는 로마 카톨릭이 올바로 또는 참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음의 진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면 그들에게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음의 진수 외에 다른 것을 더불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여전히 있다고 여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또 그 복음의 진수와 더불어 다른 복음이 요구되어 구원을 받는다면 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이 여전히 있다고 여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종교개혁자들이 우리에게 생명을 무릎서고 가르친 복음이 무엇임을 믿느냐에 따라 로마 카톨릭들이 구원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들만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조건이 무엇이냐에 따라 판단해야할 것이다. 단적으로 또는 획일적으로 구원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아니라, 구원을 받는 복음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보는 것이 좋으리라 본다.
주의’와 ‘신자’ 구별해야 정당
‘로마가톨릭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거나 해 보았을 것이다. 이 질문을 해결하려면 두 가지로 생각해 봐야 한다. 로마가톨릭주의와 로마가톨릭인에 대한 것이다.
어떤 국가의 국민 한 사람이 그 나라 전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나라에 대한 평가대로 평해서도 안 된다. 개인은 각자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특성을 보고 나라를 평하거나 나라를 보고 개인을 평하는 것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굳이 한 나라를 평하려면, 그 나라의 헌법이나 역사 등을 보면서 평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판단기준을 ‘로마가톨릭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물음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로마가톨릭주의(Roman Catholicism) 구원관과 로마가톨릭 신자들(Roman Catholics)의 구원관을 나눠 살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로마가톨릭 신자들의 구원을 논하려면,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그 신자들 각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물어볼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 올바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가톨릭인들의 구원을 평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로마가톨릭주의의 구원관은 그들이 주장하는 교회법과 법령을 통해 평할 수 있다. 로마가톨릭의 구원관은 칭의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종교개혁 후, 그들은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를 개최하여 종교개혁자들을 정죄하고 자신들의 법령과 교회법을 제정하였다. 그때 제정한 것은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로마가톨릭의 신앙이 되고 있다. 두 차례 바티칸 종교회의가 열렸지만, 트렌트의 신조는 그대로 고수되고 있다.
특히 트렌트에서 결정한 6번째 회기 법령인 칭의론을 보면,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명한다. 하지만 누구든 은혜가 무엇이며, 은혜가 어떻게 행하심을 먼저 이해하지 못하면 은혜만으로 사람은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한다.
개혁신학은 은혜를 전적인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지만, 로마가톨릭은 은혜를 초자연적 도움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로마가톨릭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성화시키고 강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영혼 속에 유입시키는 존재론적인 어떤 영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협력과 동의를 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 것은 은혜의 사역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은혜의 사역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 안에서 그리고 자선으로 말미암아 성화 속에서 우리의 협력을 반드시 일으킨다고 한다.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로마가톨릭의 은혜관은 철저하게 세미-펠라기우스적이거나 펠라기우스적이다. 세미-펠라기우스의 입장은 529년 오렌지 종교회의에서 정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수용ㆍ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로마가톨릭이 말하는 칭의는 첫 아담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의 상태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의 상태와 은혜의 상태로의 ‘변환’(translation)이라고 한다. 이런 변환을 안겨다 주는 칭의는 죄의 사면만 아니라 사람의 내적 성화와 갱생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칭의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우리들의 마음에 부어주셔서 우리를 ‘변화’(transforming)시키셔서 존재론적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다. 첫 번째 칭의, 즉 이런 변환은 세례적 중생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세례를 통해 원죄의 죄책이 경감되고, 죄의 속성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세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한다. 선행을 얻을 만한하게 되어 두 번째 칭의를 받게 된다. 두 번째 칭의는 성찬과 고해와 연관을 맺게 된다. 살아가면서 성찬에 참여하고 받듯이 고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성찬으로 인해 초자연적 삶이 조장되고, 고해성사로 인해 죄의 병으로부터 치유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볼 때, 로마가톨릭이 주창하고 고수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함이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의 개혁신학의 구원관에서 볼 때 분명한 오류이다.
글=라은성 교수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역사신학
출처 : 개혁신학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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