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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

by 【고동엽】 2021. 11. 17.

차례
서론
1. 성경관의 차이
2. 교회관의 차이
3. 교황 무오론
4. 구원관의 차이
* 기독교와 천주교의 주요 교리 요약 비교


서론
원래, '교회(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죄악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마 16:18, 행 5:11). 교회는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우주적이고 보편적인(catholic) 그리스도의 몸(엡 4:1-6)입니다. 곧 머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신앙고백이 같은 이 땅의 모든 지역교회들은 그 지역적 특성을 초월하여 '한몸'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공동체들은 '보편적인 교회(catholic church)'입니다. 원래 '카톨릭'이란 말은 바로 이 우주적 교회의 보편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핍박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성장해가던 보편교회가 세속정권을 차지하게 된 이후 중세 천년 동안(이 기간을 개신교에서는 '암흑기'로 부르지만 천주교에서는 '영광의 시기'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입장 때문에 천주교는 지금도 세속정치에 매우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세가 세속권세 위에 군림하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제 말을 '이원론적 사고'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다만, 천주교의 해묵은 '권력지향성'을 지적하고자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은 '정치판'에서도 '주님'이심을 저는 믿습니다.), 보편교회로서의 교회는 끝을 모르는 부패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예,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계절'같은 작품).
그러다가 1517년 종교개혁의 횃불이 타오르게 되면서 부패한 교회의 발걸음을 다시 진리 위에 세우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게 되었고, 마침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등의 구호로 시작된 종교개혁을 통해 오늘날의 개신교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사실상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출발하면서 천주교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셈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천주교의 한 분파(작은 집)가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도적 신앙의 연장선상으로 복귀시킨 빛나는 개혁의 결과로 등장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님의 몸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등장한 개신교가 '진정한 보편적 교회'로서 기독교신앙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면서, 중세 천년동안 부패의 주도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썩은 교회의 맥을 여전히 잇고 있는 오늘날의 천주교를 가리키는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라는 이름은, 로마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시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종교적 분파를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오늘날 천주교가 사용하는 '카톨릭'이라는 이름은, 우주적인(보편적인/ catholic)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분파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1. 성경관의 차이
개신교 신앙의 뿌리는 누가 뭐래도 성경 66권에 있습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도합 66권의 성경을 우리는 우리 신앙고백의 유일무이한 기준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66권의 성경이 바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딤후 3:16, 벧후 1:20-21)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66권의 성경이 아닌 72권(혹은 73권)의 성경을 성경으로 인정합니다(그나마도 성경 자체의 권위라기 보다는 로마 교황청의 권위로 인정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점은 교회관의 차이에서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개신교에서 정경으로 인정하는 66권 외에 약 6-7권의 외경을 더 추가해서 그것을 성경으로 사용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앞으로 설명드릴, 천주교를 천주교답게 만드는 몇 가지 결정적인 '교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들이 66권의 성경 안에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66권 중 신약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는 과정에서 작용했던 기준은 '사도성', '공식 예배에서의 낭독 여부', '고전성(최초의 문서인가?)', '기독론적 강조점', '영감성' 등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도성'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도'는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1세대 제자들' 12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단 한권의 책도 저술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 역시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문서화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로 초대교회가 탄생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교회의 교세가 급속도로 강해지고,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를 넘어 먼 땅끝의 이방인 지역에까지 전파되면서,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지 못한 이방신자들을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문서화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인쇄기술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사회의 현실 때문에 일단 만들어진 문서들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그 문서를 일일이 베끼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베끼는 과정에서 많은 변종(사본)들이 생기게 되었고, 그 와중에 마침내는 예수님의 복음과 전혀 다른 내용들이 거룩한 문서 속에 섞여 돌아다니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수많은 문서들을 선별하여 정경으로 삼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 문서의 내용이 일치하는지, 다시 말해서 사도성이 있는지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도성이 있으면 일단 정경에 포함시킬 후보로 삼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사도성이 정경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성령)께서 이런 정경선정의 원칙들이 적용되는 과정에 깊이 개입하셔서 섭리하시는 가운데 약 300여년의 기간을 통해 영감된 여러 문서들 가운데 신약 27권만을 신약 정경으로 완성시켜 주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신구약 66권만을 정경으로 만들어주신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유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약 39권 신약 27권 도합 66권으로 완성된 기독교의 정경인 성경은 오늘날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죄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으로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준'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경이 확정된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천주교에서 6-7권의 외경을 정경 안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 것은, 정통신앙고백으로부터 천주교가 이탈한 것을 나름대로 합리화시키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려 한 데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기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어렵고 꾀까다로운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이유는, 어려운 라틴어 성경을 사제단의 전유물로 삼아 천주교의 각종 일탈행위를 정당화하는 일(지금도 로마교황청 미사에서는 라틴어가 자주 등장하지요)을 더 이상 못하게 하려 한 데 그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라틴어성경을 들고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는 사제단의 전횡을 막기 위해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고 한 루터의 주장은, 역설적이게도 천주교가 그들 말대로 영광을 한껏 누리던 중세 천년 동안 일반인들(평신도들)에게 성경이 금서(禁書)였다는 어이없는 사실을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천주교에서는 종교개혁의 기수인 마르틴 루터를 지금도 사단의 앞잡이로 매도하며, 그네들 사이에서 가장 심한 욕설을 할 때마다, '저 루터같은 놈'이라는 표현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은 성경을 갖고 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똑같이 보고 있는 성경에 있어서도 자주 불거지는 번역상의 문제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개신교는 분명히 66권의 성경을 정경으로 고백하고 있는 반면, 천주교에서는 이 정경 외에 외경 6-7권을 덧붙여서 72권 내지 73권을 성경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천주교의 성경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얼마든 더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에 다룰 교황무오론이나 천주교의 교회론을 잘 살펴보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2. 교회관의 차이
이미 앞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천주교와 우리 개신교의 교회관의 차이는 성경관의 차이와 맞물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관의 차이야말로 천주교를 천주교답게 하고 개신교를 개신교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교회가 존재하는 근거를 철저하게 성경말씀에 둡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서 교회라는 조직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천주교는 그와 반대로 천주교회의 신성한(?) 권위가 성경을 거룩한 문서로 인정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교황청과 사제단(가르치는 교회)이 신성한 권위를 지니고(바로 이 점에서 '교황무오론'이 나오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 권위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계속해서 외경(혹은 위경)이 추가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고, 그래서 성경의 권수가 계속 늘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교황의 칙서나 사제단의 지침서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가끔씩 언론에 바티칸의 교황이 어떤 문제에 대해 공식입장을 표명한 것이 떠들썩하게 발표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황청의 입장을 밝힌 것이 아니라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내놓은 거룩한 선포의 성격을 띠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교황무오론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천주교의 교회관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우주적인 하나의 교회(catholic church)입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교회를 두 개의 계급, 곧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듣는 교회)로 나눕니다. '가르치는 교회'는 바티칸의 교황을 중심한 추기경단과 사제단을 말하고, '배우는 교회'는 소위 평신도들을 말합니다. 이 두 계층의 계급구조(의식)는 군대를 방불케 합니다. '배우는 교회(평신도)'는 철저하게 '가르치는 교회'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바로 이런 천주교의 왜곡된 교회관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사제주의'를 거부하고 '만인 제사장주의'(벧전 2:9)를 회복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바로 이런 교회관 때문에 성경은 주로 가르치는 교회의 전유물입니다. 배우는 교회는 굳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르치는 교회의 교시와 칙령을 받아 순종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암흑기였던 중세 천년동안 천주교의 가르치는 교회가 배우는 교회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최근 개신교의 성경공부 열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천주교에도 성경을 공부하는 흐름이 다소 생기기는 했으나, 지금도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배우는 열정과 신학적 깊이에 있어서는 천주교인들은 개신교인들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주변에 천주교인이 있거든 성경말씀에 대해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아도 교황(청)이 있는 한 거룩한 말씀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비록 그들이 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천주교에서는 교황(청)이 곧 하나님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천주교는 교황권이 세속정권을 지배했던 중세 천년(개신교에서는 암흑기로 봄)을 '영광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세계사(중세사)에서 소위 '카놋사의 굴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바로 천주교의 정치적 야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다(생명의말씀사에서 펴낸 《간추린 교회사(개정판)》을 꼭 한 번 읽어보시되, 특히 중세교회사 부분을 눈여겨 보십시오. 중세 천년동안 천주교가 어떤 모습을 띠고 있었는지를 잘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개신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교회공동체가 존재하지만, 천주교는 (가르치는)교회의 신적인 권위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결론을 내리자면, '천주교회라는 조직'이 곧 하나님인 것입니다.




3. 교황 무오론
천주교의 성경관과 교회관의 특질과 맞물려 있는 것이 바로 교황무오론입니다. 천주교의 우두머리인 교황은 인간적인 오류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주장이 바로 교황무오론이지요.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교황무오론이 전제되지 않으면 교황의 칙령과 교시가 신성성을 상실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천주교는 지금도 교황무오론을 폐기하지 못하고 있고 교황을 '성하'로 떠받들고 있으며 교황은 자기가 마치 하나님인 양 행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천주교인들의 평생의 소망은 교황성하께서 친히 집전하시는 바티칸 소재 성 베드로 성당의 미사에 단 한 번만이라도 참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의 하나인 베드로를 제 1 대 교황으로 보고, 베드로로부터 현 교황까지 교황의 족보를 정리해 두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베드로를 제 1 대 교황으로 보는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16장 17-19절입니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페트로스 Πετροs '분리된 돌'이란 뜻)라. 내가 이 반석(페트라 πετρα, '암반'이란 뜻) 위에 내 교회(에클레시아 εκκλησια)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7-19)
그러나 마태복음 16:18의 페트로스는 남성형 고유명사이고 페트라는 여성형 일방명사로서 '분리된 돌'을 가리킵니다. 천주교에서는 페트로스(베드로)를 교회의 기초요 우두머리(교황)로 보고 있으나,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다보면, 마태복음 16: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에 근거하여 초대 교황인 베드로야말로 사단(의 앞잡이)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라는 연약한 인간 위에 교회의 기초를 세웠다는 해석은 성경 전체의 큰 문맥에 잘 맞지 않습니다. 설령 에베소서 2: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같은 데서 사도적 기능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할지라도, 거기서도 성경은 베드로 한 사람만을 교회의 기초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반석이시며(고전 3:11), 그 반석이신 예수님에 대한 반석 같은 신앙고백 위에 그 분의 교회가 세워진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페트라(반석이신 예수님, 예수님에 대한 반석 같은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지 페트로스(인간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마태복음 16장의 이 고백 후에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하는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연약한 인간이 교회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의 결정적인 증거이지요). 다시 말하면, 교회는 베드로가 그랬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참된 신앙인들로 구성된 거룩한 모임인 것입니다.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 삼아 앞서 소개한 《간추린 교회사(개정판)》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교황의 계보가 얼마나 추악한 인간의 죄악으로 얼룩져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역사상 어떤 때는 동시에 두 명의 교황이 등장하여 서로 파문장을 날리며 교권을 다투고, 또 어떤 땐 세속정권(왕권)과 경합(예, 카놋사의 굴욕)하며 얼마나 추악한 범죄행위로 교회 역사를 얼룩지게 만들어 놓았는지……
마태복음 16:19의 '천국 열쇠'는, 천주교인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교황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적 맥락에서 열쇠는 대개 '청지기직'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캠벨 몰간 목사의 연구에 의하면 이 열쇠는 다름 아닌 '서기관 직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청중은 유대인들이었는데, 그 유대인들에게 '열쇠'는 곧 당시의 '서기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서기관들이 그들의 직임을 상징하는 열쇠를 품에 차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신다고 하신 것은, 이제 베드로가 사도로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서기관 직임'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록 잠시 배신의 길을 걸었으나, 주 예수님의 은혜로 회개하여 사도직에 복귀한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 성령의 권능을 받아 반역의 땅 예루살렘(성전 근처)에서 최초의 복음 설교를 열정적으로 행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새로운 서기관 직임'을 신실하게 감당하여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설립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를 최초의 교황으로 보고, 그 교황에게 천국 열쇠가 부여되었다는 전제에서 교회론을 전개하는 천주교 교리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마 16:19의 '매인 것' '풀린 것'은 헬라어 원어상 '중성'으로서 사람이 아니라 '사물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매다' '풀다'는 동사는 둘 다 완료수동태 분사형으로서 '이미 매인 것' '이미 풀린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예수님)에 의해 결정적으로 확정된 '것들'이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계시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교회는, 하나님처럼 무소불위의 권세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드러내는 거룩한 "도구"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이유에서 마태복음 16장 말씀은 천주교의 교회관을 지지해 주는 본문이 못됩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황이 아니며, 교회의 뿌리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인간으로서 허물과 죄가 많았듯이 교황 역시 베드로만큼이나 주님의 구속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일개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천주교의 교황무오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아가 우리 개신교는 이런 뒤틀린 교리(성경해석)에 기초한 천주교의 사제주의를 철저히 배격합니다. 만일 천주교가 이 교황무오론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마태복음 16:23이 말하듯이, 교황이야말로 사단(마귀)의 앞잡이인 것입니다.




4. 구원관의 차이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천주교의 교리는 우리 개신교와 본질적인 차이가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구원관'의 차이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분명히 "내가 곧 유일한 길이고, 유일한 진리이며, 유일한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베드로(누가)도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살기 등등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예수님 외의)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증거했습니다. 여하튼 성경 66권 전체가 구원론에 관한 한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천주교의 구원론 속에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한 구원의 길'을 교묘히 부인하는 교리들(마리아 숭배, 연옥설, 성인공덕설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마리아 숭배(마리아 종신 처녀설)
천주교인들은 예수님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잉태했던 마리아를 신격화하여 "성모(聖母)"로 부르며 숭배(추앙)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각 성당마다 세워져 있는 마리아상, 또 그 마리아상 앞에서 (촛불을 켜놓고) 합장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아마 많이들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인들이 예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보기 때문에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도 하고, 마리아를 통한 구원의 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천주교인은 "예수님을 통해 기도하기 어려운 것들은 하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통하면 더 잘 응답되는 것"이라는 우습지도 않은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천주교인은 목사인 저에게도 "개신교가 다 좋은데 딱 한가지 안 좋은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 한 분을 더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 고치면 천주교와 개신교는 얼마든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장광설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 분이 천주교의 교리를 오해했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배우지도 않은 것을 그토록 확신 있게 목사인 저에게까지 주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마리아를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천주교인들이 주장하듯 마리아를 정말 '하나님의 어머니'요 '구원의 중보자'라고 이야기합니까? 다음 성구들을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누가복음 1장 30절).……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누가복음 1장 38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한복음 19장 25-27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마가복음 6장 3절).
인용된 몇 가지 성경구절을 보면 마리아를 신격화하여 성모로 떠받드는 천주교의 교리가 얼마나 허황한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소위 '마리아 종신 처녀설'은 바로 이런 신격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로 처녀의 순결을 지키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제롬과 에피파니우스가 천주교의 교리에 영향을 받아 이런 주장을 했으나 이것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심지어 제롬은 요셉의 동정[童貞]설까지도 주장했습니다).
성경은 마리아를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여자', '참으로 연약한 여자'로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특히 마가복음 6장 3절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한 후 요셉과의 결혼생활을 통해 여러 자녀를 출산 양육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복음서) 어디에도 마리아를 소위 '주연급'으로 묘사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성경 어디에도 마리아를 '조연급'으로라도 묘사하고 있는 곳 또한 없습니다. 복음서의 유일한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에 기록된 마리아 자신의 고백과 같이, 마리아는 그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구세주를 잉태하는 특별한 은총을 입은 '주님의 계집 종'에 불과한 '사람'(일개 연약한 여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 숭배, 마리아 종신처녀설은 천주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교묘하게 고안된 적그리스도적인 발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으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기도(요한복음 14:13-14절)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4장 14-16절).




2) 연옥설
천주교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 외에 '연옥'이라는 제 3의 처소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곳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신앙인답게 살지 못한 자들의 영혼이 잠시 머무는 곳으로서 이곳에 머물면서 '수련'을 하거나 다른 이의 연보(재산기부 혹은 헌금) 혹은 (성인들의) 공덕에 의해 천국으로 올라갈 기회가 부여되는 곳이라 합니다. 그러나 성경 66권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인간이 육체의 죽음을 맛본 후에, 그에게 구원을 위한 '제 2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 육체의 죽음 이후에 인간에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만일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육체의 죽음 이후에 구원을 위한 제 2의 기회가 또 주어진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스꽝스런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브리서 3:13)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마가복음 8:38, 예수님 말씀)
사랑하는 이들 중에 불행히도 예수를 믿지 않고 세상을 떠났을 경우, 천주교의 이 연옥설이 유가족들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교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육체가 살아 숨쉬는 동안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들어가게 된다고 못박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 누군가가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 아직은 구원의 기회가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그가 숨지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면 그에게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주 예수님의 복음에 진지하게 반응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구원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함께 처형당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강도의 구원이 정말 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제 2의 기회가 또 있다고 한다면 죽음 직전에야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 역시 아무런 감동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연옥설은, 우리가 육체 안에 있는 동안에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판가름한다는 이 준엄한 사실을 현저히 희석시키려는 마귀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인공덕설 :
구원에 관한 한, 성경은 연좌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도 본인의 회개와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도 자기 불신앙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예레미야 31:29-30).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에스겔 18:2-4)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성인공덕설'이라는 해괴한 교리를 주장함으로써, 육체의 죽음 이후에 제 2의 구원의 기회가 또 있는 것처럼 가르침과 동시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위대한) 사람의 공덕(공로)을 넘겨받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런 교리 때문에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의 구원을 위해 죽은 자의 이름으로 전 재산을 기부(헌납)하기도 합니다. 그의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대개 이런 방식으로 헌금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천주교는 개신교에 비해 헌금을 거의(전혀) 강조하지 않는 것처럼 미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자본주의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헌금이 이루어지지 않고 어떻게 그토록 거대한 천주교회 조직이 별 탈 없이 움직일 수 있겠는가? 여하튼, 천주교에서는 죽기 전에 위대한 신앙의 업적(공덕)을 쌓은 사람들 중에서 '가르치는 교회'인 교황청의 특별심사를 거쳐 교황이 '성인'으로 추대하면 '성인(saints)'이 됩니다(수년 전, 교황이 한국에 와서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을 비롯한 103인을 성인으로 추대하는 의식을 행했던 사실을 기억하지는지요). 말하자면, 자타가 공인할 만한 신앙의 업적(예컨대 순교자가 된다든지)이 있어야 하고 또 교황(청)으로부터 '성인'으로 추대되어야만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 성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고 남은 '공덕'을 신앙의 공덕이 약간 모자라 천국에 입성하지 못한 누군가에게 넘겨 줌으로써 그 사람도 함께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공덕설의 요지입니다(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은 천주교의 이런 이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앞서 인용한 예레미야 31:29-30, 에스겔 18:2-4 등에서 보듯이 우리는 모두다 자신의 회개와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그 순간 '거듭나게 되며',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영(성령)이 그 몸에 내주하시는 '성도(聖徒, Holy people)의 신분을 갖게 됩니다. 신앙고백과 <동시에> 그 누구라도 (교황청의 인증이 없어도)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백성(성도)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하다면(분명한 신앙고백의 경험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도(천주교식으로 말하면 성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결과물로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출발점에서 이미 성도로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생명'이 주입되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4). 그러므로 성인이 되기 위해 교황(청)의 심사와 '성인추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우리의 공로에 따라 성인이 되고 안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에 따르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누구라도 신앙고백과 <동시에> '성도(saints)'가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도가 되는 것이 우리의 공덕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전적으로 죄인을 향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에, 소위 '공덕'을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일 또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천주교의 '성인공덕설'은, '가르치는 교회'인 교황청(사제단)의 권세를 강화하기 위한 교활한 술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소위 '고해성사' 역시 마찬가지 각도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중보자는 사제가 아닙니다. 사제의 중보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은 사제를 신부[神父, Holy Father]라고 부르지요). 교황 아니라 그 누구라도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 직접 나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4:13-14, 히브리서 3:1, 10:19-22).


* 기독교와 천주교의 주요 교리 요약 비교






1. 교회사(敎會史)
1) 기독교: 주후 33년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하여 시작 되었으며,
1527년 마틴 루터, 장 칼빈 등의 종교 개혁으로 초대교회의 모습을 되찾아 ‘예수교’로도 불린다.
2) 천주교: 주후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려 국교로 인정할 때
이교도들의 우상숭배까지 포용하여 가톨릭을 만들었고,
1054년 동, 서방 교회 분열 시 서방교회로 지금의 ‘로마 천주교’를 뜻한다.




2. 교회관(敎會觀)
1) 기독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라는 반석 위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벧전2:4-8).
2) 천주교: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마16;13-19).




3. 경전(經典)
1) 기독교 : 194년 얌니야 회의에서 결정된 신/구약 정경 66권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인정한다.
2) 천주교: 구약 46권(외경 7개 포함: 토비아서, 유딧서, 마카비 상, 마카비 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과 신약 27권으로, 신구약 정경66권과 외경 7권을 교리적인 근거로 삼고(1546년), 연옥설(1439년)은 외경의 마카비서에 근거한 것이다.
십 계명 중 제 2계명을 없애고 제 10계명을 둘로 나누었다. 여기에다가 그들은 모든 전승(교황이 옥탑에서 선포한 내용들)들까지도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1445년).




4. 정치제도(政治制度)
1) 기독교: 성직 구조는 목사 정도이다. 개신교는 만인제사장에 근거해, 성속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즉, 모든 기독교인이 성직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를 목회자라고 부르지, 성직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2) 천주교: 교황제라고 하여, 교황에 의해 교회가 지도된다. 이는 서방교회가 감독제를 채택하면서 발생한 정치제도이다. 성직제도는 부제-> 사제-> 주교-> 대주교->추기경-> 교황 (교황은 추기경들의 투표로 선출됨, 추기경은 12세기 등장)




5. 성경관(聖經觀)
1) 기독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3:16)이다.
2) 천주교: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임은 부인한다.?성경은 교회가 그 권위를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된다?고 한다.




6. 성경해석권(聖經解釋權)
1) 기독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직접 각개인에게 말씀하시며 성령께서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것을 믿고 있다(요16:13;골3:16;요5;39).
2) 천주교: 교회 만이 성경해석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일반성도들은 성경을 해석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때 천주교는 1229년 톨로사 회의에서 평신도가 금서목록으로서 성경을 갖는 것을 금했었다.




7. 교황무오류설(敎皇無誤謬說) :
1) 기독교: 성경 어디에도 교황이라는 말이 없으며, 교황이든 베드로이든 어느 누구도 모든 인간은 부패하고 거짓되다고 말씀하고 있다(렘7:9;시14:2,3).
2) 천주교: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결정적으로 선포할 때, 교황은 직무상 무오류성을 향유한다고 신격화했다(1870년).




8. 마리아 관(Mary 觀)
1) 기독교: 예수를 낳아 양육한 모친으로 죄가 없다든가, 하늘로 승천했다든가, 천국에서 성도를 돌본다는 설명은 성경에 없다.
2) 천주교: 하나님의 어머니(431년 제정->1931년 재확인), 마리아 무원죄설(1854년), 중보자(1917년), 마리아 승천설(1950년), 종신 처녀설(1962년) 등을 주장한다.




9. 연옥설(煉獄說)
1) 기독교: 성경에 연옥이란 말도 나오지 않으며, 그들이 제시한 성경 구절도 논쟁할만한 가치도 없다.
2) 천주교: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연옥이라는 데가 있는데 죄에 대한 적당한 보속을 완료하지 않은 영혼들은 연옥에서 나머지를 보속해야 한다는 연옥설(1439년)을 주장한다.
연옥설의 근거로는 유전(구전)에서 찾고 그밖에 외경 마카비하12:43-45;마12:32,5:25-26;고전3:13-14 등을 제시한다.




10. 구원관(救援觀)
1) 기독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으로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엡2:8).
2) 천주교: 구원의 방법이 복수이며, 선행으로 완성되어야한다고 한다.






11. 의식관(儀式觀)
1) 기독교: 세례, 성만찬.
2) 천주교: 성세(영세), 견진, 성체, 고해, 종부, 신품, 혼배 등의 7가지 성례 비준함(1439년).




12. 성만찬(聖晩餐)
1) 기독교: 임재설(성공회와 루터교, 그리스도가 성만찬 시 떡과 포도주를 통해 임재함), 상징설(장로교와 츠빙글리파,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할 뿐이다.)
2) 천주교: 화체설(성만찬 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교리, 1215년 제정).




13. 우상(偶像)
1) 기독교: 우상 철저 배격함
2) 천주교: 우상숭배함 - 성상(성인의 형상), 유골.유품, 천사, 십자가, 성화 등




14. 진화론(進化論)
1) 기독교: 창조론만 인정함.
2) 천주교: 진화론을 인정함(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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