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 1469-1536) (네덜란드)

by 【고동엽】 2021. 11. 13.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한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공동생활형제단에서 내면적인 경건과 문학애(文學愛)를 배운 후 1492년 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수사 기질이 없다고 생각하여 수도원을 떠났다. 1495년 파리의 몬테이규(Montaigu) 대학에 입학한 후 처음 유명론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법학 교수인 로베르 가게(Robert Gaguin, 1433-1501)는 키케로주의자로서 스콜라 신학을 혐오하였다. 로베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에라스무스는 후에 ‘세계어는 라틴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다수의 북구 인문주의자들이 민족주의와 민족어에 관심을 가진 것에 반하여, 에라스무스는 라틴어를 세계화 시키므로 국경 없는 통합 유럽을 꿈꾸었다.


1499-1500년에 에라스무스는 영국을 방문하여 콜렛(John Colet, 1466?-1519)과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와 친교를 나누게 되었다. 콜렛은 에라스무스에게 성경과 초대 교부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해 보도록 격려하였다. 두 번째 영국 방문(1505-06) 후 그는 이탈리아에서 3년간 체류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는 부패한 카톨릭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1511년에 쓴 그의 <우신예찬>(Praise of Folly)은 로마교회의 부패를 풍자하여 유럽을 웃음바다로 몰아넣었다. 그는 이 책에서 교황과 성직자들의 깨끗지 못한 마음과 생활, 수도원 제도, 중세 스콜라 철학의 모호성 등 당대의 악폐를 풍자적으로 비웃었으며, 교회의 평화로운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의 저서 <엔키리디온>(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 그리스도 병사를 위한 소책자)에서, 교회 개혁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훌륭한 학문 즉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연구하고, 초대교회 교부들의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1503년(초판), 1509년(재판), 1515년(3판), 그리고 그 이후 23판에 도달할 정도로 북유럽에서 인기를 누렸다. 에라스무스는 이 책에서 성경과 교부들의 저술로 돌아갈 것과 함께 평신도의 활성화를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성직자는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를 자신들의 위치까지 끌어올리는 교육자들이라고 말한다.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은 그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또한 교회의 외면적 측면, 즉 제도화된 교회 기구, 의식, 사제화에서 출애굽하여 각 성도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 내면의 문제요, 양심의 문제인 죄의 고백을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성과 속의 이중구조 속에서 수도사는 더 경건하고 평신도는 덜 경건하다는 논리를 거부하였다. 누구나 성경을 읽고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자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삶을 영위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신약성경의 편집일 것이다. 네 개의 헬라어 사본들을 이용하여 헬라어 신약성경과 함께 라틴어 번역판을 1516년 바젤에서 출판하였다. 이 성경은 완벽한 것은 아니었으나 많은 신학자들이 처음으로 신약의 원문을 접하고 라틴어 불가타 번역본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신약성경은 한 시대의 영적 · 문학적 금자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록 에라스무스는 자신은 종교개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교부신학에 관한 저술과 신약성경의 번역은 종교개혁의 정신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쯔빙글리 부처는 에라스무스로부터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 개혁자와는, 특히 루터와의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자로서 문화의 재정립(cultural reorientation)을 통해 인간 가치를 높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죄의 고통과 구원에 대한 방면에서는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체험한 회개의 절박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터가 카톨릭과 면죄부 논쟁을 일으키자 에라스무스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루터의 행위를 방자하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1524년에는 <자유 의지를 혹평함에 대하여>를 써서 로마교회의 권위에 도전한 루터를 공격하였다. 이에 루터는 <노예의지론>을 써서 인간의 죄악성을 폭로하며, 결국 기독교인의 자유란 그의 의지의 전적 무능력을 깨닫는 데 있다고 에라스무스에게 응전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강조하는 이신득의의 교리보다, 자유 의지로 인간답게 사는 도덕적 이상을 기독교의 본질로 가르쳤는데,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과 일맥을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