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설교에 나타나는 전도의 기본은 왕성한 성경적 유신론이었다.
철두철미한 신론이었다. 현대 전도의 경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다.
그러나 청교도 전도자들의 경우 성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은
창세기 1:1(”태초에 하나님이--“)이었다.
창조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계획하신 목적들을 이루어 가시는 일들이 펼쳐지는 결과였다.
의롭다 하시고 화목을 이루시며 죄인들을 자신에게 이끄시는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는 절대로 속죄, 화목, 죄 용서, 칭의 등의 개념들이
성경적 의미를 지닐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조셉 얼라인은 하나님의 본성 하나 하나가 전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죄인을
대적한다는 사실을 아주 생생하게 전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진리를 심으사
죄인으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공의, 그의 신실하심,
그의 순결하심이 모두 그 죄인을 대적한다고 한다.
토마스 라이,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청교도 설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주제가 너무나도 뚜렷한 특징으로 드러난다.
존 플라벨,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떠한 의무를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쇼요리문답 3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의 책임을 함께 묶어 놓는 것이 바로 청교도들의 메시지였다.
청교도 목사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다고 가르쳤다. 청교도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는 만큼
죄에 대하여 반응한다고 보았다. 매튜 헨리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그의 거룩하심보다
죄인들에게 더 끔찍스러운 것은 없다”고 진술하였다.
토마스 브룩스는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는 첫째 방책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위엄과 영광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의 앞에 서 있고, 예배로 여러분의 영혼이 그와 교제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초라하고 낮고 가볍고 경박할 때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해도 마귀가 온통 흔들어 놓는다.
하나님을 전지하신 하나님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으로,
모든 영광스러운 완전이 충만하신 하나님으로, 위엄과 순결과 영광 가운데 계시사
악을 조금이라도 그냥 보아넘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마음에 일어나는 헛된 생각들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그렇게 능력적으로 선포한 청교도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인간의 책임의 기초로 제시하였다. 브룩스는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는 다섯 째 방책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더욱 가득 차도록, 모든 영적 실체들과 하늘의 것들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힘쓰는 것이다. 잔이 포도주로 채워질수록 그 잔에 물을 담을 여유가
그만큼 적어지는 법이다. 여러분, 하나님으로 더욱 가득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손을 정말로 권능의 손으로 바라보기 전에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 잠잠히 있게 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벧전5:6).
하나님의 손을 약한 손으로, 가냘픈 손으로, 낮은 손으로, 천한 손으로 바라보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손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적 유신론에 대한 거듭되는 강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그들의 설교의
대명사가 되었다. 토마스 브룩스,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그의 손안에 있는 황금 홀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나, 그의 역사하심으로나, 그의 긍휼하심으로나, 그의 심판으로나
그것을 사용하셔서 모든 사람을 자기 앞으로 이끄셔서 고개 숙여 절하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에 따라서 구원 과정에 대한 시각도 결정되었다.
청교도들은 그 어떠한 죄인도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구원받은 적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죄인에게 주셨기 때문에 죄인이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설교하였다.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위엄 있는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토마스 후커, “죄인이 회심하도록 역사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죄인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효력 있는 부르심” 혹은 “유효적 소명”이라고
지칭하였다.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드실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자신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렇게 효력 있게 만드셨다고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효력 있는 부르심에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나타난다는
성경적인 사상을 열열히 증거하였다.
토마스 굿윈,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부르심이 아주 갑작스런 선택의 회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택하심이 사람을 완전히 휘어잡고, 강력한 힘으로
그 사람을 끌어내며, 그 사람에게 신적인 본성을 각인시키고, 부패한 본성과
이기적인 사랑을 뿌리째 뽑아 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를 심어 놓으며,
첫날부터 그 사람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출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가 그러하며, 바울 이후의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런 예들이 없지 않다.
오직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신적인 능력으로만
그런 갑작스런 놀라운 변화가 사람의 영혼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주권을 “모든 피조물들을 자기 자신의 기쁘심에 따라
처리하실 수 있는 그 분의 절대적인 권한”으로 정의하였다. 에드워즈는 그의 교회를
휩쓸었던 부흥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다. “생각해 보건대, 죄인을 구원하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교리를 강조하고, 기도 응답의 문제와 자연인의
고통들이 계속되는 문제 등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하신 자유를 강조하는 설교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되었던 설교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청교도들의 전도의 메시지의 기본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있었다.
그들의 복음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였고, 사람의 마음을 찔렀다.
그러나 현대의 전도는 이러한 강조점과 비교할 때에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최근 십 수년 동안 <사영리>라는 전도 책자가 널리 사용되어 오고 있다.
국제 대학생 선교회가 제작하여 배포하는 이 책자가 전도에 관한 현대적 사고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1영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 여기의 초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무언가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역사가 아니라 사람이 받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로 나타난다. 현대의 복음의 경우 그 핵심적 주제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국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폭발”도 하나님의 위엄과 그의 성품, 그리고 그의 본성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요구보다는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문제가 중심이
되어 있다. 죄가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다루셔야
했다는 식의 그의 진술에 대해서 청교도 목회자는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차녹,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전 계획은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은 상태로 우리를 회복시키는 데 있으며,
그리하여 그가 자기의 본성의 이러한 탁월하심에 대해 얼마나 애착을 갖고 계시며
또한 악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를 보여 주시고자 함이다.”
구속의 계획은 청교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깊으신 뜻의 경륜 가운데서
행하기로 정하신 바의 결과였지, 결코 죄악된 인간에게 혜택을 주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하시도록 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으로 보았다.
차녹, “피조 세계가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지으신 바 되었듯이,
그의 경영하시는 모든 역사들도 그와 똑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강력한 성경적 신론을 전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피조물이 서로 함께 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그 불의를 벗어버리든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순결하심을 벗어버리시든가
둘 중의 하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음의 원 주제였던 것이다.
- 브루스 비클, 『복음과 청교도설교』, pp 127-141에서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철두철미한 신론이었다. 현대 전도의 경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다.
그러나 청교도 전도자들의 경우 성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은
창세기 1:1(”태초에 하나님이--“)이었다.
창조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계획하신 목적들을 이루어 가시는 일들이 펼쳐지는 결과였다.
의롭다 하시고 화목을 이루시며 죄인들을 자신에게 이끄시는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는 절대로 속죄, 화목, 죄 용서, 칭의 등의 개념들이
성경적 의미를 지닐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조셉 얼라인은 하나님의 본성 하나 하나가 전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죄인을
대적한다는 사실을 아주 생생하게 전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진리를 심으사
죄인으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공의, 그의 신실하심,
그의 순결하심이 모두 그 죄인을 대적한다고 한다.
토마스 라이,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청교도 설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주제가 너무나도 뚜렷한 특징으로 드러난다.
존 플라벨,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떠한 의무를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쇼요리문답 3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의 책임을 함께 묶어 놓는 것이 바로 청교도들의 메시지였다.
청교도 목사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다고 가르쳤다. 청교도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는 만큼
죄에 대하여 반응한다고 보았다. 매튜 헨리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그의 거룩하심보다
죄인들에게 더 끔찍스러운 것은 없다”고 진술하였다.
토마스 브룩스는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는 첫째 방책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위엄과 영광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의 앞에 서 있고, 예배로 여러분의 영혼이 그와 교제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초라하고 낮고 가볍고 경박할 때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해도 마귀가 온통 흔들어 놓는다.
하나님을 전지하신 하나님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으로,
모든 영광스러운 완전이 충만하신 하나님으로, 위엄과 순결과 영광 가운데 계시사
악을 조금이라도 그냥 보아넘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마음에 일어나는 헛된 생각들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그렇게 능력적으로 선포한 청교도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인간의 책임의 기초로 제시하였다. 브룩스는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는 다섯 째 방책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더욱 가득 차도록, 모든 영적 실체들과 하늘의 것들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힘쓰는 것이다. 잔이 포도주로 채워질수록 그 잔에 물을 담을 여유가
그만큼 적어지는 법이다. 여러분, 하나님으로 더욱 가득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손을 정말로 권능의 손으로 바라보기 전에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 잠잠히 있게 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벧전5:6).
하나님의 손을 약한 손으로, 가냘픈 손으로, 낮은 손으로, 천한 손으로 바라보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손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적 유신론에 대한 거듭되는 강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그들의 설교의
대명사가 되었다. 토마스 브룩스,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그의 손안에 있는 황금 홀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나, 그의 역사하심으로나, 그의 긍휼하심으로나, 그의 심판으로나
그것을 사용하셔서 모든 사람을 자기 앞으로 이끄셔서 고개 숙여 절하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에 따라서 구원 과정에 대한 시각도 결정되었다.
청교도들은 그 어떠한 죄인도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구원받은 적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죄인에게 주셨기 때문에 죄인이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설교하였다.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위엄 있는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토마스 후커, “죄인이 회심하도록 역사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죄인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효력 있는 부르심” 혹은 “유효적 소명”이라고
지칭하였다.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드실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자신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렇게 효력 있게 만드셨다고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효력 있는 부르심에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나타난다는
성경적인 사상을 열열히 증거하였다.
토마스 굿윈,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부르심이 아주 갑작스런 선택의 회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택하심이 사람을 완전히 휘어잡고, 강력한 힘으로
그 사람을 끌어내며, 그 사람에게 신적인 본성을 각인시키고, 부패한 본성과
이기적인 사랑을 뿌리째 뽑아 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를 심어 놓으며,
첫날부터 그 사람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출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가 그러하며, 바울 이후의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런 예들이 없지 않다.
오직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신적인 능력으로만
그런 갑작스런 놀라운 변화가 사람의 영혼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주권을 “모든 피조물들을 자기 자신의 기쁘심에 따라
처리하실 수 있는 그 분의 절대적인 권한”으로 정의하였다. 에드워즈는 그의 교회를
휩쓸었던 부흥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다. “생각해 보건대, 죄인을 구원하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교리를 강조하고, 기도 응답의 문제와 자연인의
고통들이 계속되는 문제 등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하신 자유를 강조하는 설교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되었던 설교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청교도들의 전도의 메시지의 기본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있었다.
그들의 복음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였고, 사람의 마음을 찔렀다.
그러나 현대의 전도는 이러한 강조점과 비교할 때에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최근 십 수년 동안 <사영리>라는 전도 책자가 널리 사용되어 오고 있다.
국제 대학생 선교회가 제작하여 배포하는 이 책자가 전도에 관한 현대적 사고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1영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 여기의 초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무언가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역사가 아니라 사람이 받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로 나타난다. 현대의 복음의 경우 그 핵심적 주제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국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폭발”도 하나님의 위엄과 그의 성품, 그리고 그의 본성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요구보다는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문제가 중심이
되어 있다. 죄가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다루셔야
했다는 식의 그의 진술에 대해서 청교도 목회자는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차녹,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전 계획은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은 상태로 우리를 회복시키는 데 있으며,
그리하여 그가 자기의 본성의 이러한 탁월하심에 대해 얼마나 애착을 갖고 계시며
또한 악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를 보여 주시고자 함이다.”
구속의 계획은 청교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깊으신 뜻의 경륜 가운데서
행하기로 정하신 바의 결과였지, 결코 죄악된 인간에게 혜택을 주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하시도록 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으로 보았다.
차녹, “피조 세계가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지으신 바 되었듯이,
그의 경영하시는 모든 역사들도 그와 똑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강력한 성경적 신론을 전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피조물이 서로 함께 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그 불의를 벗어버리든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순결하심을 벗어버리시든가
둘 중의 하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음의 원 주제였던 것이다.
- 브루스 비클, 『복음과 청교도설교』, pp 127-141에서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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