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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우리의 의라(조지 휫필드)

by 【고동엽】 2021. 11. 12.

주는 우리의 의라(조지 휫필드)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인간의 일반적인 본성이나 그 개별적인 마음의 성향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가 마음에 뿌리를 박은 마지막 우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모두 행위 언약 아래 태어났기 때문에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이런 행위 언약에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비록 온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악마적인 자만심에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교를 비난하고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지만, 우리 모두가 또한 가톨릭교도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모두 타고난 알미니안파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신조를 따른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공로의 교의를 거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선한 은혜라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에 곧바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아주 훌륭하게 관찰하는 것같이 우리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이리저리 ‘다니며’ 옛 바리새인들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서 난 의에 온전히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쓰라린 슬픔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일찍이 알려졌던 것 중 가장 흔한 죄악입니다. 어느 시대나, 특히 우리가 사는 이 형편없는 시대에 있어서 충분히 매도되지 않는 죄악입니다. 일반인들에 있어서나, 제사장들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하신 것 같이, 한때 진리를 드높게 설교한 강단에서까지.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경건한 조상들과는 달리 너무 타락하여, 은혜의 교리, 특히 모든 것을 넘치게 하신 예수의 인격적인 의의 교리를 너무 드물게 그리고 너무 가볍게 너무 있는 상황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열렬한 믿음의 조상들이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다시 일어나 저들의 치명적인 잘못을 우뢰와 같은 음성으로 일깨워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천사들도 알아보려고 하는 큰 신비의 하나며,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이 가르치신 최초의 교훈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첫 조상들에게 입히신 옷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믿는자들의 마음을 공로에 돌리는 전형적인 사례들,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돌리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에게 입혀주신 옷은 짐승의 가죽옷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짐승은 사람의 식물이 아니었으므로 그 짐승들은 희생제물이 되었으며 그 뒤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큰 희생을 기념하는 예표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추측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잡은 짐승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힌 옷은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하나님의 어린양의 의로 가려야한다는 교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여기시고”(창 15:6)라고 하신 말씀이 뜻하는 바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가 특히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주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에 대한 바른 견해를 다섯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Ⅰ. 주 여호와라는 말은 누구를 가르키는가?
Ⅱ. 주가 어떻게 사람의 의가 되는가?
Ⅲ. 이 교리에 반대하는 몇 가지 중요한 반론
Ⅳ. 이 교리를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이어지는 아주 심각한 결과의 몇 가지 예증
Ⅴ.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와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주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권고



Ⅰ. 나는 주(여호와)라고 말할 때 나오는 ‘주’는 누구를 가르키는 말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아리우스파나 소시니우스파 말장이들이 만들어내는 말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고귀한 피로 불쌍한 죄인들을 사신 주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부끄러움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주라는 이름으로 언급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주(여호와)가 말하노라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주(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의로운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는데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본문에서 주라고 일컫는 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만일 성경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는 다른 본문이 없다해도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주라는 낱말이 본래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이심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여러 성경의 난외에서 보듯이 주라는 낱말은 본래 원어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본질적인 칭호인 여호와(한글 개역성경에는 주를 대부분 여호와로 밝혀서 읽고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파들은 와서 하나님의 아들께 입 맞추고 그 앞에 엎드려,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듯이 그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를 참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천사들, 저 계명성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도 동정녀 마리아를 경배하는 자들과 다름이 없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리고 소시니우스파 곧 그리스도는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이여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원리에 의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만일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는 육신의 팔일뿐이기 때문입니다(대하 32:8). 그리고 ‘육신의 팔을 믿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는 그런 괴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나는 이런 점들을 고려하고 나면 그들도 그같이 괴물같은 터무니없는 학설을 부끄러워서 감히 더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라는 말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하며, 그가 여기서 몸소 여호와라는 칭호를 취하시며 그러므로 그가 참 하나님 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는 바울이 깊은 믿음을 통해 표현하고 있듯이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 9:5)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Ⅱ. 어떻게 주께서 인간의 의가 되시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전가(imputation, 하나님이 의로 여기심, 창 15:6)에 의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신 뒤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부터 계신 지극히 높으신 분의 겸손하심은 너무나 크고 깊어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복종을 요구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과 죄 짓지 않고 복종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불멸의 생명을 주시겠다는 조건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자기 자신을 즐거이 그 언약 당사로서의 책임을 지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그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순종하고 그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다면 정녕 살리라는 사실을 추측해도 좋을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비통한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전해줍니다. 곧 우리의 첫 조상이 어떻게 이 언약을 깨뜨렸으며, 그 때문에 장래에 하나님의 영접을 받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것보다 더 훌륭한 의를 필요하게 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들은 무슨 일을 해야만 합니까? 그들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히 행위 언약아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순종한 뒤로, 비록 힘을 잃었으나 그 일을 해야 함은 물론 모든 일을 계속하여 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며 또한 주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대로 가장 완전하게 행해야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이 이미 저지른 범죄행위로 말미암아 무한히 침해된 하나님의 공의를 보상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자(Divine Philanthropy)가 눈부시게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십시오. 사람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나타나기 위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본성까지 입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람의 본성을 통해 그는 복종하셨으며, 그로써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도덕률을 다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으며, 그로써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위하여, 또는 대신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만족하였고, 동시에 사람으로서 복종하셨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자, 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야 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온전하고 넘치는 의를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로움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단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인 동시에 수동적인 순종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말할 때, 후자 곧 그의 죽으심만을 언급할 뿐입니다. 그러나 전자 곧 그의 삶과 적극적인 순종이 똑같이 필요합니다. 이 두 요소를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합당한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사셨습니다. 고난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또는 대신하여) 순종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연합하여, 우리의 첫 조상의 불순종이 전가되어 불순종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전가될 완전한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서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첫째와 둘째 아담을 비교한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이해시키고자했던 주 우리의 의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33장 16절에서 “그 성은(곧, 교회 자체) 주(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이 의가 그 성에 전가되어)”라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과 모든 자녀가 가장 깊이 묵상해야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락한 자들의 교만한 마음에 뿌리를 내린 많은 반론들이 이렇게 온전하고, 이렇게 거룩하며, 이렇게 영혼 구원의 양식이 되는 교리를 잇달아 비난하고 있습니다.



Ⅲ. 이 교리에 반대하는 몇 가지 중요한 반론
첫째, 그들은 그들 자신이 도덕적 동반자임을 내세우기 위하여, ‘의가 전가된다는 교리는 선행을 파기하고 방종으로 이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제발 일반적으로 이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믿음이 넉넉한 사람들입니까? 진정으로 선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소수의 예외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대개 썩어빠진 정신에다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명칭은 불경스러운 도덕론자profane moralists가 아니면 이른바 거짓 도덕론자들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곳에 나온 여러분과 아울러 지난 세대에 체험한 믿음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인격의 의에 대한 교리가 가장 많이 비난을 당하고 가장 드물게 언급된 곳에, 악행이 적지 않게 휩쓸었고 지금 휩쓸고 있지 않습니까! 적그리스도인 아르미안의 가르침은 항상 적그리스도들의 행실을 이끌어 왔고 또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롭다하시는 가르침 곧 전가된 의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서는 교회의 개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루터가 명령하듯이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입니다(articutis stantis aut condentis ecclesioe).
그리고 이 교리를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반대하는 쪽으로부터 대개 도덕률폐기론자들, 사기꾼들이라는 악명으로 낙인을 찍히고 있으나 이 교리의 진리가 이 교리를 가르치는 목회자와 그것을 고백하는 신도들의 삶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면, 양쪽의 부정적인 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 족이 모든 면에서 유리하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이 교리도 다른 모든 은혜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일부 비그리스도교도들의 행실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 믿음에 의한 칭의 등에 대하여 말은 했으나, 결코 자신의 영혼 속에 그 의가 전가되었음을 느끼지 못한 사람의 행실이 그리스도의 적으로 하여금 그같이 모독할 수 있는 구실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불공정한 동시에 부당한 논증 방법입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전가된 의에 대한 이 교리 그 자체가 ‘선행을 방해하거나 방종에 이끈 적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아니다’라고 담대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어떤 원인으로부터 일(또는 행위)을 제외시킵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이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로서, 그리고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의 의롭다 인정받은 증거가 뚜렷함을 나타내기 위해 선행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전가된 의에 대한 교리가 어떻게 방종으로 이끌어가는 교리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모두가 중상모략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이단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단들만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기 자신의 영혼으로 체험해 보지 못한 자들이 계속해서 의의 교리를 반박하고 나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반박이 있음에도 본문의 선지자와 함께 우리는 당당하게 ‘주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그의 종들이 그를 모방하는 것을 염려할 것은 없다) 종종 자신을 빛의 천사를 꾸밉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도된 것들을, 이단과 아르미니우스파들이 사람들을 꼬드겨 말하게 할 것이다) 그들의 반론을 가장 돋보이게 하려고, 어떤 자들은 “우리 구세주가 그런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이 산상수훈을 보면, 그는 도덕만을 언급하십니다. 따라서 전가된 의의 교리를 아무 근거도 없습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반론을 내세우는 자들은 주의 복된 설교를 읽지도 않았거나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그 설교를 보면 전가된 의의 교리, 곧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 인정하신다는 가르침이 아주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믿음의 경우를 아는 자는 그가 보는 눈이 있다면 그 말씀을 읽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께서 도덕과 선행을 권고하시고 (모든 신실한 목사님들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유식한 바리새인들이 첨가한 많은 거짓된 겉치례들을 제거하여 도덕률을 명백히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시기 전, 주목되는 사실은, 그가 심령의 가난, 온유함, 거룩함, 슬픔, 마음의 깨함, 특히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같은 내적인 경건을 말씀하시고 나서, 그의 의를 전가받은 증거로서 선행을 권고하시며, 이 은혜와 신성하신 그의 기질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게 하시는 점입니다.

“너희 빛을 (즉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빛)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삶의 규칙으로서의 율법의 법을 빼앗으려고),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그것을 끝까지 지켜서 그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하려고)”(마 5:17),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도덕과 율법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전가된 의를 무효로 하는 대신 오히려 확인하심은 물론이요 착한 행실이 의가 우리의 영혼에 전가된 증거요 확증임을 밝히심으로서 앞에서 말한 반론을 반박하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선지자가 본문에서 ‘주 우리의 의라’하는 말을 들으십시오.

그러나 사단이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공격했을 때 성경을 인용함은 물론 성경 말씀으로 연속해서 시험했던 것처럼 사단의 자녀들도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대개 같은 방법을 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가된 의의 교리에 대하여 또 다른 반론을 펴면서 복음서의 청년을 보기로 내세웁니다. 그들의 반론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복음서 기자 마가는 10장에서 어떤 젊은이가 그리스도께 달려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든 그에게 율법의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영생을 얻기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일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행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원인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가된 의의 교리는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최대한의 반론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논리의 전개에는 아무런 타당성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전가된 의의 필연성을 증명하려고 했다면 지금 이 젊은 청년의 경우보다 더 좋은 예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젊은이와 우리 주께서 그를 대하시는 방법을 좀더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절을 보면 이 복음서 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그는 귀족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께 달려온다는 것은 정말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꿇어 앉아(이런 신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은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청년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변하시기 위하여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그 청년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입니다.

말하자면 영생이란 그의 행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께서는 그 청년에게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반론을 펴는 자들처럼 그 청년의 도덕적 행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을만하다는 생각을 조금도 심어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 계명을 통해 그 청년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끄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청년이 자기 자신이 계명의 조목마다 어겼음을 깨닫고, 그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결과적으로 자기의 영생의 기반이 될 더욱 훌륭한 의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주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의 의도였습니다. 그 청년은 독선적이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 인정하려고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을 알았더라면 그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어겼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간음을 한 적은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마음으로 한 여자에게 음욕을 품어본 적이 없었을까요? 그가 실제로 남을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아무 이유없이 화를 내거나 남을 헐뜯은 적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계명의 지극히 작은 것을 어겼더라도, 그것으로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율법이 하였음이라)”(갈 3:10)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관찰한 것 같이, 우리 주께서는 비난하기는커녕 그 청년에게 전가된 의의 필요성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를 그같은 방법으로 다루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셨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적인 사랑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며 동시에 이 청년은 예수님의 보혈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염려하여 우시면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말씀을 알았더라면”(눅 19:42) 등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본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 청년을 사랑하신 사랑과 마리아와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르다를 사랑하신 사랑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참조, 요 11: 5, 13, 23).

이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가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공중예배 시간에 점잖게 행동하며 여러 면에서 겉으로 아무런 흠이 없는 생활을 하는 신자를 보면 그만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목회자가 그런 신자에게 느끼는 사랑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거듭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느끼는 영혼의 일체감과 동정심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족하지만 우리 주의 경우에 적용시켜 보십시오. 젊은이의 경우에 대하여 대개 무슨 말들을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편견을 극복하지 않고 이 반론을 편든다면, 여러분은 그 청년처럼 슬퍼하며 떠나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청년에게 답변하신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문에서 “주는 우리 의라”고 한 주장의 진실성을 더더욱 확신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더욱 큰 반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반론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곳을 보면 우리 주께서는 백성들에게 영생을 상급으로 주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린 자들을 먹였고 헐벗은 자들을 입혀주는 등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실이 그들이 의롭다 인정받게 된 원인이었으며, 따라서 전가된 의의 교의는 성경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을 바탕으로 주장된 의인의 교리를 반박하는 가장 그럴듯한 반론이라는 사실을 나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가장 명백하면서도 간략하게 이 반론에 대하여 답변하기 위해서는 영국교회 신조의 조항을 빗대어 고백하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곧 선한 행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가 의롭다 인정하심을 입은 다음 그 열매로서 선한 행실이 뒤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행실은 그 자체가 상급을 요구할 수는 없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갱생된 심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행실이 많을수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오실 때 우리의 상급이 더욱 클 것입니다.

이 조항을 잘 살펴보면 반론에 대한 답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태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임금이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상을 주리라. 너희가 이 모든 일을 나를 사랑함으로 하였고 이로써 너희가 나의 참 제자된 것을 증거하였느니라)”(마 25:34).

그러므로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이런 행실에 의하여 의롭다 인정을 받고 있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마 25:37-38)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의를 의존하면서, 하나님께 용인받고 죄 용서함받는 것에 관한 말과 질문은 전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하여 다시 대답할 것입니다. ‘그 장 후반부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런 선한 행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하고 내어 쫓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하신다면 선행하는 것 때문에 구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전가된 의의 교리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사소한 도덕율일지라도 저버린 사람은 누구든지 당연히 정죄하실 수 있으나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반드시 상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계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들이며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며 가장 거룩한 산 영혼의 언어가 되어야할 책임을 거의 이행하지 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방금 언급한 경건한 영혼의 틀입니다.

이 사실을 헤아려 볼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에는 너무나 무력한 존재여서 인간의 어설픈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행실을 하나님이 크게 상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낮 뜨거운 짓일 것입니다. 이 말을 ‘주는 우리의 의라’고 한 예레미야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내세우는 자들에게 의분을 느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전가된 의의 교리에 대하여 널리 제기된 당당한 반론들을 잘 반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답변을 중단해야 한다면 나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감탄했던 논증의 방법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이 방법이 언제나 논점 중 어떤 전제를 부인함으로서 생길 수 있는 불합리한 사항들을 보여주는 아주 납득할만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Ⅲ. 이것은 제기된 다음 문제입니다. 그리고 전가된 의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혼란과 불합리보다 더 크고 더 심각한 불합리는 다른 교리를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결코 생기지 않았습니다.

첫째, 만일 우리가 이 교리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거짓말로 만들어 버릴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모두 뒤엎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엡 2:9). 구원은 하나님의 은사요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적 의가 하나님이 나를 영접하시는 오직 하나님의 원인이 아니라면, 만일 내가 행했거나 앞으로 행할 행실이 조금이라도 구원에 보탬이 된다면,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원인이라면, 나는 무엇인가 스스로 자랑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속하시는 위대한 일에 있어서는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전가된 의의 교리를 반대하는 편이라면 그렇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교리가 진실이 아니라면 성경 본문이 얼마나 거짓말이 될지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전가된 의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의 계시를 동시에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하나님의 책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주는 우리의 의라’고 한 말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나는 이 설교 서두에서 우리는 본래 무도 알미니안파요 가톨릭교도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알미니안 주의는 가톨릭교로 퇴행하는 방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만일 우리가 전가된 의의 교리를 부인한다면, 우리가 어떤 믿음을 고백하든지 간에 실제로 우리는 마음으로 가톨릭교도가 되는 것이며 다른 개신교의 명의로 인정을 못 받게 될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만일 여러분은 성자들에게 기도하고 그들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러 왔다면, 여러분은 내가 가톨릭 선교사로 불려야 마땅하며 회당에서 쫓겨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이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로, 성자들의 중재없이 충분했으며, 예수님의 중재가 부족하여 성자들의 중재를 보탠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짓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더 부연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는 부족하여 우리는 죽음도 보태야 하며,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죽어서 여러분의 죽음을 그의 죽음에 보태야 비로소 충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먼지를 털고 일어나면서 나를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 자’라고 불러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중재가 부족한양 성자들의 중재를 보태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우리의 죽음을 보태는 것이 불합리한 짓일 뿐만 아니라 불경스러운 짓이기도 하다면, 그리스도의 복종이 부족한 양 우리의 복종을 보태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합리하고 불경스러운 짓이 아닌가 판단하십시오. 만일 그렇다면, 주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복종이 다 우리의 의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많은 불합리한 것들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 교리를 부인함으로써 유발되는, 그리고 내가 전에 저지른 불합리를 한 가지 더 언급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고위 성직자가가 로체스터 백작에게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의 실재를 여러 가지 논증하여 설득했으나 실패를 하고 나자 이런 말을 남기고 자기의 교구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곧 “좋습니다. 백작 저하, 만일 지옥이 없다면 나는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지옥과 같은 그런 곳이 있다면 백작님은 어떻게 되실까요?”

나는 이 말을 지금 주장하고 있는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에게 적용합니다. 만일 전가된 의의 교리와 같은 가르침이 없다면 이 교리를 지지하는 자와 거룩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자들은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가르침이 없다면(확실히 있으나) 그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분간하기가 곤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지옥불을 분깃으로 받을 것이며 영원히 연자맷돌을 매단 신세가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실에 의지하는 자는 그 행실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소의 저울로 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게가 모자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행실로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떠난 그들은 지옥 불길 속에서 가련한 심령으로 잦아들며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뉴잉글랜드 출신의 위대한 회중교회 목사님인 솔로몬 스토다드는 그가 쓴 책의 제명을 <심판날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안전을 얻음>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참 잘 된 명칭이라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이 기회에 나는 그 책을 권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반석을 두고 무엇 때문에 지푸라기를 잡으려고 허리를 구부리겠습니까?

이제 나는 더욱 자세한 설명을 하기 전에 사도 바울이 당당하게 외치는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고전 1:20)라는 구절을 잠시 인용하고자 합니다. 이 세대에 합리적인 불신자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서 제시된 교리보다 더 합리적인 것이 여러분의 논증을 통해 나올 수 있습니까? 말씀과 일치하는 확신을 느끼지 못하였습니까?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를 여러분의 의가 되시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여러분의 양심에 더 긴밀하게 호소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형제들이여, 어떤 사람은 이 교리를 반대하고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다고 생각하더라도, 여러분 대다수에게는 이 교리가 고귀한 것이며 여러분이 갓난 아이 때부터 간직해 온 바른 말씀에 합당하다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전혀 기대하지 않고 지방에서 왔으나 영접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는 우리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주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교리를 기억만하고 마음에 살아 있는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정죄받을 죄만 불어날 뿐입니다.

내가 자주 말했던 것처럼 다시 여러분에게 말하겠습니다. 마음을 의탁하지 않은 그리스도는 결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도마처럼 믿으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거룩함이 되신 것처럼 여러분의 드러난 의로움이 되셨습니까? 의라는 낱말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와 아울러 우리 안에 역사된 거룩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하나로 합일시켰습니다. 그는 결코 이 둘을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않으며,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또한 주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로 여러분은 ‘주는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신의 범죄와 원죄를 혐오하고 자기 자신의 의를 역겨워했다면, 이사야가 잘 표현했듯이 “여러분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 같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나의 영혼은 그리스도를 갈급하여 그의 의를 애타게 사모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까? 아, 내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입고 나의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그리스도만을,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그리스도만을 주옵소서. 내가 만족하겠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리이다.

이것이 여러분의 마음의 언어로 고백된 적이 있었습니까? 이런 마음의 갈등을 겪고 난 다음, 믿음의 팔을 뻗어 여러분의 영혼에 복되신 예수를 껴안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고 말할 수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어디에 있든지 두려워 마십시오. 환호하십시오, 복된 심령들이여! 주, 주 그리스도, 영원한 하나님이 여러분의 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여러분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제 그의 은혜로 의롭게 된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목하며 오래지 않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영광중에서 영원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열매를 육신과 영혼으로 맺을 것입니다. 진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생명이나 죽음이나 모두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만일 주의 의가 여러분의 의라면, 주의 의를 끊임없이 여러분의 입으로 증거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며 권고하십시오. 앉았을 때나 일어섰을 때나 일터에 나갈 때나 집에 들어올 때나 그의 의를 말하십시오!

그 은혜의 큼을 생각하며 아울러 그 은혜를 주시는 분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믿은 그를 온세상에 보이십시오! 모두에게 여러분의 믿음의 열매를 알게 하여 주가 여러분의 의요 여러분이 하늘에서 주를 뵈올 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십시오! 여러분을 부르신 이가 거룩하신 것 같이 거룩하게 되는 법을 공부하십시오! 그의 피로 여러분을 씻고 거룩하게 되십시오! 주의 의를 악평하지 않도록 하고 친구의 집에서 그리스도가 해를 입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으로 날마다 자라나십시오. 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그 사랑의 줄에 묶여 그에게 순종하십시오! 많이 용서를 받았으니 많이 사랑하십시오.

주께서 그의 의를 주시는데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가를 항상 물으십시오! ‘왜 저니이까, 왜 저니이까?’라는,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질문을 항상 마음에 두십시오. 왜 주가 나의 의인가? 왜 그가 나의 구원이 되시는가? 항상 그의 손에 정죄받아 마땅한 내가 왜 그의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는가?

나의 벗들이여! 나는 내가 하나님이 내 마음에 특별히 분별하는 사랑을 주심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 여러분을 격려하는 능력을 조금 돌려서 그리스도 없이 죄짓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그에게 인도하고 그의 의를 받아들여 생명을 얻으라고 권고해야 할 것입니다.

슬프도다, 나의 마음은 찢어질듯합니다! 내 앞에 이처럼 많은 고귀한 사람들이 모이다니! 그러나 아, 가슴을 에이는 듯한 상념이여!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의 심령을 동아보신다면, 모인 숫자와 비교해서 말하자면, 주는 우리의 의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인들이여!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의가 아니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아니, 그리스도의 의만이 여러분이 입고 혼인잔치에 나와야 할 대상입니다.

아, 그리스도 없이 죄짓고 사는 자들이여! 나는 여러분 때문에 비통합니다! 내 영혼의 소망은 확대되었습니다. 아, 지금 이 시간 나의 이 소망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라면! 주가 여러분의 의로움이 되시는 시간이라면! 의를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여러분에게 죽음이 닥치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진정 여러분이 숨을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 세우실 때, 여러분 자신의 주장하는 의의 어설픈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벗은 몸을 가리지 못할 것입니다.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들이 아무 쓸모가 없을 알았고 여러분도 알게 될 것입니다.

아,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심판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주저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만일 주가 여러분의 의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무엇일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을 지으신 그가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 안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의가 안 되신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정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정죄를 받고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영영한 불속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살은 구리요 뼈는 쇠입니까? 구리살과 쇠뼈라도 어떻다는 말입니까?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지옥 불은 완전히 태워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떠나 견딜 수 있겠습니까? 아,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기는 것만 같습니다! 며칠이나 몇 시간이라도 하나님 없이 어두움을 헤매며 빛을 보지 못할 때마다 슬피 우는 거룩한 영혼들에게 물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그가 계시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그를 찾아 슬퍼하며 온종일 그를 찾아 얼마나 애통하는가를 보십시오! 그리고 하루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심을 잃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일이라면 영원이 그에게서 추방당하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의가 아니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전가되고 여러분의 삶에 적용되지 않으면 여러분은 죽어서 지옥불에 영원히 타는 고통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몸소 여러분을 정죄하여 그 고통의 연못에 던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나는 불쌍하고 가련한 죄인들이 주의 심판석 앞에 두려워 떨며 서서, 주여 우리가 정죄를 받아야 한다면 천사나 천사장을 보내어 그 판결을 선고하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돌이킬 수 없는 선고를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두려움을 알고 그리스도와 긴밀한 사귐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주는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쉬지 마십시오. 주밖에 누가 여러분을 용서하시는 넉넉한 사랑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믿음을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만일 주께서 믿음을 주신다면 여러분은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그의 의와 그의 모든 것을 함께 받을 것입니다. 죄가 많고 크다고 해서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인이라면 나도 죄인입니다. 여러분이 죄인의 괴수라면 나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배반자라면 나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그의 풍부하고 아낌없고 으뜸이신 은혜를 영원히 흠모해야 할 것입니다), 주가 나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젊은이여, 오십시오. 방탕하게 놀며(내가 한때 그랬던 것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방황하는 탕자들이여 오십시오. 집으로 오십시오. 여러분의 돼지 우리를 떠나 돌아오십시오.

이제 육감적인 쾌락의 꼬투리를 먹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바라고 일어나 집으로 오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그의 아들의 의의 옷을 입고 저만치 서 계시는 그를 보십시오. 그의 눈부신 옷을 보고 또 보십시오. 하나님의 피를 주시고 사신 그 옷의 사랑스러운 의미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얼마나 위대한 것을 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의 의의 옷이 없으면, 여러분은 영원히 잃어버릴 것입니다.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쌍하고 죄많은 탕자들이여, 집으로 오십시오. 정말 나는 복음서의 장자처럼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아니, 나는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여, 내려다보시고 강림하소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내려오소서, 나에게 은혜를 보여 주신 것 같이 당신의 복되신 성령을 시켜 당신의 의를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젊은 탕자들에게 입히시고 그 벌거벗은 심령을 당신의 가장 고귀한 옷으로 입히소서!

그러나 나는 처녀들과 아울러 청소년들에게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몸치장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은 벗은 것이 아닙니까? 누가 주는 나의 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값을 알 수 없이 고귀한 옷을 입을 만큼 누가 열심히 갈망하고 있습니까? 그 옷을 입지 않은 자 제 아무리 단장을 해도 회칠한 무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처녀들은 가장 중요한 장식이 무엇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주가 여러분의 의가 되시기를 비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용모의 아름다움이 불에 타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중년들, 매우 분주한 상인들, 주를 훼방하는 마르다들에게 말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다 갖고 있다고 하겠지만 주를 여러분의 의로 소유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슬픕니다! 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진주를 소유하지 않는다면 이 태양 아래 애를 쓴들 무슨 유익이 돌아오겠습니까? 이 한 가지 물건이 여러분에게서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절대적으로 긴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을 음식을 위해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지금부터 주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기를, 다시 말해서 여러분에게 영생을 얻을 자격을 주시는 의가 여러분의 소유가 되도록 간구하십시오.

나는 또한 여기에 백발이 노인들이 계심을 봅니다. 아마 여러분들 대부분은 주는 나의 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 머리가 희어버린 죄인들이여! 나는 여러분을 위해 울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흰 머리는 여러분의 면류관이어야 하고 여러분의 자랑이어야 하는데 지금 여러분의 부끄러움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심을 모릅니다. 늙은 죄인들이여, 서두르고 서두르며 서두르십시오! 구원하시는 주의 사랑에 관심을 두십시오!

슬프도다 여러분의 한쪽 다리는 이미 지옥에 있고, 여러분의 생명의 잔은 텅비어가고 있으며, 여러분의 해는 떨어지는 중입니다. 주가 여러분의 의가 되지 않는다면 그 해는 떨어지고 여러분은 영원한 어두움 속에 갇힐 것입니다! 그러니까 달아나십시오, 여러분의 생영을 위해 달아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께 나오면, 그때가 열한시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내쫓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여러분의 의가 되시도록 기도하고, 사람이 늙어서 거듭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시라고 그에게 간구하십시오! 그러나 나는 양떼 중에 있는 어린 양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먹이는 것이 나의 주가 내리신 마지막 명령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내가 만일 주께서 그들의 의가 되실 수 있음과 천국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면 나오게 진노하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까, 어린이들이여, 그리스도께 오십시오. 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실 것입니다. 너무 어려서 회개하고 믿기 어렵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너희는 대개 여덟에서 아홉 살이 된 것 같으며, 아직 주 우리의 의라는 알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보다 더 어려도 그런 말을 한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직 어릴 때 오십시오. 여러분은 오래 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부모가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더라도 여러분들만이라도 오십시오. 어린이들이 주께서 여러분의 의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주님의 양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여러분들을 먹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늦지 않게 주를 여러분의 의를 삼게 하여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여기서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난한 흑인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여러분의 심령을 경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여러분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줄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 여러분이 주를 여러분의 의로 맞이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가 여러분에게 알려지게 되라라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아무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간다게 여왕의 내시에 대하여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도 여러분과 같이 흑인이었습니다. 그는 믿었고 주께서 그의 의가 되셨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어제와 오늘이 같으시며 그의 피로 여러분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집으로 오십시오. 본문 말씀을 여러분의 기도 제목으로 삼고 주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시기를 간구하십시오.

바로 지금 오소서, 주 예수여, 우리 모두의 영혼에 빨리 오십시오. 아멘, 주 예수, 아멘 또 아멘!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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