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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와 질그릇 (조지 흿필드)

by 【고동엽】 2021. 11. 12.
토기장이와 질그릇 (조지 흿필드)


토기장이와 질그릇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18:1-6)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에 걸쳐,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에게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야곱에게는 꿈으로 말씀하셨으며, 모세에게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마음에 드는 한 선지자를 보내어 특별한 메시지를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한 선지자를 택하여 특별한 메시지를 주어서 그 땅에 사는 모든 백성들에게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유형의 교훈은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특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1)
1절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여호와께로부터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레미야가 기도하지않는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을 때 임한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침 일찍 주어진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일어나라"라는 표현을 보면 침상에 아직도 누워 있다든지, 아니면 자고 있었다고도 추측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어나서 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선지자는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혈육간에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새벽녘이라고 하거나 밖이 너무 춥다고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떤 주저함도 없이 그는 즉시 일어나서 갔습니다. 하늘에서 온 환상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선지자가 작업장에 들어갔든지 아니면 집안으로 들어갔든지 간에 어쨌든 들어가 보니 토기장이가 녹로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선지자가 인도받을 만한 어떤 특별한 말씀이라도 있다는 것입니까? 이 예언서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읽은 사람들도 예레미야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꿈꾸는 자나 미신적인 열광주의자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하늘로부터 이런 방식으로 임하는 메시지를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는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그와 함께 토기장이의 집으로 갔다면, 침묵을 지키고 긴장하면서, 위대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신 명령자께서 왜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셨는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한건데 예레미야는 그 모든 것을 살폈을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그릇은 토기장이의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토기장이가 녹로를 돌리면서 어떤 특정한 형태의 그릇을 만들고 있음을 주시했습니다.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즉 그릇이 훼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의도한 목적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훼손된 그릇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훼손되었기때문에 토기장이는 그 그릇을 으레 한쪽 옆으로 치워 버리고 작업장에 있는 다른 진흙을 떠다가 다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토기장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토기장이는 그 훼손된 그릇으로 '다른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토기장이가 식솔들을 불러서 어떤 그릇을 만드는 것이 좋을지 의논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때에" 선지자가 주어진 말씀에 순종하면서, 마음속으로 주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부르짖고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적어도 예레미야는 여기서 그에게 주신 설교 말씀을 받았을 것입니다. 간단하지만 아주 대중적인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온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의 귀족들과 제사장들 및 온 백성들에게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양쪽 날이 선 검보다 더 예리하게 그들의 마음에 파고든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일반 토기장이가 하고 있는 그런 특권도 내가 갖지 못하겠느냐? 내가 나의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냐?'"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를 지었으며 내 백성으로 삼았느니라. 하늘아래 그 어떤 나라보다 더 복되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오! 이스라엘아, 너희는 배교함으로 너희 스스로를 패망케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토기장이가 훼손된 그릇을 버리듯이 나 역시 신앙적이지 않고 내 백성답게 살지 않는 너희를 버릴 권이 없겠느냐! 만일 내가 산더미처럼 쌓인 너희의 죄악을 보고 너희의 배교의 길을 고치며, 수년 내에 이 백성을 다시 부흥케 하고 너희의 종말을 더 위대하게 만들 수 없겠느냐! 토기장이가 버리든지, 아니면 다른 그릇으로 만들든지 그의 선한 소견대로 할 것이니라. 보라, 진흙이 토기장이의손에 있음같이 너희도 내 손에 있느니라. 내가 너희를 거절하든지, 즉 너희를 파멸케 하든지 혹은 내가 다시 너희를 찾아서 나의 주권적인 선함에 따라 부흥시키든지 할수 있느니라. 누가 내게 당신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하느냐고 말할 수 있느냐!"
이상이 오늘 읽은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기록된 말씀이 지닌 원래 의도라고 믿습니다. 이 말씀의 본래 의도나 의미에 관하여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여러분에게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하신 말씀을 가지고 개개인에게 특별히 적용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일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든지, 혹은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골똘히 씨름하는 것으로 여러분을 지루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저는 이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각색하여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재로, 본래 아담의 후손으로 탄생하게 된 모든 사람은 부서진 진흙 조각과 같은 것으로서, 모든 것을 살펴보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둘째로, 훼손된 그릇이기에 반드시 새롭게 갱신되어야 할 자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대지에서 우리는 또한 이 놀라운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지를 살펴 볼 것입니다. 이러한 특별한 논점들은 간단하게 적용함으로서 다룰 것입니다.

1. 하나님 앞에 놓인 훼손된 질그릇본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훼손된 질그릇 조각과 같은 존재로서, 모든 것을 살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임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아는 존재로 인간은 지음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본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존재라는 전제, 혹은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이 다 아담의 후손이라는 말씀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원래 올곧은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또한 경건한 모세가 기록하고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몇 마디의 말로 결코 그 많은 것을 다 표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창조에 대한 모세의 설명의 장엄함과 경이로움에 대해서는 감탄해 마지 않으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라는 말만 읽고 그 다음의 말은 읽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창5:1).
그처럼 놀라운 선하심에 대하여 입이 딱 벌어지지 않습니까? 여기에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또 다른 표현이 즉각적으로 이어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이 놀라운 사건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있으라 하시니 사람이 있었더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최초의 인간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토록 아름다운 창조의 상태에서 어떻게 그토록 빨리 타락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인간이 본래의 존엄성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가치는 이제 골동품 가게에서 취급되는 고대 메달의 가치로서만 여겨질 뿐입니다. (역자주:지금은 골동품의 가치가 상당히 나가지만, 휘필드 시대에는 골동품에 대한 인식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낡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단지 고대의 문장이 새겨졌다는 이유만으로 골동품 취급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신적 형상을 다시 한 번 수여받을 것입니다.
이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보다 더 특별히 살펴보아서 이런 말씀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인간의 이해력을 봅시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본래 인간의 이해력이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광범위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천사보다 약간 못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천사들과 같은 존재라면 인간의 이해력은 탁월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전부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서도 골토(Golter)씨는 그의 소논문에서 완전한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이해는 명백하게 어둡습니다. 자연에 대한 것들은 우리가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역자주:고학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이 있습니다)심지어 우리가 가진 작은 지식조차도 육체의 나약함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하는 것처럼 이 지식을 얻기 위하여 피땀 흘리는 작업을 해야만 합니다.
천한 사람들과 편협한 사람들은 자기 딴에는 영리하다고 생각하여 지혜로운 말을 하려고 합니다. 세련된 언어들에 관하여 피상적인 지식을 약간 습득하고 무미건조한 학문에 있어서 약간의 진보 성향을 띠는 그들은, 쉽게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종종 과장되고 헛된 말들을 내뱉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높임을 받는 사람들, 생각이 깊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감히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장 위대한 학자들은 인생에 있어서 심지어 가장 작은 것들도 존중하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현상들을 세심히 연구하면서 아직도 헤집고 다녀야 할, 측량할 수 없이 많은 거대한 공간들이 존재함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을 존중하면서, 자신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데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자들입니다.
이는 소크라테스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왜 지상에서 선생님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단언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내가 나의 무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걸세."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우리들도 이 이교도 철학자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얄팍한 지식을 자랑하면서 무지를 감추려고 한다는지, 혹은 자신들이 참으로 지혜롭다고 주장하면서학자인 척하는 도도한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자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2)훼손된 질그릇에 영적 무지가 채워졌습니다.
만일 우리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우리의 이해력을 점검한다면 막막할 뿐 아니라 이해력 자체가 어둡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심지어 전에 전혀 느끼지 못하였던 자들도 어둠을 뼈저리게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빛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던 자들이요, 그리하여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것, 영적인 것들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존재라는 성경적인 가르침이 분명한데 어떻게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큰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비교해 말하면 인간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무지게의 다양한 색을 구분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2:14).
"받지 아니하나니", 즉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들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로 말미암아 복을 받은 자였는데, 그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요3:7참고).
그는 그 말씀을 붙들고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3:4-9).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가장 무지한 사람처럼 세번씩이나 어리석은 질문을 했습니다. 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까지 인간의 이해력의 무지함에 대해서 이것만큼 명확하게 잘 설명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처럼 인간은 훼손된 질그릇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이는 인간 의지의 왜곡된 기질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었습니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뜻 외에는 다른 의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아담의 뜻은 마치 음악에서의 합창곡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불일치도 없었습니다. 상반된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간은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의지입니다. 마치 빛이 어둠과 다르듯이, 하늘과 지옥이 다르듯이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전적으로 배치됩니다. 우리는 육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죄인을 대적하는데 열의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의미하는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있는 교황을 출교하라는 소리를 힘차게 높이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가운데 로마에 가서 이 영적인 적그리스도를 끌어낼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 안에는 적그리스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끔찍하고도 더 위험한 적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의지가 여러분의 마음 보좌에 좌정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게 됩니다. 그것은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제자들이 도리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노릇 함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눈은 그들의 마음에 있는 역겨운 것들을 잘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종종 슬픔에 젖게 합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들은 때때로 분노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주의를 기울여 살핌에도 불구하고 힘든 고난이 밀려오거나 침체 기간이 길거나 끈질긴 유혹이 닥치게 되면, 그들은 종종 모든 지혜의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대적하는 반역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항변합니다.

이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울부짖게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영적인 사람, 거듭난 사람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사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자기 의지와 모든 악한 것들이 잠복하거나, 아니면 눈에 띄게 그의 거듭나지 못한 영혼을 주관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알아서 스스로에게 고백하든지, 의지가 불안정하고 이해력도 부족한, 그야말로 훼손된 질그릇과같은 존재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열정이 무상하다는 견해는 이 슬픈 진리를 더 확고하게 할 것입니다. 인간의 열정은 하나님의 낙원에서 먼저 드러났는데 적절한 경계 안에서, 그리고 적합한 대상에 고정되어 유지된 것이었습니다. 강물이 흘러가듯 달콤하고 즉흥적이며 습관적으로 그들의 대양이신 하나님께로 흘러 들어간 열정이었습니다그러나 상황은 변했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악의적인 열정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맹렬한 급류가 모든 것을 다 가져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싫어해야만 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들은 싫어합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두려워하며, 두려워해야 할 것은 도리어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통제 불능의 일들이 우리들의 정열을 소진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판단이 정반대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적이요, 영원한 복락을 희생하는 것이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행동해 버립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에 임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의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예속되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보다 나은 것을 더 열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너무나 자주 우리들에게서 나타납니다.
3)부서진 질그릇은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인간을 짐승과 악마에 비교하여 설명할 때 많은 분들의 반감을 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육체적인 측면에서 주장한다면 인간은 정말로 짐승이요, 실제로 악마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교를 반대하는, 학식 있는 한 성직자의 주장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짐슴인 인간은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악마인 인간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인간을 짐슴이나 악마로 비교해서 설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충격적인 비교를 사용할 때, 우리는 오로지 도덕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하신 말씀 그 이상의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경건한 다윗은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시73:22).
또 경건한 욥도 일반적으로 인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욥11:12).
어떤 자들이 말하는 것 처럼 이 구절에서 부정적인 설명구를 빼 버리고 나머지를 읽으면 긍정적인 것이 남는데 그것은 "인간은 들나귀 새끼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4).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5:19)
이 악한 자는 불순종하는 자녀들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즉 그는 거듭나지 않은 영혼들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땅의 것들에 정열을 기울이기 쉬운 우리의 어리석음과, 육체의 것들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는 우리의 수고와 관심, 우리의 정욕을 달성하기 위한 우리의 수고들은 다 우리가 세상적인 자들이요, 짐승과 같은 존재임을 입증하는 사례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의 정신적인 것, 열정과 분노와 싫어함, 악의, 질투 등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다 악마적인 존재임을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이 둘은 인간의 열정과 의지와 이해력 측면에서 볼 때, 훼손된 질그릇 조각에 불과한 인간임을 말하는 데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본성적인 양심의 어두워진 현재 모습은 더 찬란한 빛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첫 사람인 아담의 영혼에서 양심은 의심할 여지 없이 주님의 촛불이었습니다. 양심은 그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정확하게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분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런 능력은 약간이나마 여전히 우리 인간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희미하게 타오를 뿐입니다. 너무나 쉽게, 그리고 빨리 가려지거나 소멸되고 맙니다. 저는 이런 진리를 배우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을 이교도 세상으로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경험하여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해력, 의지, 열정뿐만 아니라 본성적인 양심에 관해서도 그것이 부서진 질그릇과 같음은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다른 증거를 댈 필요가 없습니다.
고귀하고 뽐내는 다이애나(Diana;에베소 지역에 있었던 여신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말은 그녀가 도움 받을 데 없는 미개한 이성이라는 뜻입니다.(unassisted unenlightend reason).이 또한 위 주장의 정당성을 증명합니다. 저는 인간의 이성을 헐뜯거나 찬탄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로고스, 즉 이성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법에 합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올바른 이성의 법을 형성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데는 많은 학식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의 섬김은 "영적 예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종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어리석고 미친 자들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들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반대하던 자들이 지금 이성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오직 부패된 것임을 발견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이성이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기에는 너무나 무능하며, 구원의 길로 안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마치 소돔성에 사는 사람들이 천사에 의해서 눈이 어둡게 되어 롯의 집 대문을 발견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이교도 세상에서 날고 뛰는 이성주의자들이 저지른 엉청난 실수는, 예배의 대상과 방법에 있어서 인간 이성의 나약함과 부패함을 충분히 입증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똑똑한 사람들이 이성의 힘으로 놀라운 과학적 발견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이성 자체가 구원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간은 전적으로 부서진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더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내세울 증거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의 이해력의 부족, 의지의 왜곡, 우리 열정의 반역, 양심의 부패, 이성의 타락 등이 명백한 증거들입니다. 현재의 무질서와 우리의 헌법도 동일한 내용을 증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부서진 질그릇 조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원래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높은 지위와 특권을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또는 신분의 차이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본래 다 동일한 지위에 있던 존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실로 진흙덩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진흙덩이가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의해 빚어져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건설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의미하고 성급하게 뒤죽박죽 만든 것이 아니라 설계에 따라 건축하셨습니다. 그의 영원한 마음에 작정하신 계획에 따라 완성된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몸도 지체도 없는 분이시므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고 했을 때, 그것이 그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었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우스(South)박사가 말한 것처럼 영원한 로고스가 인간의 육체 가운데 나타나셨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보배로운 진주가 보물 상자 속으로 들어가듯이, 무한한 지혜가 때가 됨에, 인간의 몸속에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 선인들 일부는 처음 인간은 영광스런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혜로운 자가 되려고 시도하지 않고서도 인간은 영광스러운 몸을 지닌 존재였으며 죄를 알지 못하였고 질병이나 고통도 알지 못한 존재였음을 단언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지금의 인간은 이가봇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초적인 힘과 영광이 불행하게도 떠나가고 없기 때문입니다. 옛 고대 유적들이 파괴됨과 같이 인간이 본래의 완전한 아름다운 모습에서 한참 떨어진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호칭에 의하여 어떻게 부를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몸을 주저함 없이 "악한 몸"(Vile Body)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비록 그 몸이 원래 참으로 두려울 만하며 감탄할 만한 모습으로 지어진 것이었을지라도 지금은 악한 몸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몸은 악한 질병에 걸리고 죄의 병기로 사용되기 일쑤입니다. 마침내 결과적으로도 악한 것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전3:20).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구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던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우심은 그의 친구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결점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파괴되고 땅에 묻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갑시다. 우리 주님에게 전적으로 동조하면서 적어도 잠시나마 주님께서 가지신 그 연민의 마음에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인간의 현재 실존적인 슬픈 모습을 생각하며, 육체와 영이 다 타락한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의 실존을 보면서 부서진 이 질그릇 조각에 대한 탄식과 애통함을 억제시킬 수 있습니까?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슬픈 탄식을 받아들이도록 누가 도울 수 있습니까?

오, 능한 자들이 어찌 저토록 추락해 버렸는가! 그들이 높은 곳에서 어찌 저토록 죽음을 당했는가!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원래 그토록 추락한 모습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몇 마디 말로 결코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의로우시고 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였습니다.
4)성경이라는 참거울로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들에게 흥미있게 보여 주는 요점입니다. 이 복된 성경 말씀, 책 중의 책인 이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의 경험에 직접 촉구하고 있습니다. 과거 모든 시대의 증언들이 우리들의 증거물들과 적절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야 할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야 합니다.
성경이야말로 참거울로, 우리의 실제와 적절한 모양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하듯이 우리의 본성을 비로서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세상에 흘러내고 있는 홍수같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악들의 근원과 원천이 무엇인지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이 신뢰할 만한 계시의 말씀을 반대하는 자들, 결과적으로 이 말씀에서 흘러 나오는 교리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제가 앞에서 지적한 것들을 확정지어 주는 존재들입니다. 이해력, 의지, 열정, 양심 및 이성의 권능과 관련하여 인간은 아무 무질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한, 누구도 본문의 계시의 말씀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계시는 오류가 없는 수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고, 매 장마다 하나님의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이며, 모든 인류에게 다 적합한 것으로 모든 인류가 다 경험하는 바요, 우리에게 놀라우리만큼 잘 보존되어 전달된 것이며, 우리의 죄를 책망하고 회심케 하며 수백만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은 가장 가혹한 핍박을 견디게 하는 말씀이며, 가장 교묘한 비판들을 다 잠재울 수 있는 말씀이며, 최악으로 핍박하는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기 원하는 자들은 이 말씀과 논쟁하려고 하지 말고 곡해된 마음이 용서받기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곤경에 빠지게 되며, 쓴맛을 맛보게 되며, 그들의 양심은 마치 벌겋게 달아오른 철로 무디어진 것처럼 마비되고 맙니다. 그들의 눈은 이 세상의 신에 의해서 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이 어찌 볼수 없고, 느낄 수 없으며, 이 진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보편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실로 이 계시 자체는 인간이 타락했다는 교리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고귀한 품성을 잘 간직하였다라면, 하나님의 법이 아직도 우리의 심성에 새겨져 있었더라면 이 신적 계시는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존재로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하기보다, 이제는 우리 최고의 창조주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분은 인간의 본래 모습이 어떠한지를 단 몇 마디 언급으로, 직접 찾아 나선 세상의 현인과 관원들보다 더 잘 알려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적 계시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체하는 몇몇 사람들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전달된 교리에 원수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교리를 방어함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인물들의 타락을 증거하든지. 혹은 이방 세계를 지칭함으로써 일반적인 이 교리의 증거들을 교묘하게 피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의 잘못은 자신들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인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다 역겨운 존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들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 부서진 질그릇 조각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이 타락하도록 허용하였습니까? 인간은 타락하기 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까? 타락에 의해 성립된 부패가 인간 모두에게 만연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난해하고 비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들이 제기되지만, 거기에 답을 드린다면 그런 질문은 죄악된 호기심을 만족시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첫부모를 유혹하였듯이 금지된 열매를 따 먹도록 여러분도 유혹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교의 다음 대지로 넘어가겠습니다.
2. 새롭게 되는 타락 본성다음으로 여러분에게 제시할 것은, 이 타락한 본성이 반드시 새롭게 된다는 절대적인 필연입니다. 이것은 제 눈에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 대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기도 합니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옛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로 주전 287-212경에 존재한 인물)가 한번은, "내 발에 딱 맞는 장소를 주시오. 그러면 나는 세상을 옮기겠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그는 많은 비난을 받음으로써 그 거만한 발언에 대한 정당한 책임을 져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받아들이면 인간이 거듭난다는 필연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늘나라 메시지를 듣고 있는 여러분 모두는 죽은 다음에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을 위한 저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천국에 여러분 모두를 위한 처소가 준비되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십니까? 여러분은 영원한 언약의 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듣고 있습니까?
"더 이상 시간이 없으리라"고 선언하시면서 하늘나라로 즉시 오라는 초청장을 주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듣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이 땅에서 먼저 하늘나라를 즐거워하는 적절한 준비를 하지 않는 한, 여러분에게 천국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 뿐입니다. 어찌 어둠이 빛과 사귈수 있습니까? 벨리알의 자식들이 어떻게 순결하시고 흠이 없으신 예수와 더불어 교제의 악수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대하여 이상한 개념들을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이해력의 나약함에 있어서 성경은 땅에서의 즐거움과 인간적인 장엄함을 나타내는 용어들을 사용하여 천국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보다 높은 것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은 고작 낙원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의 생각 깊이, 천국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도록 복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늘나라는 장소적 개념보다는 상태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먼저 여러분의 마음이 적절한 상태로 배치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천국에서조차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투쟁적인 영광 외에 은혜가 무엇입니까? 승리의 은혜 외에 영광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관점은 한 경건한 작가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습니다.
"거룩, 행복 및 천국은 똑같은 하나의 개념에 대한 세 가지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위대한 설교자 프레스톤(Preston)목사가 죽음을 앞두고 그의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습니다.
"나는 내 처소를 바꾸는 것일 뿐이지 내 동반자들을 바꾸는 것이 아니네."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경건한 선한 사람들과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그가 교제한 분들과 계속해서 교분을 나누게 됨을 알았습니다. 무한히 더 정제된 모습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됨을 안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천사들과 앞서 간 많은 신앙인들과 하늘나라에서도 교제할 수 있게 됨을 안 것입니다.

1)타락한 본성이 도덕적 변화로 갱신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하늘의 동반자들과 복된 교제를 나누는 동참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이 부서진 질그릇인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보편적으로 도덕적 변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의 이해력이 반드시 조명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의지와 이성과 양심이 반드시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정열도 반드시 갱신되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도록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혈과 육은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기 때문에,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반드시 덧입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옛 것은 반드시 사라지고 모든 것, 심지어 영혼의 기능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조차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도덕적 변화를 어떤 분들은 회개, 혹은 회심 혹은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용어가 어떤 것이든지 택하여 사용하십시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새롭게 된 것을 가질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성경은 이것을 거룩, 성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 주님은 "새로운 탄생", "거듭남", 또는 "위로부터 난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말은 단지 상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동방의 언어적 표현도 아닙니다. 또한 세례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하게 된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 사용한 표현도 아닙니다.
그 표현들은 마음과 삶의 실제적인 변화, 도덕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말들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거하는 실제적인 동참을 의미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것을 상징적인 해석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새롭게 되는 능력을 경험하지 않는 한, 또한 그들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견고하고 살아 있는 경험에 의해서 그들의 삶이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그들의 모든 학문과 비평적 수고는 실제로 정죄받음에서 부터 결코 면제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배웠든 못 배웠든 신분의 귀천을 떠나서, 비록 니고데모와 같이 이스라엘의 관원일지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음을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누가 토기장이입니까? 누구에 의해서 이 부서진 질그릇이 새로운 그릇으로 변화됩니까? 다시 말하면 이 놀랍고 위대한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제가 이 질문에 답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설득에 의해서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설득력도 좋은 것이기는 합니다.
저는 기독교 설교자들이 설교에 있어서 이성적인 논리 전재나 동기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전혀 동조하지 않습니다. 논리성을 배제하고서는 설교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도 논리나 변론을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1:18).
설교의 황태자인 사도 바울도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행24:25)을 강론했습니다.(흠정역에는 "he 'reasoned' of righteousness, temperance,and judgement to come" 즉, "논리 전개하였다"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이 이런 내용들을 논리적으로 전개했을 때 총독 벨릭스는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거룩한 설교자들이 하늘나라를 가르침에 있어서 설득력 있는 전개가 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은 논리 정연한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논리적인 가르침이 전개될 때 그것의 미치는 힘은 더 큽니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불쌍한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설교할 때, 이때 논리적인 전재야 말로 더 효과적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교회 뜰로 나아가 죽은 시체들을 일으키려고 시도한다고 합시다. 마치 죽은 영혼들에게 설교하듯이 시체들을 향하여 일어나 나오라고 외친다고 합시다. 제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소망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저는 울리는 꽹과리가 되거나 소리나는 구리가 될 것이 뻔합니다.

2)도덕적 변화는 우리의 의지가 아닌 성령의 역사로 됩니다.
도덕적 변화는 우리의 의지력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에 기대는 것은 우상을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감히 그 우상을 부숴버리려고 하지도 않고 도리어 경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요6:44).
우리 자신의 의지는 많은 악을 억제하는 데 어느 정도 효력이 있습니다. 회심의 길로 들어서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는 궁극적인 노력을 주장한 후에 교회가 붙들고 있는 신앙고백이 참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갈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감히 조수의 썰물과 밀물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폭풍우를 잠잠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 같은 무모한 일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의지와 열정은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 이상 여러분을 의혹 속에 두지 않고 모두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늘의 토기장이, 이 복된 일을 하는 분은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흥모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삼위에 해당되는 성령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하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께서는 우주의 혼돈이 있을 때 태초에 수면 위에 운행하신 그 영이십니다. 이 영은 동정녀께서 거룩한 분을 잉채하기 전에 그녀 위에 임하신 성령입니다.
이 동일한 영께서 우리 영혼의 혼돈 속에 오셔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을 듣기 전에 이런 일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한 그것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유아 세례나 장년 세례는 다 무미 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 주신 불입니다. 저는 만유의 이 주님께서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영혼에게 오늘 이 불을 지펴 주시기를 기드립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과 관련하여 기억할 것은, 기적들이나 여러 유형의 방언들은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적 중의 기적은 성령의 일상적인 역사하심에 따라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인데, 이런 기적은 아직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결케 하십니다. 이 점에 있어서 참 성도들은 위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요1:13)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첫 창조와 마찬가지로 둘째 창조도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4)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첫 사람처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고귀한 진리입니다. 조롱하는 세상은 이것을 어리석고 미친 소리라고 말합니다. 이 영광스러운 변화, 새로운 창조를 낳기 위해서 영광스러운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품속을 떠나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 복음의 모든 교훈과 모든 예식, 그것이 고난이든 형통한 것이든 그의 모든 섭리하심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시는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다 이 두가지 요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타락한 존재라는 것과 우리의 영혼 속에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변화가 있다는 두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모든 나라의 수많은 영혼들을 건져 주시기 위하여. 모든 열방과 민족들의 영혼들을 수많은 도덕적 악으로부터 건져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타락한 상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가장 탁월한 상태에 머물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고귀한 보혈을 흘려 주셨습니다. 어떤 종교가 그러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이 놀라운 일과 견줄 만한 종교가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자연신교(Deism)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고상하고 이성적이며, 신적인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 특히 이 복된 회복의 사건과 전혀 무관한 자들로 앉아 있는 여러분들은(지금 제 마음은 이 진리를 적용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합니다). 왜 이 진리와 변론하기를 꺼리십니까? 왜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서진 질그릇 조각을 이 하늘의 토기장이께로 가져오지 않습니까?
왜 마음 중심에서 "오 선하신 주님, 우리를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돌아서겠나이다"라고 부르짖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오늘 바로 이 시간에 하늘의 토기장이께서 여러분을 손에 잡고 구속주의 쓰심에 합당한 영광스러운 그릇으로 만드실지 누가 압니까?
여러분과 똑같이 전에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리 있던 다른 사람들이 이제는 이 하늘의 신령한 복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얼마나 추한 여자였습니까? 그러나 그녀에게 붙어 있던 일곱 귀신을 우리 주님은 쫓아내셨습니다. 실로 주님은 부활하신 직후, 가장 먼저 그녀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모든 사도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얼마나 탐욕스러운 인간이었습니까? 그는 남의 것을 강탈하고 속이는 세리장이였습니다. 그러나 단 몇 분만에 그의 마음은 열렸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의 소유절반을 나누어 줄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사도 바울이야 말로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핍박자요, 훼방자요, 폭행자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대적하는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교회의 대파괴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도중 주님과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인하여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핍박자에서 그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수천명의 영적 아비가 되었습니다. 아마 지금 그는 우리 주님 곁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을 것입니다. 왜 이 모든 일이 벌어집니까? 그는 그처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오, 형제 여러분! 믿고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복음을 믿으십시오. 실로 이것은 복된 소식입니다. 위대한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원죄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먹지 말아야 할 열매를 따 먹어 자식들의 치아까지도 다 썩게 만들었다고 부모를 원망하는 어리석은 짓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중생 교리에 대하여 더 이상 광신주의자들의 외침이라거나, 혹은 어리석고 미친 자들의 야비한 이름들을 들먹이며 이 복된 진리들을 주장하는 자들의 상표라고 비난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 이제 믿으십시오. 믿으셨으면 이제 말하십시오. 진노의 그릇 대신에, 토기장이 옹기점의 불처럼 타오르는 지옥의 불속에서 점점 뜨겁게 달구어지는 그릇 대신에 영광의 그릇으로 만들어지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그 위대한 날에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가장 부요하고 특별하며, 주권적인 은혜를 받으면서 영원히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한두 마디 더 하지 않고 설교 말씀을 끝맺을 수는 없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거듭난 경험이 있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불쌍히 여기는지를 알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촉구합니다. 오늘의 이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단지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시렵니까?
여러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복락을 함께 누리는 일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사망의 몸을 지닌 자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하심에 따라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가 그분의 손안에 안전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잠시나마 여러분도 그분이 하신 것처럼 "다 이루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포기할 때 우리의 고개가 숙여질 그날이 올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전능하신주님, 우리의 영혼을 얻기까지 인내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가 진흙덩이임을 보옵소서, 주님은 토기장이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주님께 함부로 말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 주님, 우리는 빈 그릇으로 주님의 손에 의탁하옵니다. 주님 보시기에 좋으신 대로 만들어 주옵소서. 모든 십자가를 감당하고 모든 고난을 이기며, 모든 유혹을 극복하여 우리의 심령 속에 살아있는 주님의 형상이 깊이 새겨지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을 만나기에 적합하고 온전하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한없는 영광의 기쁨을 누리는 자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삼위되신 하나님, 그러나 한 분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권능과 능력과 위엄과 다스리심이 이제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함께 하옵소서. 아멘!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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