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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이 시대상황에 따라 변하는가?/박신 교수

by 【고동엽】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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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이 시대상황에 따라 변하는가?


[질문]

한 지성적이고 회의적인 미국인 대학생 친구가 기독교인들의 외식을 지적하면서 "너는 성경의 모든 구절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느냐?"라고 제게 물었습니다. 이 친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인간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책이라고 옳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럼 왜 너는 어떤 구절은 고집스럽게 믿으며 그 구절로 사람들을(예를 들면 동성연애자들) 정죄할 때 쓰면서, 왜 어떤 구절은 지키지 않느냐?"며 바로 그것이 외식이라고 지적하더군요.


그가 예로 제시한 구절은 (고전11:6) "If a woman does not cover her head, she should have her hair cut off; and if it is a disgrace for a woman to have her hair cut or shaved off, she should cover her head."이었습니다. 즉, "왜 현대의 기독교 여성신도들은 머리를 가리지 않느냐 이것은 외식이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사실 저는 이 구절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조금 당황했고 "성경을 해석할 때는 당시의 시대상과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나름대로 사도 바울의 의도를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그럼 문화적,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하나님 말씀도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 아니냐? 그러면 동성연애에 관한 구절도 그런 것 아니냐?"라고 반박했습니다. 저는 "머리를 가리는 문제는 단순히 문화적 차이의 문제이지만 동성연애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할 수 없다."라고 변증했습니다. 물론 그는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성경의 일점일획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 (제가 다니는 교회를 포함해서)에서 위에 언급된 구절 같은 말씀들은 전혀 문제의식 없이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중에도 중요한 말씀 (본질적인), 유연한 말씀 (문화적이나 시대적으로 이해하고 꼭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아도 되는...)등의 구분이 있는지요? 만약 제가 이 친구를(물론 이 친구의 본질적인 문제가 이런 단순한 구절을 오해해서 생기는 문제는 아니지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답변]

변증의 필요성


지성인들을 상대로 전도하다 보면 자주 부딪히는 주제입니다. 특별히 기독교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들은 성경구절을 예로 들어가면서 따져오기 때문에 어지간한 신앙 지식으로는 상대하기 힘듭니다. 질문자님이 말씀하셨듯이 신자 쪽에선 너무나 당연한 사안이지라 평소 별반 생각 없이 지내온 터입니다. 반면에 논리적으로 따져오는 상대는 그 주제에 대해서 상당히 따져본 바탕에서 반발하기에 더더욱 논리적 변증에 힘이 부칩니다.

이단들의 경우는 더 당혹스럽습니다. 자기들 주장을 변증하는 기법과 또 관련 성경구절에 대해 집중적으로 교육시키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들의 변증은 잘못된 혹은 문자적 해석을 끝까지 고집하거나, 말꼬리 잡기 궤변이거나, 자가당착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데도 정확히 그런 약점을 집어낼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만 틀린 것이 아니라 논리적 흐름에도 결정적 하자가 있는데도 미처 알지 못합니다. 질문자님이 상대하신 그 대학생의 논리 구성에도 분명 그런 모순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간 한국교계에선 믿음지상주의만 교육시켜 왔습니다. 지성적 논리적으로 파고들면 마치 잘못된 신앙인양 오도했습니다. 지성적 깨우침이 결코 신앙이 될 수 없지만, 이미 확고한 믿음을 가진 자는 지성적으로도 진리를 깨우쳐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자기가 믿는바 구체적 내용을 스스로도 온전히 알지 못하고 믿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을 하되."(벧전3:15) 성경은 진리 변증이 전문 신학자만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라 일반 신자도 믿는 이유를 정확히 알아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잘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확고하게 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변증만으로 상대에게 믿음이 생기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마음을 열 수 있는 유력한 방도는 됩니다. 무엇보다 상대로 하여금 신자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타당한 근거가 충분히 있다고, 최소한 건전하게 믿고 있다고 여기게는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변증을 통해 무엇보다 본인의 신앙이 더 견고히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 확신한 것만 아니라 배운 것에도, 그것도 먼저 강조하면서 거하라고 합니다. 이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믿지만 말고 교훈, 책망, 바르게 함, 교육에도 적극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논쟁의 초점이 다르다.

학술 토론을 할 때는 반드시 당사자들 사이에 사전에 합의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주제와 범위와 방법 등을 정하고 또 각자가 사용할 용어들의 정의부터 확실히 해두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쪽은 A를 말하는데 저쪽은 자꾸 B로 딴 죽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둘 중 누구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말하는 A와 B의 영역에선 분명히 옳은 것을 주장합니다. 단지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기에 아무래도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올바른 결론을 내리지 못할 뿐입니다. 또 그래서 서로 옳다고 우길 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마땅히 반박할 여지가 없습니다. 질문하신 이 경우도 그 대학생의 반박도 틀리지 않고, 질문자님의 변증도 옳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 해결책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 토론하고 있으므로 가장 먼저 동일한 하나의 영역 안으로 토론을 옮겨야만 합니다. 그래야 누가 옳은지 그른지 알 것이고 또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학술 토론이 아닌 전도에서 그러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가뜩이나 골치 아프고 싫어하는 예수 믿는 문제를 논리적으로 토론하자고 덤비면 아예 귀를 닫아버릴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도자가 구태여 의도하지 않아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고 조금이라도 알아본 상대라면 그쪽에서 먼저 논쟁으로 이끌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논쟁을 거는 그들이 아닙니다. 상대가 전도를 들어주는 것만도 감사해야 합니다.

전도자부터 토론자로서 온전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변증할 주제에 대해 그 내용은 물론 토론할 범위와 방식과 용어 등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궤변이나, 말꼬리 잡기에 말리지 않는 대신에 그 논리적 모순을 캐치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꽤 어려운 문제이지만 자주 접하는 반발에 대해선 적절한 변증을 구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토론의 범주는 무엇인가?

질문하신 경우 토론의 주제와 범위 등이 서로 어떻게 다릅니까? 쌍방이 주장하는 A와 B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먼저 질문자께서 "머리를 가리는 문제는 단순히 문화적 차이의 문제이지만 동성연애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할 수 없다."라고 변증한 것은 아주 잘한 것입니다. 서로 다른 차원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따지고 들어갔어야만 했습니다.

상대는 동성애나 머리 수건이나 둘 다 문화적 차이라고만 여겼습니다. 자연히 문화적 차이는 시대 장소 사람에 따라 변할 수 있고 그 변함에 문제 삼을 만한 도덕적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또 그 주장에 하자가 없어 보입니다. 예컨대 재즈 좋아하는 미국 남부 사람과 요들송을 부르는 스위스 사람을 선악과 우열로 따질 계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 두 주제는 “진리와 그 적용”이라는 차원에서 따져야 할 사안입니다. 모든 문제를 문화의 영역에서만 논하려 드는 불신자의 기본 관점을, 최소한 토론의 범주를, 진리의 차원으로 옮길 수 있도록 변증해야 합니다.

진리란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적용은 문화적 차이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진리는 문화에 따라 적절히 적용하되 그 진리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적용이 그 근거가 되는 진리와 위배된다면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를 문화적 차이로 이해하고 그쳐선 안 됩니다. 이는 알다시피 자기 머리 위에 남편이라는 주권자가 따로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 당시에 맨 머리로 다니는 창녀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머리에 수건 쓰는 것 자체가 영원한 진리나 계명이 아닐 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도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아내는 남편과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순복해야 하며 정절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진리를 당시 상황에 적용한 실례(實例)가 여자는 교회 안에선 수건을 쓰라는 것입니다. 이런 적용 방안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오늘 날도 교인들이 원한다면 교회에서 남자는 모자를 써서 자기 위에 하나님만, 또 여자는 수건과 모자를 함께 써서 자기 위에 남편과 하나님이 있다는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성적 고결함을 유지해야 하는 윤리나,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유별나게 지으시고 서로 돕게 했습니다. 하나가 없는 반쪽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또 기본적으로 모든 동식물을 종류별로, 성적(性的)으로 따지면 각기 고유의 생식수단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의미임, 만들었습니다. 이런 질서를 어기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라는 것이 동성애와 관련된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도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이 그분이 반드시 있어야 하도록 정해 놓은 위치, 신분, 자세 등에서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남자가 여자가 아닌 남자를, 여자도 남자가 아닌 여자를 성의 대상으로 삼으면 사람과 세상 앞에 보다는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결혼제도를 창안한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에 윤리적 차원을 넘어 그분을 직접 부인 거부한 죄입니다.

수간(獸姦), 간음, 혼음, 강간 등의 성적 범죄를 레위기 20장에서 가증한 범죄로 간주하는 것도 같은 차원입니다. 수간은 인간은 인간끼리 교접해야 함에도 동물과 상관했고, 어떤 방식의 간음도 하나님이 맺어준 배우자만의 관계를 깨뜨린 것이고, 혼음은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함을 위반한 것이며, 강간은 진정한 사랑에 바탕을 둔 자발적 성관계가 아니기에 죄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성애를 금한 것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동성애를 포함 모든 성범죄가 "하나님이 정한 위치를 벗어나지 말라"는 진리를 잘못 적용했기에 죄인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선 죄를 인간끼리 서로 해를 입혔느냐 여부만 따집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죄가 아닙니다. 성(性)이 가정 안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부부간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통로로 그분이 주신 아름답고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아기 낳는 수단이거나 쾌락만 위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서로 합의만 하면 어떤 방식으로 성을 즐기든 죄가 되지 않습니다. 상대와 합의 없이 이뤄진 강간만 죄이지, 이젠 간음마저 각자의 배우자와 가족에 미친 피해는 아예 계산도 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에서 여자가 머리에 수건 쓰는 것과 동성애를 금지한 것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본질적 부차적 문제로 여겨서도 사실은 부족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라는 영원한 진리는 따로 있습니다. 동성애는 그 진리 자체를 위반했기에 아무리 시대와 상황이 바뀌어도 죄인 반면에, 머리에 수건 쓰는 것은 방식은 아무리 바뀌어도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만 잘 반영되면 죄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구절들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혹은 본질적 부차적 주제로 나뉘지 않습니다. 어느 구절은 확고히 지키고 어떤 구절은 적당히 타협해도 된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를 선포한 구절과, 그 시대 삶에 실제 적용해야 할 구절로만 나뉠 뿐입니다. 적용구절들은 기록할 당시 사람들에게 당장 읽혀지고 또 그대로 순종시킬 필요에 따라 작성되었을 뿐 아니라 진리에 위배되는 적용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시대상황에 달리 적용될 수 있는 구절들도 반드시 그 진리부터 따져야만 합니다. .

진리와 문화

그런데 진리는 변하지 않고 그 적용만 문화에 따라 바뀌고 또 그런 문화적 차이가 선악은 물론 우열의 문제조차 아니라는 데에는 신자나 불신자나 이견(異見)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떤 유사한 논쟁에도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모두가 동의하는 전제입니다.

살펴본 대로 그 학생의 첫째 오류는 머리에 수건 쓰는 것 자체를 성경이 말하는 진리라고 여긴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 그 적용인데도 진리라고 전제하고 모든 사고를 진행시켰습니다. 필연적으로 현대교회가 그 진리를 지키지 않으니 진리는 문화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언뜻 당연해 보이는 결론도 내렸습니다. 또 그래서 성경이 동성애를 금하는 진리도 이제는 문화가 바뀌었으니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적용해버렸습니다.

이 진술에서 그의 논리구성에서부터 오류가 있다고 서두에서 말씀드린 제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문화가 바뀌었으니 진리도 바뀌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지 않습니까? 진리는 바뀔 수 없다는 스스로 인정하는 전제마저 뒤집는 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동성애 금지도 대부분의 신자마저 미처 몰랐듯이 머리 수건 쓰는 것과 같이 진리의 적용에 해당됩니다. 또 진리를 바르게 적용하면 동성애는 마땅히 죄로서 금지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다른 적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일한(필연적으로 절대적 배타적 의미가 됨) 적용이기에 기독교 내부에선 마치 진리처럼(질문자님 말씀대로 하면 본질적 문제처럼) 이해합니다. 대외적으로는 동성애를 비난 일변도로만 대하는 아주 고집 센 근본주의로 오인되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해도 된다는 해석은 문화적 차이에 따른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도 시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불신자들이 잘못된 논리 전개에 따라 내린 잘못된 결론일 뿐입니다. 이는 전혀 진리와는 거리가 먼 진술입니다. 신자 불신자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진리는 앞에서 말씀드린 전제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진리도 시대와 따라 바뀌어야 한다는 너무나 엉터리 같은 주장을 문화적 차이라는 말로 그럴싸한 말로 포장 호도한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성경의 무오류성을 믿지 않고 인간이 저작한 일반적 책과 같다는 변할 수 없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불신자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문화적 차이는 성경의 진리를 잘못 적용한 정도를 넘어 성경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므로 마땅히 뜯어고쳐져야 할 대상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반하면 죄”라는 성경의 진리가 바뀌지 않는 한에는 동성애 금지는 포기되어선 안 되는 “진리의 적용”입니다. (일부 기독교계가 이 진리와 적용에도 일치를 보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유감입니다. 그러니 불신자들마저 부화뇌동합니다.)

그 학생의 주장하는 바는 성경의 모든 규정을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다른 규정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데까지 비약됩니다. 역으로 말해 문자적 규정 자체가 진리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머리에 수건 쓰는 것은 문화적 차이라고 해석해놓고선 결과적으로 그마저 진리라고 말한 셈입니다. 말하자면 진리와 적용, 문화적 차이와 영적 진리 혹은 계명 등을 아무런 구별 없이 혼동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정작 문제는?

바꿔 말하자면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신자와 불신자 간에 인식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그 적용은 물론 적용의 선악여부에 대한 판단도 달라질 뿐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문화적 차이가 진리마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해석 적용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산물이 문화적 차이일 뿐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수긍하고 합의하려 노력할 문제가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서로 사랑하자는 식의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문화가 진리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부터 합의 하지 않는 한에는 그런 노력은 아예 출발조차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믿는 진리가 다름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종교다원주의가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을 다루는 절대 진리가 여럿일 수는 없기에 다름을 인정한 후에는 과연 어느 쪽이 진짜 진리인가는 계속 따져 봐야 합니다. 또 절대적 진리라고 확신하는 측에선 그 진리를 절대 포기 수정 타협해선 안 될 뿐 아니라 그러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우주의 주인으로 자유의지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고 믿고 또 그것을 목적으로 삼는 불신자는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 되심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주제도 결국 다람쥐 쳇바퀴 도는 논쟁만 될 뿐입니다. 최소한 불신자들이 상기에 풀어서 설명한 진리와 문화적 차이의 관계를 제대로 깨닫고서 자신들의 논리적 허구를 인정하지 않는 한에는 토론이 진행될 수 없습니다. 아니 전도자부터 정확히 알지 않고는 함부로 논쟁을 하려 해선 안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래서 믿는 이유를 꿰뚫고서 물으면 답변은 해주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온유는 이해되는데 왜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입니까? 전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려내는 천하보다 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사람의 지혜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 영혼을 바꿔주어야 가능할 뿐입니다. 질문자께서 상대했던 학생처럼 하나님과 성경을 기본적으로 인정한다면 기독교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자의 논리흐름에 오류가 있다는 변증까지는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증만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실상 믿음이 생기면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음이 믿음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님의 경우처럼 이런 사안들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별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되고 또 둘 필요도 없습니다. 지성적 불신자가 논쟁을 걸어 와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부터 먼저 전하시고 어떻게 하든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어 품어달라고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전에는 가능한 논쟁은 피하시고, 피치 못할 경우가 생긴다면 진리와 문화가 다르다는 원리부터 납득시킨 후에 세부적인 주제로 접근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세부적, 실제적, 결과적 문제에서 토론을 시작하면 아무 쓸데없는 논쟁에 휩쓸리게 마련입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에서부터 논리가 전개되어야지 그 순서를 거꾸로 해선 안 됩니다. 요컨대 신본주의(특별히 절대적인)와 인본주의는 물론 유사신본주의는 아무리 휘저어도 섞이지 않는 영원한 물과 기름이라는 뜻입니다.

 

WHY JESUS ONLY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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