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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리 (창 9:20-27)

by 【고동엽】 2021.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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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리  (창 9:20-27)

나 자신이 나를 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되며 어떤 것입니까? 의외로 사람은 자신을 잘아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을 잘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이 경험한 삶에 대한 자기 판단인 것이며 자신의 약점에 대한 것이 더 많은 것입니다. 자신의 특권 곧 자기 자신에 대해 감사하고 싶은 것은 별로 찾으려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생각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권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리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해주시는 자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 곧 나 자신에게도 특권이 있음을 발견하여 그 삶을 번성케 해 주시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도 특권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여 나의 세계를 밝게 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경속에 있는 나의 축복이요 나의 삶속에 예비해 두신 감추어진 둥지입니다. 이 둥지를 발견하는 사람만이 그곳에서 천국의 보화를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 축복의 둥지를 열어 보이시는 자리입니다.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앞에 범죄하여 하나님이 홍수로 인간세계를 심판하시므로 지구상에는 노아라는 사람의 여덟식구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식구가 일년동안 포도농사를 지어 즐거워하면서 잔치를 하는데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술 주정을 한것입니다. 낮에 옷을 벗고 집에서 잠을 잔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때 그 아버지를 대하는 세 아들의 자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아버지의 자리가 자녀들의 축복의 둥지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허물이 보이면 복된 가족의 자리는 무너집니다(21).

일반 사회와 가정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자신의 삶속에 새로운 시각과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자가 되고, 고개숙인 아버지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사회는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우리사회를 받쳐주는 힘이 됩니다. 기준이 없는 사회는 어떠한 생산적인 자리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 자리는 결코 인간 삶을 안전하게 세워주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일컬어 잣대라고 말합니다. 이 잣대에 맞추어 모자라면 도태당하고 넘쳐 나면 자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경쟁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라는 공동체는 분명한 기준위에서 사랑과 협력을 해야 든든히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잣대가 우선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잣대가 필요한 것은 누구에게 맞추어야 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정은 누구에게 맞추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하는 곳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맞춰서 태어나게 하지 않았고, 자식도 부모를 맞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가서 맞추는 잣대가 나타나고 그때부터 가정에는 아픔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허물이 제일많이 보여지는 자리가 가정인데 그곳에다 잣대를 들이대면 모두가 상처투성이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술에 취하여 실수한 아버지를 자기 잣대로 재는 자식이 있으므로 아버지의 자리는 너무나 초라하게 된것입니다. 허물이 크게 보인다는 것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신호가 됩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속에 허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모두의 자리는 수치심이 생기게 되고 가장 심각하게 도전 받는 것이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2. 부모 곧 아버지의 자녀로 자신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22-23).

  사회는 법이 강해야 민주사회로 발전하게 되고 가정은 허물을 받아 줄 수 있을때에 견고하게 세워지게 됩니다. 본문의 노아 가정에도 허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인간의 잣대로 바라 본 둘째 아들 때문에 가정 곧 아버지의 자리가 무너지는가 싶더니 그러나 그 아버지를 세워주는 자리가 있어서 고통이 그 가정을 덮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자리는 아버지의 자녀로 자랑스럽게 자신을 세우는 첫째와 세째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부모의 자녀 곧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복을 찾을 수 있을 때에 자신의 삶속에 복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허물을 밖에 나가서 폭로 했으나 첫째와 세째아들은 그 허물을 덮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었다기 보다는 그것을 허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아름답게 하며, 가정을 복되게 하고, 자신을 명예롭게 해줍니다. 이 자리를 찾을 수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의 삶속에 새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고 그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힘을 얻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을 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 할것이라(사49:15)"라고 했고,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 때 자신을 힘있게 세울 수 있으며 아버지 곧 부모가 있는 자녀는 외롭지 않습니다.

3.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자녀가 세상을 복되게 살아갑니다(26-27).

  부모의 존재 곧 아버지의 존재는 자녀로 하여금 세상에서 복을 받을 자로 세워주시는 분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축복 할 수 없다면, 아버지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산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자신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것 밖에는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부모 곧 아버지에게 주신 축복권에 대한 자리입니다. 그 축복권이 나에게 행사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관계가 아닌 부모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특별한 관계 곧 부모님의 자리를 허물지 않을 때에 있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은혜와 첫째되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부모를 주신 은혜이며 하나님은 그 부모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통로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못 해석하면 부모가 축복권의 주체인 것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축복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그 축복권이 나에게 열려지는 통로는 인간적 관계를 복되게 할 때에 열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그 통로가 막힌 것이요 첫째와 세째는 그 통로가 열려진 것입니다. 아버지가 축복하는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자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중심입니다. 아버지의 자리를 아름답게 하는 자녀로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살아계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  론
  성도는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영혼이 잘되어야 육신의 복이 나를 아름답게 합니다. 아버지의 자리를 넓게 하여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자녀로 세상을 복되게 살아갑시다.  
(설교/ 공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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