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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북미 개혁신학의 동향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의 특성과... | 개혁주의신학

by 【고동엽】 2021. 11. 9.
span>20세기 후반 북미 개혁신학의 동향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의 특성과 그 기여를 중심으로

이 승 구 박 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제 1 부: 개요

"개혁 신학"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작업의 범위가 상당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개혁 신학"이란 말에 대해서 크게 3가지 다른 용례가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가장 포괄적인 용례로 종교 개혁적 신학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16세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적 전통을 유지하는 모든 신학이 이에 포함될 것이다. 천주교 신학(Roman Catholic theology)과 동방 정교회의 신학(Greek Orthodox theology)와 대조되는 개혁파 신학, 루터파 신학, 성공회의 저교회파 신학, 심지어는 재침례파의 과격한 종교 개혁의 신학까지가 이에 포함될 것이다.

두 번째 용례는 종교 개혁적 신학들 가운데서 루터파나 과격한 종교 개혁파 신학과 대조되는 칼빈의 신학적 전통을 유지하거나 그 전통으로부터 나온 신학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전통을 따져 볼 때에 (즉, 어떤 신학이 과연 어떤 전통에서 나온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개혁 신학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용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나 에밀 부룬너의 신학은 이렇게 전통을 따질 때에는 천주교 신학도, 루터파 신학도 아니고 개혁파 신학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도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에 가깝게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톰 토랜스의 신학, 오토 웨버의 신학 등도 개혁 신학인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개혁 신학"이라는 말을 이런 용례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프레드 끌로스터가 잘 말하고 있듯이, 그들 나름의 독특성을 지닌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의미는 세 번째 용례에 따르는 것인데, 이는 전통적 개혁파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 그 전통적 특성, 특히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점, 제한 속죄를 받아들이는 점, 구원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독력주의'(monergism)를 받아들이는 점등을 포기하지 않고 그 특성을 계속 유지하려는 신학만을 개혁신학으로 부르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 후반을 살고 있는 20세기 전체에 걸쳐서 이런 의미의 개혁 신학이 어떤 발전과 기여를 하였는지를 일일이 다 검토한다는 것은 아주 커다란 작업이 될 것이다. 나에게 맡겨진 북미 개혁신학의 동향을 살피는 일만 해도 어떻게 그 작업을 다 할 수 있으려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챨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제임스 헨리 똔웰(James Henry Thornwell, 1812-1862), 알키발드 알렉산더 핫지(A. A. Hodge, 1823-1886), 댑니(Robert Lewis Dabney, 1820-1898),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등의 19세기 미국 개혁신학자들과 월필드(B. B. Warfield, 1851-1921),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1962-1949),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 등과 같은 20세기 초반에 크게 활동했던 미국 개혁 신학의 거성들이 이루어 놓은 작업에 근거해서 20세기 후반, 즉 1950년대 이후 북미에서의 개혁 신학의 발전과 기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만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I. 기존의 개혁 신학적 틀 안에서의 발전: 머레이와 안토니 후크마, 그리고 데이비드 웰즈

II. 보다 철저한 개혁 신학의 추구: 코르넬리우스 반틸과 그 후계자들

III. 개혁 신학을 하는 새로운 범례의 제시: 스파이크맨과 리쳐드 린츠

IV. "개혁파 인식론"의 발전: 알빈 플란팅가와 니콜라스 월터스토르프


제 2 부 :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 작업의 특색과 기여

기존의 개혁신학의 틀 안에서 개혁신학을 미국서 잘 발전시킨 20세기 후반의 신학자들로는 역시 웨스트민스터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죤 머레이와 칼빈 신학교의 조직 신학 교수였던 안토니 후크마, 그리고 고오든-콘웰 신학교의 역사 신학과 조직 신학 교수인 데이비드 웰즈를 들 수 있다. 머레이는 학생들이 성경 이외의 체계에 붙잡히는 것이 두려워 독립적인 조직 신학 책을 쓰지 않았고, 후크마는 그의 칼빈 신학교 조직 신학 교수 시절 말년에 종말론에 대한『성경과 미래』를, 그리고 그가 은퇴한 후에야 인간론, 그리고 구원론에 해당하는 조직 신학 책을 써내었다. 머레이가 체계적인 조직 신학 책을 써주었거나, 후크마가 더 오래 살아서 조직 신학의 나머지 부분을 다 완성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후크마는 비교적 머레이의 작업을 잘 반영하면서 작업하였다고 판단되므로 이하에서는 주로 후크마의 작업을 중심으로 논의하도록 하겠다.

물론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에는 이전의 개혁 신학자들, 특히 칼빈과 계속해서 그의 정신적인 스승이요 그의 언약 사상을 박사 학위 주제로 삼았던 헤르만 바빙크나 그의 동료요 전임자인 벌코프의 깊은 영향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신학을 진술하는 형태나 그의 새로운 주장들에는 이전의 신학자들과 비교할 때에 상대적으로 다음과 같은 독특성을 드러내면서 작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비교적 성경에 대한 체계적 주해를 신학에 좀더 많이 반영하고, 주해에 좀더 철저한 작업을 한 것; (2) 신학적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좀더 성경의 용례를 중시한 점; (3) 신약학자들이 잘 밝혀 낸 하나님 나라 사상에 좀더 충실한 형태의 조직신학을 제시한 것;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통적 개혁신학의 장점에 충실한 신학을 현대의 상황에서 창의적으로 제시한 점. 이와 같은 점에서 그의 조직신학적 작업은 20세기 개혁신학의 진정한 발전과 진보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근자에 상당히 개혁파적 입장에 서서 조직신학 책을 저술한 그루뎀의 작업과 비교할 때, 후크마의 작업은 발전과 진보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는 데 비해서, 그루뎀의 작업은 좀더 현대에 작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점과 좀더 평이한 진술을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신학에 좀더 친근히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 외에는 과연 현격한 진보의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으려는지 의문을 표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사역 문제 등에 대한 입장 표명 등과 관련하여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는 과연 철저히 개혁파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점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주해 과정을 드러내는 신학의 제시

이전의 신학자들도 주해에 근거한 신학을 하였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보스의 조직신학이 그러하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벌코프의 신학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크마는 이런 전통을 받아들이되 이를 더욱 분명히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이전 신학자들이 주해에 근거해 내린 결론을 중심으로 조직 신학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비해서, 후크마는 실제 신학을 진술할 때에 주석을 쓸 때와 같이 그 구절과 관련된 모든 점을 다 철저하게(comprehensively) 할 수는 없지만 이 주해의 과정을 필요한 만큼 드러내면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3부작 전체에서 이점이 잘 드러난다. 특히, 종말론과 구원론을 다루는 데서 이 점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제 그의 이런 주해 작업을 드러내면서 신학을 제시하는 몇몇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아담에게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 후크마는 아담이 불순종한 날 죽지 않은 것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견해는 죽음의 심판에 즉각 시행되지 않고 연기된 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때문이라고 보는 바빙크, 카이퍼, 알더스 등의 견해이다. 그리고 두 번째 견해는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관용어임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게할더스 보스의 견해이다. 보스는 이 관용구의 다른 예로 왕상 2:37과 출 10:28을 든다. 이 두 절 모두에서 "~하는 날에는"이라는 말은 "~하면 반드시"란 뜻이라는 것이다. 후크마는 이 둘 모두가 가능한 해석이라고 보면서도 두 번째 견해가 더 개연성이 높은 듯하다고 한다(The Future, p. 81; God's Image, p. 138). 이처럼 후크마는 성경 주해에 좀더 유의함으로서 좀더 나은 입장을 제시할 수 있었다.

(2) 성경 주해를 드러내며 작업한 좀더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중간상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검토하면서 논의하는 빌립보서 1: 21-23에 대한 주해이다. 이 구절이 죽음에 대한 바울의 기대보다는 부활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으로 23절에 나오는 "떠나서"라는 단어가 '아나루사이'( )로 죽음의 순간적 경험을 묘사하는 부정과거 부정사라는 것을 지적한다(The Future, p. 104). 또한 와 같이 두 동사가 한 관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부정사들이 나타내는 동작들이 한 가지 일의 두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문법학자들의 견해에 근거해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그가 떠나서 죽는 순간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순간이라고 후크마는 논의한다(The Future, p. 104). 후크마는 이처럼 구체적인 주해의 과정을 자세히 드러내어 논의를 분명히 하고 있다.

(3) 성경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인간을 영혼과 몸의 통일체로 보는 견해가 옳다는 것을 잘 드러낸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종말론을 쓸 때에는 베르까우어에 의존하며 그가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잘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하던 그가(The Future, p. 95) 후에 인간론을 쓰면서 이 점을 아주 온전히 잘 드러내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영육 통일체(psychosomatic unity)라고 부르기를 즐겨 한다. 그는 자신의 이런 용법이 죤 머레이에게서 온 것임을 즐거이 밝히고, 브로밀리와 스톱도 같은 견해를 나타낸다고 밝히고 있다(God's Image, p. 217, n. 59). 그는 또한 이렇게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이해하는 것의 실천적 의의도 잘 고찰하며 밝혀 내고 있다(God's Image, pp. 222-26). 이런 입장에 따라서 후크마는 바빙크와 리쳐드 마우에게 동의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전체로서의 인류 안에서라는 것을 강조한다(God's Image, pp. 99-101). 이는 후에 구원론에서 카이퍼, 월터스 데이비드 모베르그, 리쳐드 마우 등에게 동의하면서 성화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점(Saved by Grace, pp. 228-31)과도 잘 어울리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4) 머레이의 논의에 의존하면서 주해 작업을 잘하여 우리의 이해를 크게 진작 시킨 예로 에베소서 4:22-24에 대한 후크마의 설명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이 문장 속의 세 가지 부정사(즉, "벗어버리다"는 뜻의 "아포떼스따이"[ ], "새롭게 되다"는 뜻의 '아나네우스따이'[ ], 그리고 "입다"는 뜻의 "엔두사스따이"[ ]를) 많은 영역 본이나 한글 개역과 같이 명령형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머레이가 제시하는 것처럼 결과를 나타내는 부정사 혹은 설명형의 부정사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한다. 그래서 후크마는 이 세 부정사 모두가 주동사인 21절의 "너희가 가르침을 받았다"( )에 의존한다고 한다(God's Image, p. 26f.). 따라서 이 구절은 NIV와 같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새롭게 되어 ...... 새사람을 입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론에서는 이 문제를 좀더 길게 논의하면서 왜 머레이와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옳은지를 잘 밝혀 주고 있다(Saved by Grace, pp. 209-13). 이는 결국 신자 안에 새사람과 옛 사람이 현존하고 있어서 싸움하고 있다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의 견해에 반하며, 이를 주해를 통해 교정하는 것이다.

후크마는 이렇게 주해에 근거해 작업하므로써 선배 신학자들의 견해를 잘 비판하고 수정하며 보다 성경적인 견해에로 이끌어 간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아주 조심스럽고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을 다 제시하면서 부드럽게 논의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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