改革主義 聖經神學과 說敎
이승구 敎授
개혁 신학적(改革 神學的) 관점(觀點)을 가지고서 성경신학(聖經神學)을 하는 분명한 모델을 제시한 개할더스 보스(G. Vos)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모임을 갖고 있다. 아라빅 연구(Arabic studies)로 스트라스부르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1888), 현재 칼빈 신학교의 전신인 기독교 개혁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비롯한 폭넓은 신학 분과를 가르치고 강의하던 그가 1893년 초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성경신학 교수로 초빙 받고서 그가 은퇴할 때(1932)까지 39년 동안 성경신학을 강의하여 그 기록을 우리에게 큰 유산으로 남겨 놓은1) 보스는 개혁신앙을 가지고서 신학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많은 개혁신학자들에게 깊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고서 신학적 작업을 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을 몇 명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의 성경 신학적 통찰을 변증학과 기독교 윤리 영역에 적용시킨 코르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2) 사실 그는 보스를 무척 존경하여 그의 연구실에 보스의 사진을 늘 걸어 놓았다고 한다.3) 그리고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준 이로서 보스의 성경신학을 신약신학 영역에서 계승하여 발전시키며 이제는 이를 조직 신학 영역에도 적용하고 있는 리쳐드 개핀(Richard Gaffin, Jr.)을 들어야만 할 것이다.4)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접근에 가장 유사한 모범을 보여준 이는 최낙재 목사님일 것이다. 그리고 개핀과 함께 조직신학에 있어서 소위 보스적 접근(Vosian Approach)을 하고 있는 이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런 용어가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그 내용에 있어서 그런 작업을 하여 보스의 성경 신학적 이해,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와 기독론적 이해를 신학에 잘 반영한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5) --사실 벌코프의 조직신학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얼마나 보스적인 성경신학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지를 잘 의식하고 있는 이들이 드물다. 많은 이들은 그저 교과서적인 그의 진술 양식에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쟌 머레이(John Murray), 그리고 보스적인 신학을 다음 세대의 복음주의 신학이 모델로 삼아 추구하고 나가야 할 신학이라고 제시하는 리처드 린츠(Richard Lints),6) 그리고 기독론 분야에서 이를 잘 적용하고 좀더 폭넓은 글들을 써서 그런 접근의 기반을 다지고 있는 데이비드 웰즈(David F. Wells)7) 등을 이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실천 신학 특히 설교에 있어서 보스적인 성경신학을 잘 반영해 보려고 한 에드문드 클라우니(Edmund P. Clowney)를 들어야 한다.8)
시작하는 말: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설교에 대한 함의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보스적 성경신학을 우리의 신학과 목회 사역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일을 좀더 구체화시켜 보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의 첫째 과제로 우리는 이 논문에서 보스적 성경신학이 우리의 설교 사역에 주는 함의를 찾아 보려고 한다. 이는 결국 어떻게 하면 우리의 설교가 진정한 개혁파적 설교가 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한 측면을 다루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보스는 진정한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수립해 보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성경 신학적 노력이 반영된 설교 사역은 진정한 개혁주의적 설교 사역이 될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설교 사역에 대한 함의를 찾는 이 일의 첫째 작업인 이 논문에서는 보스가 보여준 바와 같은 개혁주의 성경신학에 대한 탐구가 우리의 설교에 어떤 도움과 지침을 주는지를 아주 일반적인 용어로 진술해 보려고 한다.
(1)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섬기는 일로서의 설교에 대한 인식 강화
가장 먼저 '보스가 제시한 바와 같은 성경신학'(즉, '개혁주의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계시 앞에 우리를 세운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스의 정의에 의하면 성경신학이란 "특별 계시의 역사"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9) 계시사에 관심 하는 성경신학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로 하여금 계시의 독특성 앞에 서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 자체의 성격이 본래 그러한 것이지만 개혁주의 성경 신학적 관심을 반영한 설교를 하려는 이들은 가장 먼저 설교란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된 것임을 각별히 유의하게 된다. 여기서 개혁주의 성경신학과 개혁주의적이지 않은 성경신학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이는 보스가 말하고있는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세 가지 원칙을 생각할 때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그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계시의 무오한 성격에 대한 인식("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고, 의식적이시라면, 당신 님의 모든 자기 계시 양식에 있어서도 당신 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한 무오한 표현을 할 것이라는 추정은 불가피하다"10) (2)계시의 기본 사역의 객관성("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계시는 밖으로부터 옮을 의미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계시를 주셨으면, 그것을 어떤 형태로 할 것인가를 [즉 객관적인 방식으로 할 것인가, 시편 등에서와 같이 주관적 계시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의 말씀을 충분히 신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11)); (3)기록 과정에서의 만전영감(plenary inspiration: "이 문제에 대한 성경 자체의 의식을 생각하면 우리는 곧 '만전 영감'이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영감된 것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12) 그러므로 이런 원칙을 가지고 계시의 역사를 드러내고 탐구하는 것이 개혁주의 성경신학인 것이고, 이런 원칙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개혁주의적이지 않은 성경신학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성경신학에 유의하면서 설교를 하는 이들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성문화시킨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고 그 뜻을 해명하는 것이란 의식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오늘날 하나님의 특별 계시와 접촉할 수 있는 수단이 성경뿐이듯이,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세상에 선포하는 귀한 사역이라는 강한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Vervum Dei Minister)에 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에 유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를 곡해시키거나 오용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큰 범죄 행위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잘 파악하고 그 시대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하는 교회를 해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할 때에 무엇보다 먼저 이 설교 사역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분명히 하고, 밝혀주고, 해명하는 일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할 때에 이런 설교의 본래적인 사명에서 벗어나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일까? 첫째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본문의 강조점과 상관없는 다른 것이 강조될 때에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지 못하는 것이 된다. 시드니 그레이다너스가 잘 말하고 있듯이, 설교자가 아무리 성경에 대한 고등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성경 본문을 "독단이나 자기 자신의 개념들을 제시하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한다면, '오직 성경'이라는 고백을 그것을 주창하는 사람이 해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13) "말씀을 섬긴다는 것은 본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회중들에게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 본문이 전달하려는 "특별한 내용"을 찾아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14) 또한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한다고 해도 성경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전달하는 것은 사실상 설교를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시간에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어지럽히는 것만큼 무시무시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그런 죄와 잘못을 회개하기보다는 어찌하든지 은혜만 되면 된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후안무치의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결국 계시를 주시고 그것을 성문화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성경 본문의 풍성한 의미를 다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말씀을 잘 섬기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한 설교 시간에 본문의 모든 측면을 다 말할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상황이나 설교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인간의 제한성을 생각할 때에 한 설교에서는 본문의 한 측면만을 잘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나 연속되는 설교나 몇 년에 걸쳐서 한 교회에서 강설하여 가면서는 결국 본문의 모든 측면을 다 잘 드러내어서 그 본문의 풍성한 의미가 다 잘 드러나게끔 해야만 한다. 클라우니도 개혁파 적인 설교는 결국 "응용된 내용이 풍성할 것이다"(Will be rich in applied content)라고 말한 바 있다.15) 이런 풍성한 설교의 결과로 모든 교우들이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잘 이해하고 그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설교자가 나름의 편견과 제한을 가지고 있어서 본문의 다양한 측면을 다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큰 오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셋째로,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를 때는 우리의 생각을 쳐서 성경의 생각에 복종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오랫동안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 죽은 후에 "천국"(Kingdom of Heaven)에 간다고 생각해 왔고, 성경에서 천국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을 생각해 온 일이 많다. 그러나 보스를 비롯한 성경 신학자들이 성경에 나온 "천국"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를 연구하고서 내린 결론은 천국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실현"과 동의어로 사용된 말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보스의 다음과 같은 강조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숙명도, 그의 통치의 추상적인 권한, 즉 그의 주권(His Sovereignty)도 아닌 것이다. 이는 그의 통치의 실제적 실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만 이는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을 창세전 부터 가지셨으므로, 주권이란 의미의 하나님 나라는 '올' 수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진 신적 최고권의 실제적 행사를 의미한다.16) 그러므로 보스의 성경 신학적 탐구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의 추상적 권한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그런 통치의 실제적 실현인 것이다. 이런 입장은 보스만의 견해가 아니라, 천국에 대한 성경 신학적 연구를 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예를 들어서, 래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복음서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구속적인 행위,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뜻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원리-- 심지어 '신적 통치의 원리'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개념은 너무 철학적이며, 너무 하나님의 활동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이다."17)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핵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 사이에 그의 통치를 확립하기 위하여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라는 것과 세대 말에 묵시론적 행위로 등장할 이 나라가 악을 정복하고, 인간을 이 악의 세력에서 구출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에로 인도하기 위하여 예수의 인격과 사역과 함께 인류 역사에로 이미 임하셨다는 사실이다."18) 또한 칼빈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 취임 강연에서 레커 교수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지 조금만 숙고해 보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어떠하든 간에,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명백해진다. 역사의 말기에 일어날 종말론적이며 완전한 친교, 혹은 이 세대 안에서 갖는 하나님과의 합당한 사귐, 혹은 역사 내에 이루어질 천년간의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 혹은 금세 에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 혹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굴복시키고,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의 세상에 개선하시고, 세상에 대한 그의 주재권을 재 천명하시므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 -- 이러한 모든 것들이 구 속의 도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능동적인 신적 능력을 반영한다.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란 용어는 하나님의 권위의 역사적 표현과 그의 우주의 마지막 구속을 효과 있게 하는 능력을 지칭하는 신약 성경의 요약이다.20)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이 땅과 역사에로 오는 통치이고, 오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보스를 비롯한 많은 성경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잘 정리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이미 원리적으로 실현되었으며, 그의 재림에서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를 것이다. 이런 성경 신학적 연구의 결과는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점차적으로라도 우리의 용어 사용과 설교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이런 성경 신학적 연구의 결과를 도외시하고 우리가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개념과 선입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결국 성경의 계시를 계시답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국은 이 세상에로 침노하여 오는 것이고(신약에 사는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온 것이며), 장차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를 것이며, 이런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고, 극치에 이를 그 나라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실 것이다. 다음과 같은 웰즈의 요약은 지금까지 성경학자들이 발견한 천국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잘 요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찾고, 이를 위해 기도하고, 바랄 수 있으나, 래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이를 가져오실 수 있는 것이다. [눅 23: 51; 마 6:10, 33; 눅 12:31] 하나님 나라를 주시고 취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오직 이를 받고, 이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것일 뿐이다(마 21: 43; 눅 12:32)....우리가 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이 나라를 파괴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것이다....물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는 있으나 이 나라를 수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마 10:7; 눅 10:9, 12:32).21)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는 모든 개념과 사상에 있어서, 심지어 그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이런 성경신학의 발견을 잘 반영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에 종말론적 사역으로서의 설교가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시의 계시로서의 성격에 유의한다는 것은 이 보다 좀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진 방식, 즉 그 역사적 점진성에 유의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다음에는 이점을 언급해 보기로 하자.
(2) 특별계시사에 유의하는 설교
보스적인 성경 신학을 염두에 두면서 설교할 때에 우리가 특히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단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점진적인 계시의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특별 계시사를 반영하는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다. 보스는 이렇게 말한다.
계시는 한 소진적(消盡的) 행위 안에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진적 행위의 긴 과정 중에서 전개된 것이다....왜냐하면 계시는 그것 자체로서 자족하게 서는 것이 아니고, (특별계시에 관한 한) 우리가 구속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다른 행위와 불가피하게 연관된 것이며, 또 이 구속은 역사적으로 계속되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구속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구속이 점차로 전개되듯이, 계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22) 그러나 이렇게 점진적으로 주어진 계시는 유기적인 성격의 계시이므로 계시의 절대적 완전성을 부인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기적 점진성이란 씨형태로 부터 완전한 성장에의 도달을 말한다."23) 그러므로 우리는 유기적 점진성을 가지고 주어진 계시의 역사적 과정을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고, 우리의 설교도 이 과정을 반영해야만 한다. 전문적인 학자가 아닌 목사님들은 전문적으로 특별계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물론 우리 주변에 특별계시사만을 전문적으로 깊이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맺으신 언약이나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를 연구한 이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24) 왜냐하면, 보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역사적 측면을 염두에 둔 개혁파의 언약 교리는 계시사를 구성하려는 첫 시도였고 오늘날 성경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의 선구로 옳게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25)
그렇다면 이렇게 특별계시의 역사를 염두에 두면서 설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첫째로, 어떤 본문을 해석하여 설교할 때에 일차적으로 그 본문이 다루는 그 시대까지 주어진 계시의 빛에서 그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후대에 주어진 계시까지를 염두에 두고서 그 본문을 해석하게 되면 무리한 해석이 많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직 희생제사에 대한 계시가 주어져 있지 않은 시대를 다루는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하면서 그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도출해 내는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와 연관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축출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는 말씀은 분명히 희생제사에 대한 계시가 주어지기 전의 상황이므로 이 본문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대한 표상으로나 그림자로 해석하고26) 그렇게 설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을 하시기 바로 전에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표현되어 있고 그 구원 방식에 대한 암시도 주어지긴 하였다. 바로 원복음(原福音, Protoevangelium)이라고 불리는 '뱀으로 표상되는 사단의 세력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그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 원복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인간들과 사단의 세력 사이에 원수 관계를 설정하시리라는 것, 그 우주적 투쟁에서 결국 여자의 씨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것 등이 시사되고 약속되어져 있다.27) 아담은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이런 약속을 믿었든 싶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내의 이름을 "생명"이란 뜻에서 하와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원 복음에는 아직 이 여자의 씨에 의한 결정적인 승리가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려는 지에 대한 계시나 시사와 암시는 아직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와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것은 그 당시까지 주어진 계시의 내용을 넘어가는 것이다. 키드너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구속을 미리 예견하는 것은 지나치게 나가는 것이고 문맥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28) 따라서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에서 그런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계시사를 생각하지 않고서 아직 주어져 있지 않은 계시를 본문에서 미리 삽입하는 잘못된 해석의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29) 그러므로 이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은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서 축출되는 이들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점에서 세심하게 배려하신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키드너는 이렇게 말한다: "가죽옷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필요하게 된 도덕적, 물리적 복지의 다양한 측면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30)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보존자이심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31)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사건과 관련하여 이런 무리한 해석의 또 하나의 예를 들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을 때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것"(창 4:4, 5)과 연관해서 그 이유를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그 제물을 삼아드린 것에서 찾는 해석이 있어왔는데, 이런 것도 계시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해석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아벨의 제사와 연관해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말씀을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은 그런 시대착오적 해석을 더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많은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일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스코필드 관주 성경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가인의 피없는 제사는 신적인 방식에 대한 거부였다.... 속죄의 피를 흘린(히 9:22)[아벨의]의 제사는 곧 바로 그의 죄의 고백이며, 대리 (희생제)에 대한 그의 믿음의 표현이다(히 11:4)."32) 그러나 희생제사에 대한 계시는 후대에 모세를 통해서 명확하게 주어진 것이다. 혹자는 이 모든 계시가 모세를 통해 주신 모세 오경에 기록되었으니 모세 시대의 계시를 배경으로 하여 보아야 하지 않는 가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그 이전의 역사 자체의 상황과 그 시기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적 의도를 무시한 채 그 계시가 기록된 시기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만을 염두에 두는 또 하나의 시대 착오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희생 제사에 대한 계시가 주어져 있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는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리든지, 양과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리든지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두 가지 제사 모두에 대해 다 같은 단어 "민하"(????????)가 사용되어져 있다.33) 이는 후대의 제사 법에 의하면 폭넓게 사용된 예들도 있기는 하지만(삼상 2:17) 주로 곡물 제사인 소제에 대해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는 아직 어떤 것으로 제사를 드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키드너가 말하는 대로 "피가 없음이 가인의 제물을 무자격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34)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 창세기 본문 가운데서는 그 이유가 주어져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가인의 제물은 그의 소산 중에서 최선의 것이 아니었다고35) 추론할 근거가 본문 가운데에는 없는 것이다. 창세기 본문은 단지 그런 사실이 발생했다는 것과 그런 상황에 대해서 가인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중심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가인이 후에 이 문제에 반응하는 방식에서 제사에 임하는 가인의 마음을 찾아보려고 한다. 즉, 후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은 것은 그가 처음부터 순수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36)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후대의 계시에서만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도 분명한 시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히 11:4)는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아벨의 예물이 열납된 이유가 그의 믿음에 있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주석을 볼 수 있다. 즉, 그 때까지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와 그의 제물이 받아들여진 이유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은 제사를 드렸어도 믿음이 없이 이런 종교적 행위에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마음이 없이 외적인 희생 제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자신들을 우롱하는 모든 허구는 다 불신의 산물임이 언급되어야만 한다."37)
이런 것과 연관된 또 하나의 예로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이 복수형인 것이나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말씀하실 때(창 1:26)나 사람의 타락에 대해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실 때(창 3:22), 바벨탑과 관련하여 "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말씀하신 때(창 11:7), 그리고 이사야를 파송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실 때(사6:8) 등에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쓰신 것 등을 후대 계시의 빛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계시나 그에 대한 시사라고 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계시의 유기적 발전을 생각한다면 삼위일체와 관련해서도 우리는 밴틸과 함께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도 가르쳐졌으리라, 그러나 신약에서 훨씬더 분명하게 가르쳐졌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38) 그러나 위와 같은 예들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찾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월필드는 옛 저자들은 이런 예들과 같은 현상들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시사"(intimations of the Trinity)를 발견했었다고 말한다.39) 그런데 옛 저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런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엘로힘'과 관련해서는 도날드 블뢰쉬가 그런 언급을 한적이 있다. 그는 엘로힘은 "통일성(단일성)안에 있는 신적인 복수성"(a divine plurality in unity)을 함의한다고 말한다.40) 그러나 엘로힘의 복수형에 대해서는 그렇게 까지 직접적인 계시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밴틸은 '엘로힘'이란 명칭과 관련하여 "우리는 최대한 말한다면 그것이 후에 계시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41) 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이는 이에 대해서 "그 자체가 삼위일체를 계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대의 계시의 빛에서 볼 때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는 뜻"이라는 보역을 달고 있다. 그러므로 최대한으로 양보하여 말할 때 후대 계시에 대해서도 적합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도 좀더 조심스럽게 엘로힘이란 명칭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증명을 찾는 것은 "최소한도로 말한다고 해도 매우 의심스럽다"(to say the least very dubious)고 말하는42) 벌코프와 같이 말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엘로힘'이라는 명칭과 관련해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나 시사를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43) 이에 대해서는 델리취가 보고 있듯이 "생명과 능력의 충만함을 시사하는 집중의 복수(an intensive plural)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4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제일 먼저 거부되어야 하는 견해는 이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다신론의 반영으로 보아야 한다는 궁켈(Gunkel)의 견해이다.45) 이에 대해서는 창세기 1장이 가지는 반 다신론 적인 입장을 고려하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부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쓰신 것과 관련해서 고대 유대인 학자 필로를 비롯해서 폰 라트 등이 생각하듯이 "하나님이 자신을 천상적 존재들[천사들] 가운데 포함시킨다"고46) 보는 것도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창 1:26을 그렇게 보면 함의상 인간이 천사의 형상으로도 창조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47) 이 구절의 직접적인 문맥에서 사람이 천사들의 형상으로 언급된 것이 없고, 또한 27절의 단수형이 이런 해석을 불가능하게 한다.48) 비슷한 해석을 하는 웬함은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이 견해에 좀 변형을 시도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만들자'라는 것은 창조의 최종 걸작인 사람에게 만군의 천사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말씀하시는 하늘 궁전에 대한 신적인 선언으로 여겨져야만 한다."49) 그는 이렇게 보는 것이 욥기 38: 4, 7의 말씀과도 일치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는 다음의 언급할 엄위의 복수로 보는 견해와 연관될 수는 없을까?) 사람이 천사의 형상으로도 간주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 있다면 이런 견해가 소위 왕적 선언으로서의 "우리"를 취하는 해석 중에서 가장 나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는 이하에 언급될 하나님의 자기 의논형의 복수형과도 어울릴 수 있는 해석이라고도 여겨진다).
엄위의 복수로 보는 견해들이 현대에 많이 시도된 견해들이다. 떼오도루스 프리젠은 이를 장엄의 복수로 보아 창세기 1:26에 삼위일체에 대한 함의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50) 그런가 하면 이사야 6:8에서는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둘러 싸여진 것으로 보면서 천사들을 포함한 천상회의에서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이해한다.51) 이사야 6;8과 관련해서는 이처럼 천상회의에서 천사들을 포함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1:26 이하와 관련해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그렇게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장엄의 복수로 사용된 예가 없다는 지적들도 있다.52)
미국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웨인 그루뎀도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쓰신 것이 "엄위의 복수"(a plural of majesty)로 볼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하면서,53) 이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하나님 자신 안에 다양한 위격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한다.54) 물론 그는 창세기 기록에는 "하나님의 신격 안에 위격이 몇 있으신 지, 또 온전한 삼위일체 교리에 접근하는 것은 전혀 없고, 단지 한 인격 이상이 관여하고 있음만이 시사되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55) 창세기 1:26과 11:7과 관련해서 벌코프도 그 구절들이 삼위일체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인격의 복수성이 시사되어있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고 한다.56) 이런 표현들이 단도직입적으로 "삼위일체가 함의되어 있다"고57) 말하는 것이나 "신성안에 위격들의 복수성이 있다"고58) 말하는 것보다 좀더 계시사에 유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월필드의 주장도 계시사를 유의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구약 본문에 신약적 개념을 무리하게 넣어 읽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신약 계시의 조명 아래서 구약 본문을 읽는 것이다. 구약은 풍성하게 가구가 놓여져 있으나 조명이 잘 안된 방과 비교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구약에 계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구약 계시 밑에 깔려 있어서, 이곳 저곳에서 보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계시는 그 후에 오는 온전한 계시에 의해 교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더 온전해 지고, 확대되며, 더 넓어진다고 할 수 있다.59) 이런 입장과 연관될 수 있는 좀 복합적이고 독특한 견해는 데렉 키드너의 견해이다. 그는 창세기 1:26의 "우리"라는 복수를 "충만의 복수"(the plural of fullness)라고 보면서, "구약에서는 얼 듯 시사된 이 충만함이 후에 요한 복음 14:23(14:17)의 '우리'에서 삼일체(triunity)로 전개될 것이었다"고 한다.60) 카일도 장엄의 복수와 삼위일체적 견해의 기초적 시사로 보는 견해를 연관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를 장엄의 복수(pluralis majestatis)로 여기는 것 외에 다른 어떤 해석이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이 복수형을] (하나님께서 경외적 이유(reverentiae causa)에서가 아니라, 당신 님께서 가지신 신적 능력과 본질의 충만함을 언급하면서 복수로서 자기 자신에게 자기 자신과 함께 말씀하신다는)가장 깊이 있고 가장 집중적인 형태[의 복수]로 이해하는 해석이다. 또한 이는 절대적 신적 존재 안에 집중되어 있는 잠재력들(potencies)이 하나님의 능력과 속성들 이상의 것이라는 삼위일체적 견해의 토대에 놓여있는 진리이다. 즉, 그것들이 그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후대의 계시의 과정에서 신적 존재의 위격들로서 점점 뚜렷하게 구별되어 나타날 위격들(hypostases)이라는 것이다.61)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너무 지나치게 후대의 계시를 넣어서 이해하는 듯한 이런 해석들도 계시의 진전을 염두에 두면서 진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웬함은 별 논의 없이 단적으로 "원저자에게는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시사]이 복수에서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는 보편적으로 인정된다고 한다."62) 그 자신은 위에서 보았듯이 이 "우리"가 천사들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본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시사가 이 구절에 대한 소위 "충만한 의미"(the sensus plenior)로 있을 수는 있다고 보면서 "신약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함께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다고 보고 있으며, 이것이 초대교회로 하여금 삼위일체적 해석을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으나" 그런 통찰은 분명히 창세기의 기록자의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63)
이 복수를 자기 의논의 복수(a plural of self-deliberation)로 보자는 의견이 제출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 견해를 따른다.64) 이런 견해를 따르면 이 구절에서 신적 인격의 복수성이나 그에 대한 시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의견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세일하머는 비슷한 경우로 인용되는 창11:7에서 복수가 사용된 것은 "우리가 만들자"(창 11:3)는 말과 교차구조적 말장난(the chiastic wordplay) 때문에 "우리가 혼동시키자"는 표현이 나온 곳이며, 창 18:7에서는 그런 의논에 단수가 사용되었다는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65) 그러므로 창세기 1:26 이하의 "우리가"라는 이 복수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복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구절과 관련해서는 (1) 창세기 1:26 이하에 하나님의 인격의 복수성에 대한 함의가 있으나 당시 사람들은 그 충분한 함의를 알 수 없었고, 후대의 계시의 빛에 비추어 볼 때 그 충분한 함의가 나타난다고 보는 견해와 (2) 왕적 선언으로서의 "우리"(royal we), 장엄의 복수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 그리고 (3) 이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시사보다는 하나님의 자기 의논의 복수로 보아야 본문의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견해 등의 해석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지금까지 학자들의 논의는 각각에 대해서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며 논란해 가는 형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논의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논의 할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계시의 진전을 생각하면서 논의하고, 계시의 진전을 반영하는 식으로 진술해야 할 것이다. 특히 반 삼위일체적 해석을 하는 일들도 이런 계시의 진전을 생각하면 sensus plenior 로서 이런 함의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웬함과 같이 열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의 진전을 탐구하는 성경신학의 도움을 얻어서 일차적으로는 당시까지 주어진 계시의 빛에서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계시를 계시답게 받아들이는 일의 한 부분인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는 이 계시의 좀 더 폭넓은 문맥 안에서 그 의미의 진전을 살피는 일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3) 구속역사의 진전에 유의하는 설교
계시사에 유의하는 것은 이 계시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구속사의 진전에 유의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경신학에 유의하는 우리의 설교는 구속사적 설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본문의 구속사에서의 위치를 밝히며, 이 구속사의 최종적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의 관계를 밝히는 설교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될 것이다.66)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무시간적인 접근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구약의 어떤 본문에서든지 그리스도의 모형을 무리하게 찾아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고, 구속사적 성경해석과 설교를 제시한 이들의 생각과 아주 거리가 먼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 정탐군들과 맺은 약속인 라합의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내려뜨려 놓겠다는 것에서,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시대로부터 교회 내에서 많이 시도된 대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서 흘려진 피에 대한 상징이나 모형을 찾아보려는 것은67) 잘못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우드스트라의 말은 시사적이다.
이런 종류의 모형론적 연관은 아주 조심해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사실 신구약 사이의 참된 모형론적 연관 성은 성경 자체의 의식의 빛에서만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형'으로부터 그것이 모형하는 바 사이에 실제로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주의가 요청된다. 그저 색깔이 같다든지 다른 외적인 것들이 같은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은 것이다.68)
이런 주장을 유의하면서 생각한다면 유월절 의식의 붉은 피와 여기서의 붉은 줄을 연관시키는 것도69) 과연 어디까지 유지될 수 있는 생각인지를 물어야 한다. "어쩌면 이 줄과 출애굽 유월절 때에 문에 바른 피 사이의 어떤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런 연관성을 찾는데는 상당한 주의가 요청된다"고 말하는70) 우드스트라의 조심스러운 태도보다 좀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유월절의 붉은 피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모형론적인 관계를 가지며 성경 자체가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여기서의 붉은 줄은 "성경 어디에서도 모형론적 관계를 지닌 것으로 진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71) 그러므로 이 붉은 줄은 "그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라합]의 집을 알고, 그 안에 있는 이들을 살려 두겠다는 표(sign)일 뿐이다."72) 또한 시편의 거의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드러내려고 한 루터의 시도들은 좀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가르침과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사역을 계시답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의 전형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지나치게 나아가지 아니하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본문 자체가 다루고 있는 시기의 구속사적 위치에 끊임없이 유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시대에 주어진 계시의 한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노력을 충분히 한 후에는 이제 구속사의 최종적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 속의 성취의 빛에서 각각의 본문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드러내는 노력을 해야한다. 여기서 과거의 본문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미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구약의 본문이 지금 여기서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구속사적 연관성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 특히 서신서 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시대적 지평, 즉 원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임하여온 "종말의 시대", 즉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시대"라는 지평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는 2000년의 시대적 거리와 과거의 본문에 대한 현대의 해석이라는 해석학 일반의 문제 외에는 별다른 문제를 가지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에게 제시된 형태가 그대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응성 있는 계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신 서에 대한 설교에서의 적용은 비교적 쉬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는 말
우리는 이제까지 개혁주의 성경신학이 우리의 설교에 주는 함의를 간단히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개혁주의 성경신학에 유의하면 (1) 우리의 설교가 참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답게 받고, 전달하는 일이 될 수 있고, (2) 계시의 역사에 유의하면서 주어진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해야하고, (3) 구속사적 진전에서 그 본문의 독특한 위치와 내용을 드러내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 유의하는 우리의 설교는 얼마나 풍성하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을 까? 그런데 이런 제안은 실질적으로 우리의 설교를 돕고 그 사역을 강화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우리의 마음을 좁게 하고 성경의 풍성하고 다양한 내용을 억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이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전달하시고자 하는 풍성한 내용을 다 전달해야만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Vervum Dei Minister)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더 상기하도록 하자.
이 일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겨진 다음 과제는 (1) 보스의 실제 설교문들을 잘 분석하여 그로부터 우리의 설교 사역에 대한 지침을 이끌어 내는 일, (2) 보스적 성경신학에 유의하며 작업했던 다른 저자들의 작품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일에 있어서 가장 먼저 탐구해야할 대상은 클라우니일 것이다), 그리고 (3) 구체적으로 이런 일에 유의하는 구체적인 설교문의 작성과 실행이 될 것이다.
1)그 유산이 바로 그의 강의 노트와 강의록을 책자의 형태로 출판한 그 유명한 [성경신학] 책이다. Cf.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Grand Rapids: Eerdmans, 1948), 한역, [성경신학] 이승구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여기엔 어떤 점에서는 강의록의 냄새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그가 좀더 전문적으로 성경신학 책을 쓸 수 있었다면 이 보다 좀더 풍성한 제시가 있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특히 신약의 계시를 다루는데서 말이다.
2) 그의 많은 저작이 그러하지만 보스의 영향을 특히 잘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들로는 다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Cornelius Van Til, Christian Theistic Ethics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80), Chapters 5, 10: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71), especially Chapter 6. 또한 이를 잘 보여주는 글로 E.P. Clowney, "Preaching the Word of God: Cornelius Van Til, V. D. M," Wesminster Theological Journal 46(1984): 233-53, 한역, in 한 제호, [성경의 해석과 설교] (서울: 진리의 깃발, 1995), pp. 410-40, 특히 pp. 413, 430을 보라.
3) Richard B. Gaffin, Jr. "Geerhardus Vos and the Interpretation of Paul," in Jerusalem and Athens: Critical Discussions on the Philosophy and Apologetics of Cornelius Van Til, ed. E.R. Geehan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1), p. 228.
4) 그의 여러 저작과 함께 다음을 특히 유의해 보라. "Systematic Theology and Biblical Theology," The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38 (1975-76): 284-88; "Geerhardus Vos and the Interpretation of Paul," in Jerusalem and Athens, pp. 229-37; "Introduction," to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The Short Writings of Geerhardus Vos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80), ix-xxiii.(한역 : "구속사 와 성경 해석"이 길호 원 광연 공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그리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개정해 내면서 이를 보스와 머레이에게 헌정하고 있음을 보라. The Centrality of the Resurrection; A Study in Paul's Soteriology (Grand Rapids: Baker, 1978/한역 "부활과 구속" 손 종국 옮김 도서출판 엠마오 1985), p.5
5)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권수경, 이상원 옮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p.147(성경 신학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p. 248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와 관련하여), pp. 497, 510 (은혜언약과 관련하여), p. 542 (인자 칭호와 관련하여), pp. 543f. ('하나님의 아들' 용어와 관련하여), pp. 652f.(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p. 832 (교회의 권세와 관련하여), 벌코프는 주로 바빙크, 카이퍼, 보스, 핫지, 댑니, 쉐드 등의 책을 일차적으로 참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6) Richard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특히 보스를 다루고 있는 pp. 181-90을 보라.
7) David Wells, The Person of Christ: A Biblical and Historical Analysis of the Incarnation (Westchester: Crossway Books, 1984), 한역, [기독론: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서울: 엠마오, 1994). 그의 근자의 작품으로 다음을 보라 No Place For Truth (Grands Rapids: Eerdmans, 1993); God in the Wasteland: The Reality of Truth in a World of Fading Dreams (Grand Rapids: Eerdmans, 1994).
8) Edmund P. Clowney, The Preaching and Biblical Theology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79). 한역: [설교와 성경신학] 김정훈 역 (한국기독교 교육연구원 1982).
9) 사실 보스 자신은 성경신학이란 용어 보다 "특별 계시사(特別啓示史)"란 명칭이 보다 알맞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신학이란 용어는 그것만이 성경적이라거나, 이것이 다른 신학 분과 보다 좀더 성경적이라고 오해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스에 의하면 "모든 참된 기독교 신학은 성경신학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계시가 아닌 성경이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취급할 유일한 자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것이다 (Vos, [성경신학], "서언"에서).
10) Vos, [성경신학], p. 28.
11) Vos, [성경신학], pp. 28, 29.
12) Vos, [성경신학], p. 30.
13)Sidney Greidanus, Sola Scriptura: Problem and Principles in Preaching Historical Texts (Toronto: Wedge Publishing Foundation, 1970), p.1.(한역: 권수경 옮김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도서출판 학생신앙운동 1989). 그러나 부연해서 사족을 달자면 한역의 제목이 원제 "오직 성경"이라는 제목이 번역본에서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로 바뀜은 의도적으로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서 회자되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라는 방법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구속사적 성경해석도 성경 본문의 문맥이 그것을 요구하고 뒷받침 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리하게 '구속사'라는 틀을 성경 어느 본문이든지 획일적으로 적용할 때 오히려 무리한(?) 본문의 문맥에 위배되는(?) 기형적 해석(?)이 도출 될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
14) D. Van Dijk, "Tot onze Leering," Pro-Ecclesia, VI (1940/41), p. 279, cited in Greidanus, p. 42.
15) Clowney, "Preaching the Word of the Lord," p. 425.
16) Vos, Biblical Theology, [성경 신학], pp. 424f.
17) G. E. Ladd, The Presence of the Future: The Eschatology of Biblical Realism(Grand Rapids: Eerdmans, 1974), pp. 188f.
18)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4), p. 91(강조 점은 필자의 것임) (한역/ 신성종, 이한수 공역 "신약 신학"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19) Robert Recker, "Redemptive Focus of the Kingdom of God," in [구속사와 하나님의 나라] 오광만 편역(서울: 풍만출판사, 1986), p. 26.
20) Recker, p. 57.
21) Wells, [그리스도는 누구 신가?], pp. 51f.
22) Vos, [성경신학], pp. 21f.
23) Ibid, p. 23.
24) 그 대표적인 글들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John Murray, The Covenant of Grace: A Biblico-Theological Study (London: Tyndale House, 1954); J.B. Payne,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62); O. Palmer Robertson, Christ of the Covenants (1980)./한역 김의원 역[계약신학과 그리스도]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25) Vos, "Hebrews, The Epistle of the Diatheke,"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14 (1916), p, 60=in Redemptive History, p. 232.
26) 그런 해석의 대표적인 예로 다음과 같은 세일하머의 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저자가 이 기사 자체에서는 이런 의미에 대한 시사를 주고 있지는 않으나, 저자는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 동물을 죽인 것에서 희생제사 개념을 선취하고 있을 수도 있다"(John H. Sailhamer, "Genesi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2[Grand Rapids: Zondervan, 1990], p. 58.) 이렇게 까지는 나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준비에는 동물 희생 제사가 함의되어 있다. 그러나 현저하게 나타난 것은 희생 제사적 방법이 아니라, 치유적 결과이다"고 말하는 클라인의 말에는 어느 정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의 의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진다.(Meredith G. Kline, "Genesis," in The New Bible Commentary [Leicester: IVP, 1970], p. 85). 클라인이 이렇게 나아가는 것은 좀 의아스러운 일이다.
27) 이런 요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는 Vos, [성경신학], pp. 58-60.을 보라.
28) Derek Kidner, Genesi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in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y, Vol. 1(Leicester: IVP, 1967/한역 한정건 역 [창세기]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4), p. 72: "It is unduly subtle, and a distraction, to foresee the atonement here".
29) 그런 잘못된 해석은 때로는 창세기 기록의 역사성을 무시하고 이 본문을 이 글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 가운데서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과 같은 죤 스키너의 말을 생각해 보라: "페니키아의 우소오스(Usoos) 전설에서는 [가죽옷 입는 일의 기원은] 야생 동물 사냥과 연관되며, 이는 또다시 희생제사 제도와 연관된다..... 고대 셈족들에게서는 희생 제사 제도와 동물의 고기를 음식으로 먹는 것이 불가 분리 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이는 사람들이 자연의 자연스러운 열매로만 살던 황금 시대로 부터의 첫 이탈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John Skinn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Genesis, Second Edition [Edinburgh: T. & T. Clark, 1930), p. 87). 스키너는 로버트슨 스미뜨도 이와 비슷하게 이 구절에서 가축의 희생 제사제도의 도입에 대한 J 문서 편집자들의(Yahwistic) 이론을 찾고 있다고 밝힌다.(Robertson Smith, Lectures on the Religion of the Semites, Second Edition (1984), pp. 306ff., cited in Skinner, p. 87).
30) Kidner, p.72: "The coats of skins are forerunners of the many measures of welfare, both moral and physical, which man's sin makes necessary."
31) 폰라트는 심지어 우리가 여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보존자로 볼 수 있게 된다고 까지 말한다. Cf. Gerhard von Rad, Genesis: A Commentary, E.T. by John H. Marks, revised by John Bowden (London: SCM Press, 1972), p. 96.
32) Scofield Reference Bible, pp. 10-11.
33) 아주 세심하게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이들로 다음을 보라. C. F. Keil and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1: The Pentateuch, E. T. by James Martin, 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76), p. 109; John H. Sailhamer, "Genesi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2 (Grand Rapids: Zondervan, 1990), pp. 61, 63.
34) Kidner, p. 75.
35) 유대인들 가운데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그가 충실한 곡식으로가 아니라, 잘 여물지 않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듯 싶다. 칼빈은 이런 생각을 어리석은 상상이라고 하였다. Cf.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E. T by John King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reprinted,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3), p. 196. 다른 점에서는 매우 세심한 카일과 델리취 주석이 이점에서는 가인의 제물은 첫 열매가 아니었는데 이런 선택의 잘못이 그의 하나님께 대한 온전하지 못한 마음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점(Keil and Delitzsch, pp. 110f)이 매우 의아스럽다. 스티거즈 역시 그런 입장을 취하는 데 그는 주로 아벨의 제물을 묘사하는 용어에 대한 분석에 근거해서 비교적으로 가인의 제물을 낮추어 보는 듯하다(Harold G. Stigers, A Commentary on Genesis [Grand Rapids: Zondervan, 1976], p. 87). 웬함도 그들과 같은 입장을 표한다(Gordon J. Wenham, Genesis 1-15: Word Biblical Commentary 1[Waco, Texas: Word Books Publisher, 1987], pp. 103, 104). 그러나 가인의 제물이 첫 열매가 아니었다는 그들의 주장에 반하여 Sailhamer는 그들의 제물이 모두 첫 열매로 여겨질 수 있다고 한다(p. 61).
36) 대표적인 예로 다음을 보라. Sailhamer, p. 61: "In his response we see the heart that lay behind the unaccepted offering."
37) Calvin, p. 196.
38) Cornelius Van Til,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1), 한역, [개혁주의 신학 서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p. 366.
39) B. B. Warfild,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 in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Philadelphia: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68), p. 29. See also Arthur W. Wainwright, The Trinity in the New Testament (London: SPCK, 1962, 1982), p. 18. 바빙크는 '엘로힘'과 관련하여 삼위일체에 대한 시사를 찾던 인물 중의 하나가 롬바르드(Rombard)라고 한다. [Herman Bavinck, The Doctrine of God, trans William Hendriksen [Grand Rapids: Eerdmans, 1951]; Grand Rapids: Baker, 1977], p. 100=한역, [개혁주의 신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p. 141).
40) Donald G. Bloesch, Essentials of Evangelical Theology, Vol. 1: God, Authority, and Salvation (New York: Harper and Row, 1978), p. 48, n. 20. 벌코프는 그런 해석을 하는 이로 Rottenberg를 들고 있다.(De Triniteit in Israels Godsbegrip, pp. 19ff., cited in Berkhof, p. 86).
41) Van Til, Systematic Theology, p. 366. 핫지의 다음 같은 견해도 이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에조차도 후대의 계시에서 그 참된 해석을 찾을 수 있는 이 교리에 대한 시사들이 있다.....그러나 계시의 진전으로부터 신성안에 삼위 계시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에 라야 그런 표현 형태가 그 위대한 교리[삼위일체 교리]에 그 토대를 두고 있음이 분명히 인식되는 것이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1[Riprinted, Grand Rapids: Eerdmands, 1977], pp. 446f.).
42) Berkhof, p. 86.
43) Payne, pp. 146, 167. 또한 Bavink, p. 256=한역, pp. 372f.을 보라.
44) Bavink, p. 100=한역, p. 141에서 재인용. 또한 Bavink, Our Reasonable Faith, tran. Henry Zylstra (Grand Rapids: Eerdmans, 1956; Grand Rapids: Baker, 1977), p.147: "...Elohim is in plural form, and therefore, although it does not, as was formerly generally supposed, designate the three persons of the divine Being, it does, in its character as an intensive plural, point to the fullnes of life and of power which are present in God"도 보라(강조 점은 필자의 것임). 월필드도 바빙크를 인용하면서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Warfield,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 in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p. 30). 또한 Berkhof, p. 48도 보라: "The plural is to be regarded as intensive, and therefore serves to indicate a fulness of power."
45) Wenham, p. 28에서 재인용.
46) Von Rad, Genesis, p. 58. 또한 그의 [구약성서신학], 제 1 권, 허혁 역 (왜관: 분도 출판사, 1976), p. 152도 보라. 이와 같은 견해를 표현하는 이들로 다음을 보라. John Skinn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Genesis(Edinburgh: T & T. Clark, 1930), p. 31; M. G. Kline, "Genesis," in NBC, p.83; Donals E. Gowan, Genesis 1-11: From Eden to Babel, 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88), p. 27. Gordon Wenham에 의하면 다음 같은 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취한다고 한다. W. Zimmerli, T. N. D. Mettinger, W. H. Gispen, Day (Wenham, p. 27).
47) 이 점에 대한 강한 지적과 논의로 Keil and Delitzsch, Genesis, p. 62를 보라. 이는 어거스틴 때부터도 있어온 반론이다. Augustine, City of God, 해당 부분을 보라.
48) 이에 대한 좋은 지적으로 Sailhamer, p. 37을 보라.
49) Wenham, p. 28.
50) Theodorus Vriesen, An Outline of Old Testament Theology, Trans. S. Neuijen (Oxford: Basil and Blackwell, 1958), p. 179. /(한역 노항규 옮김 [구약신학개요],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51) Ibid, pp. 179-80.
52) 비록 엘로힘과 관련해서 이기는 하나 바빙크가 그렇게 말한다.(Bavink, p. 100=한역, p. 141).
53)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Grand Rapids: Zondervan, 1994), p. 227. 그는 이와 관련해서 이 구절들에서 복수형이 "옳지 않게 이와 같은 식으로 [즉, 엄위의 복수로] 설명되었다"고 말하는 카우취가 편집한 게세니우스의 히브리 문법을 인용하고 있다(E. Kautzsch, ed, Gesenius' Hebrew Grammar, 2nd ed. (Oxford: Clarendon Press, 1910), section 124g, n. 2). 그는 또한 자신의 랍비 문학에 대한 조사를 언급하면서 "후기 유대인 해석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만족할 만한 의견의 일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Sysmatic Theology, p. 227, n. 2).
54) Ibid., p. 227.
55) Ibid, p. 227.
56) Berkhof, p. 96.
57) Payne, p. 167. 비슷한 입장의 표현으로 Sailhamer, pp. 37f 을 보라.
58) Calvin, p. 92: "Christians, therefore, properly contend, from this testimony, that there exists a plurality of Persons in the Godhead."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사를 부르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자신 안에 구별된 어떤 것을 발견하신다고 추론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영원한 지혜와 능력이 그 안에 내재하는 것이다"(pp. 92f).
59) Warfield,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 pp. 30f. 또한 각주 41에서 인용한 바 있는 Hodge, Systematic Theology, pp. 446f도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0) Kidner, p. 52: "... the fullness, glimpsed in the Old Testament, was to be unfolded as triunity, in the further 'we' and 'our' of John 14:23 (with 14:17)."
61) Keil and Delitzsch, Genesis, pp. 62f.
62) Wenham, p. 27.
63) Wenham, p. 28.
64)Umberto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trans. Israel Abrahams, 2 vols. (Jerusalem: Magnes Press of Hebrew University, 1961, 1964), 155-56; Claus Westerman, Genesis 1-11: A Commentary, trans. John J. Scullion (Mi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84), pp. 144f.; Bruce Vawter, on Genesis: A New Reading (Garden City, N. Y.; Doubleday, 1977), p.54. Wenham에 따르면 Steck, W. Gross, P.E. Dion등도 이 견해를 취한다고 한다(Wenham, p. 28).
65) Sailhamer, pp. 37-38. 창 11:3, 7의 교차구조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고 한다. J. P. Fokklemann, Narrative Art in Genesis (Assen: Van Gorcum, 1975). 자기 의논의 경우에 단수가 사용된 예(창 2:18, 시 12:5, 사 33:10)에 주의를 촉구하며 이 의견에 반대하는 Keil and Delitzsch, Genesis, p. 62도 보라.
66) 이에 대한 가장 강한 강조는 1930년대에 화란에서 구속사적 해석과 설교 운동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는 끌라스 스킬더(K. Schilder)가 하였다고 볼 수 있다. Greidanus, Sola Scriptua, pp. 40, 141f.을 보라.
67) 로마의 크레멘트로 부터 이런 해석이 시도되었다는 것에 대한 언급으로는 Francis A. Schaeffer, Joshua and the Flaw of Biblical History, 이주익 옮김, [여호수아: 끝없는 전진, 끝없는 승리] (서울: 기독지혜사, 1988), p. 85.
68) M. H. Woudstara, The Book of Joshua; NICOT(Grand Rapids: Eerdmans, 1981), p. 75.
69) 이런 연관성을 생각하는 대표적인 예로 다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J. Alberto Soggin, Joshua, E.T. by R.A. Wilson (London SCM Press, 1972), p.42.
70) Woudstara, p. 75, n. 33.
71)Donald H. Mavig, "Joshua,"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3(Grand Rapids: Zondervan, 1992), p. 263. 그런데 이 말 앞에 그가 하고 있는 말인 "비록 붉은 줄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기시키지만"이란 말은 그의 이 주장을 좀 약화시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어 좀 불행한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72) J. Maxwell and Gene M. Tucker, The Book of Joshua, The Cambridge Bible Commentary(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4), p. 32. 이렇게 붉은 줄을 그저 이런 표로만 보고 옳게 주해하는 주석들로 다음을 들 수 있다. Keil and Delitzsch, Joshua(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76), p. 38; John Rea, "Joshua," in Wycliff Bible Commentary, p. 209; Trent C. Butler, Joshua, Word Biblical Commentary 7 (Waco, Texas: Word Books Publisher, 1983), p. 32.
이승구 敎授
개혁 신학적(改革 神學的) 관점(觀點)을 가지고서 성경신학(聖經神學)을 하는 분명한 모델을 제시한 개할더스 보스(G. Vos)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모임을 갖고 있다. 아라빅 연구(Arabic studies)로 스트라스부르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고(1888), 현재 칼빈 신학교의 전신인 기독교 개혁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비롯한 폭넓은 신학 분과를 가르치고 강의하던 그가 1893년 초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성경신학 교수로 초빙 받고서 그가 은퇴할 때(1932)까지 39년 동안 성경신학을 강의하여 그 기록을 우리에게 큰 유산으로 남겨 놓은1) 보스는 개혁신앙을 가지고서 신학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많은 개혁신학자들에게 깊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고서 신학적 작업을 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을 몇 명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의 성경 신학적 통찰을 변증학과 기독교 윤리 영역에 적용시킨 코르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2) 사실 그는 보스를 무척 존경하여 그의 연구실에 보스의 사진을 늘 걸어 놓았다고 한다.3) 그리고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준 이로서 보스의 성경신학을 신약신학 영역에서 계승하여 발전시키며 이제는 이를 조직 신학 영역에도 적용하고 있는 리쳐드 개핀(Richard Gaffin, Jr.)을 들어야만 할 것이다.4)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접근에 가장 유사한 모범을 보여준 이는 최낙재 목사님일 것이다. 그리고 개핀과 함께 조직신학에 있어서 소위 보스적 접근(Vosian Approach)을 하고 있는 이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런 용어가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그 내용에 있어서 그런 작업을 하여 보스의 성경 신학적 이해,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와 기독론적 이해를 신학에 잘 반영한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5) --사실 벌코프의 조직신학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얼마나 보스적인 성경신학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지를 잘 의식하고 있는 이들이 드물다. 많은 이들은 그저 교과서적인 그의 진술 양식에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쟌 머레이(John Murray), 그리고 보스적인 신학을 다음 세대의 복음주의 신학이 모델로 삼아 추구하고 나가야 할 신학이라고 제시하는 리처드 린츠(Richard Lints),6) 그리고 기독론 분야에서 이를 잘 적용하고 좀더 폭넓은 글들을 써서 그런 접근의 기반을 다지고 있는 데이비드 웰즈(David F. Wells)7) 등을 이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실천 신학 특히 설교에 있어서 보스적인 성경신학을 잘 반영해 보려고 한 에드문드 클라우니(Edmund P. Clowney)를 들어야 한다.8)
시작하는 말: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설교에 대한 함의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보스적 성경신학을 우리의 신학과 목회 사역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일을 좀더 구체화시켜 보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의 첫째 과제로 우리는 이 논문에서 보스적 성경신학이 우리의 설교 사역에 주는 함의를 찾아 보려고 한다. 이는 결국 어떻게 하면 우리의 설교가 진정한 개혁파적 설교가 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한 측면을 다루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보스는 진정한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수립해 보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성경 신학적 노력이 반영된 설교 사역은 진정한 개혁주의적 설교 사역이 될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설교 사역에 대한 함의를 찾는 이 일의 첫째 작업인 이 논문에서는 보스가 보여준 바와 같은 개혁주의 성경신학에 대한 탐구가 우리의 설교에 어떤 도움과 지침을 주는지를 아주 일반적인 용어로 진술해 보려고 한다.
(1)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섬기는 일로서의 설교에 대한 인식 강화
가장 먼저 '보스가 제시한 바와 같은 성경신학'(즉, '개혁주의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계시 앞에 우리를 세운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스의 정의에 의하면 성경신학이란 "특별 계시의 역사"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9) 계시사에 관심 하는 성경신학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로 하여금 계시의 독특성 앞에 서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 자체의 성격이 본래 그러한 것이지만 개혁주의 성경 신학적 관심을 반영한 설교를 하려는 이들은 가장 먼저 설교란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된 것임을 각별히 유의하게 된다. 여기서 개혁주의 성경신학과 개혁주의적이지 않은 성경신학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이는 보스가 말하고있는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세 가지 원칙을 생각할 때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그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계시의 무오한 성격에 대한 인식("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고, 의식적이시라면, 당신 님의 모든 자기 계시 양식에 있어서도 당신 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한 무오한 표현을 할 것이라는 추정은 불가피하다"10) (2)계시의 기본 사역의 객관성("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계시는 밖으로부터 옮을 의미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계시를 주셨으면, 그것을 어떤 형태로 할 것인가를 [즉 객관적인 방식으로 할 것인가, 시편 등에서와 같이 주관적 계시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의 말씀을 충분히 신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11)); (3)기록 과정에서의 만전영감(plenary inspiration: "이 문제에 대한 성경 자체의 의식을 생각하면 우리는 곧 '만전 영감'이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영감된 것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12) 그러므로 이런 원칙을 가지고 계시의 역사를 드러내고 탐구하는 것이 개혁주의 성경신학인 것이고, 이런 원칙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개혁주의적이지 않은 성경신학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성경신학에 유의하면서 설교를 하는 이들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성문화시킨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고 그 뜻을 해명하는 것이란 의식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오늘날 하나님의 특별 계시와 접촉할 수 있는 수단이 성경뿐이듯이,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세상에 선포하는 귀한 사역이라는 강한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Vervum Dei Minister)에 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에 유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를 곡해시키거나 오용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큰 범죄 행위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잘 파악하고 그 시대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하는 교회를 해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할 때에 무엇보다 먼저 이 설교 사역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분명히 하고, 밝혀주고, 해명하는 일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할 때에 이런 설교의 본래적인 사명에서 벗어나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일까? 첫째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본문의 강조점과 상관없는 다른 것이 강조될 때에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지 못하는 것이 된다. 시드니 그레이다너스가 잘 말하고 있듯이, 설교자가 아무리 성경에 대한 고등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성경 본문을 "독단이나 자기 자신의 개념들을 제시하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한다면, '오직 성경'이라는 고백을 그것을 주창하는 사람이 해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13) "말씀을 섬긴다는 것은 본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회중들에게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 본문이 전달하려는 "특별한 내용"을 찾아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14) 또한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한다고 해도 성경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전달하는 것은 사실상 설교를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시간에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어지럽히는 것만큼 무시무시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그런 죄와 잘못을 회개하기보다는 어찌하든지 은혜만 되면 된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후안무치의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결국 계시를 주시고 그것을 성문화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성경 본문의 풍성한 의미를 다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말씀을 잘 섬기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한 설교 시간에 본문의 모든 측면을 다 말할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상황이나 설교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인간의 제한성을 생각할 때에 한 설교에서는 본문의 한 측면만을 잘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나 연속되는 설교나 몇 년에 걸쳐서 한 교회에서 강설하여 가면서는 결국 본문의 모든 측면을 다 잘 드러내어서 그 본문의 풍성한 의미가 다 잘 드러나게끔 해야만 한다. 클라우니도 개혁파 적인 설교는 결국 "응용된 내용이 풍성할 것이다"(Will be rich in applied content)라고 말한 바 있다.15) 이런 풍성한 설교의 결과로 모든 교우들이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잘 이해하고 그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설교자가 나름의 편견과 제한을 가지고 있어서 본문의 다양한 측면을 다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큰 오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셋째로,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를 때는 우리의 생각을 쳐서 성경의 생각에 복종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오랫동안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 죽은 후에 "천국"(Kingdom of Heaven)에 간다고 생각해 왔고, 성경에서 천국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을 생각해 온 일이 많다. 그러나 보스를 비롯한 성경 신학자들이 성경에 나온 "천국"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를 연구하고서 내린 결론은 천국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실현"과 동의어로 사용된 말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보스의 다음과 같은 강조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숙명도, 그의 통치의 추상적인 권한, 즉 그의 주권(His Sovereignty)도 아닌 것이다. 이는 그의 통치의 실제적 실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만 이는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을 창세전 부터 가지셨으므로, 주권이란 의미의 하나님 나라는 '올' 수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진 신적 최고권의 실제적 행사를 의미한다.16) 그러므로 보스의 성경 신학적 탐구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의 추상적 권한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그런 통치의 실제적 실현인 것이다. 이런 입장은 보스만의 견해가 아니라, 천국에 대한 성경 신학적 연구를 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예를 들어서, 래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복음서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구속적인 행위,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뜻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원리-- 심지어 '신적 통치의 원리'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개념은 너무 철학적이며, 너무 하나님의 활동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이다."17)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핵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 사이에 그의 통치를 확립하기 위하여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라는 것과 세대 말에 묵시론적 행위로 등장할 이 나라가 악을 정복하고, 인간을 이 악의 세력에서 구출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에로 인도하기 위하여 예수의 인격과 사역과 함께 인류 역사에로 이미 임하셨다는 사실이다."18) 또한 칼빈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 취임 강연에서 레커 교수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지 조금만 숙고해 보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어떠하든 간에,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명백해진다. 역사의 말기에 일어날 종말론적이며 완전한 친교, 혹은 이 세대 안에서 갖는 하나님과의 합당한 사귐, 혹은 역사 내에 이루어질 천년간의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 혹은 금세 에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 혹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굴복시키고,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의 세상에 개선하시고, 세상에 대한 그의 주재권을 재 천명하시므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활동 -- 이러한 모든 것들이 구 속의 도리 가운데서 행하시는 능동적인 신적 능력을 반영한다.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란 용어는 하나님의 권위의 역사적 표현과 그의 우주의 마지막 구속을 효과 있게 하는 능력을 지칭하는 신약 성경의 요약이다.20)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이 땅과 역사에로 오는 통치이고, 오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보스를 비롯한 많은 성경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잘 정리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이미 원리적으로 실현되었으며, 그의 재림에서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를 것이다. 이런 성경 신학적 연구의 결과는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점차적으로라도 우리의 용어 사용과 설교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이런 성경 신학적 연구의 결과를 도외시하고 우리가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개념과 선입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결국 성경의 계시를 계시답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국은 이 세상에로 침노하여 오는 것이고(신약에 사는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온 것이며), 장차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를 것이며, 이런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고, 극치에 이를 그 나라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실 것이다. 다음과 같은 웰즈의 요약은 지금까지 성경학자들이 발견한 천국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잘 요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찾고, 이를 위해 기도하고, 바랄 수 있으나, 래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이를 가져오실 수 있는 것이다. [눅 23: 51; 마 6:10, 33; 눅 12:31] 하나님 나라를 주시고 취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오직 이를 받고, 이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것일 뿐이다(마 21: 43; 눅 12:32)....우리가 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이 나라를 파괴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것이다....물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는 있으나 이 나라를 수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마 10:7; 눅 10:9, 12:32).21)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는 모든 개념과 사상에 있어서, 심지어 그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이런 성경신학의 발견을 잘 반영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에 종말론적 사역으로서의 설교가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시의 계시로서의 성격에 유의한다는 것은 이 보다 좀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진 방식, 즉 그 역사적 점진성에 유의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다음에는 이점을 언급해 보기로 하자.
(2) 특별계시사에 유의하는 설교
보스적인 성경 신학을 염두에 두면서 설교할 때에 우리가 특히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단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점진적인 계시의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특별 계시사를 반영하는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다. 보스는 이렇게 말한다.
계시는 한 소진적(消盡的) 행위 안에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진적 행위의 긴 과정 중에서 전개된 것이다....왜냐하면 계시는 그것 자체로서 자족하게 서는 것이 아니고, (특별계시에 관한 한) 우리가 구속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다른 행위와 불가피하게 연관된 것이며, 또 이 구속은 역사적으로 계속되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구속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구속이 점차로 전개되듯이, 계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22) 그러나 이렇게 점진적으로 주어진 계시는 유기적인 성격의 계시이므로 계시의 절대적 완전성을 부인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기적 점진성이란 씨형태로 부터 완전한 성장에의 도달을 말한다."23) 그러므로 우리는 유기적 점진성을 가지고 주어진 계시의 역사적 과정을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고, 우리의 설교도 이 과정을 반영해야만 한다. 전문적인 학자가 아닌 목사님들은 전문적으로 특별계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물론 우리 주변에 특별계시사만을 전문적으로 깊이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맺으신 언약이나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를 연구한 이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24) 왜냐하면, 보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역사적 측면을 염두에 둔 개혁파의 언약 교리는 계시사를 구성하려는 첫 시도였고 오늘날 성경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의 선구로 옳게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25)
그렇다면 이렇게 특별계시의 역사를 염두에 두면서 설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첫째로, 어떤 본문을 해석하여 설교할 때에 일차적으로 그 본문이 다루는 그 시대까지 주어진 계시의 빛에서 그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후대에 주어진 계시까지를 염두에 두고서 그 본문을 해석하게 되면 무리한 해석이 많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직 희생제사에 대한 계시가 주어져 있지 않은 시대를 다루는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하면서 그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도출해 내는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와 연관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축출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는 말씀은 분명히 희생제사에 대한 계시가 주어지기 전의 상황이므로 이 본문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대한 표상으로나 그림자로 해석하고26) 그렇게 설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을 하시기 바로 전에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표현되어 있고 그 구원 방식에 대한 암시도 주어지긴 하였다. 바로 원복음(原福音, Protoevangelium)이라고 불리는 '뱀으로 표상되는 사단의 세력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그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 원복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인간들과 사단의 세력 사이에 원수 관계를 설정하시리라는 것, 그 우주적 투쟁에서 결국 여자의 씨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것 등이 시사되고 약속되어져 있다.27) 아담은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이런 약속을 믿었든 싶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내의 이름을 "생명"이란 뜻에서 하와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원 복음에는 아직 이 여자의 씨에 의한 결정적인 승리가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려는 지에 대한 계시나 시사와 암시는 아직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와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것은 그 당시까지 주어진 계시의 내용을 넘어가는 것이다. 키드너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구속을 미리 예견하는 것은 지나치게 나가는 것이고 문맥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28) 따라서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에서 그런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계시사를 생각하지 않고서 아직 주어져 있지 않은 계시를 본문에서 미리 삽입하는 잘못된 해석의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29) 그러므로 이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은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서 축출되는 이들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점에서 세심하게 배려하신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키드너는 이렇게 말한다: "가죽옷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필요하게 된 도덕적, 물리적 복지의 다양한 측면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30)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보존자이심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31)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사건과 관련하여 이런 무리한 해석의 또 하나의 예를 들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을 때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것"(창 4:4, 5)과 연관해서 그 이유를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그 제물을 삼아드린 것에서 찾는 해석이 있어왔는데, 이런 것도 계시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해석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아벨의 제사와 연관해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말씀을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은 그런 시대착오적 해석을 더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많은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일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스코필드 관주 성경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가인의 피없는 제사는 신적인 방식에 대한 거부였다.... 속죄의 피를 흘린(히 9:22)[아벨의]의 제사는 곧 바로 그의 죄의 고백이며, 대리 (희생제)에 대한 그의 믿음의 표현이다(히 11:4)."32) 그러나 희생제사에 대한 계시는 후대에 모세를 통해서 명확하게 주어진 것이다. 혹자는 이 모든 계시가 모세를 통해 주신 모세 오경에 기록되었으니 모세 시대의 계시를 배경으로 하여 보아야 하지 않는 가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그 이전의 역사 자체의 상황과 그 시기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적 의도를 무시한 채 그 계시가 기록된 시기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만을 염두에 두는 또 하나의 시대 착오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희생 제사에 대한 계시가 주어져 있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는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리든지, 양과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리든지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두 가지 제사 모두에 대해 다 같은 단어 "민하"(????????)가 사용되어져 있다.33) 이는 후대의 제사 법에 의하면 폭넓게 사용된 예들도 있기는 하지만(삼상 2:17) 주로 곡물 제사인 소제에 대해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는 아직 어떤 것으로 제사를 드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키드너가 말하는 대로 "피가 없음이 가인의 제물을 무자격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34)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 창세기 본문 가운데서는 그 이유가 주어져 있지 않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가인의 제물은 그의 소산 중에서 최선의 것이 아니었다고35) 추론할 근거가 본문 가운데에는 없는 것이다. 창세기 본문은 단지 그런 사실이 발생했다는 것과 그런 상황에 대해서 가인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중심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가인이 후에 이 문제에 반응하는 방식에서 제사에 임하는 가인의 마음을 찾아보려고 한다. 즉, 후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은 것은 그가 처음부터 순수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36)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후대의 계시에서만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도 분명한 시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히 11:4)는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아벨의 예물이 열납된 이유가 그의 믿음에 있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주석을 볼 수 있다. 즉, 그 때까지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와 그의 제물이 받아들여진 이유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은 제사를 드렸어도 믿음이 없이 이런 종교적 행위에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마음이 없이 외적인 희생 제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자신들을 우롱하는 모든 허구는 다 불신의 산물임이 언급되어야만 한다."37)
이런 것과 연관된 또 하나의 예로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이 복수형인 것이나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말씀하실 때(창 1:26)나 사람의 타락에 대해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실 때(창 3:22), 바벨탑과 관련하여 "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말씀하신 때(창 11:7), 그리고 이사야를 파송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실 때(사6:8) 등에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쓰신 것 등을 후대 계시의 빛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계시나 그에 대한 시사라고 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계시의 유기적 발전을 생각한다면 삼위일체와 관련해서도 우리는 밴틸과 함께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도 가르쳐졌으리라, 그러나 신약에서 훨씬더 분명하게 가르쳐졌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38) 그러나 위와 같은 예들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찾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월필드는 옛 저자들은 이런 예들과 같은 현상들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시사"(intimations of the Trinity)를 발견했었다고 말한다.39) 그런데 옛 저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런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엘로힘'과 관련해서는 도날드 블뢰쉬가 그런 언급을 한적이 있다. 그는 엘로힘은 "통일성(단일성)안에 있는 신적인 복수성"(a divine plurality in unity)을 함의한다고 말한다.40) 그러나 엘로힘의 복수형에 대해서는 그렇게 까지 직접적인 계시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밴틸은 '엘로힘'이란 명칭과 관련하여 "우리는 최대한 말한다면 그것이 후에 계시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41) 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이는 이에 대해서 "그 자체가 삼위일체를 계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대의 계시의 빛에서 볼 때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는 뜻"이라는 보역을 달고 있다. 그러므로 최대한으로 양보하여 말할 때 후대 계시에 대해서도 적합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도 좀더 조심스럽게 엘로힘이란 명칭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증명을 찾는 것은 "최소한도로 말한다고 해도 매우 의심스럽다"(to say the least very dubious)고 말하는42) 벌코프와 같이 말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엘로힘'이라는 명칭과 관련해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나 시사를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43) 이에 대해서는 델리취가 보고 있듯이 "생명과 능력의 충만함을 시사하는 집중의 복수(an intensive plural)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4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제일 먼저 거부되어야 하는 견해는 이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다신론의 반영으로 보아야 한다는 궁켈(Gunkel)의 견해이다.45) 이에 대해서는 창세기 1장이 가지는 반 다신론 적인 입장을 고려하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부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쓰신 것과 관련해서 고대 유대인 학자 필로를 비롯해서 폰 라트 등이 생각하듯이 "하나님이 자신을 천상적 존재들[천사들] 가운데 포함시킨다"고46) 보는 것도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창 1:26을 그렇게 보면 함의상 인간이 천사의 형상으로도 창조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47) 이 구절의 직접적인 문맥에서 사람이 천사들의 형상으로 언급된 것이 없고, 또한 27절의 단수형이 이런 해석을 불가능하게 한다.48) 비슷한 해석을 하는 웬함은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이 견해에 좀 변형을 시도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만들자'라는 것은 창조의 최종 걸작인 사람에게 만군의 천사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말씀하시는 하늘 궁전에 대한 신적인 선언으로 여겨져야만 한다."49) 그는 이렇게 보는 것이 욥기 38: 4, 7의 말씀과도 일치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는 다음의 언급할 엄위의 복수로 보는 견해와 연관될 수는 없을까?) 사람이 천사의 형상으로도 간주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 있다면 이런 견해가 소위 왕적 선언으로서의 "우리"를 취하는 해석 중에서 가장 나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는 이하에 언급될 하나님의 자기 의논형의 복수형과도 어울릴 수 있는 해석이라고도 여겨진다).
엄위의 복수로 보는 견해들이 현대에 많이 시도된 견해들이다. 떼오도루스 프리젠은 이를 장엄의 복수로 보아 창세기 1:26에 삼위일체에 대한 함의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50) 그런가 하면 이사야 6:8에서는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둘러 싸여진 것으로 보면서 천사들을 포함한 천상회의에서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이해한다.51) 이사야 6;8과 관련해서는 이처럼 천상회의에서 천사들을 포함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1:26 이하와 관련해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그렇게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장엄의 복수로 사용된 예가 없다는 지적들도 있다.52)
미국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웨인 그루뎀도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쓰신 것이 "엄위의 복수"(a plural of majesty)로 볼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하면서,53) 이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하나님 자신 안에 다양한 위격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한다.54) 물론 그는 창세기 기록에는 "하나님의 신격 안에 위격이 몇 있으신 지, 또 온전한 삼위일체 교리에 접근하는 것은 전혀 없고, 단지 한 인격 이상이 관여하고 있음만이 시사되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55) 창세기 1:26과 11:7과 관련해서 벌코프도 그 구절들이 삼위일체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인격의 복수성이 시사되어있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고 한다.56) 이런 표현들이 단도직입적으로 "삼위일체가 함의되어 있다"고57) 말하는 것이나 "신성안에 위격들의 복수성이 있다"고58) 말하는 것보다 좀더 계시사에 유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월필드의 주장도 계시사를 유의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구약 본문에 신약적 개념을 무리하게 넣어 읽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신약 계시의 조명 아래서 구약 본문을 읽는 것이다. 구약은 풍성하게 가구가 놓여져 있으나 조명이 잘 안된 방과 비교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구약에 계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구약 계시 밑에 깔려 있어서, 이곳 저곳에서 보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계시는 그 후에 오는 온전한 계시에 의해 교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더 온전해 지고, 확대되며, 더 넓어진다고 할 수 있다.59) 이런 입장과 연관될 수 있는 좀 복합적이고 독특한 견해는 데렉 키드너의 견해이다. 그는 창세기 1:26의 "우리"라는 복수를 "충만의 복수"(the plural of fullness)라고 보면서, "구약에서는 얼 듯 시사된 이 충만함이 후에 요한 복음 14:23(14:17)의 '우리'에서 삼일체(triunity)로 전개될 것이었다"고 한다.60) 카일도 장엄의 복수와 삼위일체적 견해의 기초적 시사로 보는 견해를 연관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를 장엄의 복수(pluralis majestatis)로 여기는 것 외에 다른 어떤 해석이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이 복수형을] (하나님께서 경외적 이유(reverentiae causa)에서가 아니라, 당신 님께서 가지신 신적 능력과 본질의 충만함을 언급하면서 복수로서 자기 자신에게 자기 자신과 함께 말씀하신다는)가장 깊이 있고 가장 집중적인 형태[의 복수]로 이해하는 해석이다. 또한 이는 절대적 신적 존재 안에 집중되어 있는 잠재력들(potencies)이 하나님의 능력과 속성들 이상의 것이라는 삼위일체적 견해의 토대에 놓여있는 진리이다. 즉, 그것들이 그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후대의 계시의 과정에서 신적 존재의 위격들로서 점점 뚜렷하게 구별되어 나타날 위격들(hypostases)이라는 것이다.61)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너무 지나치게 후대의 계시를 넣어서 이해하는 듯한 이런 해석들도 계시의 진전을 염두에 두면서 진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웬함은 별 논의 없이 단적으로 "원저자에게는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시사]이 복수에서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는 보편적으로 인정된다고 한다."62) 그 자신은 위에서 보았듯이 이 "우리"가 천사들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본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시사가 이 구절에 대한 소위 "충만한 의미"(the sensus plenior)로 있을 수는 있다고 보면서 "신약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함께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다고 보고 있으며, 이것이 초대교회로 하여금 삼위일체적 해석을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으나" 그런 통찰은 분명히 창세기의 기록자의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63)
이 복수를 자기 의논의 복수(a plural of self-deliberation)로 보자는 의견이 제출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 견해를 따른다.64) 이런 견해를 따르면 이 구절에서 신적 인격의 복수성이나 그에 대한 시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의견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세일하머는 비슷한 경우로 인용되는 창11:7에서 복수가 사용된 것은 "우리가 만들자"(창 11:3)는 말과 교차구조적 말장난(the chiastic wordplay) 때문에 "우리가 혼동시키자"는 표현이 나온 곳이며, 창 18:7에서는 그런 의논에 단수가 사용되었다는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65) 그러므로 창세기 1:26 이하의 "우리가"라는 이 복수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복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구절과 관련해서는 (1) 창세기 1:26 이하에 하나님의 인격의 복수성에 대한 함의가 있으나 당시 사람들은 그 충분한 함의를 알 수 없었고, 후대의 계시의 빛에 비추어 볼 때 그 충분한 함의가 나타난다고 보는 견해와 (2) 왕적 선언으로서의 "우리"(royal we), 장엄의 복수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 그리고 (3) 이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시사보다는 하나님의 자기 의논의 복수로 보아야 본문의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견해 등의 해석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지금까지 학자들의 논의는 각각에 대해서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며 논란해 가는 형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논의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논의 할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계시의 진전을 생각하면서 논의하고, 계시의 진전을 반영하는 식으로 진술해야 할 것이다. 특히 반 삼위일체적 해석을 하는 일들도 이런 계시의 진전을 생각하면 sensus plenior 로서 이런 함의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웬함과 같이 열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의 진전을 탐구하는 성경신학의 도움을 얻어서 일차적으로는 당시까지 주어진 계시의 빛에서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계시를 계시답게 받아들이는 일의 한 부분인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는 이 계시의 좀 더 폭넓은 문맥 안에서 그 의미의 진전을 살피는 일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3) 구속역사의 진전에 유의하는 설교
계시사에 유의하는 것은 이 계시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구속사의 진전에 유의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경신학에 유의하는 우리의 설교는 구속사적 설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본문의 구속사에서의 위치를 밝히며, 이 구속사의 최종적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의 관계를 밝히는 설교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될 것이다.66)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무시간적인 접근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구약의 어떤 본문에서든지 그리스도의 모형을 무리하게 찾아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고, 구속사적 성경해석과 설교를 제시한 이들의 생각과 아주 거리가 먼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 정탐군들과 맺은 약속인 라합의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내려뜨려 놓겠다는 것에서,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시대로부터 교회 내에서 많이 시도된 대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서 흘려진 피에 대한 상징이나 모형을 찾아보려는 것은67) 잘못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우드스트라의 말은 시사적이다.
이런 종류의 모형론적 연관은 아주 조심해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사실 신구약 사이의 참된 모형론적 연관 성은 성경 자체의 의식의 빛에서만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형'으로부터 그것이 모형하는 바 사이에 실제로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주의가 요청된다. 그저 색깔이 같다든지 다른 외적인 것들이 같은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은 것이다.68)
이런 주장을 유의하면서 생각한다면 유월절 의식의 붉은 피와 여기서의 붉은 줄을 연관시키는 것도69) 과연 어디까지 유지될 수 있는 생각인지를 물어야 한다. "어쩌면 이 줄과 출애굽 유월절 때에 문에 바른 피 사이의 어떤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런 연관성을 찾는데는 상당한 주의가 요청된다"고 말하는70) 우드스트라의 조심스러운 태도보다 좀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유월절의 붉은 피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모형론적인 관계를 가지며 성경 자체가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여기서의 붉은 줄은 "성경 어디에서도 모형론적 관계를 지닌 것으로 진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71) 그러므로 이 붉은 줄은 "그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라합]의 집을 알고, 그 안에 있는 이들을 살려 두겠다는 표(sign)일 뿐이다."72) 또한 시편의 거의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드러내려고 한 루터의 시도들은 좀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가르침과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사역을 계시답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의 전형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지나치게 나아가지 아니하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본문 자체가 다루고 있는 시기의 구속사적 위치에 끊임없이 유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시대에 주어진 계시의 한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노력을 충분히 한 후에는 이제 구속사의 최종적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 속의 성취의 빛에서 각각의 본문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드러내는 노력을 해야한다. 여기서 과거의 본문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미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구약의 본문이 지금 여기서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구속사적 연관성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 특히 서신서 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시대적 지평, 즉 원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임하여온 "종말의 시대", 즉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시대"라는 지평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는 2000년의 시대적 거리와 과거의 본문에 대한 현대의 해석이라는 해석학 일반의 문제 외에는 별다른 문제를 가지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에게 제시된 형태가 그대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응성 있는 계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신 서에 대한 설교에서의 적용은 비교적 쉬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는 말
우리는 이제까지 개혁주의 성경신학이 우리의 설교에 주는 함의를 간단히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개혁주의 성경신학에 유의하면 (1) 우리의 설교가 참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답게 받고, 전달하는 일이 될 수 있고, (2) 계시의 역사에 유의하면서 주어진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해야하고, (3) 구속사적 진전에서 그 본문의 독특한 위치와 내용을 드러내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 유의하는 우리의 설교는 얼마나 풍성하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을 까? 그런데 이런 제안은 실질적으로 우리의 설교를 돕고 그 사역을 강화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우리의 마음을 좁게 하고 성경의 풍성하고 다양한 내용을 억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이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전달하시고자 하는 풍성한 내용을 다 전달해야만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Vervum Dei Minister)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더 상기하도록 하자.
이 일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겨진 다음 과제는 (1) 보스의 실제 설교문들을 잘 분석하여 그로부터 우리의 설교 사역에 대한 지침을 이끌어 내는 일, (2) 보스적 성경신학에 유의하며 작업했던 다른 저자들의 작품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일에 있어서 가장 먼저 탐구해야할 대상은 클라우니일 것이다), 그리고 (3) 구체적으로 이런 일에 유의하는 구체적인 설교문의 작성과 실행이 될 것이다.
1)그 유산이 바로 그의 강의 노트와 강의록을 책자의 형태로 출판한 그 유명한 [성경신학] 책이다. Cf.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Grand Rapids: Eerdmans, 1948), 한역, [성경신학] 이승구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여기엔 어떤 점에서는 강의록의 냄새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그가 좀더 전문적으로 성경신학 책을 쓸 수 있었다면 이 보다 좀더 풍성한 제시가 있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특히 신약의 계시를 다루는데서 말이다.
2) 그의 많은 저작이 그러하지만 보스의 영향을 특히 잘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들로는 다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Cornelius Van Til, Christian Theistic Ethics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80), Chapters 5, 10: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71), especially Chapter 6. 또한 이를 잘 보여주는 글로 E.P. Clowney, "Preaching the Word of God: Cornelius Van Til, V. D. M," Wesminster Theological Journal 46(1984): 233-53, 한역, in 한 제호, [성경의 해석과 설교] (서울: 진리의 깃발, 1995), pp. 410-40, 특히 pp. 413, 430을 보라.
3) Richard B. Gaffin, Jr. "Geerhardus Vos and the Interpretation of Paul," in Jerusalem and Athens: Critical Discussions on the Philosophy and Apologetics of Cornelius Van Til, ed. E.R. Geehan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1), p. 228.
4) 그의 여러 저작과 함께 다음을 특히 유의해 보라. "Systematic Theology and Biblical Theology," The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38 (1975-76): 284-88; "Geerhardus Vos and the Interpretation of Paul," in Jerusalem and Athens, pp. 229-37; "Introduction," to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The Short Writings of Geerhardus Vos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80), ix-xxiii.(한역 : "구속사 와 성경 해석"이 길호 원 광연 공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그리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개정해 내면서 이를 보스와 머레이에게 헌정하고 있음을 보라. The Centrality of the Resurrection; A Study in Paul's Soteriology (Grand Rapids: Baker, 1978/한역 "부활과 구속" 손 종국 옮김 도서출판 엠마오 1985), p.5
5)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권수경, 이상원 옮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p.147(성경 신학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p. 248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와 관련하여), pp. 497, 510 (은혜언약과 관련하여), p. 542 (인자 칭호와 관련하여), pp. 543f. ('하나님의 아들' 용어와 관련하여), pp. 652f.(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p. 832 (교회의 권세와 관련하여), 벌코프는 주로 바빙크, 카이퍼, 보스, 핫지, 댑니, 쉐드 등의 책을 일차적으로 참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6) Richard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특히 보스를 다루고 있는 pp. 181-90을 보라.
7) David Wells, The Person of Christ: A Biblical and Historical Analysis of the Incarnation (Westchester: Crossway Books, 1984), 한역, [기독론: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서울: 엠마오, 1994). 그의 근자의 작품으로 다음을 보라 No Place For Truth (Grands Rapids: Eerdmans, 1993); God in the Wasteland: The Reality of Truth in a World of Fading Dreams (Grand Rapids: Eerdmans, 1994).
8) Edmund P. Clowney, The Preaching and Biblical Theology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79). 한역: [설교와 성경신학] 김정훈 역 (한국기독교 교육연구원 1982).
9) 사실 보스 자신은 성경신학이란 용어 보다 "특별 계시사(特別啓示史)"란 명칭이 보다 알맞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신학이란 용어는 그것만이 성경적이라거나, 이것이 다른 신학 분과 보다 좀더 성경적이라고 오해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스에 의하면 "모든 참된 기독교 신학은 성경신학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계시가 아닌 성경이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취급할 유일한 자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것이다 (Vos, [성경신학], "서언"에서).
10) Vos, [성경신학], p. 28.
11) Vos, [성경신학], pp. 28, 29.
12) Vos, [성경신학], p. 30.
13)Sidney Greidanus, Sola Scriptura: Problem and Principles in Preaching Historical Texts (Toronto: Wedge Publishing Foundation, 1970), p.1.(한역: 권수경 옮김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도서출판 학생신앙운동 1989). 그러나 부연해서 사족을 달자면 한역의 제목이 원제 "오직 성경"이라는 제목이 번역본에서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로 바뀜은 의도적으로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서 회자되는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라는 방법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구속사적 성경해석도 성경 본문의 문맥이 그것을 요구하고 뒷받침 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리하게 '구속사'라는 틀을 성경 어느 본문이든지 획일적으로 적용할 때 오히려 무리한(?) 본문의 문맥에 위배되는(?) 기형적 해석(?)이 도출 될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
14) D. Van Dijk, "Tot onze Leering," Pro-Ecclesia, VI (1940/41), p. 279, cited in Greidanus, p. 42.
15) Clowney, "Preaching the Word of the Lord," p. 425.
16) Vos, Biblical Theology, [성경 신학], pp. 424f.
17) G. E. Ladd, The Presence of the Future: The Eschatology of Biblical Realism(Grand Rapids: Eerdmans, 1974), pp. 188f.
18)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4), p. 91(강조 점은 필자의 것임) (한역/ 신성종, 이한수 공역 "신약 신학"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19) Robert Recker, "Redemptive Focus of the Kingdom of God," in [구속사와 하나님의 나라] 오광만 편역(서울: 풍만출판사, 1986), p. 26.
20) Recker, p. 57.
21) Wells, [그리스도는 누구 신가?], pp. 51f.
22) Vos, [성경신학], pp. 21f.
23) Ibid, p. 23.
24) 그 대표적인 글들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John Murray, The Covenant of Grace: A Biblico-Theological Study (London: Tyndale House, 1954); J.B. Payne,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62); O. Palmer Robertson, Christ of the Covenants (1980)./한역 김의원 역[계약신학과 그리스도]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25) Vos, "Hebrews, The Epistle of the Diatheke,"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14 (1916), p, 60=in Redemptive History, p. 232.
26) 그런 해석의 대표적인 예로 다음과 같은 세일하머의 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저자가 이 기사 자체에서는 이런 의미에 대한 시사를 주고 있지는 않으나, 저자는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 동물을 죽인 것에서 희생제사 개념을 선취하고 있을 수도 있다"(John H. Sailhamer, "Genesi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2[Grand Rapids: Zondervan, 1990], p. 58.) 이렇게 까지는 나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준비에는 동물 희생 제사가 함의되어 있다. 그러나 현저하게 나타난 것은 희생 제사적 방법이 아니라, 치유적 결과이다"고 말하는 클라인의 말에는 어느 정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의 의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진다.(Meredith G. Kline, "Genesis," in The New Bible Commentary [Leicester: IVP, 1970], p. 85). 클라인이 이렇게 나아가는 것은 좀 의아스러운 일이다.
27) 이런 요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는 Vos, [성경신학], pp. 58-60.을 보라.
28) Derek Kidner, Genesi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in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y, Vol. 1(Leicester: IVP, 1967/한역 한정건 역 [창세기]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4), p. 72: "It is unduly subtle, and a distraction, to foresee the atonement here".
29) 그런 잘못된 해석은 때로는 창세기 기록의 역사성을 무시하고 이 본문을 이 글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 가운데서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과 같은 죤 스키너의 말을 생각해 보라: "페니키아의 우소오스(Usoos) 전설에서는 [가죽옷 입는 일의 기원은] 야생 동물 사냥과 연관되며, 이는 또다시 희생제사 제도와 연관된다..... 고대 셈족들에게서는 희생 제사 제도와 동물의 고기를 음식으로 먹는 것이 불가 분리 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이는 사람들이 자연의 자연스러운 열매로만 살던 황금 시대로 부터의 첫 이탈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John Skinn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Genesis, Second Edition [Edinburgh: T. & T. Clark, 1930), p. 87). 스키너는 로버트슨 스미뜨도 이와 비슷하게 이 구절에서 가축의 희생 제사제도의 도입에 대한 J 문서 편집자들의(Yahwistic) 이론을 찾고 있다고 밝힌다.(Robertson Smith, Lectures on the Religion of the Semites, Second Edition (1984), pp. 306ff., cited in Skinner, p. 87).
30) Kidner, p.72: "The coats of skins are forerunners of the many measures of welfare, both moral and physical, which man's sin makes necessary."
31) 폰라트는 심지어 우리가 여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보존자로 볼 수 있게 된다고 까지 말한다. Cf. Gerhard von Rad, Genesis: A Commentary, E.T. by John H. Marks, revised by John Bowden (London: SCM Press, 1972), p. 96.
32) Scofield Reference Bible, pp. 10-11.
33) 아주 세심하게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이들로 다음을 보라. C. F. Keil and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1: The Pentateuch, E. T. by James Martin, 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76), p. 109; John H. Sailhamer, "Genesi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2 (Grand Rapids: Zondervan, 1990), pp. 61, 63.
34) Kidner, p. 75.
35) 유대인들 가운데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그가 충실한 곡식으로가 아니라, 잘 여물지 않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듯 싶다. 칼빈은 이런 생각을 어리석은 상상이라고 하였다. Cf.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E. T by John King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reprinted,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3), p. 196. 다른 점에서는 매우 세심한 카일과 델리취 주석이 이점에서는 가인의 제물은 첫 열매가 아니었는데 이런 선택의 잘못이 그의 하나님께 대한 온전하지 못한 마음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점(Keil and Delitzsch, pp. 110f)이 매우 의아스럽다. 스티거즈 역시 그런 입장을 취하는 데 그는 주로 아벨의 제물을 묘사하는 용어에 대한 분석에 근거해서 비교적으로 가인의 제물을 낮추어 보는 듯하다(Harold G. Stigers, A Commentary on Genesis [Grand Rapids: Zondervan, 1976], p. 87). 웬함도 그들과 같은 입장을 표한다(Gordon J. Wenham, Genesis 1-15: Word Biblical Commentary 1[Waco, Texas: Word Books Publisher, 1987], pp. 103, 104). 그러나 가인의 제물이 첫 열매가 아니었다는 그들의 주장에 반하여 Sailhamer는 그들의 제물이 모두 첫 열매로 여겨질 수 있다고 한다(p. 61).
36) 대표적인 예로 다음을 보라. Sailhamer, p. 61: "In his response we see the heart that lay behind the unaccepted offering."
37) Calvin, p. 196.
38) Cornelius Van Til,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1), 한역, [개혁주의 신학 서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p. 366.
39) B. B. Warfild,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 in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Philadelphia: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68), p. 29. See also Arthur W. Wainwright, The Trinity in the New Testament (London: SPCK, 1962, 1982), p. 18. 바빙크는 '엘로힘'과 관련하여 삼위일체에 대한 시사를 찾던 인물 중의 하나가 롬바르드(Rombard)라고 한다. [Herman Bavinck, The Doctrine of God, trans William Hendriksen [Grand Rapids: Eerdmans, 1951]; Grand Rapids: Baker, 1977], p. 100=한역, [개혁주의 신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p. 141).
40) Donald G. Bloesch, Essentials of Evangelical Theology, Vol. 1: God, Authority, and Salvation (New York: Harper and Row, 1978), p. 48, n. 20. 벌코프는 그런 해석을 하는 이로 Rottenberg를 들고 있다.(De Triniteit in Israels Godsbegrip, pp. 19ff., cited in Berkhof, p. 86).
41) Van Til, Systematic Theology, p. 366. 핫지의 다음 같은 견해도 이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에조차도 후대의 계시에서 그 참된 해석을 찾을 수 있는 이 교리에 대한 시사들이 있다.....그러나 계시의 진전으로부터 신성안에 삼위 계시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에 라야 그런 표현 형태가 그 위대한 교리[삼위일체 교리]에 그 토대를 두고 있음이 분명히 인식되는 것이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1[Riprinted, Grand Rapids: Eerdmands, 1977], pp. 446f.).
42) Berkhof, p. 86.
43) Payne, pp. 146, 167. 또한 Bavink, p. 256=한역, pp. 372f.을 보라.
44) Bavink, p. 100=한역, p. 141에서 재인용. 또한 Bavink, Our Reasonable Faith, tran. Henry Zylstra (Grand Rapids: Eerdmans, 1956; Grand Rapids: Baker, 1977), p.147: "...Elohim is in plural form, and therefore, although it does not, as was formerly generally supposed, designate the three persons of the divine Being, it does, in its character as an intensive plural, point to the fullnes of life and of power which are present in God"도 보라(강조 점은 필자의 것임). 월필드도 바빙크를 인용하면서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Warfield,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 in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p. 30). 또한 Berkhof, p. 48도 보라: "The plural is to be regarded as intensive, and therefore serves to indicate a fulness of power."
45) Wenham, p. 28에서 재인용.
46) Von Rad, Genesis, p. 58. 또한 그의 [구약성서신학], 제 1 권, 허혁 역 (왜관: 분도 출판사, 1976), p. 152도 보라. 이와 같은 견해를 표현하는 이들로 다음을 보라. John Skinn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Genesis(Edinburgh: T & T. Clark, 1930), p. 31; M. G. Kline, "Genesis," in NBC, p.83; Donals E. Gowan, Genesis 1-11: From Eden to Babel, 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88), p. 27. Gordon Wenham에 의하면 다음 같은 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취한다고 한다. W. Zimmerli, T. N. D. Mettinger, W. H. Gispen, Day (Wenham, p. 27).
47) 이 점에 대한 강한 지적과 논의로 Keil and Delitzsch, Genesis, p. 62를 보라. 이는 어거스틴 때부터도 있어온 반론이다. Augustine, City of God, 해당 부분을 보라.
48) 이에 대한 좋은 지적으로 Sailhamer, p. 37을 보라.
49) Wenham, p. 28.
50) Theodorus Vriesen, An Outline of Old Testament Theology, Trans. S. Neuijen (Oxford: Basil and Blackwell, 1958), p. 179. /(한역 노항규 옮김 [구약신학개요],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51) Ibid, pp. 179-80.
52) 비록 엘로힘과 관련해서 이기는 하나 바빙크가 그렇게 말한다.(Bavink, p. 100=한역, p. 141).
53)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Grand Rapids: Zondervan, 1994), p. 227. 그는 이와 관련해서 이 구절들에서 복수형이 "옳지 않게 이와 같은 식으로 [즉, 엄위의 복수로] 설명되었다"고 말하는 카우취가 편집한 게세니우스의 히브리 문법을 인용하고 있다(E. Kautzsch, ed, Gesenius' Hebrew Grammar, 2nd ed. (Oxford: Clarendon Press, 1910), section 124g, n. 2). 그는 또한 자신의 랍비 문학에 대한 조사를 언급하면서 "후기 유대인 해석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만족할 만한 의견의 일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Sysmatic Theology, p. 227, n. 2).
54) Ibid., p. 227.
55) Ibid, p. 227.
56) Berkhof, p. 96.
57) Payne, p. 167. 비슷한 입장의 표현으로 Sailhamer, pp. 37f 을 보라.
58) Calvin, p. 92: "Christians, therefore, properly contend, from this testimony, that there exists a plurality of Persons in the Godhead."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사를 부르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자신 안에 구별된 어떤 것을 발견하신다고 추론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영원한 지혜와 능력이 그 안에 내재하는 것이다"(pp. 92f).
59) Warfield,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 pp. 30f. 또한 각주 41에서 인용한 바 있는 Hodge, Systematic Theology, pp. 446f도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0) Kidner, p. 52: "... the fullness, glimpsed in the Old Testament, was to be unfolded as triunity, in the further 'we' and 'our' of John 14:23 (with 14:17)."
61) Keil and Delitzsch, Genesis, pp. 62f.
62) Wenham, p. 27.
63) Wenham, p. 28.
64)Umberto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trans. Israel Abrahams, 2 vols. (Jerusalem: Magnes Press of Hebrew University, 1961, 1964), 155-56; Claus Westerman, Genesis 1-11: A Commentary, trans. John J. Scullion (Mi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84), pp. 144f.; Bruce Vawter, on Genesis: A New Reading (Garden City, N. Y.; Doubleday, 1977), p.54. Wenham에 따르면 Steck, W. Gross, P.E. Dion등도 이 견해를 취한다고 한다(Wenham, p. 28).
65) Sailhamer, pp. 37-38. 창 11:3, 7의 교차구조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고 한다. J. P. Fokklemann, Narrative Art in Genesis (Assen: Van Gorcum, 1975). 자기 의논의 경우에 단수가 사용된 예(창 2:18, 시 12:5, 사 33:10)에 주의를 촉구하며 이 의견에 반대하는 Keil and Delitzsch, Genesis, p. 62도 보라.
66) 이에 대한 가장 강한 강조는 1930년대에 화란에서 구속사적 해석과 설교 운동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는 끌라스 스킬더(K. Schilder)가 하였다고 볼 수 있다. Greidanus, Sola Scriptua, pp. 40, 141f.을 보라.
67) 로마의 크레멘트로 부터 이런 해석이 시도되었다는 것에 대한 언급으로는 Francis A. Schaeffer, Joshua and the Flaw of Biblical History, 이주익 옮김, [여호수아: 끝없는 전진, 끝없는 승리] (서울: 기독지혜사, 1988), p. 85.
68) M. H. Woudstara, The Book of Joshua; NICOT(Grand Rapids: Eerdmans, 1981), p. 75.
69) 이런 연관성을 생각하는 대표적인 예로 다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J. Alberto Soggin, Joshua, E.T. by R.A. Wilson (London SCM Press, 1972), p.42.
70) Woudstara, p. 75, n. 33.
71)Donald H. Mavig, "Joshua,"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3(Grand Rapids: Zondervan, 1992), p. 263. 그런데 이 말 앞에 그가 하고 있는 말인 "비록 붉은 줄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기시키지만"이란 말은 그의 이 주장을 좀 약화시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어 좀 불행한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72) J. Maxwell and Gene M. Tucker, The Book of Joshua, The Cambridge Bible Commentary(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4), p. 32. 이렇게 붉은 줄을 그저 이런 표로만 보고 옳게 주해하는 주석들로 다음을 들 수 있다. Keil and Delitzsch, Joshua(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76), p. 38; John Rea, "Joshua," in Wycliff Bible Commentary, p. 209; Trent C. Butler, Joshua, Word Biblical Commentary 7 (Waco, Texas: Word Books Publisher, 1983), 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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