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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김성수교수) |

by 【고동엽】 2021.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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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הנוי; Jonah)

김성수 교수

요나서를 보면 형식상 매우 독특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로 보면 문체적인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는 역사적 서술체와 같다. 내용은 요나 선지자가 겪었던 일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엘리야처럼 역사서에 포함되어야 할 기록인데 선지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요나서 1장 1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은 선지서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이 선지서의 독특한 면은 아니다. 그러나 서두 자체가 이렇게 시작하는 만큼 선지서의 시작은 이렇다고 할 수 있다. 2장 같은 경우에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내용이 있다. 이는 선지서의 문체의 유일한 부분이다. 대개 선지서는 역사적 서술체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시적 문체로 쓰여져 있다. 성경에서 사용된 문체는 역사적 서술체와 시적 서술체 두 가지가 있다. 요나서 2장의 원문을 보면 1장과 다른 그 문체적 차이가 또렷하다. 보통의 선지서는 시적인 문체로 되어 있다. 물론 선지서 중간 중간에도 역사적 서술 부분이 간혹 나타나나 이것은 극소수이다. 선지서 대부분이 이러한데 요나서는 전부가 역사적 서술체이고 시적 서술체는 2장에만 나타난다. 하박국서 같은 경우는 3장에 가서 하박국의 기도로 끝난다. 이는 요나서와 유사성이 있으나 하박국의 선지자의 글은 1장 1절에 나타난다. 하박국은 문체 관점에서 선지서에 포함된다. 요나서는 문체적 관점에서는 선지서에 속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역사적 문체 속에 속하여 역사서에 해당된다.
또 하나 요나서의 문제점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간 것을 부인하는 진보적 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외친 기간에 관한 것이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한다. 만일 요나가 여로보암 2세 때의 선지자와 동일하다면 당시의 앗시리아는 팔레스타인을 기회만 있으면 쳐들어 온 나라였고, 이 나라의 가장 강력한 도시인 니느웨가 큰 회개를 했는데 역사적 상황과 이 말이 잘 맞지 않는다. 요나서가 영적인 진리를 말하기 위한 픽션이냐? 이런 논의가 생기고, 요나서의 역사성을 인정한 사람 중에서 요나의 흔적이 나타나야 하는 데 그렇지 않기에 8세기의 요나와 요나서의 요나가 다르다고 한 사람도 있다. 역사적으로 요나는 미궁 속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왕하 14:25에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국토를 회복했음을 말한다. 우리는 요나를 왕하 14:25과 욘 1:1의 인물을 동일시 한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 시대의 선지자였고 8세기 선지자가 분명하다. 여로보암 시대 때 활동을 한 선지자는 요나 외에 호세아, 아모스가 있고, 남쪽에서는 이사야, 미가가 있다. 아모스와 요나는 거의 같은 시기의 사람이나 선지서의 정황상 요나가 조금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아모스도 요나와 거의 같은 시기인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요나서의 문체는 역사서와 유사하다. 우리가 요나서를 선두주자로 볼 경우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엘리야의 선포 메세지는 심판과 남은 자이다. 이것을 엘리사가 이어 받았고 그는 구원을 선포한다. 엘리사 다음에 밀접한 사람이 바로 요나이다. 왜냐하면 엘리사의 예언이 실현된 때가 바로 여로보암 2세 시대이다. 요나 선지자의 메세지는 하나님이 선포한 역사 계획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미래를 말한다.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행할 하나님의 계획을 추가적으로 요나를 통해 말한다.
이것은 논리적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나 요나의 나레이티브(narrative) 스타일의 의문이 해결된다고 본다. 더 나가기 전에 요나서는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순종-니느웨 사람의 회개이다. 혹자는 선교적 관점에서 이방에 최초로 선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요나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요나의 경험은 한 선지자의 경험에 국한되고 마는 것인가? 엘리야를 그 당시 한 개인사건으로 보는 것으로 그치겠는가? 아니면 이것을 확대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성경을 우리는 신약을 통해서 확대해 보아야 한다. 마 12:39절을 보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이 내어 쫓기며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활동을 보여 주는 데도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을 언급한다. 이때 예수님의 답변이 마 12:29절이다. 지금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뜻으로 된다고 할 때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다. 이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한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자신이 3주야를 땅 속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요나의 표적이다.
투 세메이온 = 표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을 나타내는 이적적 성격과 함께 표적의 중요성은 그 의미가 그 사건 자체에 국한되지 않고 상징성을 가지게 된다. 그 사건을 넘어서 다른 것을 가르치는 요소가 표적의 중요한 뜻이다. 그러므로 표적은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요나가 겪은 일은 하나의 표적인 것이다. 요나의 사건은 그 자체보다 그것을 넘어 다른 것이 있다. 그러면 이 표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다음에 예수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말하는데 이어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말고 눅 11:30절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말한다. 여기보면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만 가르치지 않고 그 당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표적을 언급한다. 즉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었다. 요나는 앞으로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르칠 뿐만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에 대해서도 표적을 가졌다. 요나 사건을 한 선지자의 경험된 사건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풍부하고 심오하게 하고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요나서가 그 단적인 예이다. 성경을 자주 보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드러난다.
왕하 14:25에 보면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의 메세지를 선포하는 선지자로 요나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긍휼을 베푸시고, 이스라엘은 외적으로 유례없는 번영이 허락되었다. 요나에게 또 다른 계시가 임했는]데 그것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그들에게 크게 외치라고 했다. “그들의 악이 하나님께 상달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선포하라고 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요나는 이상하게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망 간 이유를 모르겠다. 8세기 선지자라 하면 앗시리아가 어떤 나라인가를 아는 자이다. 앗시리아는 기회만 있으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려고 했던 나라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할 때 좋아라고 가야 할텐데 도망갔다. 요나가 도망간 이유가 분명치 않다. 왜 요나는 앗시리아를 쳐서 선포하라는 말을 어기고 도망했을까? 선지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 이유는 4장 2절에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 메세지의 결과가 구원과 긍휼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 구원을 선포하게 한 것을 체험한 사람이 요나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에 선포하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직감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에 대한 혐오감인지 근동 지방의 제국세력 앗시리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것을 싫어하였는지 가늠하기 어려우나 요나는 앗시리아가 하나님의 긍휼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제국세력이라는 것 때문일까? 앗시리아의 도덕적 타락 때문인가? 이스라엘의 심판의 도구로 심판할 나라는 앗시리아이다. 그 앗시리아가 싫어서일까? 요나의 그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표적만 아니고 그 당시 사람에게도 표적이 된다. 이 요나는 니느웨 사람에 대해 표적을 갖는다. 또한 요나는 당시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표적을 갖는다. 바로 요나는 당시 이스라엘의 축소판이었다. 요나가 겪은 것도 요나 개인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겪은 역사적 체험의 축소판이요, 예표였다. 요나를 통해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본다면 요나가 다시스로 도피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어떤 상황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부름 자체의 목적은 세상 민족의 축복의 매개 역할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사명이 왜곡되어 이스라엘은 이기적이고, 국수주의적으로 변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왜곡됨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 나라와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매개의 역활을 져버렸다. 이방의 빛을 꺼버리는 직무유기로 이방인의 눈에 보인다. 요나의 도피는 선지자의 직무를 유기하고 도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는 아모스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장 4절에 보면 요나가 다시스로 피해 도망가는데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파선할 정도가 되었다. 요나 사건이 개인 경험에 그치지 않고 상징적 뜻을 가진다고 처음부터 밝힌 이유는, 처음부터 상징적으로 해석을 품고 요나의 개인 사건 이야기 안하면 전체 사건의 이해가 힘들기 때문이다. 바다의 폭풍은 전 세계의 정치 혼란의 대격변기로 설명한다. 단 7:2-3에서 “네 바람이 큰 바다에 불어서 큰 짐승 넷이” 나갔는데 이것은 앞으로 4강대국 등장을 말한다. “바다”는 바로 정치의 무대를 말한다. 이것은 바로 정치 혼란을 통해 4열강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것은 앞으로 앗시리아라는 큰 세력 등장으로 고대 근동이 들끓고 수 많은 나라가 멸망할 것을 말한다. 산헤립 때의 랍사게가 히스기야 왕에게 와서 자기 손에 망한 나라를 말한다. 이것은 요나 때문에 이방 선원들이 피해를 입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심판을 위해 앗시리아를 세웠는데 이 앗시리아로 인해 열방들이 끌려 들어가는 것이 선지서에 다 나타난다.
1장 5절 이하에 요나는 폭풍이 부는데도 배 밑으로 들어간다. 이는 이방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 받는 것이 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러하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배 밑으로 들어가 영적 깊은 잠에 들어간다. 이방 선장이 깨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한다. 이방인에게 깨우침을 받은 요나의 모습은 로마서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방을 구원하는 것이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폭풍 속에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걸린다. 이방인이 요나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한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민족 출신을 고백하게 하고 자신을 소개하게 한다.
10절 이하에서 요나의 말을 듣고 이방인이 근심하게 된다. 요나의 직업이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알고 이 재난을 모면할 길을 묻는다. 요나는 자기를 물에 던지라고 한다. 이때 요나를 구원하려고 힘껏 배를 젓는다. 이런 대조를 하나님이 표현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요나는 배은망덕하고 무정한 사람이다. 이스라엘로써 이방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얼마나 배은망덕하고 무자비한 일인지 모른다. 요나를 구원하려는 노력이 수포가 되자, 요나를 던지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확인 한 후에 행한다. 이방인의 경건과 요나의 무정함과 불경건이 대조를 이룬다. 바로 이 재난은 이스라엘로 말미암은 것이다. 요나를 바다에 던진 것은 이스라엘의 죽음과 심판을 의미한다.
그 구체적인 형태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폭풍이 일고, 앗시리아로 말미암은 정치적 폭풍 속에서 이스라엘이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으킨 정치적 폭풍 속에서 이스라엘이 던져질 것을 암시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망한다. 이방은은 요나를 던지고 바다가 잠잠해지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상이면 범죄대로 그 결과가 없으나 하나님을 보고 이방인이 두려워할 것임을 요나를 던짐을 보고(이것은 이스라엘을 던지는 것) 깨닫는다. 정치적 소동 속에서 이스라엘은 던져지고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고 여기에 이방도 함께 포함된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3일 동안 있게 된다. 신약에서는 3일 동안 예수님께서 죽음의 영역에 계심을 말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한 후 2-3일 지나서 구원할 것을 선포한다. 바로 2-3일은 이스라엘이 죽고 삶에로 연관된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연결되고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죽고 삶에로 2-3일이 연결된다.
2장에 들어와서 물고기 뱃속에 삼킨 자체를 요나가 생각하기를 어떻게 보았을까?
물고기 뱃속은 보통 음부의 뱃속으로 해석된다. 이스라엘이 열방의 전쟁 속에서 던져짐을 당하는데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것이 죽음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가인의 추방이 죽음의 본질을 암시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은혜를 간구해서 뭍으로 토해내어 진다. 죽음의 영역인 바다에서 삶의 영역인 뭍으로 나온다. 이스라엘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체험을 물고기 뱃속은 상징한다. 이것은 또한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3년 동안 앗시리아, 바벨론에 망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고 신자에 있어서도 옛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변화, 마지막날 부활까지 연결된다.
3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했다. 앗시리아를 멸망하려는데 구원 선포를 요나에게 말하신 하나님을 보라. 요나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증거하라 했을때 처음에 도망갔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후 재차 사명을 받은 것은 죽음의 맛을 본 새 이스라엘이 살아나서 이방에 복음 전달자가 됨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헬라나라로 오심을 말할 때 예수님은 십자가 부활 후에 그곳에 복음 증거가 되리라고 한다. 이것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심판 메세지를 들은 니느웨는 왕과 백성이 금식하고 회개한다. 하나님이 이들의 회개함을 보고 이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하나님께서 재앙의 뜻을 돌이켰다. 이것이 못마땅해서 요나는 4장에서 기도한다.
4장에서 요나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다.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이 요나는 싫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요나의 국수주의적 편협한 민족주의에 대해 하나님은 박넝쿨을 예비하여 시들게 함으로 요나의 이기심을 지적하신다. 요나는 박넝쿨이 있을 때 좋아하나 이것이 없어지면 죽겠다고 한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 요나와 하나님의 긍휼이 대조를 이룬다. 요나는 박넝쿨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지적하기를 박넝쿨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아까와 하면서 사람의 생명의 존엄성을 알지 못하는 요나를 책망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은 두 가지를 지적하시는데 요나의 이기심과 하나님의 긍휼을 보게 한다. 요나는 이기심으로 박넝쿨을 아까와 했으나 하나님의 긍휼과 대조시킴으로 요나의 잘못을 깨우치신다.
이것은 결국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시고 모든 민족에게 확대되는 복음을 예표한다. 이 예언의 모토가 요나서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편애로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이스라엘의 담을 넘어 이방인에게 확대되어 하나님의 긍휼과 관심이 계심을 여기서 말한다. 조심할 것은 하나님의 보편적 관심을 없애고 적당히 기독교가 도덕적 종교로 되는 것은 위험하다. 사망을 전하지 아니하고, 가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나님의 보편적 관심을 사회적 관심에 대한 것과 혼동치 말아야 한다.


총정리를 해보자. 앞서 서두에서 요나서의 메세지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선포하신 이스라엘의 역사 계획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되 남은 자를 남기시겠다고 하신다. 요나서는 이것을 확대시키고 추가적 요소를 말한다. 예로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나타나고 그것을 실현하는데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을 말한다. 어떤 선지서에 보면 이런 기본 요소가 있다. 이스라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나 완전한 멸망이 아니고 남은 자를 두시려는 것으로 이해되는 심판이다. 그루터기의 둥지에 새 싹이 나듯이 요나서는 이것을 구체화시키고 확대시킨다. 이 심판은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는데 바다 가운데서 죽으나 하나님께서 마련한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체험 후 새롭게 변화된 이스라엘이 되어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의 빛으로 이스라엘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다. 이스라엘을 통해 이런 일을 이루신 근본 동기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모든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선지서에서 흐르는 사상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남은 자를 남기나 이를 통해 이방이 구원을 얻고 이 구원은 확대되어 보편적 구원으로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방의 구원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선지서의 핵심이다. 역사적 사건에 따라 각도는 틀리나 선지서의 기본 뼈대는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면서 선지서를 본다면 선지서의 의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약에서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요나가 표적이었으면 이스라엘 자체에 대한 경고이고, 니느웨에 표적이 있으면 요나와 관련에서, 예수님에 관한 표적이 있으면 예수님과 관련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요나서의 말은 큰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심판은 그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스라엘과 이방에 대한 의미를 개괄적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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