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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고광필) 3강 - 사도바울의 성경해석|

by 【고동엽】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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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성경해석원리

서론


1.성경해석의 두 요소
a)text와 해석자:두 지평(이해의 범위)

2.text와 해석자의 관계성
a)상관관계(상호):지평의 융합(가다마)
b)해석자 우선:실존해석학(불트만), 해방신학, 여성신학
c)택스트에 의해서 지배:폴 리쿠어
d)저자의 의도:말씀과 성령의 내적조명

3.사도 바울
a)랍비해석의 권위자랍비 힐렐의 후게자요 제자에게서 배움
b)신약의 2/3을 기록
c)이방의 전도인
d)최초의 조직신학자(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교회 특수상황에 맞게 해석)
e)다메섹도상에서 변화받음

3.디모데 전후서
a)유일한 개인을 지적하여 편지를 씀

b)로마시의 대 화재로 인하여 네로 황제는 자기의 화재를 감추기 위하여 기독교인에게 뒤집어 쓰워서 기독교는 불법종교로 지정되었다.로마 옥중에서 죽음을 앞에 나두고 믿음으로 난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디모데는 젊은 목회자로써(밈전4:12) 에배소 교회에서 감독으로 있었다.연약하고(딤전5:23) 겁이 많았지만(딤전 1:7) 믿음의 사람이요 유능한 교사였다.디모데라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의미로서 자기 어머니 유니게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사도 바울은 이런 디모데가 어려운 상황에서 젊은 나이로 목회를 하고 있게 때문에 목회전반에 걸쳐서 교훈을 주고 있다.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을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다.바울에 의하면 목회자는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목회자거 되어야한다.전자는 성경해석을 말하며 후자는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전자와 후자는 서롤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성경을 올게 해석하야 올바른 목회자가 되고 경건한 생활를 해야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자질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만큼 성경에 대해서 정확하게 요약한 사도가 없다.성경의 저자, 성경의 내용, 성경해석의 적용, 그 결과(결단)에 대해서 말한 사도가 없다.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것을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것은 큰 의미가 있다.어려운 환경일 수록 성경을 올바로 알고 가르쳐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디모데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 강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올바로 목회를 하고자 하는 목회자가 경청해야할 말씀이다.성경해석의 대가 존 칼빈은 성경해석이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누구이며, 핵심메세지는 무엇이며,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쓰여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따라서 너무도 잘아는 것이지만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늘 새롭게 이해해야한다.오늘날 성경해석에서는 저자 의도의 파악과 동시에 해석하는 사람의 자질이 중요시 되고 있다.그래서 성경말씀과 해석자의 자질을 생각해야 한다. 딤후 3:15-17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성경해석의 문법을 살펴보자 한다.

I. 성경관

1.성경의 저자


a)성경의 두 저자(dual authorship):하나님과 인간(원 저자와 기록한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이니”(πασα γραπη θεοπνευστος)로서 감동이란 단어는 θεος와 πνεω(숨을 쉬다)의 합성어이다.문자적으로 변역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이다. All Scripture is Godbreathed(NIV).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GNB/NASB).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iation of God(KJV/NKJV).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RSV). The Whole Bible was given to us from God(living Bible). 왜 똑같은 원문을 이렇게 다르게 번역할 수 있는가?이것이 해석의 어려운 점이다.NIV을 제외하고는 전무 수동으로 번역했다.수동과 능동의 번역은 뉴앙스의 차이가 있다. 문법적으로 보면 감동이라는 단어는 형용사적으로 쓰였다.주격, 여성, 단수 형용사이다.그래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말은 서술적이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창세기 2:7에에서 흙에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living soul)이 되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심으로 사도들의 기록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 된다. 수동적으로보면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어떻게 쓰셨는가? 벧후 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Knowing first, that no prophycy of Scripturei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 for prophecy never came by the will of man, but holy men of God spo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Spirit./NKJV) “You must understand that no prophcey of Scripture came about by prophet's own interpretation. for prophcey never had its origin in the will of man, but men spoke from God as they were carried along by the Holy Spirit/NIV).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기록자는 성령 하나님이다. 수동형은 성경을 성령님을 통해서 쓰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성경은 마태, 마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가, 하나님이 누가를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시키셔서 기록케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마가 복음이지만 일차적으로 저자는 마가가 아니라 하나님이며 마가는 성령님의 도구로 쓰여짐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 마가는 기계와 같이 쓰임을 받었는가? 아니다. 마가의 믿음, 교육을 하나님께서 쓰신 것이다. 이것이 유기적 영감이다. 그래서 똑같이 복음서를 기록했지만 신학은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지만 인간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절대 무오한 말씀이다. 절대 권위가 있는 말씀이다.

2.성경의 내용


사도 바울의 성경해석 문법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을 224번에 걸처 직접 인용문의 형태로 인용하고 있다. 그외 다른 형태로는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소개된 사례가 7번 구약 성경을 의역하거나 요약한 것이 19번, 두드러진 유사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45번이 된다. 월터 C. 카이저.모이세스 실바 공저, 성경 해석학 개론, 강창헌 번역(도서출판 은성, 1996), 335.


이것은 신약과 구약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암시해준다.


David S. Dockery에 의하면 사도들의 성경 해석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 Perspective)이라고 한다. Dockery, Biblical Interpretation, 44.


바울의 해석도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된 메시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신약처럼 구약 성경에 명시적으로가 아니라 예표적으로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십자가는 이사야 53장에 부활은 요나서(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사흘동안 있다가 나온 사건)에서 예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성경이다(딤후 3:15).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쓰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올바롤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과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으로 교훈, 책망, 바르게함, 의로 교육함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게 한다(딤후 3:16-17). 따라서, 성경 해석은 신자로 하여금 이렇게 살도록 해석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새언약의 종으로 만드셨다. 그러나 이것은 의문으로 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영으로 된 것이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지만 영은 살리는 것이다(고후3:6). 여기서 의문이란 구약 자체가 의문이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를 억매이게 하는 율법주의(legalism)를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처럼 율법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고후 3:14 주석에서 이 말씀은 성경 해석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영향과 열매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귀에만 들리고 마음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을 의문이라고 하며 마음에 영향을 주고 생명을 주며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임을 영으로 말한 것이라고 했다(Calvin's Commentary, Vol.XX, [Baker Book House, 1843], 172-74).

신약에서 볼 때 구약 자체로서는 부분적인 성경이다.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구약은 하나로 통일되고 완전한 성경이 된다. 그래서 칼빈도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핵심이며 설계도와 같다고 딤후 3:15-17의 주석에서 말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24-31에서 자신이 사라와 하갈을 풍유적인 방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해서 알렉산드리아학파처럼 풍유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니다. 알레고리를 은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야기식(narrative form)으로 다루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교회의 특수 사정에 따라서 복음의 핵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재해석한다. 예를 들면 고전 15장은 부활이 없다고 말한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 부활의 역사성과 의미를 편지의 형식으로 기술하면서 변증하고 또한 험증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일상 언어로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음식을 잡수시고 성경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묘사함으로서 부활의 역사성을 말하고 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는 것도 헛되며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라고 했다. "만약 없다면"이라는 가정 부정법을 써서 부활 의미의 중요성을 변증하고 험증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당시 교회의 특수 상황에 따아서 재 해석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다. 뿐만 아니라 신약의 절반 이상을 기록한 사도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바울의 성경해석 문법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져 있지만 인간의 글이 아니다. 성경의 원저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 안에서 계시한 성경해석 방법을 ?아야 한다. 그래야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성경해석 문법이다.
성경해석 문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성경의 저자가 무슨 목적으로 성경을 기록했는가를 살펴봐야한다. 그래야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올바르다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잘못된 견해가 있기 때문에 올바르다는 말을 쓰게 되며 이 말의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필자는 서울 올라갈 때마다 늘 혼동되고 방황하게 만드는 것이 지하철을 타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는 곳을 트랙이라고 한다. 가령 제가 서울역으로 가려면 서울역으로 가는데 두개의 똑같은 트랙에 있다. 두 개의 트랙은 방향만 다르기 때문에 서울역으로 가는 트랙에 있지않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트랙에 있다면 머리 속으로는 서울역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올바른 트랙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실재로 서울역에 도달할 수가 없다. 올바른 길 혹은 트랙이라는 말은 단순히 지적인 생각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만 한다. 이처럼 실재 생활에서 올바른 길이란 엄청나게 중요하다. 사람을 살리는 길이 있고 사람을 죽이는 길도 있는 것처럼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성도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


따라서, 올바른 성경해석 문법이란 단순히 성경을 해석하는 이론이 아니라 실재로 올바른 신앙생활의 방향을 제시하며, 진정한 신자가 되게 하며,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게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성경해석 문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바울의 성경관을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성경관이 성경해석 문법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 저자는 누구인가, 성경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성경의 핵심 메세지는 무엇인가, 무슨 목적으로 쓰여?는가, 성경해석자의 자질은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 장에서는 그렇게 함으로서 사도 바울의 성경해석 문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I.성경관

성경의 저자가 누구인가? 표면상으로는 성경의 저자는 인간이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 마가, 마태, 요한, 이사야, 모세 등등을 말 할 수 있다. 만약에 이들이 성경의 진정한 저자라고 한다면 성경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인간이 ?기 때문에 인간의 말이요 사도 바울의 말이요 마태의 말이된다. 그래서 성경은 오류가 있고 세상의 다른 소설이나 윤리책이나 유명한 경전중의 하나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 공부하고 있을 때 시키고에서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인구조사 요원으로서 summer job을 가진적이 있었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서 인구조사를 하는 것 이다. 그러던중 어느날 프에트리고인을 만나서 이야기 하던중 성경에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서 성경을 읽으라고 했더니 그 사람의 성경에 대한 말을 듣고 아주 소크를 먹은 적이 있다. “성경은 바로니이다”(the bible is balony). 발론니란 햄종류의 하나인데 그 중에서 가장 질이 좋지 않은 햄이다. 또한 넌센스(non-sense)라는 말과도 같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는 성경은 넌센스라는 말이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성경은 사대성인의 한 사람인 예수의 말, 윤리, 철학, 인간을 얽어 매는 굴래등 수많은 말을 할 수 있다. 성경은 정말로 세상의 책중의 하나인가? 성경의 진정한 저자는 정말로 누인가?

i)성경 저자(딤후 3:16)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디모데 후서 3:16 말씀을 보면 성경의 저자가 누구인가를 아주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πασα γραφη θεοπνευτοs, all Scriputre is God-breathed)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모든 성경이다. 66권의 신구약을 말한다. 신구약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를 성령으로 감동 감화시켜서 성경을 기록케 했다.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히브리어와 희랍어)의 수단을 쓰셔서 성경을 기록케 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요 성경의 말씀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ii) 성경 내용(딤후 3:15)

성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말 할 수 있을까? 핵심적인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가? 언약의 말씀이다. 구원의 메세지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의 약속이요 신약은 오신 메시아의 성취다. 이 말들이 다 맞은 말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리라”(how from infancy you have known the holy Scriptures, which are able to make you wise for salvation through faith in Christ Jesus/NIV, to instruct(RSV)/, to give wisdom that leads to salvation(NSAB) και οτι απο βρεφουs ιερα γραμματα οιδαs τα δυναμενα σε σοφισαι ειs σωτεριαν δια πιστεω τη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말하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를 말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가르처 주는 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전치사는 예수 “안”(εν Χριστω Ιησου /in Christ)에라는 말이다. 예수 밖에 있는 믿음이 아니라 안에 있는 믿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부다, 미호메트, 공자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만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기 때문이다(행4:12).


성경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성경에는 시, 역사, 비유, 묵시, 윤리, 과학, 법, 모든 것이 있지만 성경은 철학, 문학, 윤리, 시, 역사 책도 아니다. 성경을 배우는 근본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성경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어떤 책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책은 없다. 성 어거스틴도 그의 고백록에서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구원을 얻게하는 지혜를 가르치지 않했다고 고백했다. The Confessions of ST. Augustine, trans., with an introductuction and notes, by John K. Ryan,(Image Books, New York, 1960), p.180.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도록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세상의 책과는 질이 다른 책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다. 예수님 자신이 말하셨다. “도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24:27, 요 5:39, 행 13:27). 따라서, 성경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이시다.

iii) 성경의 핵심 메세지


성경의 핵심 메세지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메세지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 메세지는 구속의 메세지이다. 성경핵심 메세지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이다. 성경은 구속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을 올바르게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은 성부 하나님이 선지자와 사도들을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감동시키시셔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쓰신 것이다.

iv)성경의 유익(딤후3:15-17)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으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profitable(KJV?RSV/NSAB), usful(NIV)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니라” 말했다(딤후 3:16). 이 말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신자가 믿는 자로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들어내며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칼빈은 디모데후서 주석(딤후 3:15-17)에서 성경은 선하고 행복한 삶의 완전한 룰(a perfect rule of good and happy life)을 가르처준다고 했다. 그렇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배워야한다.

a) 교훈(ωφελιμο πφοs διδασκαλιαν/doctrine(KJV/ teaching(NIV/NSAB/RSV), )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여러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교훈, 윤리에 대한 교훈, 결혼에 대한 교훈, 역사에 대한 교훈, 철학에 대한 교훈등을 배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다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 메세지이기 때문이다.

b) 책망(reproof, rebuking, πφοs ελεγμον)
성경을 공부하면 우리 신앙 생활에 어디에 잘 못이 있는가에 대해서 책망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거울과 같은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너히는 도(말씀)를 행하는 자가되고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23, any one listens to the word, does not do what it says is like a man who looks his face in a mirror, and looking at himself, goes away immediately forgets what he looks like.).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공부하고 책망을 받지 않은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 못 공부한 것이다. 잘못 설교를 들은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책망 받지 아니할 사람이 있는가? 없다. 성경을 공부하고 잘못된 점을 회개해야 한다.

c)바르게함(correction, correcting, πφοs επανοφθωσιν)
성경공부를 통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제는 말씀이 지시한 데로 고처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회개한 단순히 뉘우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돌아갈려고 하지 말고(죽음) 돌아오라고 하셨다(겔18:31-32). 회개한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찢는 것이다(욜 2:13). 이런 점에서 보면 회개란 하나님의 책망이 아니라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게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d)의로 교육함(training in righteousness, πφοs παιδειαν την δικαιοσυνη)
성경은 우리 신자가 의로운 생활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도록 가르친다. 경건한 생활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가르친다. “교육”(παιδεια)이라는 말에는 배운다는 말과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훈련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교육이란 배우고 그리고 그 배운 것을 실천하는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희랍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을 만든다고 봤다. 그래서 그들은 교육을 중요시 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세상 것을 배워야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서 올바른 인간이된다고 가르친다. 경건한 생활을 배워야 한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θρεσκεια)은 곧 과부와 고아를 그 환난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약 1:27)고 했다. 야고보에 의하면 경건한 생활이란 두가지 요소가 포함되어야함을 말해주고 있다. ?째는 성화된 삶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요 둘째는 도움이 필요한자가 어려움에 있을 때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뿐만 아니라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e)모든 선한 일을 온전케 하게함(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교훈을 배우고, 책망받고, 책망 받은 것을 고치며, 의로운 훈련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람(the man of God/KJV/NIV/RSV/the person who serves God(GNB)이 된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닮은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 신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할 때 선한 일을 할 수 없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악한 일을 하게 된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온전케 한다는 말은 흠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능히 성경 말씀데로 사는 자를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사람의 돈에서는 썩은 냄새가 난다고 킬케고올은 말했다.

II.성경해석 문법

1. 성령의 감동과 가르침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딤후 3:16). 그래서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야한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셨고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기(search) 때문이다(고전2:10-11). 우리는 당신으로부터 오는 영 곧 성령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알도록 하셨다(고전2:11-12). 성경은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고 다만 성령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면 성부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쓰게 하셨다. 그래서 성경을 쓰신 성령님의 가르침이 없이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아오셔서 성경을 가르쳐 주셨다. 어떻게 가르쳐주셨는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셨다(눅24:45). 여기서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셨다는 말은 중요한다. 우리는 스스로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하셔야 한다.
사도 요한은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신다고 말했다(요14:26).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진리의 성령님이라고 했다(요16:13). 그래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2. 구속사적인 해석
성경의 핵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의 핵심 메세지는 구속의 메세지이다. 따라서, 성경을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도 성경에서 예수님을 ?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구속사적인 해석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같은 점을 고려해야한다.

i)구속사의 정점
구약에서는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믿음의 선진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1).이런점에서 보면 구속사의 계시는 점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인 계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여기서 점진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향한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 승천, 재림을 향한 것이다. 따라서, 구속사의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해서 구약은 오실 메세아의 예언이요 신약은 오신 메시아 즉 예언의 성취이다. 따라서, 신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해서 하나로 통일성을 이룬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구약이란 이스라엘의 민족사이지 구속사는 아니다.


ii). 모형론적 해석(τυπος/typological Interpretaion/)

사도 바울은 구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모형론적으로 해석했다. 모형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핵심이라는 점에 기초를 두고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사의 정점이라는 말이다. 예형과 원형의 관계이다. 혹은 그림자와 실체와의 관게이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는 것이다.오스카 쿨만은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정점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예수(historical Jesus Christ)일뿐만 아니라 역사적 예수(historic Jesus Christ/historic event/히랍처럼 반복되고 순환적인 사건이 아니라 단 한번인 유일한 사건이다/απαξ/ εφαπαξ )라고 했다. 따라서, 구약의 중요한 인물, 사건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가령 예를 들면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예표한다(고전 5:7). 고전 10:1-22에 보면 구약의 사건은 우리가 거울로 삼고 경게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고전 10:6, 11(거울/τυπου/ τυπικως).

iii)성경의 단순성 과 명료성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도록하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케 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어려운 말로 기록되지 않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나 신약의 언어인 코이네 희랍어를 보다라도 지식층만 아는 그런 언어가 아니라 일상언어로 쓰여졌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성을 고려하셨다는 증거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당신의 말씀을 알아들 수 있도록 배려를 하셨다는 말이다. 칼빈은 하나님이 인간의 능력에 맞게 언어를 고려하여 쓰셨다고 말했다. 이것이 적응이론이다. 하나님의 고려는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다는 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성을 따라 자신의 언어로 말했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무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의 능력에 맞게 조정하시고 낮추셔서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듯이 말씀하셨다고 칼빈은 말했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하나님이 “후회”하시고(삼상 15:35) “한탄”(창 6:6-7)하셨 표현들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식언하신다거나 인간처럼 성을 내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데로 살지 않고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의미를 우리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성정과 감정적인 언어로 표현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직접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의 목적이 인간이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매한 말이나 복잡한 언어를 쓰지않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언어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쓰여진 것이다. 성경 이해의 복잡성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자체에 있지 않고 죄악된 인간의 부패된 마음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인간의 능력에 맞게 낮추셔서 성경을 기록하셨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에도 성경의 단순성과 명료성을 말한다. “성경에 있는 것은 다 똑같이 명백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게 다같이 확실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반드시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들은 성경 여기 저기 아주 명백하게 설명, 공개되어 잇음으로 유식한 자만이 아니라 무식한 자라도 적당한 방법을 적절히 사용하면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제 1장 7절)
하나님은 성경에 구원의 메세지를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계시했다. 초대교부 한사람인 크리소스톰도 성경의 문체는 이방인들의 문학이나 철학처럼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경의 단순성과 명료성에 기초한 문자적인 의미를 찾고자 했다.

3)문자적 해석(literal meaning of Scripture)

성경해석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회사를 보면 알렉산드리아를 중심한 우화적 해석 (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선호했다. 이 해석방법은 성경 언어 이면에 숨어있는 신비적인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함으로써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게 되고 영지주의자들처럼 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있으며 성경의 단순성과 명료성을 무시하게 되었다. 이에 반대해서 안디옥학파가 생겼으며 그 대표자로서는 Theodore Mopsuestia와 John Crysostom들은 성경의 언어의 문법적인면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
Webster's International Dictionary에서는 문자적 의미란 단순하고 분명한 의미이며 우화적이거나 은유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정의했다(literal means the natural or usual contstraction and implication of a writting or expression! following the ordinary and apparant sense of words; not allegorical or metaphorical. To interprete Scripture is not commited to a a wooden literalism, nor to a letterism, nor any mechanical understanding of language.).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문자적인 의미란 영적인 의미를 말한다. 여기서 영적인 의미란 알렉산드리아학파에서 말하는 문자뒤에 숨어 있는 allegoria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안디옥학파에서 말하는 theoria에의한 영적인 의미도 아니다. 성령님이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는 영적인 의미를 말한다(고후3:6; 고전2:14).
칼빈에 의하면 문자적인 해석이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의미를 말한다. 이 말속에는 성경해석은 인위적인 해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성경은 성령의 학교라고 칼빈은 말했다. 성령은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며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성경기자를 감동 감화시켜서 성경을 쓰신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자적인 해석이란 하나님이 성경에서 성령의 내적인 조명과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에 가르처준 의미를 그대로 들어내는 것이다.
“우는자는 복있다”는 성경의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칼빈은 해석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눈물 흘리는 법을 배웁시다.우리의 눈물이 상달되어야 할 곳이 바로 거기이기 대문입니다.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윗이 말 한 말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당신의 병에다 나의 눈물을 담으셨나이다.!’우리가 고귀한 향수 또는 댓가를 치뤄 얻은 한방울과 같은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간직해 두신다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눈물은 땅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우리가 손으로 닥아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울 때 그것은 분명히 한방울도 상실되지 안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은 전부다 조심스럽게 간직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같은 위로를 받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단순하면서도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드러내지 않은가!문자적인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란 성령의 내적조명을 통해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처준 자연스럽고도 단순하며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보면 칼빈의 자연스러운 의미란 바울이 말하는 영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4.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로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도 통달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신다. 따라서, 오직 성령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고전 2:13). 여기서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는 말씀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συγκρινω 라는 말은 συν(함께)와 κρινω(판단하다, 구별하다)의 합성어로서 결합하다, 설명하다, 비교하다, 평가하다, 분별하다등의 말로서 사용된다. 그래서 성경마다 이말을 다르게 번역했다. comparing spiritual things with spiritual(KJV), expressing spiritual truths in spiritual words(NIV), interpreting spiritual truths to those who posses the spirit(RSV)으로 번역했다. 각 번역마다 다소 뉴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이해해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을 고전 2:1-16의 문맥에서 보면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한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웨스트민서터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성경을 해석하는 무오한 척도는 성경 그자체이라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여기에 무엇을 더 가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진실된 의미를 가르처준다. 그래서 성경의 어느 부분의 참되고 온전한 뜻을 알고자할 때는 좀더 명백한 말씀에 비추어서 해석해야한다(Scriprure interprets Scripture, or obscure passages in Scripture must give way to clear passages).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성경의 통일성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로 통일된다. 그래서 구약은 오실 메세아에 대해서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해서 말한다. 그래서 성경은 전체적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부분은 전체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주 성경에 쓰여있는 참조 말씀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해석사적으로 보면 성경은 성경으로라는 말은 두가지 중요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말은 천주교 성경해석학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천주교에 의하면 교회는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성경해석의 마지막 권위는 교황이라고 했다. 그러나 개신교 특히 루터와 칼빈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야한다면서 해석의 권위를 교황이나 교회에 두지 않고 성경저자가 하나님인 성경 말씀에 두었다. 그래서 성경의 어려운 본문은 성경에 나온 쉬운 본문을 통해서 해석함으로 그 의미를 더분명히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라는 말은 성경을 찰학으로 해석하거나 세상의 지식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성경의 원 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경이 세상의 경험이나 철학으로 해석되어질 때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경이 인간의 책으로 전락되어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의 해석은 자유주의 성경해석의 특성중의 하나이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해야한다(고전2:13).

5. 은유적 해석

갈라디아서 4:20-31에서 아브라함의 두 아내-- 사라와 하갈--을 풍유라는 비유를 통해서(by the way of allegory) 해석했다(ατινα εστιν αλληγορουμενα). 이 사실은 사도 바울이 성경을 푸유적으로 해석했다는 근거를 제시하였으며, 풍유적인 해석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교부들도 있었다. 그러나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사도 바울은 사라와 하갈을 풍유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은유적으로 해석했다.
바울은 사라와 하갈은 두 언약을 표현하는 풍유이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갈과 사라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아브라함의 두 아내의 관계성을 통해서 율법과 약속의 차이점을 묘사한다 점이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정부인이 아니라 몸종이었으며 그녀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정 부인인 사라로부터 난 이삭을 핍박했다. 그래서,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온 율법을 의미하며 우리를 얽매이게 하지만 사라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으로서 온 약속을 의미하며 우리를 자유케 한다. 따라서, 이 풍유는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말하준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에 나오는 역사적인 두 인물을 통해서 그리고 아브라함과의 관계성 속에서 율법과 약속의 차이를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율법과 약속의 차이는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영적인 진리를 말해준다. 바울의 해석은 풍유적인 해석에처럼 역사성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며 문맥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바울의 갈라디아서에서 하갈과 사라에 대한 풍유의 해석은 은유적인 해석이지 풍유적인 해석은 아니다. Karlfried Froehlich(translator and editor), Biblical Interpretation in the Early Church(Philadelphia:Fortress Press, 1984), 96.

6.믿음의 유비(analogy of faith/analogia fidei)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6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헤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κατα την αναλογαν πιστεως)라는 구절에서 연유되었다. 로마서 12:3에서도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했다.여기서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말에서 분량대로 라는 말은 믿음에 “일치하거나” “비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이 구절을 해서하는 대 세가지 방법이제안되었다.?째,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의미한다.둘째,수학적인 비레를 의미한다. 예언자 자신의 목적과 범위내에서 이해되어져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셋째, 이미 계시된 진리에 일치하도록 예언해한다. 월터 카이져.모이세스 실바, 「성경해석학 개론」, 강창헌번역(은성, 1996), 300.

칼빈은 본문 주석에서 믿음의 유비는 올바른 성경해석의 룰을 제시한다고 했다.다시 말하면 믿음의 규범(the rule of faith)을 의미한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성경해석의 정당성을 믿음의 규범의 범위 내에 한정시켰다. 그 예가 이레니우스와 터틀리안에서 불 수 있다. 여기서 예언은 구약을 의미할 수도 있고 신구약 성경을 의미할 수도 있다. 루터는 믿음의 분수대로라는 말을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믿음에 비교해서라고 말했다. 따라서, “만약 너히가 에언하고 싶으면 너히의 예언의 행위가 믿음의 특수한 질과 조화될 수 있게끔 믿음을 넘어서지 않은 범위 내에서 에언하라”라고 의역했다. 따라서,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성겨에 계시된 말씀, 구속사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그의 교회를 세우는 범위 내에서 해석되어져야 함을 배운다.

III.해석자의 자질

성경을 해석하는데는 두 측면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전자와 후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다.해석학에서는 이것을 두 지평이라고 한다.자유주의 해석학에서는 해석이란 이 두 지평의 융합이라고 한다.그러나 정통주의 해석학에서 보면 성경 해석이란 단순히 두 지평의 융합이 아니다. 성경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은다.변해야 하는 측면은 해석자의 관점이다. 말씀과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하여 해석자의 관점이 계속적으로 교정되 수정되어서 성경의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문자적인 의미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이런점에서 성경해석에 있어서 해석자의 자질이 중요하며 그래서 “누가” 성경을 해석했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1.경건한 생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성경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신 숨결을 들을 수 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때문에 세상학문에 통달한 학자라고 할지라고 해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야한다. 성령의 내적인 조명 혹은 가르침을 받아야한다.이것이 세상의 해석학과 성경 해석학은 다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ευσεβεια μυστηριον/mystery of godliness), 그렇지 않다 하는 이는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함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가운데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경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해 있다. 다시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와 구속주로 믿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goldly life, not spiritual life)을 말하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페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딤전 6:3-5)여기서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마음이 부페하여 진리를 잃어버린다는 말은 중요하다. 경건한 생활이 없으면 마음이 부페되어 진리를 깨닳을 수 없다고 했다. 성경의 진리는 단순히 머리로서 깨달아지는 진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되어지는 진리이다. 성경을 머리로만 공부하고 연구하려들면 전도서 기자가 이야기 하듯이 우리를 머리를 피곤케 하고 번뇌케 한다고 했다(전도서12:12). 그래서 성경은 지성과 마음으로 깨달아야하는데 어떻게하면 성경을 이렇게 깨달을 수 있는가?
경건한 생활과 연관된 경건이라는 말은 목회서신과 베드로 후서에서 주로 나오며 단순한 미덕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말에 거하면(Dwell)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려 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어드리고 그 말씀에 기초하여 사는 경건한 생활이 없이는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을 할 수가 없다. 데살로니카 전서 2장 13에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않고 감사함은 너히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히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경건한 생활이란 성경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받지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순종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전도서 기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했다(전 1:7). 초대 교부중의 한사람인 그레고리 나지아니우스(Gregory Nazianus)도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처음 시작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다. 칼빈도 “참된 경건의 요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피하는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그를 주님으로 참되게 경외하며, 그의 공의를 용납하고, 또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순수하고 참된 열심에 있다.”라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상권 (생명말씀사,1991), 2,1, p.83, 각주 1.
따라서 경외하는 생활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야고보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흠없고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θρησεια)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악1:27). 경건한 생활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이다. 올바른 성경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경건한 생활은 해석자의 필수조건이다.

2.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생활(롬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성경을 해석한다는 말은 다소 어패가 있는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성경에 계시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인견적으로 말씀하신다고 칼빈은 말했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에 앞서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귀가 있다고해서 다 듣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으라”고 했다. 신약에서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시고 들을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 수 있는 귀를 갖어야 한다. 그러나 들을 귀를 모든 사람이 다 갖는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것도 아무때나 듣는 것은 아니다. 조용한 때나 심한 운동을 할 때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것처럼 신자도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를 할 때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했다.(롬 10:17)

3.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영접(살전2:13)

하나님은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좌우에 날센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을 쪼갠다.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 그렇지만 비인격적으로 역사하지 않은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서 인격적으로 역사하신다(엡6:17). 성령님의 역사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인간의 말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릴 때 그 말씀을 믿는자 안에서 역사하신다. 성령님의 역사는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지만 성경을 인간의 말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시지 않은다. 성령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는 인격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게 하려면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으로 믿어야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살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가? 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4. 마음을 새롭게 함(롬12:2)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믿음으로 구원을 말한다. 12장에서부터는 신자의 실천윤리를 말한다. 신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해야하고 살아야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악하고 죄악된 세상이다. 그래서 매일 매일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받지 않은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하신 뜻을 분별하기 어렵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으로 충만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 그래서 매일 매일 마음을 닭는 일을 해야한다.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회개의 생활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성경을 올바로 읽을 수 없으며 해석할 수도 없다.

5. 지혜와 계시의 정신(엡1:17)

사도 바울은 예배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위 정신을 너히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하시고”라고 기도했다. 놀라운 기도이다.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여기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에서 정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마음이 없을 때 계시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을 열개하시고 깨끗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 받아드리고자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한다.

6.성령님의 내적 조명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시다. 따라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받아야한다. 성령의 내적인 조명이 아닌 해석은 아무리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올바른 성경해석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경은 성령의 학교라고 했다.

7. 그리스도를 위한 삶(빌3:8)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8에서 자신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한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다. 놀라운 고백이다. 사도 바울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다. 그리고 그렇게 선포하고 전도했다. 분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고백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알게되었는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에게 유익했던 해로운 것으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버린 것이 없는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지 못하는 자이다. 따라서,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버리는 삶이 있어야 한다.

IV.정리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때문에 성경해석은 성령님의 감동, 내적인 조명,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해석자가 반드시 경건한 생활을 해야하며 그의 관점이 계속적으로 말씀과 성령 내적 조명을 통해서 수정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결국 이러한 성경해석은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생활을 하게 하며 신자로 하여금 인생을 감격과 환히 가운데 살도록 돕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전통과 사상에 영향입은 것은 사실이자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적인 해석방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신구약을 하나로 통일성을 이루며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성경을 해석했으며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따라서 성경의 영적인 의미를 추구했다.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해석했으며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사를 필수적인 것으로 봤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성경이 제시한 올바른 성경해석 문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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