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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 1부 제3장 구속이전의 특별계시의 내용

by 【고동엽】 2021. 11. 8.

제3장. 구속이전의 특별계시의 내용
이 계시와 관련된 모든 내용은 지극히 원시적이다. 그것들은 주로 상징적이다. 즉, 직설적인 말씀보다는 증표들(tokens)로써 표현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증표들은 성경의 상징법의 일반적인 특성을 지닌다. 곧, 그것들은 교훈의 수단이 됨과 아울러, 또한 모형적인 -즉, 성례적인- 예표들로서 그상징되는 것들이 장차 실현될 것에 대한 확신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성은 하나의 문학양식으로서의 기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내용들의 역사적 실재성이 부인되어 버릴 것이다. 그것은 실존하는 것들 속에 구체화되어 있는 진정한 상징법인 것이다. 이 점에서 볼때에 현대의 신화적 해석이 다음과 같은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다. 곧, 신화를 만들어내는 자들이 실제로 발생한 일들을신화를 통해서 보도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녔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 그것이다. 네 가지 원리들


(1) 생명의 원리와 생명 나무의 의미
생명나무가 동산 중앙에 서 있다. 그 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이다. 그 동산은 본래 사람의 거주를 위한 것이 아니고, 특별히 사람을 하나님 자신의 거소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영접하는 장소다. 종교의 하나님 중심의 성격이 이러한 배려에서 처음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 정확하다는 사실은 이 상징물이 역사의 마지막에서도 종말적인 형태로 다시 나타나고 있는 사실에서 확증되는데, 거기서 낙원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하여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처라는 원리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 중심으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낙원이라는 상징은 선지서와 시편에서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곧, 하나님의 동산에 속하는 것으로 창세기에 의미심장하게 언급된 그 강들과 관련되어 나타나며, 또한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종말을 지칭하기도 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은미래에 여호와의 거룩한 산으로부터 강물이 흘러내릴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나무가 생명 나무로 묘사되는 것과 똑같이, 이 강물이 생명수의 강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가 서 있었던 것처럼, 강물이 여호와의 거처 가까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계시록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새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며 그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는 것을보게 된다. 여기서 생명나무와 생명수의 강이라는 두 개의 상징들이 한데 합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진리와, 사람에게는 그 생명이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에 있다는 진리와,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과 교제하시는 그 중심적인 의도가 바로 생명을 베푸는 일에 있다는 진리가 이렇게 해서 분명히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동일한 원리가 죄악된 사람을 낙원에서 좇아내는 일을 통해서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 나무는 그의 시험 기간 내내 순종하면 얻게 될 더 높고 불변하며 영원한 생명과 결부되는 것이었다. 현재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런 결과를 얻을 것을 예상했다면, 그런 생각은 그 나무의 성례적 성격과 전혀 어긋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타락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러한 신적인 목적을 거슬러서 그 열매를 먹고자 하는 성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셨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욕심은 시험 기간이 지난후에 그 나무가 특수한 생명의 성례가 될 것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2) 두 번째 원리: 시험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상징물의 의미
(a) 첫째로, 신화적 해석이 있는데 이교도의 신화 단편이 성경 기록속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해석은 철저하게 이교적인 것으로, 신들만이 지니는 사사로운 신적특권을 사람이 취할까 하여 신들이 갖는 질투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b) 이 나무와 또한 이 나무와 결부되어 있는 “선악을 아는 지식” 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알다”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선택하다”라는 뜻을 지닐 수 있다는 언어학적인 관찰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나무의 이름은 사실상 “선악을 선택하는 나무”가 될 것이다. 어떤이들은 이를 일반적인 의미로 취하여 그 나무를 “사람이 선이나 악을 선택하는 데 사용하는 수단이 되는나무”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시험용 나무”와 같은 뜻이라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알다” 라는 단어에 구체적인 사악한 의미를 부여하여, 그 나무가 “사람에게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대적하여 사람이 독자적이며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 을 뜻한다고 본다. 그러면 결국, 그 나무의 이름이 후에 있을 처참한 결과를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악한 징조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 자체만 보면 이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것을 가능성 있는 견해로 보기는 어렵다.
(C) 이 견해는, 그 나무를 가리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 부르는 것은 바로 그 나무가 시험을 통해서 인간을 최고의 복락이 보장되는 종교적, 도덕적 성숙의 상태로 이끄시기 위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곧, 이 문구를 육체적인 의미로 보지 않고 영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다. 이 견해로 보면 그 나무의 이름이 그 결과를 미리 속단하는 것이 아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일이 반드시 바람직하지 않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선한 방식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그에 못지않게 사람이 타락하게 되면 악한 방식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3) 뱀으로 상징되는 유혹과 죄의 원리
선한 의도를 지닌 것이 시험이요, 악한 의도를 지닌 것은 유혹이라는 차이가 있으나, 둘 다 동일한 재료에 작용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악한 의도로 유혹하시는 일은 없으므로 이점을 명심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다. 창세기3:1은 뱀이 땅의 다른 어떤 짐승들보다 더 간교하다고 말씀한다. 이 구절은 뱀이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기에 적절한 이유가 바로 그 간교함에 있는 것으로 본다. 만일 사탄이 어리석게도 직접 모습을 드러냈더라면, 그 유혹에 빠질 소지가 훨씬 덜했을 것이다. 유혹하는 자가 친히 여자에게 말을 하는데, 이는 아마도 여자가 더 유혹에 약하고 죄를 범하기 쉽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구약 성경 다른 곳에서는 그런 사고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진정한 이유는 아담과 달리 여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금지명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혹의 과정은 두 단계로 구분된다. 두단계 모두에서 유혹하는 자의 주된 목적은 여자의 마음에 의심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첫 단계에서 나타나는 의심은 순진무구한 종류의 의심이요, 사실 여부에 대한 의심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보다 훨씬 심각한 종류의 의심을 조장하도록 만드는 교묘한 위장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둘째 단계에서는 이 심각한 형태의 의심이 모든 위장을 벗어 던지고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사탄은 이렇게 해서 얻은 유리한 고지를 놓치지 않고 계속 이어간다. 이제 대담하게 둘째 단계의 유혹으로 들어가서,“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골적인 형태의 의심을 여자 속에서 일깨우려 하는 것이다. 창3:4. 이 말만으로도 하나님의 경고의 성취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이례적인 구문이 되따라오므로, 이는 결국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하나님은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으나, 그렇지 않다.” 이 말은 하나님이 지극히 분명하게 하신 말씀을 거짓말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는 것이다.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로 여기려는 유혹에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음직한 그럴듯한 이유들이 덧붙여진다. 즉,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신빙성 없는 것으로 만들 만한 이기적인 동기를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여자는 유혹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열매를 먹기로 작정한 것은 비단 감각적인 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동기는 복합적이었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그 행위의 중심이되는 동기는 바로 그 유혹에 힘을 실어준 중심적인 동기와 똑같은 것이었다. 여기서볼 수 있는 충격적인 사실은 여자는 이런 생각에 굴복함을써 사실상 유혹하는 자를 하나님의 자리에 앉힌 셈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위하여 자비로운 목적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뱀은 사악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는 거꾸로 하나님의 의도가 적의가 있고 오히려 사탄이 그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의도를 가졌다고 생각하여 처신한 것이다.


(4) 죽음의 원리: 몸의 분해로 상징됨
창세기2:1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악을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말씀에 근거하여, 대대로 우리는 형벌이요,인류는 그 최초의 죄를 범함으로서 죽음아래 종속되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저술가들은 주로 과학적인 근거들에 의지하여 이를 인정하려하지 않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룰 것이 없다. 지금 이문제의 경우, 성경이 타락의 기사에서 사람이 본래부터 죽음에 종속되도록 창조된 것으로 가르친다고 보는 “사후의” 주해적 논지들을 이런 타입의 주해의 본보기들로서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생명나무가 사람이 열매를 아직 먹지 않은 나무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직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죽음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 이 논지는 사람이 창조로 인하여 갖게된 생명과 시험을 통과함으로서 얻게 될 더 높고 잃어버리지 않는 생명을 구별하지 못한다. 생명나무는 후자를 바라보는 성례였다. 그 나무를 아직 먹지 못했다는 것이 죽음의 필연성과 결부되는 그런 일반적인 생명의 부재를 의미할 수는 없다.
둘째로, 창3:19에서는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는 일이 자연적인 것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이논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본문을 문맥에서 끄집어 낼 수 밖에 없다. 이 말씀은 저주속에 나타난다. 만일 이 말씀이 그저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죽을 운명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선언하는 것에 불과했다면 거기에는 전혀 저주의 요소가 없었을것이다. 또한 즉각적인 때이른 죽음이 저주의 요소였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 앞에 나타나는 말씀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운이 다할때까지 수고하는 더딘 과정이 있을 것을 말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때까지” 라는 접속사는 “죽음의 순간이 오기까지 네가 힘든 수고를 해야할 것이라”는 식의 시간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그것은 점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네 힘든 수고가 결국 너를 죽이게 될 것이라”. 사람이 흙과 씨름하는 중에 흙이 결국 그를 정복하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후반부의 진술이 자연적인 죽음을 시사한다면, 그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저주로 제시되는 전반부의 진술과 모순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흙에서 취하여 창조된 것과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분명하게 연관짓는 마지막 말씀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그 말씀은 사람의 자연적인 죽음의 운명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표현된 죽음의 저주의 구체적인 형식을, 즉 흙으로 돌아가는 형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마지막 말씀은 주긍ㅁ이 올때까지 어째서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특수한 형식을 취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죽음의 양상을 여기서 창조와 연관짓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창2:17은 하나님의 경고의 의미가 죄가 아담을 죽게 할 것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죄가 아담을 즉각적인 때이른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는 데 있음을 입증해 준다.
창2:17의 “먹는날에는” 이라는 문구를 강조하는 것은 문맥상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며, 뒤에 이어지는 기사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오히려 불가능한 것이다. 그 말씀을 즉각적인 때이른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면, 그 말씀은 성취되지 않은 것이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후에 그 저주를 수정하여 완화시키신 것이 되는데 그런 사실들은 본문에 전혀 제시된 바가 없는 것이다.


필멸성과 불멸성
불멸성이란 철학의 언어로는 영혼의 지속성을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곧, 육체가 분해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 개별적 존재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유하는 상태르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보면 인간은 누구나가 어떤 상황 아래서든 “불멸하다”. 그 다음으로 신학적인 용어로는 “불멸성”이 사람이 자기 속에죽음을 초래할 요인을 전혀 갖지 않은 상태를 지칭한다. 물론 우발적인 죽음이 갑자기 사람에게 드리울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그 가능성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은 “불멸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 이후에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죄의 행위를 통하여 죽음의 원리가 사람 속에 들어와서, 과거에는 특정한 어떤 상황들 아래서만 죽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필연적으로 죽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의미에서의 불멸성이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종말론적인 언어로는 “불멸성”이 사람이 죄를 면하였기 때문에 죽음도 면한 그런 상태를 지칭할 수도 있다. 이런 최고의 의미에서 사람이 불멸한 것은 창조의 덕분이 아니라, 종말적인 역사가 수반되는 구속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 불멸성은 누구보다도 우선 본성적으로 그것을 지니고 계신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 다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입으신 인성의 소유이며, 그 다음은 중생자들의 소유다. 그들은 이땅에서도 원리적으로 이미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천상의 상태에서는 물론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과연 어떤 의미에서 “필멸하는지”도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첫 번째 의미로 보면 사람은 절대로 필멸성이 없다. 두 번째 의미 혹은 단계로 보면 그는 사용하는 정의에 따라서 동시에 불멸하기도 하고 필멸하기도 하다. 죽음이라는 질병을 자기속에 지고 있지 않으므로 필멸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경우에는 불멸성과 필멸성이 공존하였다고 할 것이다. 세 번째 의미 혹은 단계로 보면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든 필멸하다. 반드시 죽게 디어 있고, 죽음이 그의 속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의미혹은 단계에서보면, “필멸성”이란 단어가 중생한 사람에게는 조건부로만 적용된다. 즉, 지상의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죽음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의 몸속에서 작용하지만, 그의 새로워진 영의 중심에서는 원리적으로 이미 죽음이 배제되었고, 그 대신 불멸하는 생명으로 대치되어 결국에 가서는 죽음을 극복하고 밀어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필멸성과 불멸성의 공존은 사람의 양분화된 본성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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